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쌉싸름한 30살(28)

리드미온2004.02.10
조회14,181

“우리 회사에 리츠칼튼 사장하고 연관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밝혀졌대.

그래서 그걸 알게 된 퓨쳐인터내셔널이 리츠칼튼에 협박을 한 모양이야.

그리고 리츠칼튼에서도 사장하고 관계있는 업체를 선정하면 그 문제가 커질까 봐

우리 다음으로 점수가 좋았던 퓨쳐로 정한 거고....”

 

리츠칼튼 사장이라면 내가 프리젠테이션 할 때, 백마를 가져다 놓자고 말했던  그 사람이다.

그 사람과 관련 있는 사람이 우리 회사에 있다고?

 

“그럼 우리 중에 그 사람이 있다는 건데, 일단 저는 아니고...누구죠?”

 

“김대리...이력서에는 자세히 안 써서 몰랐는데 리츠칼튼호텔 사장 아들이라더군. 나도 이번에 알았어.”

김대리가? 리츠칼튼 사장의 아들?

 

갑자기 무언가로 쿵하고 얻어맞은 사람처럼 멍해졌다.

 

가만가만...그렇다면?

내가 연실과 만나 쓰러지던 날 아버지의 생일잔치를 리츠칼튼호텔에서 했다는 것은

아버지가 사장이라서 그랬던 거고,

프리젠테이션 때 사장님이 베이지색 정장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은

실은 자기 아버지의 취향을 알고 말했던 거고, 

그리고 마케팅 부장을 조심하라고 말했던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

쉽게 알아낼  수 있던 정보였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보니, 백마를 가져다 놓자는 억지스런 사장의 의견도

김대리의 엉뚱한 면과 닮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는 그것보단 그 이유로 프리젠테이션을 잘한 우리가 떨어지다는 것이 더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미 발표가 끝난 상황이라 기정사실이 된 듯했다.

일이 안 풀릴 때는 이렇게 엉뚱하게도 꼬이는 것 같았다.

사장 아들과 같이 일했으면 유리해야 했는데 그런 이유로 떨어지다니.

 

김대리가 원망스러웠다.

우리를 속였다는 것도 그렇고 이번 프로젝트를 물거품으로 만든 것이

김대리의 책임이라고 생각되었다.

당장이라도 김대리를 불러 놓고 어찌된 일인지 따지고 싶었지만 오늘만은 참기로 했다.

일단 오늘 은수의 송별회를 해주고 다시 한번 이 일에 대해서 정리하고 싶었다.

더구나 이런 소문이 나면 앞으로 김대리가 직장 생활을 하는데도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현명하게 처리하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치밀어 오는 김대리에 대한 배신감과 억울함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사람 앞일은 모른다고 했던가...
민준과 헤어지면서 나에게 하나 남았던 희망이 이렇게 사라져 버리다니.

앞으로 회사 생활할 일을 생각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나는 이 사실을 은수와 하연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김대리가 리츠칼튼 사장 아들이라서 떨어졌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부족해서 그랬다고 알려주고 다음에는 더 노력하자고 하는 것이 깔끔하다.

그럼 김대리는 왜 그렇게 열심이었던 것일까?

 

송별회 자리는 예상대로 우울했다.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났다면 이부장에게 회식비라도 더 뜯어냈겠지만

그럴 면목도 없어서 평범한 삼겹살 집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은수씨...내가 미안해. 성공을 선물로 준다고 해놓고...”

 

“아니에요. 늘 그러셨잖아요. 이십대는 아직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한 때라고.

그리고 그 동안 정말 많이 배웠어요.”

 

“은수씨 나도 미안해요. 내가 좀 더 노력했어야 하는 건데...”

 

평소와 달리 침묵을 지키고 있던 김대리가 은수에세 사과를 했다.

나는 김대리를 차갑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에요. 김대리님도 열심히 하셨잖아요. 운이 안 좋았다고 생각해야지요.

저야 떠나는 사람이지만 다른 분들이 걱정이네요. 이제 또 다른 일거리 찾아야 하잖아요.”

 

“걱정 마세요. 은수씨 보다 예쁜 여직원 뽑아서 독수리 5형제처럼 일할 테니까...”

 

하연이가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지 우스개 소리를 했다.

 

“아무튼 은수씨 다른 회사 가서 일 잘하고 결혼하게 되면 연락해요.”

 

나는 평범한 송별회 인사를 한마디 더 했다.

 

“은수씨 나도 결혼하면 연락할게요. 꼭 와야 합니다.”

김대리다. 아무리 농담이지만 자신 때문에 떠나는 여자에게 꼭 그렇게 말하고 싶을까?

 

“오옷 김대리님이 결혼을 한다고요? 어떤 여잔지 참 안됐다.

그 썰렁한 농담을 어떻게 평생 듣고 살까...”

 

은수는 이제 완전히 김대리에 관한 마음을 정리한 것 같았다.

주변인인 내가 듣기에도 기분 나쁜 말을 이젠 잘 받아치고 있었다.

역시 은수는 내가 처음 볼 때와 달리 강해졌다.

은수는 일과 사랑에 성공한 서른 살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예전의 겁 많고 눈물 많은 여자가 아니었다.

 

“다들 재밌어 하지 않아요? 내 유머?”

 

김대리는 아직도 모르나 보다. 자신의 상태를.

저런 사람이 무슨 호텔 사장의 아들일까?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대리님 유머가 재미있다면 그건 개그맨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죠.”

 

하연도 이번에는 만만치 않게 나왔다.

다들 긍정하는 의미로 까르르 웃었는데 김대리만 심각하게

 

“안 그래도 나 예전에 개그맨 해보고 싶어서 시험도 봤었어.”

 

라고 말했다. 점입가경이다. 그 유머 실력으로 개그맨을?

 

“떨어졌죠?”

 

바로 은수가 물었다.

 

“그게...내 컴플렉스를 극복을 못해서...”

 

“컴플렉스요? 김대리님이 컴플렉스가 있어요?”

 

하연이 신기하다는 듯 되물었다.

평소에 항상 즐거운 얼굴 표정을 하고 있고

또 나와 이부장이 아는 것이 사실이라면 부유한 환경에서 고생도 안하고 컸을 텐데...

 

“은수씨 송별회니까 특별히 얘기합니다...”

 

저렇게 진지하게 말하는 김대리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아마도 김대리는 자신 때문에 리츠칼튼 홍보 건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알기에

표현은 안 하지만 의기소침해 있는 듯 했다.

 

“내 스스로 이름 붙였는데 여자 컴플렉스가 있어요.”

 

“여자 콤플렉스요?”

 

하연과 은수는 신기하다는 듯 입을 모아 되물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사랑 컴플렉스 같아요.

내 스스로 봐서는 별 문제 없는 사람 같은데 연애는 잘 못 하겠더라고요.

늘 좋아하는 여자를 위해서 행동한다는 게 결과적으로 보면 괴롭히는 일이 되곤 했었어요.

장미꽃을 사가면 장미꽃을 싫어하는 거 몰랐냐고 핀잔을 들었고,

야구 구경 가자고 데리고 갔더니 알고 보면 영화구경을 더 좋아한다 거나...

비싼 구두를 신고 데이트를 나가면 운동화를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거나...”

 

김대리의 말이 이해가 됐다.

김대리는 연애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그래왔으니까.

그래서 나도 그런 김대리를 좋아하는 은수를 이해할 수 없었었다.

 

“후후후..상상이 되네요. 하지만, 그건 김대리님 혼자 생각일 수도 있어요.

 진짜 사랑한다면 내가 장미를 좋아하지 않아도 장미를 기쁘게 받아줄 수 있고,

 야구 경기가 재밌지 않아도 영화 보다 재밌게 느껴질 수도 있고,

 좋아하지 않던 구두도 멋있어 보이는 거예요.”

 

역시 은수답다.

어쩌면 저렇게 사랑에 대해서도 똑 부러진 소리만 할까.

역시 김대리보다는 천만 배 나은 사람을 만날 수 있으리라.

 

“아무튼 그래서 개그맨 시험을 보러 갔는데 1차 서류를 통과해서

2차 실기 시험을 보는데 글쎄 여자 시험관이 있는 거야.

갑자기 입이 얼어붙어서 외운 대사도 까먹고...

거기다 중간에 긴 바지를 내리고 속에 반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만 속의 반바지까지 내려 버린 거야...”

 

“하하하하...호호호호호”

 

다들 김대리의 얘기에 웃음이 터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마구 웃어댔다.

나는 그래도 김대리 덕분에 우울한 송별회 분위기가 사라지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그런데 여자인 팀장님하고는 일 잘하시잖아요?”

 

김대리의 얘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던 하연이 물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그건 김대리가 날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하..하연씨, 그걸 몰라서 물어? 김대리가 날 여자로 안보는 거지.”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팀장님은 편하게 해주셔서 콤플렉스를 잊고 지네요.”

 

김대리가 오랜만에 기특한 말을 한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 보면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까 다들 컴플렉스는 하나씩 있을 거예요.

전 김대리님이 그런 컴플렉스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요. 팀장님은요?”

 

하연은 김대리의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고 하면서 나에게도 물었다.

 

“난 체육...학교 때 달리기부터 줄다리기까지 잘 하는 게 하나도 없었어. 지금도 마찬가지고.”

 

나뿐만 아니라 은수와 하연도 자신의 컴플렉스를 얘기하며 오히려 우리는 유쾌해졌다.

마치 초등학교 때 서로 놀리고 장난쳤던 것처럼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되었다.
우울한 송별회가 되리라고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2차로 호프집에 갔고,

김대리가 내 병원비를 내주며 한턱 쏘라고 했던 약속을 귓속말로 상기시키며

3차로 나이트클럽을 가자고 했다.

 

나도 내친 김에 오랜만에 독수리 5형제가 불사조가 되어

춤을 추자고 선동하며 나이트클럽으로 향했다.

막강한 팀워크로 광란의 댄스로 놀다가 나와서 다시 포장마차로 향했다.

 

아마도 그 때부터인 것 같았다.
나는 취해서 은수를 붙잡고 연설조로 여러 충고를 한다고 떠들었고

새벽 3시가 넘어서 이제 헤어지자고 인사를 하고는 차를 갖고 가겠다고 대리 운전을 부른 것 같았다.
그렇게 정신없는 나대신 김대리가 은수와 하연을 택시를 태워 보낸 것까지 기억했다.

 

------------------<클릭, 달콤쌉싸름한 30살 29편 보기>------------------------

           

                                           아쉬운 분들은 아래 블로그 배너 클릭 한번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