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과제빵 수업시간에 만들었어요!

Nitro2019.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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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가 세계 3대 요리학교라고 하지만 가르치는 내용이 엄청나게 혁신적이라거나 깊이가 깊다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서울대나 지방 하위권 대학이나 정작 가르치는 내용 자체는 비슷한 것과 마찬가지랄까요. 


그러다보니 이 학교를 졸업한다고 미슐랭 레스토랑 요리사가 뿅 하고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셰프와 교수진 수준이나 학생들이 갖는 열의가 높고, 커리큘럼과 실습환경이 매우 잘 갖춰져있는 것이 다르지요.


수많은 요리사들이 업장에서 어깨 너머로 배우다보니 시간도 오래 걸리고 부정확하게 배우는 경우도 많은 데 비해서


비교적 짧은 기간에 검증된 지식을 탄탄하게 갖춘다는 점에서 경쟁력이 있는 듯 합니다.


물론 시간적 한계로 인해 다양한 요리를 깊이있게 배우지는 못하고,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본다면 "그냥 수박 겉핥기 수준이네"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 대신 세상 모든 과일 겉핥기는 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요리와 관련된 오만잡다한 내용을 다 배웁니다.


예를 들어 미국 남부 레스토랑의 크레올 요리 전문가가 볼 때는 겨우 사나흘 동안 남부 요리 열댓개 정도를, 그것도 팀 나눠서 분업해가며 만드는 걸 본다면 "겨우 그 정도로 케이준 요리를 안다고 할 수 없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이 정도 수준의 요리 지식과 실습을 전 세계 모든 요리에 걸쳐서 다 배우는 거지요. 아시아, 지중해, 북미, 중남미처럼 지역과 국가별로 나눠서 배우기도 하고 연회 요리, 보존식, 단품요리, 파인 다이닝처럼 식품이나 업장 형태에 나눠서 배우기도 하며 여기에 더해서 요리 역사나 메뉴 개발이론, 식당 운영을 위한 예산 편성 및 공중 위생과 같은 관련 지식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꽤 많은 수의 학생들이 "나는 요리학과로 들어왔는데 왜 제과제빵 학과 학생들이 배우는 내용을 배워야 하나!"라고 불만을 갖는 제과제빵 기본 클래스도 제게는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맛있는 햄버거를 만들기 위해서는 맛있는 햄버거빵 굽는 법도 배워야 하지 않겠나, 하는 거죠.


특히 예전에 집에서 몇 번 만들어 봤던 빵이나 과자 등을 훨씬 더 쉽고 빠르고 고퀄리티로 만드는 방법을 배우며 '이래서 다르구나'싶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파테 아 슈 (pâte à choux: 슈크림빵의 빵 부분)을 만들 때는 얇게 편 쿠키 반죽을 동그랗게 잘라 얹어 주면 끝부분이 타지도 않고 바삭하면서도 달콤한 빵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이번에 배웠지요.


 

모닝빵 대량생산의 모습. 갓 구운 모닝빵을 시식 핑계삼아 하나 뜯어먹으면 이렇게 맛있는 게 또 있을까 싶지요. 


예전에는 모닝빵 옆에 뜯은 자국이 마음에 안들었는데 알고보니 구울 때 거리를 둬서 구우면 푹 퍼져버리고, 미리 뜯어놓으면 옆면이 마른다고 하더군요.


창문 너머로 이웃 교실에서 제과제빵 수업 듣는 걸 보면 참 부러웠던 게, 다들 마치 고상한 예술가처럼 초콜렛으로 조각 만들고 케이크에 장식하고 있더라구요. 요리 전공은 불과 칼이 난무하는 전쟁터인데 말이죠.


그런데 막상 직접 만들어 보니 제과제빵 역시 바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특히 대량의 빵을 만들 때는 사람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반죽 롤링 머신이나 초대형 반죽기 등 상업용 기계를 사용하게 되는데, 사람이 빵을 만들면서 중간중간 기계를 쓰는 게 아니라 기계가 빵을 만들면서 중간중간 사람이 보조하는 느낌이 들 정도.


 

발효빵 (Sourdough Bread)의 모습. 나흘동안 열심히 이스트를 먹여서 잘 키운 다음, 마지막날 대부분을 털어넣고 빵을 굽습니다.


어디선가 "기를거랬잖아!"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네요.


유럽에서는 이렇게 물과 효모, 소금, 밀가루만 넣고 만드는 빵이 대세인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바게트 정도를 제외하면 저배합빵 (Lean bread)는 그닥 인기가 많지 않은 듯 합니다. 그 대신 우유와 설탕, 버터 등을 첨가한 고배합빵 (Enriched bread)이나 페이스트리 종류가 대다수를 차지하지요.


그런데 저배합빵은 재료가 심플한 음식들이 다 그렇듯 진짜 제대로 만들기는 어려운 대신, 제대로 만들기만 하면 엄청 맛있습니다.


그냥 혀 위에서 맛있는 게 아니라 뭔가 깊이있는 맛있음이랄까요. 


갓 구운 바게트를 한 입 베어물면 바삭한 껍질이 부스러지며 바람에 흔들거리는 황금색 밀밭의 이미지가 머리에 스쳐 지나갈 정도입니다.


 

파테 아 슈에 아몬드 크림 필링을 짜 넣고, 설탕을 녹여 만든 캐러멜에 푹 찍은 다음 피스타치오 가루를 굴려서 만든 디저트.


슈도 만들고 크림도 만들고 피스타치오도 다 직접 다지다 보니 손이 꽤 많이 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메뉴를 최소한 서너개씩 소화시켜야 한다는 게 문제지요.


처음 만들 때는 어버버 하다가 이틀째 되면 좀 나아지고 할만한데 사흘째에는 메뉴가 바뀝니다 -_-;


군대에서 힘들어 죽을 것 같다가 좀 살만해지면 전역하란다더니 딱 그 사이클로 움직이네요.


 

판나코타와 블랙포레스트.


첫 날엔 만들어야 하는 재료가 너무 많아서 어버버 하는데, 재료를 넉넉하게 만든 덕에 둘째날에는 여유가 조금 생깁니다.


그래서 나중엔 딸기 장미(https://blog.naver.com/40075km/221242310943)도 만들어 꽂고 할 정도였지요.


다만 디저트 팀 특성상 만들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그 정도가 한계. 마음같아서는 초콜렛 장식도 만들어서 꽂고 싶었는데 말이죠.


과일을 얹은 무스 형태의 디저트라 부드럽고 달달한 게 인기가 많습니다.


 

스펀지 케이크에 시럽을 적시고 아몬드 크림과 밤 크림을 얹어 만든 몽블랑.


오래 전에 일본 여행 갔을 때 몽블랑을 처음 먹어보고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게 있나' 싶었는데


그 때만 해도 이걸 직접 만들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요.


원래는 밤크림을 더 예쁘게 짜는 방법도 있는데, 그렇게 만들면 시간 내에 정해진 수량을 도저히 맞출 수가 없어서 자유롭게 낙하시켜서 얹어줍니다.


이렇게 보니까 왠지 메밀국수 얹어 놓은 것 같네요.


 

집에 가져와서 먹은 사워도우 브레드와 할라(Challah) 브레드. 


할라 브레드는 유태인들이 주로 먹는 전통 빵입니다. 빵 반죽을 길게 밀어서 딸내미 머리 땋아주듯 땋아서 구우면 되지요.


버터와 설탕이 들어가기 때문에 딸기잼(https://blog.naver.com/40075km/221540346452) 옆에 놓고 먹다보면 끝없이 들어가는 빵이기도 합니다.


이거 말고도 포카치아도 굽는데, 포카치아는 딸기잼 없어도 끝없이 들어가는 빵이라 집에 갖다놓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바람에 사진을 못 찍었네요.


사워도우 브레드는 조금만 지나면 무시무시하게 딱딱해집니다. 얇게 썰어서 마늘빵 구워먹거나 샌드위치 만들어 먹기에 좋지요.


 

제과제빵은 크게 네 팀으로 나눠서 역할을 번갈아가며 하게 되는데, 그 중 하나인 라미네이션(Lamination: 적층구조) 팀에서 만드는 빵들입니다.


버터와 밀가루 반죽을 층층이 쌓아서 도우도 만들어야 하고, 안에 들어가는 크림이나 과일 절임도 만들 뿐 아니라, 도우와 필링 조합을 바꿔가며 엄청나게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냅니다.


크로아상이나 초콜렛 크로아상처럼 익숙한 녀석들도 있고, 곰발바닥(Bear claw)이나 바람개비(Pin wheel) 처럼 재밌게 생긴 빵도 있는 반면 쿠인아망(Kouignamann)처럼 도대체 어떻게 읽는 건지도 모르겠는 처음 보는 녀석도 있습니다.


필링 몇 가지 만드는 법만 알아두면 속재료만 바꾸고 모양만 다르게 잡아서 가짓수 뻥튀기를 엄청나게 할 수 있겠더군요.


 

베이킹 클래스의 꽃. 보기엔 예쁘지만 만드는 사람은 죽어나는 디저트 팀에서 만드는 디저트들입니다.


그나마 치즈 케이크 같은 건 필링 채워넣고 구운 다음 과일만 얹어주면 되니까 그닥 어렵진 않은데


빵과 크림을 층층이 쌓고 조각 케이크 형태로 자른 다음 가니쉬까지 얹어야 하는 오페라나 당근 케이크는 눈돌아가게 바빠집니다.


머랭을 일일히 짜서 토치로 태워야 하는 피나콜라다 정도 되면 죽으라는 거지요.


앞서 언급했던 판나코타나 블랙 포레스트, 슈크림도 디저트 팀 할당 업무.


이런 디저트들 열 다섯 종류를 15~20개씩 만드는 게 하루 할당량입니다. 언제나 한 두개씩은 밀려서 오더 못 맞추는 가혹한 환경이었네요.


 

쿠키팀에서는 베스킨라빈스 뺨칠 정도로 다양한 쿠키와 머핀을 구워냅니다.


열 다섯 종류 만드는 디저트팀도 바빠서 주문량 소화를 못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하면, 쿠키는 미리 준비 해 놓는 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대형 반죽기에 재료 넣어서 쿠키 반죽을 만들고, 아이스크림 스쿱으로 떠서 얼리면 준비 끝.


한 판에 쿠키 반죽 백여개씩 얼려놓은 트레이가 냉동고에 가득한 덕에 쿠키팀이 할 일은 얼려놓은 반죽을 오븐에 넣고, 재고량 떨어지는 쿠키 반죽 몇 종류를 새로 만드는 것 뿐입니다.


사진에 나온 것들은 초콜렛 머핀, 오트밀 건포도 머핀, 옥수수 머핀, 초코칩 쿠키, 건포도 쿠키, 린저 쿠키, 땅콩버터 쿠키.


이 정도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들었던 프로젝트 디저트.


메인 재료로 "조린 배"를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지만, 그것 외에는 어떻게 만들어도 좋은, 자유 프로젝트입니다.


프로젝트 주제를 보자마자 예전에 만들었던 베이크드 알래스카(https://blog.naver.com/40075km/220911466829)가 떠오르더군요.


평소 주문은 주문대로 쳐내면서 추가로 이 디저트를 만들어야 하는거라 엄청 복잡한 디저트는 만들 수가 없습니다.


배를 꿀, 생강, 계피와 함께 졸여서 퓨레를 만들고, 아이스크림을 만들면서 배 퓨레를 넣어서 배 아이스크림을 만듭니다.


달걀 흰자에 끓는 설탕을 부어 만든 이탈리안 머랭을 짤주머니로 짠 다음 토치로 구워 무늬를 내고 얇게 썰어 구운 배로 장식.


맛과 색에 포인트를 더하기 위해 레몬 소스를 한 스푼 곁들이면 완성입니다.


평가는 나쁘지 않았는데, 다만 지적사항으로는 "배가 주제인데 정작 배가 갖는 비중이 약하다"는 말을 들었네요. 구운 배 슬라이스 대신 조린 배를 반으로 갈라서 옆에 기대 놓고 스푼으로 함께 떠 먹도록 배치했으면 완벽했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옛날에 베이크드 알래스카 처음 만들 때는 온 집안을 뒤집어놓은 대형 프로젝트였는데 이제 이 정도는 기본 오더 쳐내면서 추가로 만드는 '복잡하지 않은' 디저트가 되었네요. 


그만큼 알게 모르게 성장했다는 말이겠지요.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을테구요.


새삼 감회가 새롭습니다.


다만 제가 앞으로 하려는 게 단순한 요리 기술자가 아니라 좀 더 복합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분야인지라 여기에 안주하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수업을 들을 때도 끊임없이 그 적용 방법과 다른 분야와의 접목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넓고 얕은 CIA 커리큘럼은 무수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는 점에서 저한테 딱 맞는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