저랑 제 동생이 부모 잡아먹는 패륜아인가요?

ㅇㅇ201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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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판을 즐겨 보는 이십 대 초반 대학생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데 주위에는 마땅히 털어 둘 곳이 없어서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조금 길더라도 한 번씩만 읽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제가 어릴 때 아빠가 무리하게 돈을 끌어다 사업을 하셨어요. 엄마는 절대 안 된다고 극구 반대하셨지만 우리 아들 최고고 내 아들 말은 다 맞다는 할머니께서 집을 담보로 잡아 돈을 해 주신 걸로 압니다. 결과는... 네. 쫄딱 망했어요. 당시 저는 유치원생이었는데 엄마랑 집에 들어왔더니 드라마처럼 피아노, 티비, 전자렌지 온 집안에 빨간색 딱지가 붙어져 있더라구요. 너무 어렸던 터라 압류라는 단어의 뜻을 몰라서 친하게 지내던 아래층 초등학생 언니에게 달려가서 압류가 뭐냐고 물어봤던 기억이 나요. 고모들, 외가 식구들 다 도와주셨는데 그래도 수습이 안 되었다고 하더라구요.

아빠는 사업을 접고 동종 업계의 회사로 들어갔고, 엄마도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어린 나이에 안 해 본 일 없이 정말 열심히 사셨어요. 결혼 전부터 허리가 안 좋으셨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김밥 천국 같은 식당에서 종일 서서 일하셨고, 그 기억은 지금도 가슴에 사무칠 만큼 생생해요. 할머니랑 안과 다녀오면 엄마가 일하는 김밥천국에 꼭 들렀는데 거기서 김밥 말고 바쁘게 서빙 하던 모습이요. 어린 마음에 초등학교 일학 년 운동회에 왜 엄마는 안 오냐고 울던 것도 생각나고 그렇습니다.

엄마는 저랑 제 동생한테 최선을 다했고,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 주셨지만 그래도 힘들게 살았어요. 가난해서 더 고통스럽게 살았어요. 친구들은 다 학교 끝나고 아파트 단지가 있는 방향으로 가는데 저는 달동네에 사는 게 창피해서 일부러 나도 그쪽 산다고, 그 아파트 산다고 하고 빙 둘러서 집으로 올라가기도 하고, 학교 다니는 내내 급식비 미납 명세서에는 제 이름은 빠지질 않았고, 친구들 다 어디 갈지 고민하는 동안 저는 얼마 들지 얼마 내야 할지 계산부터 해야 했고... 머리가 크고 어느 정도 눈치라는 게 생기면서 단 한 번도 마트에 마음 편히 가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엄마 따라 장을 보러 가면 늘 가격 먼저 살피고, 이거 사 줄까? 저거 사 줄까? 물어봐도 사 달라고 한 적도 잘 없어요. 엄마가 힘들게 번 돈으로 계산하는 거였으니까.

저는요. 성인 되고 제일 기뻤던 게 제대로 된 알바를 할 수 있는 거였어요. 미성년자라서 사람이 많이 필요한 호텔 알바, 가끔 가다 대타 정도만 할 수 있었는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니까 내 손으로 돈을 벌 수 있더라구요. 그게 정말 기뻤어요. 보탬이 될 수 있다는 그 사실이요. 친구들은 다 성인이 된 설레임 같은 걸 느끼고 여기저기 놀러가고 대학 들어가기 전에 옷도 사 입고 머리도 할 때 저는 겨우겨우 사정해서 빵 만드는 곳에서 제대로 된 첫 알바를 했네요. 첫 월급이 팔십만 원 남짓이었는데 그걸로 제일 먼저 한 건 아빠 운동화, 엄마 백팩 하나 사 드린 거였구요. 다니는 내내 참 힘들었는데 그래도 기뻐하시면서 고맙다는 말 들으니까 너무 행복하더라구요, 그때는.

사업 말아먹고 들어간 회사에서 십 년 정도 근무한 아빠는 제가 고등학생일 때 그만 두고 나오셨어요. 그리고 그 퇴직금으로 또 사무실을 얻어서 사업을 하셨죠. 처음 말아먹었던 그때 그 업종과 똑같은 걸로요. 이번에도 잘 안 됐어요. 망했어요. 그런데도 붙들고 있더라구요. 언젠가 친척 어른이 그러시더라구요. 그 나이쯤 되면 남의 밑에 못 있는다고, 남자는 자기 사업체 하나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전 그 말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제발 그만 두고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같이 사니 마니 싸우고 지치고 울고... 그거 다 엄마 혼자 하셨어요. 아빠는 제대로 된 대답도 안 했어요. 소리만 질렀어요. 대학 가서 배운 게 그것 뿐이라서, 다른 건 할 줄 모른다는 이유로 사업장 붙들고 있는 사람이랑 왜 같이 사는지 엄마가 미울 때도 많았구요. 하지만 그 이유의 절반은 저희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자식이 없었으면 진작 갈라서서 어디 도망이라도 갔을 텐데 행여나 편부모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라고 눈총받을까 봐, 살면서 불리한 상황에 처할까 봐 걱정도 되셨겠죠. 아직 그런 시선들로부터 마냥 자유롭지는 않은 사회니까. 혼자 키우기 겁도 나셨을 거고, 이혼이라는 게 마냥 쉬운 일이 아니니 쉽사리 결정할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 납득합니다.

저희 아빠는 화가 나면 난폭한 면모가 있는 사람이에요. 아빠라는 사람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 집에 있던 빨간 청소기 던지는 거였으니 말 다 했죠. 한창 집안 어려울 때 고등학생이던 동생도 고깃집에서 알바를 했었는데, 늦게 들어온다고 가게에까지 전화를 해서 영업 방해하고 소리 지르고 동생한테 쌍욕하던 사람입니다. 놀다온 게 아니라 일하고 온 다 큰 애 뺨도 때리고요. 엄마한테도 마찬가지예요. 이상한 집착을 해요. 모임이라도 나가면 받을 때까지 전화하고, 제대로 된 여행도 못 가 본 엄마 친구들이랑 여행 약속도 취소시킨 대단한 인간이죠.

그런 인간이 그렇게 몇 년씩 적자만 나는 걸 꾸역꾸역 붙들고 있더라구요. 제가 커서 대학을 가고, 다니고, 제 동생이 커서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도요. 그 긴 시간을 엄마 혼자 생계 책임 지셨어요. 대학 등록금은 어떻게 마련했는지, 애들이 무슨 돈으로 학교를 다니는지, 밥은 사 먹고 다니는지 이런 거 관심 하나 없던 사람입니다. 외식을 해도 돈 한 푼 낸 적 없었어요. 오히려 다 큰 저희가 종일 알바 해서 지금까지 생계에 보태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음 되었지 아빠는 돈 한 푼 엄마한테 가져다 준 적 없어요.

그렇게 하다하다 작년에 너무 지친 엄마 입에서 더는 못하겠다고, 정말 갈라서자는 말이 나왔고 이혼 서류까지 왔다갔다 하면서 집안이 말 그대로 한바탕 뒤집어졌어요. 엄마랑 싸우면서 본인은 가장으로서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 모르겠다, 너(엄마) 돈 좋아하니까 나 죽으면 보험금 네가 다 가져라, 난 너(엄마)보다 내 누나들이 더 불쌍하다라고 하더라구요. 사실 이때 전 완전히 아빠라는 사람에 대해 마음을 접고 놓아버린 것 같애요. 저 사람은 더이상 갱생이 불가능한 인간이구나 싶어서요. 또 왜 이제껏 안 되는 걸 붙들고 있었는지도 알겠더라구요. 왜 가장으로서 책임을 져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무슨 가정을 돌보겠어요. 위로 고모가 몇 분 계신데 이게 무슨 일이냐며 마찬가지로 난리가 나고, 아빠 호출하고, 그러고 엄마한테 전화해서 아범 기술 배우기로 했으니까 한 번만 용서하라고 하시고... 이래저래 여러 일들이 있었습니다.

기술직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그래도 내심 안 되는 사업 붙들고 있을 때보다는 가정에 도움이 되겠지 싶었어요. 그런데 일 시작한 지 몇 달이 지났는데도 여전합니다. 여전히 돈 한 푼 안 가져다 줘요. 반장이라는 사람이 돈을 안 준대요. 그럼 스트레스 받지 말고 다른 곳을 찾아보라니까 그것도 싫대요. 업계 좁아서 소문이 난대요. 이제 시작한 사람한테 뭘 바라냐고 화를 냅니다. 저희 엄마도 저도 받은 돈 다 가져다 달라고 한 적 없어요. 하지만 최소 인간이라면, 양심이 있다면 내가 지금은 일을 배우는 단계라서 가정에 큰 보탬이 될 수 없다. 미안하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쪽 일이 없으면 대리 운전이라도, 생산직 단기 알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본인이 일을 하지 않아도 꾸역꾸역 집이 돌아가니까 어쨌든 비빌 곳이 있으니 일을 하지 않는 거라는 제 생각이 비약입니까?

이제는 정말 지긋지긋해요. 맨날 가난에 찌들려서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도 지겹고, 난폭하고 능력 없는 아빠도 끔찍해요. 가끔은 주방에서 칼 가져다 죽여버리고 나도 같이 죽고 싶다는 충동도 강하게 들어요. 엄마도 안쓰럽고, 밉고, 누구는 쉽게 다 버리고 독립해 버리라던데 그게 마음처럼 쉬운 게 아니라서 더 속이 타고, 어릴 때부터 알바 하느라 고생하는 동생도 마음이 아프고, 이제는 너희끼리 ㅇㅇ(아빠) 버리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냐, 걔 방황하다 죽으면 네가 책임 질 거냐는 정신 나간 소리 하는 고모고 역겹고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내 인생의 절반은 당신이 만든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무너졌는데, 정작 당사자는 뻔뻔하게 안방 차지하고 누워 있는 것도 더러워요.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지내지만 저 사람 발소리만 나도 치가 떨리고요.

오늘 고모한테 전화가 왔더라고요. 아범 얼굴이 안 좋은데 둘이 무슨 일 있냐고, 너희가 잘 품어 주라고, 전보다 상황 좋아졌는데 몇 년만 더 참아 보라고. 미친 소리죠. 듣다듣다 기가 찬 엄마가 고모한테 이혼 이야기하는 거 들었어요. 근데 이번에도 흐지부지 될까 봐 동생도 저도 그게 제일 겁이 나요. 제발 이혼했으면 좋겠어요. 제발이요. 제가 뭘 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