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雪化) 3. 후계자와 점괘 열 일곱이 된 결의 모습은 이미 족장으로서의 위엄과 범상함이 넘쳤다. 결은 아버지를 도와 벌써 여러 가지 부족일에 관여하며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다지고 있었다. “이것이 올해 우리가 받을 공물내역이오.” “알겠습니다. 헌데... 요즘 부여족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말이 들립니다.” “부여의 병력이 다소 많아진 것은 사실이오. 경계근처에서 작은 전투도 몇 차례 있었소.” “어째서 우리에게는 알리지 않으셨습니까?” “아직은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 듯 싶소. 조금 더 지켜봅시다.” 결의 부족에 공물을 바치고 병력을 지원받는 관노부의 노 관리는 생각했다. 계루부의 병력에 의존해 태평하게 지내는 것이 과연 부족을 위한 일인가에 대해서. 아무리 계루부의 군사라 할지라도 관노부의 영토내에 주둔하고 있으면 관노부의 명령을 따르는것이 당연한데, 계루부의 군사들은 직속상관으로 부임해있는 장수의 명령만을 듣고, 그 장수는 계루부 본토에 있는 족장의 명령만을 따랐다. 작은 전투라해도 관노부에 알리지 않고 의견을 통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또다른 속셈이 있는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계루부의 칼날이 부여를 향하고 있다고 하나, 훗날 그 끝이 관노부로 향하지 말란 법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태평함을 즐기다 칼과 갑옷이 녹슬고, 전투에 무능해질대로 무능해진다면... 하지만 노 관리의 생각은 여기서 멈췄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관노부의 미비한 해상력으로 잘 훈련된 부여의 기마족에 맞서봐야 돌아오는 것은 불탄 전답과 가구들일것이 뻔했다. “그런데...” 공물이 적힌 내역을 살피던 노 관리가 문득 입을 열고 말꼬리를 흐렸다. “여기 적힌 것이 노비 아닙니까?” “그렇소.” “한번도 노비를 청하신적은 없지 않습니까?” “지금 받는 공물들로는 변방에 위치한 병사들을 먹이는것만도 부족하오. 우리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소. 그렇다고 크게 곡물을 늘려 받을 수는 없지 않소? 해서, 일할 사람들을 청하기로 결정한 것이오.” 따지고보면 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 관리는 난처했다. 어찌 같은 부족민을 타 부족에 노비로 보낼 수 있단 말인가... “허나, 결님...” “이야기가 끝났으니 전 이만 일어서야겠습니다.” 노 관리의 난처한 표정을 모른척하고 방을 나온 결은 곧장 무당 무록을 찾았다. 꽃보다 향기로운 소리를 따라가니 과연 무록이 앉아 공후를 타고 있다. 결은 무록옆에 발소리를 내지 않고 다가가 앉았다. 세상을 초탈한 듯한 무록의 깊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더없이 마음이 평온해지곤 한다. 허나... 무록의 눈동자는 보통사람과 달리 움직임이 없다. 무록은 태어나면서부터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 사실을 한 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내노라 하는 미녀들도 울고갈 만큼 아름다운 외모의 무록이었으나, 정작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후의 열세가닥 줄위로 미끄러지며 들어본적없는 음악을 연주하던 무록의 희고 긴 손가락이 이윽고 연주를 멈췄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군요.” 외모만큼 차분하고 청아한 목소리다. “생각보다 길었지.” “......노비를 청하셨지요?” “그랬다.” “...결국 제 말을 듣지 않으셨군요.” “점괘를 보고 한 말이 아니지 않으냐.” “......점괘가 그리 나왔다해도 듣지 않으셨을 겁니다.”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처지였다. 무록이 결보다 네 살이나 아래였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을 털어놓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아니, 굳이 입밖에 내지않아도 속내를 훤히 알 수 있는 사이였던 것이다. 무록은 관노부의 사람을 부족내로 들이지 말라고 수년전부터 이야기 해왔다. 하지만 결이 결정하면 그대로 행동할 것임을 무록도, 결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무록의 충고 때문에 잠시 미루는 것일뿐. 그리고... 드디어 결은 열일곱이 되었다. 열일곱이란 나이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족장의 후계자로서 실권을 갖게 되는 시점인 것이다. 빠르면 열여덟에서 늦어도 스물에는 족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제 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부족민에게 법이 되는 것이다. 결이 처음으로 외교에 나서서 한 일이 바로 관노부에 노비를 청한 일이다. 무록이 염려하던 일이다. 무록은 인간의 힘으로는 우주의 이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하고 있었다. 아직 줄위에 놓여져 있는 무록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결은 알고 있었다. 대체 무록은 무엇을 저렇게 걱정하는 것일까. 우리 부족민만으로 두 부족의 경계를 지켜야 하는 것이 얼마나 무리인지 잘 알고 있을텐데... 공물의 양을 늘리지 않고 대신 노비를 청한 것은 오히려 덕이 아닌가? “결이님...” “말하거라.” “뱀을 아시지요? 보신적이 물론 있으시지요?” “그렇지. 헌데 그건 왜...” “뱀은, 자신을 공격하지 않으면 먼저 사람을 해치지 않습니다.” “그렇지.” “허나, 뱀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안전한것도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게냐?” “관노부에서 사람을 들여오면, 그것은 곧 수풀사이에 몸을 숨기고 독을 모으는 뱀을 들이는 일이 될것입니다.” “설마 힘없는 노비들이 우리 부족을 위협하기라도 할거란 말이냐? 무엇때문에?” “......” “하하하...! 네가 걱정하는 것이 그거라면, 지나친 기우로구나. 우리를 위협할만큼 많은 노비를 청한것도 아니고 가축처럼 부려먹을 생각도 아니니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지 않으냐. 거기다 노부를 모시는 노비가 있다면 노부도 함께와도 된다고 이미 일렀다.” 결이 족장이 되면 무록은 그의 곁에서 생사를 함께 해야 한다. 의지가 강하고 범상한 주군을 모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무록은 결 때문에 목숨을 거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결을 위해 목숨을 걸지 못할것이 두려운 것이었다. 이미 무록의 길은 정해져 있었다. 결은 무록의 방에서 나와 호수근처를 서성거렸다. 무록은 아직 정치와 세계를 모른다. 어느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문득 어린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호수가득 울렸다. 뜰에 모인 시녀들이 결을 보고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부족내 여자들에게 결은 안타까운 동경의 대상이었다. 남자라도 홀릴만한 출중한 외모에 단번에 상대를 제압하는 눈빛. 다루지 못하는 무기와 말이 없었다. 아직 후계자일뿐임에도 그의 명성은 다른 부족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소녀들의 수다소리에 생각에서 깬 결은 발걸음을 돌렸다. 마침 바람이 불며 도화가 날렸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밟고 걷던 결은 문득 육년전 관노부의 한 마을에서 만난 소녀가 떠올랐다. 순전히 도화 때문에 떠오른 것이었다. 소녀에게서 나던 향기가 꼭 도화향 같았던 것이다. 갑자기 떠오른 것은 아니다. 소녀를 만나고 난 후 해마다 도화가 필때면 소녀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상하게 나이가 들수록 소녀생각을 할때면 결의 가슴이 북처럼 울렸다. 결은 급히 시녀 하나를 손짓해 불렀다. “너는 가서 관노부에서 오신 사신에게 잠시 내 처소로 와달라 청하여라.” “네-” 결은 시녀가 자리를 뜬 후에도 한참 꽃잎을 바라보고 있었다.
#3 설화(雪化)
설화(雪化)
3. 후계자와 점괘
열 일곱이 된 결의 모습은 이미 족장으로서의 위엄과 범상함이 넘쳤다.
결은 아버지를 도와 벌써 여러 가지 부족일에 관여하며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다지고 있었다.
“이것이 올해 우리가 받을 공물내역이오.”
“알겠습니다. 헌데... 요즘 부여족의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말이 들립니다.”
“부여의 병력이 다소 많아진 것은 사실이오. 경계근처에서 작은 전투도 몇 차례 있었소.”
“어째서 우리에게는 알리지 않으셨습니까?”
“아직은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닌 듯 싶소. 조금 더 지켜봅시다.”
결의 부족에 공물을 바치고 병력을 지원받는 관노부의 노 관리는 생각했다.
계루부의 병력에 의존해 태평하게 지내는 것이 과연 부족을 위한 일인가에 대해서.
아무리 계루부의 군사라 할지라도 관노부의 영토내에 주둔하고 있으면 관노부의 명령을 따르는것이 당연한데, 계루부의 군사들은 직속상관으로 부임해있는 장수의 명령만을 듣고, 그 장수는 계루부 본토에 있는 족장의 명령만을 따랐다.
작은 전투라해도 관노부에 알리지 않고 의견을 통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또다른 속셈이 있는것인지도 모른다.
지금 계루부의 칼날이 부여를 향하고 있다고 하나, 훗날 그 끝이 관노부로 향하지 말란 법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태평함을 즐기다 칼과 갑옷이 녹슬고, 전투에 무능해질대로 무능해진다면...
하지만 노 관리의 생각은 여기서 멈췄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관노부의 미비한 해상력으로 잘 훈련된 부여의 기마족에 맞서봐야 돌아오는 것은 불탄 전답과 가구들일것이 뻔했다.
“그런데...”
공물이 적힌 내역을 살피던 노 관리가 문득 입을 열고 말꼬리를 흐렸다.
“여기 적힌 것이 노비 아닙니까?”
“그렇소.”
“한번도 노비를 청하신적은 없지 않습니까?”
“지금 받는 공물들로는 변방에 위치한 병사들을 먹이는것만도 부족하오. 우리로서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소. 그렇다고 크게 곡물을 늘려 받을 수는 없지 않소? 해서, 일할 사람들을 청하기로 결정한 것이오.”
따지고보면 결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 관리는 난처했다.
어찌 같은 부족민을 타 부족에 노비로 보낼 수 있단 말인가...
“허나, 결님...”
“이야기가 끝났으니 전 이만 일어서야겠습니다.”
노 관리의 난처한 표정을 모른척하고 방을 나온 결은 곧장 무당 무록을 찾았다.
꽃보다 향기로운 소리를 따라가니 과연 무록이 앉아 공후를 타고 있다.
결은 무록옆에 발소리를 내지 않고 다가가 앉았다.
세상을 초탈한 듯한 무록의 깊은 눈동자를 보고 있자면 더없이 마음이 평온해지곤 한다.
허나... 무록의 눈동자는 보통사람과 달리 움직임이 없다.
무록은 태어나면서부터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 사실을 한 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내노라 하는 미녀들도 울고갈 만큼 아름다운 외모의 무록이었으나, 정작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공후의 열세가닥 줄위로 미끄러지며 들어본적없는 음악을 연주하던 무록의 희고 긴 손가락이 이윽고 연주를 멈췄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군요.”
외모만큼 차분하고 청아한 목소리다.
“생각보다 길었지.”
“......노비를 청하셨지요?”
“그랬다.”
“...결국 제 말을 듣지 않으셨군요.”
“점괘를 보고 한 말이 아니지 않으냐.”
“......점괘가 그리 나왔다해도 듣지 않으셨을 겁니다.”
서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처지였다.
무록이 결보다 네 살이나 아래였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을 털어놓을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아니, 굳이 입밖에 내지않아도 속내를 훤히 알 수 있는 사이였던 것이다.
무록은 관노부의 사람을 부족내로 들이지 말라고 수년전부터 이야기 해왔다.
하지만 결이 결정하면 그대로 행동할 것임을 무록도, 결도 잘 알고 있었다.
단지 무록의 충고 때문에 잠시 미루는 것일뿐.
그리고... 드디어 결은 열일곱이 되었다.
열일곱이란 나이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족장의 후계자로서 실권을 갖게 되는 시점인 것이다.
빠르면 열여덟에서 늦어도 스물에는 족장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제 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부족민에게 법이 되는 것이다.
결이 처음으로 외교에 나서서 한 일이 바로 관노부에 노비를 청한 일이다.
무록이 염려하던 일이다.
무록은 인간의 힘으로는 우주의 이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하고 있었다.
아직 줄위에 놓여져 있는 무록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결은 알고 있었다.
대체 무록은 무엇을 저렇게 걱정하는 것일까.
우리 부족민만으로 두 부족의 경계를 지켜야 하는 것이 얼마나 무리인지 잘 알고 있을텐데...
공물의 양을 늘리지 않고 대신 노비를 청한 것은 오히려 덕이 아닌가?
“결이님...”
“말하거라.”
“뱀을 아시지요? 보신적이 물론 있으시지요?”
“그렇지. 헌데 그건 왜...”
“뱀은, 자신을 공격하지 않으면 먼저 사람을 해치지 않습니다.”
“그렇지.”
“허나, 뱀을 공격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안전한것도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게냐?”
“관노부에서 사람을 들여오면, 그것은 곧 수풀사이에 몸을 숨기고 독을 모으는 뱀을 들이는 일이 될것입니다.”
“설마 힘없는 노비들이 우리 부족을 위협하기라도 할거란 말이냐? 무엇때문에?”
“......”
“하하하...! 네가 걱정하는 것이 그거라면, 지나친 기우로구나. 우리를 위협할만큼 많은 노비를 청한것도 아니고 가축처럼 부려먹을 생각도 아니니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지 않으냐. 거기다 노부를 모시는 노비가 있다면 노부도 함께와도 된다고 이미 일렀다.”
결이 족장이 되면 무록은 그의 곁에서 생사를 함께 해야 한다.
의지가 강하고 범상한 주군을 모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무록은 결 때문에 목숨을 거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결을 위해 목숨을 걸지 못할것이 두려운 것이었다.
이미 무록의 길은 정해져 있었다.
결은 무록의 방에서 나와 호수근처를 서성거렸다.
무록은 아직 정치와 세계를 모른다.
어느정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문득 어린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호수가득 울렸다.
뜰에 모인 시녀들이 결을 보고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부족내 여자들에게 결은 안타까운 동경의 대상이었다.
남자라도 홀릴만한 출중한 외모에 단번에 상대를 제압하는 눈빛.
다루지 못하는 무기와 말이 없었다.
아직 후계자일뿐임에도 그의 명성은 다른 부족까지 널리 알려져 있었다.
소녀들의 수다소리에 생각에서 깬 결은 발걸음을 돌렸다.
마침 바람이 불며 도화가 날렸다.
바닥에 떨어진 꽃잎을 밟고 걷던 결은 문득 육년전 관노부의 한 마을에서 만난 소녀가 떠올랐다.
순전히 도화 때문에 떠오른 것이었다.
소녀에게서 나던 향기가 꼭 도화향 같았던 것이다.
갑자기 떠오른 것은 아니다.
소녀를 만나고 난 후 해마다 도화가 필때면 소녀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상하게 나이가 들수록 소녀생각을 할때면 결의 가슴이 북처럼 울렸다.
결은 급히 시녀 하나를 손짓해 불렀다.
“너는 가서 관노부에서 오신 사신에게 잠시 내 처소로 와달라 청하여라.”
“네-”
결은 시녀가 자리를 뜬 후에도 한참 꽃잎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