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막리지 을지문덕 원수 평전』 ⑶

대모달2019.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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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재(丹齋)가 평가한 을지문덕(乙支文德)

고구려(高句麗)가 중원통일제국인 수(隨)와의 전쟁에 승리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612년 살수대첩(薩水大捷)의 주역인 을지문덕(乙支文德)에 대해 역사인물평전(歷史人物評傳)을 쓴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을지문덕의 출생지·성장 과정·부친이나 조부의 이름 등을 기록한 문헌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김부식(金富軾)의『삼국사기(三國史記)』「열전(列傳)」에도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전개 과정이 전부이며, 그것도 중국 사서(史書)의 기록을 재편집한 것에 불과하다. 김부식은 신라중심사관(新羅中心史觀)으로『삼국사기』를 저술했기 때문에 고구려·백제 인물의「열전」은 너무 간략하게 서술하고 소흘히 다루었다.

을지문덕이 천수(天壽)를 누리고 죽었는지, 아니면 한창 일할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한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역사적 수명은 단 7개월에 불과하다. 을지문덕의 개인 사료는 사실상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그래서 을지문덕의 일대기를 책 한권으로 써서 펴낸다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이다. 글 쓰는 사람의 상상력을 더해 소설의 형식을 빌려 쓰지 않으면 을지문덕의 전기(傳記)는 도저히 나오지 않는다. 분명히 우리 민족의 역사에 실재했던 영웅인데도 마치 전설 속의 인물인 것처럼 우리에게서 멀어져만 가는 을지문덕… 그래도 그 어려움을 딛고 불가능에 가까운 그의 전기를 지어 세상에 발표했던 사람이 있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1908년에『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을 탈고했던 것이다. 단재가 당시 만28세의 젊은 나이에 완성한『을지문덕전』을 읽어본 산강재(山康齋) 변영만(卞榮晩) 선생은 “이 책은 우리나라 출판서적계의 효시(嚆矢)다”고 극찬하였다. 산강재가 “무애생(無涯生)이 귀신을 울리고 신령을 불러오는 그의 필력(筆力)으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한 위인(偉人) 을지공(乙支公)의 수염과 눈썹을 그려내고 그 목소리와 안색까지 모두 생생하게 그려내었는바, 저 살수(薩水)에서의 전투는 더욱 생생하여 삼라만상은 모두 그 빛을 잃고 천지간의 모든 구멍에서는 귀신이 우는 소리를 지르는데, 내 그로 인하여 고개를 숙였고, 원기가 생겨났고, 미친 듯이 큰 소리로 부르짖었고, 슬퍼 눈물을 흘렸는바, 나도 몰래 온갖 종류의 감정이 한꺼번에 쏟아져서 뒤범벅이 되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단재가 쓴『을지문덕전』은 전설 속의 인물로 뒤바뀐 을지문덕을 다시 역사 속의 영웅으로 부활시킨 훌륭한 걸작이었다.

그러나 지금부터 약 100년 전에 출간됐던 단재의『을지문덕전』은 강산이 수십번도 더 바뀌는 세월이 흐르면서 어문교육의 변화로 오늘날에 청소년들이 이 책을 도저히 읽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적인 문장 구조로 고구려의 전쟁 영웅 을지문덕을 재해석한 ‘21세기판『을지문덕전』’이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영향력이 우리 나라의 미래에 심각한 파장을 몰고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어느 누구보다 을지문덕을 존경하고 그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를 펼쳤던 단재는 을지문덕을 어떻게 분석하고 있을까? 단재의『을지문덕전』은 “땅의 넓이는 그 십 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인구는 그 백 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고구려가 저 수나라를 대적하여 하였으니, 그 기개는 비록 장하나 그 방도는 심히 위태로웠다. 그 당시에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들려 한다’는 국외자(局外者)들의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을 텐데도, 을지공은 홀로 의연히 그러한 비판을 못 들은 척하고 적국에 대항하였으니, 과연 무엇을 믿고 그러하였던가? 말하자면, 오직 독립정신(獨立精神) 단 한가지였다”면서 을지문덕을 자주의식(自主意識)의 상징적 인물로 표현하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후세 사람들이 만약 그의 머리털 하나만큼만 닮더라도 그 나라의 독립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며, 그의 한두 마디의 말만 잘 거두어 간직하더라도 그 나라의 역사를 채워 넣을 수 있을 것이니, 을지문덕이란 사람은 우리 대동국(大東國) 4천년 역사에서 유일한 위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전 세계 각국에도 그 짝이 드물도다”라고 칭송하면서 당시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국체(國體)를 보존할 수 없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조선왕조 시대의 사대모화사상(事大慕華思想)에 있었음을 지적하였다.

단재에게 있어 을지문덕이란 역사인물은 민족자존(民族自存)과 독립정신(獨立精神)의 표상이었고, 신(神)과 같은 존재였으며,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한 식민지화 정책을 합리화하려고 내세운 한국인들의 타율적(他律的) 종속성(從屬性) 이론을 논파하는데 롤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는『을지문덕전』의 서문(序文)에서 “내가 해외 각국을 여행해보니, 그 나라 영웅이 칼을 휘두른 곳에서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그를 노래하고, 그 영웅이 피를 흘린 곳에서는 수천만의 사람들이 춤을 추는데, 몸이 있는 자는 그 몸을 영웅에게 바치고, 재주가 있는 자는 그 재주를 영웅에게 바치며, 학문이 있는 자는 그 학문을 영웅에게 바쳐서 한 나라 전체가 영웅을 부르면서 같이 나아가기 때문에 영웅이 배출되어, 워싱턴 이후에도 허다(許多)한 워싱턴이 나왔고, 나폴레옹 이후에도 허다한 나폴레옹이 나왔던 것이다”고 논술했다. 한때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회원이었으나 1910년 경술병탄늑약(庚戌倂呑勒約) 이후 조선총독부 소속 판사로 재임했던 이기찬(李基燦)은 “을지문덕은 우리 나라 4천년 역사상 제일가는 위인이니, 그 독립적 기상(氣象)과 건투정신(健鬪精神)은 실로 우리 민족의 대표적 인물이며 모범적 인물이다. 그러므로 을지문덕의 기풍(氣風)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의존심(依存心)이 강하던 자라도 반드시 자립(自立)하게 되며, 의욕을 상실하고 물러서려는 성격의 사람이라도 반드시 떨쳐 일어나 앞으로 나가려고 하게 된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제1차 여수전쟁(麗隋戰爭)이 벌어지던 598년 무렵 수(隨)의 인구는 890만호였으니 1호에 5명 가족을 기준으로 하면 4천 450만명이다. 고구려(高句麗)가 멸망할 때 가구수가 69만호라고 하였으니 대략 345만명이다. 이 수치로 대비하면 고구려의 인구가 수에 비해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 경제 수준은 인구의 대비보다 더 큰 격차가 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누가 보아도 패색(敗色)이 짙은 이 전쟁을 고구려의 승리로 이끌었다. 평범한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내지 못할 일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이 위대한 인물을 단지 중국의 사료만을 베껴서『삼국사기』「열전」에 간략하게 기록해 놓았다.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에 대해서는 세밀한 부분까지 자세히 기록하면서도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의 과정만 서술한 김부식의『삼국사기』편찬 방식은 당연히 단재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연구자들은 을지문덕이 장영실(蔣英實)처럼 귀족이 아니라 낮은 신분의 사람으로서 우연히 국왕의 눈에 띄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아 출장입상(出將入相)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의 내력은 이렇게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도저히 접근할 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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