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도 남자를 좋아해

ㅇㅇ2019.08.03
조회355
우울해서 써봤어. 그냥 누구 하나라도 들어줬으면 해서.
17살이야. 남자고.
나 남자 좋아한다. 자각한지는 좀 됐어. 7살때 같은 유치원 남자아이를 처음 좋아하고, 12살때 같은 반 아이를 좋아했어. 이때 처음으로 자각했어. 알게 되었을땐 그냥.... 무덤덤했어. 아, 내가 걔를 좋아하는구나. 이런 느낌. 그리고 알았어. 절대 나는 남들같은 연애는 못하겠구나. 평생 짝사랑만 하겠구나.
그래도 좋았어. 멀리서 지켜보는것도 좋았고, 먼저 말 걸어주는게 좋았어. 밤에 이불을 뒤척이며 꿈에 네가 나왔으면 좋겠다 생각했어. 네 덕분에 학교가는 것이 좋아졌어. 6학년이 되었을땐 다른 반이 되서 속상했어.
그런데 하필 다른 중학교가 되더라. 너와 다른 학교로 갈거라 말하긴 해도 내심 같은 학교가 되길 기대했는데.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이제 그럴 필요도 없어졌어. 나만 쏙 떨어졌지. 졸업식엔 인사도 못했어. 넌 친구가 많았잖아. 우린 별로 친하지 않았고. 그렇게 짧은 짝사랑은 끝이 났어.
그리고 중학교를 입학했어. 성격이 소심해서 적응하진 못할까 걱정했었는데 다행히도 친구들이 도와주더라. 답지않게 조용한 척도 했어. 지금 생각해보니 나 뿔테안경 진짜 안어울리더라. 볼살도 많았고 키도 작았어.
거기서 세 번째 짝사랑을 시작했어. 14살의 마지막에 좋아한다는걸 알아챘어. 네가 여자를 좋아한다는걸 알아. 그런데 사랑받아 마땅할 사람을 누가 좋아하지 않을 수 있어. 뭐든 열심히 하고, 다정하고 멋진 너를 누가 싫어할까. 모두가 좋아하는 너를 나도 좋아하는게 나쁜건 아니잖아.
다음해가 되면 반이 바뀔 것 같아 우울했지만 그래도 좋았어. 잠잠했던 학교생활에 너라는 변화가 온거잖아. 그런데 내년이 되자 같은 반이 배정이 됐어. 믿기지 않았어. 네 이름과 내 이름이 써져있는 표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어.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 넌 내 이름을 콕 집어 말하며 같은 반이라고 얘기했어. 아무 의미도 아니었겠지만 가슴이 두근거렸어.
2학년에는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우린 인사만 하는 사이에서 장난을 치는 사이로 바뀌었어. 너한테 한 손으로 들려보기도 하고, 그 상태에서 엉덩이를 맞아보기도 하고, 처음으로 너를 비롯한 친구들을 집에 재워보기도 했어. 그런데 연락을 안했어. 못했어. 내가 먼저 다가갔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어. 그런데도 좋았어. 학교에서 인사하고 장난치는 사이로도 충분했어, 나는. 어쩌다 먼저 전화가 오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너무 현실성없는 이야기라 금세 지워버렸어.
그때 나는 내가 질투가 많은 사람이란걸 알았어. 네가 귀여운 애들에게 장난치는게 싫었고, 친구들이 네 여자친구를 언급하는게 듣기 거북했어. 표현하는 법도 몰라서 그냥 속으로만 생각했어. 네가 좋다. 멋지다. 싫다.
난 아직도 그때를 후회해. 내가 좀 더 너한테 다가갔으면, 먼저 연락했으면, 속상해 울고있던 너를 멀리서 지켜보지 말고 위로해줬으면 널 포기하기 전까진 좀 더 친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미묘한 사이를 간직한채 3학년이 됐어. 또 같은 반이 되지는 않더라. 기대했지만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라 그냥 수긍했어. 다른 반이니까 잘 못 볼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시험공부를 핑계로 친구들과 같이 공부방에서 공부하며 조금이나마 너를 볼 수 있었어. 그때 장난친건 미안. 네가 볼까봐 자세히는 못말하겠는데, 진짜 미안. 재밌긴 하더라.
거기서 용기를 더 냈어. 너네 집에 놀러가고 싶다고. 거절당했지만 말이야. 저녁시간에, 가족이 있어서 어려울 것 같다고 너는 말했어. 알았다고 하고 끊었어. 조금은 슬펐지만 틀린 말이 없었기에 잊었어. 그런데 그 다음날 너한테서 전화가 오더라. 오늘 놀러오지 않겠냐고.
당연히 허락했어.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너네 집으로 달려갔어. 네 집은 좋은 향기가 났어. 네 특유의 향이 있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저 멀리에서 있어도 느껴져. 그냥 딱 너라는 냄새가 나. 옷에, 이불에, 하다못해 휴대폰에서도 나던 향. 다 좋았어. 좋아하는 애와 함께 있었던 것도 좋았고, 나를 초대해준 것도 좋았고, 아무 대화 없어도 좋았어. 야. 그때 같이 편의점 가줘서 고마워. 새벽까지 휴대폰 했었잖아 우리.
다음날에도, 그 다다음 날에도. 계속 있었어. 딱히 거절하거나 불쾌한 기색이 없길래 조금은 기대했었어. 혹시 얘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왜, 그렇잖아. 짝사랑 하면 한 번쯤은 망상해도 되는거잖아.
그리고 며칠 뒤에도 또 놀러갔어. 나 아직도 기억한다. 애들끼리 놀았었는데, 그날 저녁에 집에 가기 귀찮아서 너한테 전화를 한번 해봤거든. 오늘 너네 집에서 자도 되냐고. 흔쾌히 허락하더라. 빨리 오라면서. 이름 부르고 장난으로 사랑한다고 말해주는게 간질거렸어. 옆에 친구들이 있는게 들렸지만 개의치 않았어. 그리고 집에 도착했어. 그런데 뭔가 조금 이상하더라. 넌 전화를 하고 있었고, 애들은 입술에 손가락을 댄 채로 나를 쳐다봤어. 무슨 일이지? 하면서 가까이 다가갔어.
고백이더라. 저번에 너네집에서 잤을때도 계속 연락하던 그 애한테 넌 고백하고 있었어. 그냥 당연한 일이잖아. 그래서 응원했어. '잘 됐으면 좋겠다'라고. 고백에 성공했을때의 행복한 네 얼굴을 보고 축하해줬어. 근데 나 그날 생일 하루 뒤였는데. 일주일만 좀 늦게 해주지.
너 여친 생겼잖아. 안될거 알아서 포기하려고 했어. 딱 여름방학 계곡만 놀러가고 포기하자. 딱 3학년 기말고사 공부만 같이 하고 포기하자. 내일까지 연락 안오면 포기하자. 그런데 결국 고등학교까지 같이 가더라. 너 집에서 여기까지 거리 멀잖아. 집 바로 옆에 학교도 있으면서 왜 온거야.
너한테 물어보고 싶어. 내가 너 좋아하는거 알잖아. 왜 집에 초대했냐. 왜 그날 걔한테 고백했냐. 왜 나한테 자꾸 말걸었냐. 너 나 좋아하냐? 아니잖아. 왜 자꾸 착각하게 만들어? 내 마음 알면서 일부로 장난치는거같아서 짜증난다고 그냥 다.
그날 고백한 애랑 아직까지도 사귀잖아. 넌 아무 생각이 없는데 나만 속썩는걸 생각하니까 전부 귀찮아지더라. 그만하고 싶다. 더이상 좋아하기 힘들다. 페이스북 활동중인걸 보면서 연락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도 지친다. 또 다른 반이더라. 마음 속으로는 같은 반이길 기대했는데. 그걸 알아채고 나니까 멍청하단 느낌이 들었어.
방학이라 마음을 정리하기는 쉬웠어. 그렇다고 확신했는데. 개학날 네 얼굴을 보니까 그동안 외면했던게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어. 몇달 또 안봤다고 더 멋져져서는 나한테 인사를 건네는데 거기에 두근거리는 내가 밉더라. 그렇게 한 달을 너한테 매달려 살았어.
그리고 어느날 정말 그만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어. 네가 아닌 지친 내 마음에 비집고 들어오는 애가 있었어. 짝사랑을 포기하려고 다른 애를 짝사랑한다는게... 생각해보니 정말 미친 짓이더라. 아프지 않으려고 고른 선택이 더 아플줄은 몰랐어.


그렇게 중학교 때의 짝사랑을 잊으려고 네 번째 짝사랑이 시작됐어. 나 진짜 바보같다.
네 번째 짝사랑은 학원에서 만난 애야. 알게된지는 1년쯤 지났지만 고등학교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친해졌어. 고등학교 전에는 걔가 먼저 연락했지만(주로 학원 숙제나 인사, 근데 그때는 자각이 없어서 그냥 그렇구나 했어) 입학한 이후부터는 내가 먼저 들이댔어. 안녕. 나도 독서실 갈래. 숙제는 했어? 과자 먹어. 아냐, 우리 친해.
처음으로 먼저 다가갔어. 들이댈수록 점점 더 좋아지더라. 그래서 장난이 지나쳐도 참았어. 고등학생 남자애들끼리는 다 하는 장난이잖아. 놀리는것도 다 친해지고 싶어서 그런거였으니까. 같이 공부하는것도 좋았고. 어쩌다 약속을 지키지 않아도 참았어. 몇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지만 괜찮았어. 기분이 가라앉긴 했지만 내가 좋아서 그런거였잖아. 그렇게 생각하니까 몇 시간 만에 풀어지더라.
그런데 이게 아니었나봐. 화낼건 화내야 하고 잘못된건 잘못된거라 지적했어야 했나봐. 시간이 갈수록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 집에 놀러가도 되냐고 세네번 물어봐도 애매하게 대답한것도 괜찮아. 같은 침대에 누우려고 했을때 여러번 밀어낸것도 괜찮아. 장난삼아 모질게 대했던것도 다 괜찮아. 참을 수 있어. 근데 속이 썩어들어가는건 어쩔수가 없더라. 사람의 욕심은 늘어간다는게 사실인가봐. 예전엔 그냥 멀리서만 보면 좋다고 생각했는데, 널 알고난 이후로 행복한 날보다 우울한 날들이 더 많아지는거 있지. 짧은 얘기를 하면 연락을 하고싶고, 연락을 하면 만나고 싶고, 어쩌다 만나는 일이 있으면 둘이서만 만나고 싶어. 그러다가 거절을 당하면 기분은 땅 아래로 끝없이 추락하고 말아.
친해지지 말걸. 갈수록 더 큰 기대를 하게 되니까 실망도 커져. 이젠 네가 놀러간다는 소식을 멀리서만 들어도 가슴이 아파. 나도 데려가주라. 나한테 연락좀 해줘. 나좀 사랑해주라.
네가 싫어. 우리는 절대로 친구 이상이 될 수 없다는게 싫어. 뭐든지 열심히 하고 잘 웃는 네가 미워. 내가 아닌 다른 애들과도 잘 놀러다닌다는게 짜증나. 그런데 연락이 오면 어느순간 풀어지고 나도 잘 놀러다닌다는게 더 싫어. 나도 이런 내 마음을 모르겠다.
맞다. 너 오늘 생일이더라. 미리 축하 해주고 또 만나서 축하해주고 싶었는데 놀러가서 아쉽다. 좋은 하루 보내. 재밌게 놀다왔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