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화(雪化)

sOda2004.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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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정확한 고증과는 일치하지 않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배경


부여족으로부터 갈려나온 고구려가 아직 국가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던 2세기경.

고구려는, 왕이 배출되었던 계루부, 왕실과의 혼인으로 왕비족으로 등장한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의 5부족 연맹체였다.


등장인물


담- 관노부의 혈통이나 계급이 낮은 유지의 딸로 단아하고 청초하다. 생각이 깊고 의지가 굳으며 유난히 희고 아름다운 살결덕에, 설화라는 이름으로 알려져있다.


결- 계루부의 형(족장의 후계자)로, 어리지만 무사다운 용맹함과 강인함을 갖고있다. 인과 덕도 있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고 있다. 다소 다혈질인 단점이 있다.


원이- 관노부 높은 가문의 장자로, 담이와 먼 친척뻘 되는 오라비이다. 어려서부터 담이를 무척 아끼고 애틋한 감정이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1]  도화(桃花)


1.  나무에 매달린 소녀


생전 처음보는 길고 화려한 행렬이었다.

 

말을 탄 장수들이 스물몇, 뒤를 따르는 병사들과 일꾼들이 어림잡아 온(百)은 되보였다.

 

 

“아가씨! 아이구, 정말 이러다 큰일나세요~ 얼른 내려오세요~!”

 

 

몸이 가볍고 여자애 답지않게 활달한 담이의 남모르는 취미는 나무 오르기.

 

이런 좋은 구경을 놓칠 담이가 아니다.

 

담이는 행렬을 더 잘 보고자 담밖으로 길게 늘어진 나무로 슬슬 기어가기 시작했고, 아래 있던 여종은 기겁을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내 걱정 마! 어디 하루이틀 오른 솜씨야?”

 

...라고 말하는 순간, 담이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한 나뭇가지는 아래로 쭈욱~ 휘었고, 그만 담이는 그 위를 미끄러지며 가지 끝을 잡고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고 말았다.

 

순식간에 날렵한 호위무사들이 칼날을 세워 담이주변을 포위했다. 우두머리를 노린 자객으로 알았을까-

 

하필이면 턱~하니 행렬 한 가운데를 가로막은 셈이 되고 말았으니, 누가보아도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조그마한 소녀로 인해 그 거대한 행렬이 움직임을 멈추게 되었다.

 

밖을 내다보던 여종은 그만 하얗게 질려 안채로 뛰어가고 말았고, 담이는 매달려 있는 와중에도 힘든기색을 억지로 숨기고 난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담이는 말을 탄 지긋한 장수와 마주보고 있었다. 장수도 놀란 듯한, 황당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흐음... 네가 행렬을 멈추려고 한짓이냐?”

 

“아, 아니에요! 실수로 나무가 휜 것 뿐이에요.”

 

장수는 나뭇가지를 따라 시선을 옮기며 “나무엔 어찌 올라갔느냐?”

 

“보, 복숭아를 따려구요!”

 

 

장수는 담이의 맹랑한 거짓말에 웃음을 참으며 일부러 진지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직 복숭아를 따기엔 이른 것 같다만...?”

 

 

그제서야 담이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팔도 저려오고, 상황도 이보다 최악일 순 없었다.

 

이들은 군사도 많고 힘도 센 부족의 장수들이다. 어쩌면 죄를 물어 노비로 데려갈지도 모른다.

 

장수는 칼을 겨눈 호위무사들을 향해 손을 들어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계속 그렇게 매달려서 지나가는 것을 방해할테냐...? 아니면 이리 발을 딛을테냐?”

 

 

장수는 자신의 무릎을 손바닥으로 치며 딛을곳을 가르켰다.

 

저길 밟았다간 노비가 아니라 참수를 당할지도 모르지.

 

 

“조, 조금만 비켜주시면 땅을 딛겠어요.”

 

“허허... 꽤 높은데 다치면 어쩌려고?”

 

“이정도는 문제없어요~!”

 

 

장수는 말머리를 살짝 돌려 담이의 아래쪽을 비워주었다.

 

담이는 망설일 것도 없이 가지에서 손을 놓았다. 떨어져봐야 다리 하나 밖에 더 부러지겠어?

 

하지만 담이가 바닥으로 뒹굴기 전, 장수는 떨어지는 담이의 허리를 잡아챘고, 다행히 담이는 장수 옆구리에 안전하게 안기게 되었다.

 

담이는 자신을 옆구리에 낀 노 장수의 묵직한 손힘에, 순간 두려움과 함께 경외심을 느꼈다.

 

담이의 난처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곧 장수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하하하! 것참 맹랑한 소녀일세. 정말로 손을 놓을지는 몰랐더니...”

 

 

이때 뒤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담이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말굽 소리의 주인을 힘들게 올려다 보았다.

 

아직 앳됨이 남아있는 소년이었다. 의외였다.

 

무리들중에 이런 어린 소년이 말을 타고 끼어있었다니.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네가 내려서 이 소녀를 좀 도와주어라.”

 

 

소년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에서 내렸다.

 

이 어리고 대책없는 소녀가 수백의 행렬을 멈추게 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라도 상한

모양이었다.

 

소년의 손이 담이의 겨드랑이와 허리를 잡자, 곧 담이는 자신의 처지도 잊고 순간적으로 두 팔로 소년의 어깨를 밀어내고 말았다.

 

덕분에 소년은 두어걸음 뒤로 밀쳐졌고, 담이는 바닥으로 나뒹굴고 말았다.

 

담이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 생각도 없이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소년은 무안함 반, 수치심 반으로 얼굴이 벌개져 손으로 입가를 훔쳐냈다.

 

 

“이런 무례한...!”

 

 

이때 또다른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소년과 담이의 시선은 동시에 달려오는 말쪽으로 향했다.

 

 

“원이 오라버니!”

 

 

담이의 얼굴은 반가움으로 바닥에 흩어진 도화마냥 화사해졌고, 소년은 담이의 그런 얼굴을 흘깃 노려보았다.

 

담이가 원이 오라버니라 부른 사람은 말을 급하게 멈추며 곧장 뛰어내리더니 장수앞으로 달려와 숨을 헐떡이면서도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부디 무례함을 용서하소서. 여기 아이는 제 먼 친척뻘 되는 동생으로 아직 철이없어 죄인줄 모르고 한 행동이옵니다.”

 

“껄껄껄... 아이가 다치지 않아 다행이오. 많이 지체되었으니 그만 움직이도록 합시다.”

 

 

원은 곧이어 소년에게 고개를 숙였다.

 

담이로서는 화가 나는 일이었다.

 

나이도 한참 어린 녀석한테 왜 원이 오라버니가 고개를 숙여야 하지?

 

 

“부디, 허물은 꾸짖되, 벌은 내리지 마소서. 아직 어린 아이 입니다.”

 

 

소년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마치 아랫사람에게 하대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맞을 채비를 단단히 하셨군요. 기왕이면 길도 깨끗이 치워놓지 그러셨소- 길은 사람이 다니라 통해놓은것이니 막는 것이 있으면 걷어내야 하지 않소?”

 

 

담이는 소년의 거만함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사람이지, 돌멩이라도 된단게야? 우연히 길 좀 막았기로서니 그걸로 원이 오라버니를 저렇게 망신을 주다니. 나이도 한참 어린놈이.

 

 

“잘못은 내가 했으니 오라버니한테 뭐라고 하지 말아요. 벌을 받아도 내가 받아야 하는거 아니에요?”

 

 

순간 노 장수와 소년은 담이의 담력에 탄복했다.

 

겨우 허리밖에 닿지 않는 키로 오라버니라 부르는 사람을 가로막고 서있는 어린 계집애 눈에는 기개가 서려 있었다.

 

저런 어린 소녀가 저런 위엄을 갖고 있다니.  

 

소년의 가슴속이 동(動)했다.

 

이 크고도 작은 사건은 장수의 넉넉한 마음으로 무마됐고, 행렬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년은 능숙한 솜씨로 말을 몰아 행렬에 명령을 내리며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살아남기위한 부족들간의 눈에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치열한 전쟁터에 첫 발을 내딛은

족장의 후계자, 결은 말위에서 잠시 소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반듯한 이마와 붉고 탐스러운 입술. 도화처럼 희고 깨끗한 살결... 거기다 또렷한 눈빛과 기품이 느껴지는 말투가 귀한 출신임을 말해주는 것 같다.

 

아까 소녀가 자신을 밀쳐냈을땐 언뜻 도화향이 사방에 날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다음에 소녀를... 만에 하나라도 인연의 끈이 이어져 있어 다시한번 마주치게 된다면 도화향내로 기억해 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멀어져가는 긴 행렬의 무리에 유독 결의 뒷 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던 담이역시 생각하고 있었다.

 

덩치보다 큰 말에 올라 덩치보다 큰 장수들을 호령하는 소년의 정체에 대해서.

 

그리고 차갑고 속을 알 수 없는 소년의 눈에 대해서.

 

담이는 소년이 두려웠다.

 

그는 왠지 달랐다.

 

그 서늘한 기운이 사람들을 얼리는 주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차고 강하다.

 

어쩌면 열한살 어리기만했던 담이에게 운명이 친절을 베풀어 무언가를 예고해 준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부터 얽히게 된 소년과의 운명에 대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