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에도 쓸데없이 무슨 학구열은 그리 높았는지 공부가 너무 하고싶어서 대학에도 갔다.
대학을 가서도 집은 여전히 가난했고 내가 어른이되어서도 아버지는 매일 술만 마시면 어머니를 때렸다. 때리기만 한 날은 그래도 평안한 하루였다. 어머니가 대들기라도 한 날이면 아버지는 소주를 그자리에서 벌컥벌컥 들이킨 뒤 너덜거리는 찬장문에서 식칼을 꺼내 어머니를 찌른 날도있었고, 목을 졸라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걸 경찰에 신고한적도 여러번이었다.
매일 죽고싶다 죽고싶다하면서 우리 남매 탓을 하며 이혼을 하지않는 어머니가 너무 싫어서 대학교 입학식을 하자마자 집을 나와 살았다.
독립하니 모든것이 돈이었다. 나는 거지같은 집구석을 탈출한것에 큰 의미라도 두듯이, 좀 못입고 좀 못먹어도 두번다시 돌아가지않겠다 다짐하며 대학을 다니며 일년에 주말도없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에는 노동법이니 인권이니 이런 것들이 미미해서 였을까. 사장들은 마음에 들지않으면 월급을 주지않거나 내 뺨을 때리거나 하기를 부지기수였다. 노동부에 진정서를 내도 그뿐이었다. 사장들은 명의와 사업장만 바꾼채로 나 아닌 다른 어린 대학생들에게도 똑같이 하더라. 그래서 그땐 그냥 그게 세상인줄 알았다.
대학 2년차에 접어들무렵, 아르바이트로는 학자금을 도저히 벌수가없어서 휴학을하고 공장에 들어갔다. 친구들은 군대에도 가고 또는 휴학하고 어학연수니 해외여행이니 잘 다니더라. 매일매일 스스로와 비교되어 죽고싶은 생각뿐이었지만 그래도, 난 아직 젊으니까 열심히 살면 좋은날이 올거라 믿었다.
복학하고나서 모아두었던 돈 한푼이라도 아껴 한학기라도 더 다니고싶어서 어쩔수없이 집에 다시 들어갔다. 아버지는 50대 후반이 되었는데도 바뀐것이 없었다. 우리집에는 멀쩡한게 하나도 없었다. 장농은 모서리마다 다 부서져있었고, 박스만큼 큰 구형 티비는 아버지께 맞아서 속이 훤이보였다. 누런 장판은 여기저기 칼집이 나있었고 싸울때 물건을 던지면서 찍힌 흠 투성이었다. 나는 하루하루가 지옥같았지만 절대 부모처럼은 살고싶지 않아서 꾸역꾸역 참고 통학을했다. 어린아이떄와 달리 몸도 많이 자라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를때도 이제 어느정도 말릴수는 있는 수준은 되었다.
그러다 스물 네살이 되던해 , 아버지는 우울증으로 차에 연탄을 피우고 자살을했다. 경찰이 건네 준 그가 남긴 일기장에는 가족들이 왜 자신을 외면하고 배척하려 하는지 이해할수없다, 외롭다는 글이 가득했다. 나는 묵묵히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않았다.
내 아버지는 끝까지 비루했다. 돌아가시고 난 뒤 빚은 어마어마했고, 물려받을건 잠깐 직장생활했을때 쌓인 국민연금 400만원과 구형 마티즈를 판 100만원 뿐. 나는 상속포기를 할까 했지만 당장 장례치를 돈과 생활할 돈 조차 우리가족에겐 없었다. 엄마의 명의로 카드나 대출을해서 아버지가 썼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신용불량자였고, 나는 고작 스물 넷의 여자애였고, 동생은 갓 중학교를 졸업한 어린아이였다.
장례식 중간중간에 관리자가 와서 국화비니 수육비니 하며 중간정산을 요구했다. 동생은 어리고 어머니는 실신했기때문에, 그 모든 처리를 내가 다 해야했다. 당장 돈이 없었기때문에 관리자에게 사정사정을 해서 부조가 들어오면 중간에 갚고, 또 손님오면 갚고, 이렇게해서 겨우 장례비를 정산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후로, 어머니는 우울증에 빠져 매일 자살하겠다고 하면서, 내가 알바를 할때도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있을때도 전화를 해댔다. 전화를 받지않을때는 문자를 보냈다. 니가 전화를 받지않으니 유서를 문자로 남긴다. 라는 내용으로. 정말 미칠것같았다. 매일 맞고살았으면서 왜 우울증에 빠졌는지도 이해되지않았고, 왜 나까지 앞으로 나가지못하게 발목을 잡고 진흙탕속으로 같이 끌고 들어가려 할까 라는 생각밖에 들지않았다.
어머니의 매일 일과는 자살시도와 죽고싶다는 전화나 문자를 보내는것이 다였기때문에, 집에 돈이 있을리가 없었다. 어린 동생까지 굶길수는 없어서 나는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공장에 들어갔다. 부모처럼 살기싫어서 죽자살자 공부해서 그래도 나름 이름있는 대학을 다녔는데, 알바가 아닌 정사원으로 공장에 취업하니 또 세상이 달랐다. 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나에게 가족때매 미련하게 군다면서 손가락질했다. 같이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공부 잘해봐야 소용없다며 내 추락이 그들의 처지에 위안이라도 주는듯이 나를 가십거리로 삼았다. 나는 주야간을 교대하며 늘 일 마치고나면 공장 창고 제일 구석 아무도오지않는곳에 가서 한참을 울었다. 그래도 열심히 살면 언젠가는 또 다시 공부할수있을거라고, 내 인생을 바꿀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뀌는것은 없었다.나 또한 삶이 너무 무거워서 여러번 자살시도를 하긴했으나 포기했다. 온 몸의 뼈가 다 부러지고 결국 장애까지 얻었지만 눈떠보니 또 살아있더라.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 천장에 갈매기모양이 보였다. 몸이 다 부러져 옴짝달싹 할수없으니 하나, 또 하나, 갈매기 갯수를 세면서, 나는 잘 사는것도 잘 죽는것도 아무것도 못하는 한심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살고 죽는게 천운에 따르는거라면 살아있는동안 한번 살아보자,라고 생각했다. 어린 나에게 써보지도 못한 빚의 그 금액이 너무 무거워서 신용회복위원회에 도움을 청했고, 다른 빚들도 하나씩 갚아나갔다.
그렇게 시간이흘러, 나를 눈여겨보던 귀인의 도움으로 운좋게 스물 아홉에 대기업에 입사했다. 대학중퇴지만 졸업자들보다 낫다며 많은것들을 도와주셨다. 세상에 살다보니 이런일도 있구나 싶었다. 나는 부모가 남긴 빚은 이제 없고, 부모때문에 생긴 빚만 남았으니 탄탄한 직장에서 이것만 잘 갚으면서 살면 어쩌면 나도 사랑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도낳을수있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에 이유없는 운은 없었다. 다니던 대졸자들도 몇개월이면 혀를 내두르고 갈 정도로 업무강도는 높았고, 바쁠땐 화장실 가는것도 사정사정을 해야할정도로 업무량이 미어터졌다. 처음에는 그래도 대기업이니까, 내 처지에 못가는 곳이니까 감사하게 생각하자 라고 버티며 악착같이, 미친듯이 일만했다. 덕분에 동기들보다 월급은 점점 많아져갔고 회사에서도 우수사원으로 손꼽히게 되었지만 나는 기립성저혈압과 공황장애, 고도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런 환멸스러운 삶에서도 내게 의지할 곳 하나, 그 고양이 한마리였다. 사람에게 하지 못하는 말, 사람에게 기대지 못하는 마음들을, 그 말 못하는 짐승 한마리에게 위안받으며 살았다. 죽어버리고싶은 날에도, 내가 너를 데려왔으니 너를 끝까지 책임지고 네가 죽을때까지 너를 보듬겠다고 , 내 아무리 삶을 꾸역꾸역 삼켜내며 살고있지만 결코 내가 너보다 일찍 죽어버리지는 않을게, 약속했다. 그런 그 고양이가 오늘 죽었다. 싸늘한 돌이 되었다. 나는 울지도 못한채 공허한 눈으로 한참을 죽어 식어버린 그 몸을 쓰다듬었다.
나는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나. 나는 이제 무엇때문에 죽지 말아야하나.
서른이 넘었지만 모아둔것 하나 없고, 아직도 매월 입금되는 돈은 내 돈이 아니다.
한창 구두 신고 치장하고 다닐 나이에 남들처럼 근사한 가방하나도 없고 멋진 물건이나 옷도 하나도 없는데 만져보지도 못한돈이, 내 한달 한달이 손에서 스러져버리는것도 이젠 신물이 난다.
나는 무슨 복으로 또 잘사는 집 사람들하고만 친해진건지, 아니면 그냥 내 자격지심인건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인들은 부모님께 말만 하면 대학원 한학기 등록금이 나오고, 생일에는 차를 선물받고, 취업이 안되자 아버지가 운영하는 건물들에 월세를 대신 받으러 다니면서 아버지께 월급을 받고 산다.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아닌 평범한 그 일상이, 나를 매일매일 갈기발기 찢는다.
정신병원도 다니고 심리코칭도 받아보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딱지 앉은 상처를 애써 뜯어내 피만나게하고, 결국 새살이 돋게해주진 못했다.
언제나 나는 내 마지막을 담담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사망보험도 들어놓았고, 국민연금도 많지는 않지만 좀 쌓였을거고, 혼자살고있는 이 집의 보증금도 빼고나면 그래도 남은 사람들에게 피해는 안되겠지. 주변정리는 끝났고 친한 친구 몇에게 미리 보험금이랑 연금이랑 보증금빼면된다고, 죽고나면 정신없어 할 가족들이게 전해달라고 유언아닌 유언도 다 남겼다.
어머니께서 절절히 믿는 그 천주교에서는 다 내탓이오, 하고 가슴을 세번 친다던데
나는 세번가지고는 안될것같다.
가난하게 태어난것도 내탓이고, 가난한 부모를 만난것도 내탓이고,공부를 더 못한것도 내탓이고, 미련한 삶을 죽지도 못하고 계속 살아 아침마다 끝내 눈이 떠지는것도 내탓이고, 내 고양이가 죽은것도 내탓이다.
죽으면 나는 지옥에가겠지. 하지만 두렵지는 않다. 신도 내 삶을 살아본다면 고민하나없이 지옥에 보내지는 못할걸. 어차피 사는것도 지옥이었고.
그냥 쓰는 이야기
오늘 내 첫 고양이가 죽었다.
간이 좋지않았는데 나이까지 들어서 약을 먹이고 병원에 데려가도 차도가 없었다
어제 새벽에 왠지 느낌이 좋지않아서 한달가까이 송장처럼 축 쳐져 있었던 그아이에게
힘들면 너무 고생하지말고 푹 쉬어도 된다고 말한게 화근이었을까
그렇게 마지막 인사가 된채 눈을 감았다
나는 나이 서른하나. 모든것이 덧없었다
집에 들어와서 불을켜면 바퀴벌레들이 사르륵 도망가는 다세대주택 단칸방에서
사춘기 겪을 여유도없이 학창시절을 보냈고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에도 쓸데없이 무슨 학구열은 그리 높았는지 공부가 너무 하고싶어서 대학에도 갔다.
대학을 가서도 집은 여전히 가난했고 내가 어른이되어서도 아버지는 매일 술만 마시면 어머니를 때렸다. 때리기만 한 날은 그래도 평안한 하루였다. 어머니가 대들기라도 한 날이면 아버지는 소주를 그자리에서 벌컥벌컥 들이킨 뒤 너덜거리는 찬장문에서 식칼을 꺼내 어머니를 찌른 날도있었고, 목을 졸라 숨이 깔딱깔딱 넘어가는걸 경찰에 신고한적도 여러번이었다.
매일 죽고싶다 죽고싶다하면서 우리 남매 탓을 하며 이혼을 하지않는 어머니가 너무 싫어서 대학교 입학식을 하자마자 집을 나와 살았다.
독립하니 모든것이 돈이었다. 나는 거지같은 집구석을 탈출한것에 큰 의미라도 두듯이, 좀 못입고 좀 못먹어도 두번다시 돌아가지않겠다 다짐하며 대학을 다니며 일년에 주말도없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에는 노동법이니 인권이니 이런 것들이 미미해서 였을까. 사장들은 마음에 들지않으면 월급을 주지않거나 내 뺨을 때리거나 하기를 부지기수였다. 노동부에 진정서를 내도 그뿐이었다. 사장들은 명의와 사업장만 바꾼채로 나 아닌 다른 어린 대학생들에게도 똑같이 하더라. 그래서 그땐 그냥 그게 세상인줄 알았다.
대학 2년차에 접어들무렵, 아르바이트로는 학자금을 도저히 벌수가없어서 휴학을하고 공장에 들어갔다. 친구들은 군대에도 가고 또는 휴학하고 어학연수니 해외여행이니 잘 다니더라. 매일매일 스스로와 비교되어 죽고싶은 생각뿐이었지만 그래도, 난 아직 젊으니까 열심히 살면 좋은날이 올거라 믿었다.
복학하고나서 모아두었던 돈 한푼이라도 아껴 한학기라도 더 다니고싶어서 어쩔수없이 집에 다시 들어갔다. 아버지는 50대 후반이 되었는데도 바뀐것이 없었다. 우리집에는 멀쩡한게 하나도 없었다. 장농은 모서리마다 다 부서져있었고, 박스만큼 큰 구형 티비는 아버지께 맞아서 속이 훤이보였다. 누런 장판은 여기저기 칼집이 나있었고 싸울때 물건을 던지면서 찍힌 흠 투성이었다. 나는 하루하루가 지옥같았지만 절대 부모처럼은 살고싶지 않아서 꾸역꾸역 참고 통학을했다. 어린아이떄와 달리 몸도 많이 자라서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를때도 이제 어느정도 말릴수는 있는 수준은 되었다.
그러다 스물 네살이 되던해 , 아버지는 우울증으로 차에 연탄을 피우고 자살을했다. 경찰이 건네 준 그가 남긴 일기장에는 가족들이 왜 자신을 외면하고 배척하려 하는지 이해할수없다, 외롭다는 글이 가득했다. 나는 묵묵히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않았다.
내 아버지는 끝까지 비루했다. 돌아가시고 난 뒤 빚은 어마어마했고, 물려받을건 잠깐 직장생활했을때 쌓인 국민연금 400만원과 구형 마티즈를 판 100만원 뿐. 나는 상속포기를 할까 했지만 당장 장례치를 돈과 생활할 돈 조차 우리가족에겐 없었다. 엄마의 명의로 카드나 대출을해서 아버지가 썼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신용불량자였고, 나는 고작 스물 넷의 여자애였고, 동생은 갓 중학교를 졸업한 어린아이였다.
장례식 중간중간에 관리자가 와서 국화비니 수육비니 하며 중간정산을 요구했다. 동생은 어리고 어머니는 실신했기때문에, 그 모든 처리를 내가 다 해야했다. 당장 돈이 없었기때문에 관리자에게 사정사정을 해서 부조가 들어오면 중간에 갚고, 또 손님오면 갚고, 이렇게해서 겨우 장례비를 정산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후로, 어머니는 우울증에 빠져 매일 자살하겠다고 하면서, 내가 알바를 할때도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있을때도 전화를 해댔다. 전화를 받지않을때는 문자를 보냈다. 니가 전화를 받지않으니 유서를 문자로 남긴다. 라는 내용으로. 정말 미칠것같았다. 매일 맞고살았으면서 왜 우울증에 빠졌는지도 이해되지않았고, 왜 나까지 앞으로 나가지못하게 발목을 잡고 진흙탕속으로 같이 끌고 들어가려 할까 라는 생각밖에 들지않았다.
어머니의 매일 일과는 자살시도와 죽고싶다는 전화나 문자를 보내는것이 다였기때문에, 집에 돈이 있을리가 없었다. 어린 동생까지 굶길수는 없어서 나는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공장에 들어갔다. 부모처럼 살기싫어서 죽자살자 공부해서 그래도 나름 이름있는 대학을 다녔는데, 알바가 아닌 정사원으로 공장에 취업하니 또 세상이 달랐다. 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나에게 가족때매 미련하게 군다면서 손가락질했다. 같이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공부 잘해봐야 소용없다며 내 추락이 그들의 처지에 위안이라도 주는듯이 나를 가십거리로 삼았다. 나는 주야간을 교대하며 늘 일 마치고나면 공장 창고 제일 구석 아무도오지않는곳에 가서 한참을 울었다. 그래도 열심히 살면 언젠가는 또 다시 공부할수있을거라고, 내 인생을 바꿀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뀌는것은 없었다.나 또한 삶이 너무 무거워서 여러번 자살시도를 하긴했으나 포기했다. 온 몸의 뼈가 다 부러지고 결국 장애까지 얻었지만 눈떠보니 또 살아있더라. 정신을 차려보니 병원 천장에 갈매기모양이 보였다. 몸이 다 부러져 옴짝달싹 할수없으니 하나, 또 하나, 갈매기 갯수를 세면서, 나는 잘 사는것도 잘 죽는것도 아무것도 못하는 한심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살고 죽는게 천운에 따르는거라면 살아있는동안 한번 살아보자,라고 생각했다. 어린 나에게 써보지도 못한 빚의 그 금액이 너무 무거워서 신용회복위원회에 도움을 청했고, 다른 빚들도 하나씩 갚아나갔다.
그렇게 시간이흘러, 나를 눈여겨보던 귀인의 도움으로 운좋게 스물 아홉에 대기업에 입사했다. 대학중퇴지만 졸업자들보다 낫다며 많은것들을 도와주셨다. 세상에 살다보니 이런일도 있구나 싶었다. 나는 부모가 남긴 빚은 이제 없고, 부모때문에 생긴 빚만 남았으니 탄탄한 직장에서 이것만 잘 갚으면서 살면 어쩌면 나도 사랑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도낳을수있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에 이유없는 운은 없었다. 다니던 대졸자들도 몇개월이면 혀를 내두르고 갈 정도로 업무강도는 높았고, 바쁠땐 화장실 가는것도 사정사정을 해야할정도로 업무량이 미어터졌다. 처음에는 그래도 대기업이니까, 내 처지에 못가는 곳이니까 감사하게 생각하자 라고 버티며 악착같이, 미친듯이 일만했다. 덕분에 동기들보다 월급은 점점 많아져갔고 회사에서도 우수사원으로 손꼽히게 되었지만 나는 기립성저혈압과 공황장애, 고도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그런 환멸스러운 삶에서도 내게 의지할 곳 하나, 그 고양이 한마리였다. 사람에게 하지 못하는 말, 사람에게 기대지 못하는 마음들을, 그 말 못하는 짐승 한마리에게 위안받으며 살았다. 죽어버리고싶은 날에도, 내가 너를 데려왔으니 너를 끝까지 책임지고 네가 죽을때까지 너를 보듬겠다고 , 내 아무리 삶을 꾸역꾸역 삼켜내며 살고있지만 결코 내가 너보다 일찍 죽어버리지는 않을게, 약속했다. 그런 그 고양이가 오늘 죽었다. 싸늘한 돌이 되었다. 나는 울지도 못한채 공허한 눈으로 한참을 죽어 식어버린 그 몸을 쓰다듬었다.
나는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나. 나는 이제 무엇때문에 죽지 말아야하나.
서른이 넘었지만 모아둔것 하나 없고, 아직도 매월 입금되는 돈은 내 돈이 아니다.
한창 구두 신고 치장하고 다닐 나이에 남들처럼 근사한 가방하나도 없고 멋진 물건이나 옷도 하나도 없는데 만져보지도 못한돈이, 내 한달 한달이 손에서 스러져버리는것도 이젠 신물이 난다.
나는 무슨 복으로 또 잘사는 집 사람들하고만 친해진건지, 아니면 그냥 내 자격지심인건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인들은 부모님께 말만 하면 대학원 한학기 등록금이 나오고, 생일에는 차를 선물받고, 취업이 안되자 아버지가 운영하는 건물들에 월세를 대신 받으러 다니면서 아버지께 월급을 받고 산다.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아닌 평범한 그 일상이, 나를 매일매일 갈기발기 찢는다.
정신병원도 다니고 심리코칭도 받아보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딱지 앉은 상처를 애써 뜯어내 피만나게하고, 결국 새살이 돋게해주진 못했다.
언제나 나는 내 마지막을 담담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죽기 전에 사망보험도 들어놓았고, 국민연금도 많지는 않지만 좀 쌓였을거고, 혼자살고있는 이 집의 보증금도 빼고나면 그래도 남은 사람들에게 피해는 안되겠지. 주변정리는 끝났고 친한 친구 몇에게 미리 보험금이랑 연금이랑 보증금빼면된다고, 죽고나면 정신없어 할 가족들이게 전해달라고 유언아닌 유언도 다 남겼다.
어머니께서 절절히 믿는 그 천주교에서는 다 내탓이오, 하고 가슴을 세번 친다던데
나는 세번가지고는 안될것같다.
가난하게 태어난것도 내탓이고, 가난한 부모를 만난것도 내탓이고,공부를 더 못한것도 내탓이고, 미련한 삶을 죽지도 못하고 계속 살아 아침마다 끝내 눈이 떠지는것도 내탓이고, 내 고양이가 죽은것도 내탓이다.
죽으면 나는 지옥에가겠지. 하지만 두렵지는 않다. 신도 내 삶을 살아본다면 고민하나없이 지옥에 보내지는 못할걸. 어차피 사는것도 지옥이었고.
걷고 먹고 마시고 자는 모든것들이 의미가없다.
나 빼고 모두들 잘 사는것만 같다.
여전히 오늘 날씨도 참 구름한점없이, 속없이도 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