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데 어린 세손(정조)이 아버지를 꺼내달라며 빌고있는 와중에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은 궁에 정내미가 떨어져 궁을 떠나 시골로 가게 된다. 정조는 정재원을 자주 찾아뵙기도하고 과거시험을 권유하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어느 날 정재원의 아들이 태어나고 궁 생활을했던 자기와는 달리 순탄하고 평온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귀농’이라고 짓는다. 그 귀농은 자라서 22살의 나이로 시험에 합격하고 정약용으로 정조를 만난다.
고개를 숙이고있는 정약용에게 정조는 고개를 들라하고 나이가 몇이냐 물어봤다. 조선시대 당시 기껏 생원시에 합격한 청년에게 용안을 보여주는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궁금해서 얼굴을 쳐다보다 들켜 유배보내지기도한 사회에서 왕이 먼저 용안을 보여준 이유는 바로 정조가 묻길 몇년생이냐? “임오년생입니다.” 임오년생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해이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라 하였다.
뼛속까지 글쟁이 바른사나이였던 정약용과 달리 정조는 잠도 없고 활도 잘쏘고 담배도 폈다. 담배냄새를 싫어하는 정약용에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괴롭혔다.
시간 내에 시를 쓰지 못하면 궁 안에 있는 작은 연못 한가운데 인공섬에 유배보냈다가 다시 데려오기도했다.
술을 못하는 정약용에게 정조는 술을 원샷시켜 꽐라가 되는 정약용을 보고 놀렸다. 정약용이 아들한테 보낸 편지를 보면 "정조께서 소주를 가득 따라 하사하셔서 난 오늘 죽었다... 라고 생각했다" 라고 쓰여 있다.
정조는 밤길에 얼굴이 긁혀 상처가 난 정약용을 보고 놀렸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일부러 아주 못하는 활쏘기를 시키고선 실패하면 또 궁 안에 연못 가운데에 있는 작은 인공섬에 유배보내고 벌을 주고 놀렸다. 정 빠져나오고 싶다면 노를 저어 빠져나오라고 시키고 정약용은 노를 저어 탈출했다. 정조는 정약용이 연못에서 노를 젓고 있는걸 보며 껄껄껄 웃었다곤 한다.
감독관이였던 정약용이 남인을 거대 합격시킨것을 알고 대노한 정조는 정약용을 오해하고 다시는 관직을 주지않겠다고 정약용은 이유도 모른채 유배보내졌다. 얼마후 자기가 오해했단것을 알고 다시 정약용을 데려와 미안해서 궁 안에 있는 도서관을 구경시켜주고 연회에도 데려갔다. 연회에서마저 술을 먹인... 정약용은 필름이 끊겨 친한 형이였던 이익운에게 어떤 모양의 글씨를 썼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보여드릴 길이없다고 서찰을 보냈다
정조와 정약용은 서찰을 자주 주고받았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보낸 서찰에 ‘가가가’ 라는 한자가 군데군데 쓰여져있었다. 오늘 말로 번역하면 ‘ㅋㅋㅋ’
정조는 정약용말고도 다른이들에게 서찰을 보낼때도 ‘가가가’라는 한자를 사용했다.
정약용이 정조의 시권을 낭독하면 정조는 좋다고 무릎치면서 ‘가가가’
정조는 정약용을 정말 대놓고 편애했다. 정조께서 과제를 내리시고 정약용은 친구 이벽과 밤새워 초고를 만들어 정조에게 올리니 “다른애들은 황잡한데 정아무개는 좀 괜찮다”
정약용이 집에 가는길 군졸들이 정약용의 짐을 들어주고 댁까지 모시는걸 보고 다들 부러워했다.
정약용이 정치적으로 밀려 계속 낙방하자 정조는 언제까지 초시만 볼꺼냐고 혼을 냈고 연속 낙방에 정조가 어린 정약용이 정치싸움에 다칠까 일부러 급제를 늦췄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정약용은 장원 급제하여 정조의 곁으로 가고 정약용은 위 글처럼 정조의 셔틀이 된다.
정조와 정약용이 한자내기를 하다 정약용이 모두 암기한 반면 정조는 아주 쉬운 석 삼 한자를 빼먹어서 졌다.
정약용의 일기 중 “나는 규정각에 소속되어 내원에서 활쏘기를 시험 할 때마다 늘 맞추지 못하여 벌을 받았다” 라는 구절이 있다 말타기도 못해서 매번 정조에게 놀림을 받았다.
정조는 종종 정약용에게 선물을 주었다. 책갈피,연꽃부채 정약용이 연꽃부채를 꽤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정조가 밖에서 어린아이들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인것을 보고 정약용에게도 봉숭아 물을 들여보라고했다.
정조가 정약용을 너무 아껴 매일 불러 술을 먹이고 화살을 쏘게해서 아들에게 주상전하께서 나를 너무 아끼시어 죽을뻔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조는 발바닥 비비기를 하면 힘이 난다 했다.
정조는 1752년생 정약용은 1762년생 두 사람의 나이 차는 10살 차다.
정약용은 정씨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매우 단아하고 희고 깨끗하다며 정직하게 자라 옥골선비라고 다들 부둥부둥 귀여움을 받았다
정조의 술버릇이 고약했다고한다 같이 있는 사람들을 보내지 않는 버릇.. 그래서 박지원과 정약용이 항상 불평했던 기록이 있다.
정조는 입이 험해 쓰는 욕들이 매우 수위높은 신박한 욕들이였다.
정약용의 직계 후손인 정해인이다. 정조가 정약용에게 남자답지않게 선이 곱고 예쁘다라고 한걸로 봐서 정해인은 정약용의 고운 선을 따라받은것같다. 정약용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술 못하는 정약용에게 술을 원샷드링킹시키면서 좋아했던 정조는 소주잔이아닌 책상에 있는 붓통같은 크기에 술을 먹게 하였다..
정조와 정약용은 서로 군신관계였지만 친했고 비록 많이 괴롭히고 놀리기도했지만 정조는 정약용을 매우 편애하고 예뻐했고 아껴했다고 기록에 남아있다. 그 이유는 추측이지만 어릴적 자신의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죽는걸 보았을때 자신의 편이였던 정재원의 아들이였기때문이 아닐까
개꿀잼인 정조 정약용 일화 한번씩만 보구가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데 어린 세손(정조)이 아버지를 꺼내달라며 빌고있는 와중에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은 궁에 정내미가 떨어져 궁을 떠나 시골로 가게 된다. 정조는 정재원을 자주 찾아뵙기도하고 과거시험을 권유하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어느 날 정재원의 아들이 태어나고 궁 생활을했던 자기와는 달리 순탄하고 평온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귀농’이라고 짓는다. 그 귀농은 자라서 22살의 나이로 시험에 합격하고 정약용으로 정조를 만난다.
고개를 숙이고있는 정약용에게 정조는 고개를 들라하고 나이가 몇이냐 물어봤다. 조선시대 당시 기껏 생원시에 합격한 청년에게 용안을 보여주는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궁금해서 얼굴을 쳐다보다 들켜 유배보내지기도한 사회에서 왕이 먼저 용안을 보여준 이유는 바로 정조가 묻길 몇년생이냐? “임오년생입니다.” 임오년생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해이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라 하였다.
뼛속까지 글쟁이 바른사나이였던 정약용과 달리 정조는 잠도 없고 활도 잘쏘고 담배도 폈다. 담배냄새를 싫어하는 정약용에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괴롭혔다.
시간 내에 시를 쓰지 못하면 궁 안에 있는 작은 연못 한가운데 인공섬에 유배보냈다가 다시 데려오기도했다.
술을 못하는 정약용에게 정조는 술을 원샷시켜 꽐라가 되는 정약용을 보고 놀렸다. 정약용이 아들한테 보낸 편지를 보면 "정조께서 소주를 가득 따라 하사하셔서 난 오늘 죽었다... 라고 생각했다" 라고 쓰여 있다.
정조는 밤길에 얼굴이 긁혀 상처가 난 정약용을 보고 놀렸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일부러 아주 못하는 활쏘기를 시키고선 실패하면 또 궁 안에 연못 가운데에 있는 작은 인공섬에 유배보내고 벌을 주고 놀렸다. 정 빠져나오고 싶다면 노를 저어 빠져나오라고 시키고 정약용은 노를 저어 탈출했다. 정조는 정약용이 연못에서 노를 젓고 있는걸 보며 껄껄껄 웃었다곤 한다.
감독관이였던 정약용이 남인을 거대 합격시킨것을 알고 대노한 정조는 정약용을 오해하고 다시는 관직을 주지않겠다고 정약용은 이유도 모른채 유배보내졌다. 얼마후 자기가 오해했단것을 알고 다시 정약용을 데려와 미안해서 궁 안에 있는 도서관을 구경시켜주고 연회에도 데려갔다. 연회에서마저 술을 먹인... 정약용은 필름이 끊겨 친한 형이였던 이익운에게 어떤 모양의 글씨를 썼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 보여드릴 길이없다고 서찰을 보냈다
정조와 정약용은 서찰을 자주 주고받았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보낸 서찰에 ‘가가가’ 라는 한자가 군데군데 쓰여져있었다. 오늘 말로 번역하면 ‘ㅋㅋㅋ’
정조는 정약용말고도 다른이들에게 서찰을 보낼때도 ‘가가가’라는 한자를 사용했다.
정약용이 정조의 시권을 낭독하면 정조는 좋다고 무릎치면서 ‘가가가’
정조는 정약용을 정말 대놓고 편애했다. 정조께서 과제를 내리시고 정약용은 친구 이벽과 밤새워 초고를 만들어 정조에게 올리니 “다른애들은 황잡한데 정아무개는 좀 괜찮다”
정약용이 집에 가는길 군졸들이 정약용의 짐을 들어주고 댁까지 모시는걸 보고 다들 부러워했다.
정약용이 정치적으로 밀려 계속 낙방하자 정조는 언제까지 초시만 볼꺼냐고 혼을 냈고 연속 낙방에 정조가 어린 정약용이 정치싸움에 다칠까 일부러 급제를 늦췄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정약용은 장원 급제하여 정조의 곁으로 가고 정약용은 위 글처럼 정조의 셔틀이 된다.
정조와 정약용이 한자내기를 하다 정약용이 모두 암기한 반면 정조는 아주 쉬운 석 삼 한자를 빼먹어서 졌다.
정약용의 일기 중 “나는 규정각에 소속되어 내원에서 활쏘기를 시험 할 때마다 늘 맞추지 못하여 벌을 받았다” 라는 구절이 있다 말타기도 못해서 매번 정조에게 놀림을 받았다.
정조는 종종 정약용에게 선물을 주었다. 책갈피,연꽃부채 정약용이 연꽃부채를 꽤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정조가 밖에서 어린아이들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인것을 보고 정약용에게도 봉숭아 물을 들여보라고했다.
정조가 정약용을 너무 아껴 매일 불러 술을 먹이고 화살을 쏘게해서 아들에게 주상전하께서 나를 너무 아끼시어 죽을뻔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정조는 발바닥 비비기를 하면 힘이 난다 했다.
정조는 1752년생 정약용은 1762년생 두 사람의 나이 차는 10살 차다.
정약용은 정씨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매우 단아하고 희고 깨끗하다며 정직하게 자라 옥골선비라고 다들 부둥부둥 귀여움을 받았다
정조의 술버릇이 고약했다고한다 같이 있는 사람들을 보내지 않는 버릇.. 그래서 박지원과 정약용이 항상 불평했던 기록이 있다.
정조는 입이 험해 쓰는 욕들이 매우 수위높은 신박한 욕들이였다.
정약용의 직계 후손인 정해인이다. 정조가 정약용에게 남자답지않게 선이 곱고 예쁘다라고 한걸로 봐서 정해인은 정약용의 고운 선을 따라받은것같다. 정약용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술 못하는 정약용에게 술을 원샷드링킹시키면서 좋아했던 정조는 소주잔이아닌 책상에 있는 붓통같은 크기에 술을 먹게 하였다..
정조와 정약용은 서로 군신관계였지만 친했고 비록 많이 괴롭히고 놀리기도했지만 정조는 정약용을 매우 편애하고 예뻐했고 아껴했다고 기록에 남아있다. 그 이유는 추측이지만 어릴적 자신의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죽는걸 보았을때 자신의 편이였던 정재원의 아들이였기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