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심한 걸가요? 불쌍한 걸까요?

코콬20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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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엄마는 내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시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 정확히는 초3 때부터였다. 그 이야기는 나 임신했을때 아빠가 발로 찼다든지, 나 태어나고 나서 친할머니가 돈만 받고 나 버리고 놀러갔다든지, 사촌 오빠들이 나를 바닥에 떨어트렸다든지,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가 엄마 성인이라 비자 안 나와서 엄마만 빼고 이모랑 삼촌이랑 외국으로 이민 갔다든지, 증조 할머니랑 사느라 할머니 얼굴 잘 못 봤다든지, 증조 할머니 옷 입고 학교 다녀서 창피했다든지, 그래서 나는 엄마에 비해 얼마나 행운아인지 등에 대한 내용이었다. 얼마 후 엄마가 아빠한테 맞아 온몸에 든 멍자국을 사진으로 남겨야한다며 찍으라고 카메라를 건네줬을 때 엄마의 이야기가 사실이라 믿게 됐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아빠 또는 친가를 닮은게 죄악이었다.

너는 아빠 닮아서 밖에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 입이 싸다, 입도 짧으면서 식탐 많다. 자기보다 잘난 사람들이랑 못 어울리고 누가 치켜세워주는 걸 좋아한다 등등의 말이 최고 욕이었다. 슬픈 사실은 나에 대한 저런 특징들이 다 사실이었기 때문에 저러지 않으려고 내 자신한테 저게 나쁜 거라 열심히 세뇌시켰다. 나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나만큼 엄마 힘들게 하지 않겠다는게 믿음을 주는게 그때는 그렇게 중요했고, 나는 필사적이었다.


처음이 어렵지 두번째, 세번째는 쉬웠다.

그때 이후로 엄마는 시어머니와 시누이 5명들한테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폭언을 들은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셨다. 때로는 엄마와 아빠가 싸울 때면 같은 이야기를 듣고 또 들을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그 이야기들을 잊지 않게 됐고, 또 그 이외에 내 인생에서 일어난 사소하게 슬픈 이야기들은 금방 잊어버리는 습성을 갖게 됐다.


명절 때는 유독 힘들었다.

외가는 미국에 있어서 명절 기간 꽉꽉 채워서 친가는 광란의 파티를 열었다. 쉽게 말해, 하루종일 먹고, 화투 치고, 자고, 명절 음식 지겨우면 아빠한테 “오빠 비싼 음식 사줘”라 하면 밖에서 포장해오고 그런게 전부였다. 언제 한번 명절 끝나고 엄마가 너는 어떻게 아빠 닮아서 한번을 안 도와주냐, 노는 게 그렇게 좋냐, 고모들이랑 놀때 엄마는 뒤에서 혼자 요리하고 청소한다, 그리고 고모들은 너가 아빠 성씨 가진 새끼라 좋아해주는 거다, 너 처름 태어났을 때 아들 아니라고 엄청 무시했다는 말 듣고 나선 고모들 피하기 시작했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할머니와 고모들의 연락이 잦아졌지만, 만나면 용돈 주실 걸 알지만, 절대 만나지 않는다. 나는 엄마 편이니까. 나는 엄마가 받은 고통들을 절대 잊지 않을 거니까.


다행히 몇 년 후 해외로 도피했다.

배우는 걸 좋아하는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1년은 열심히 하니까 성적은 곧바로 상위권에 들었다. 작은 학교에서는 전교 1등 한 번하고, 더 큰 학교로 옮겼다. 거기서는 학기별로 각 과목별로 선생들이 학업우수상을 딱 한 명한테 수여하는 구조였기 때문에, 한국 학부모의 기대와 달리 한국 학생들이 상을 휩쓸 수 없었다. 보통 각 과목별로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들이 골고루 선정됐다. 나는 국어(영어), 수학, 과학, 사회에서 A 또는 A+은 받았지만, 우수상은 타지 못했다. 그래도 선택 교양 미술 수업 중에서도 공예 수업에서 학업우수상을 지명받았다. 1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때를 가장 뿌듯했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더 큰 학교로 옮기기 전에 본 입학 시험을 바로 도착한 첫 해에는 보고 떨어졌었는데, 그때 엄마랑 자주 싸웠고, 그때마다 공부도 못하고, 뚱뚱하고, 못생겼으면서 인성도 터졌다는 말을 들었던 게 가장 아팠던 순간으로 기억한다.


가장 괴로웠던 시기는 한국에 돌아왔을 때였다.

한국식 공부가 잘 맞지 않았던 나는 고등학교 때는 바닥을 기었다. 그 충격으로 나는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포기했다가, 다시 일어났다가를 반복했다. 그래도 아예 손에서 놓지 않았고, 성적은 조금씩 올라가는 듯했지만, 공부에 소질은 없었는지 아님 나의 짧았던 노력으로 12년 평생 공부한 애들만큼의 결과를 기대하는게 가소로웟는지 수능은 처참하게 망쳤다. 적어도 ooo 대에는 갈 거라 기대했던 엄마는 실망하셨고, 나도 공부를 갑자기 못하는 열등생으로 전락한 내 자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엄마랑 싸울 때마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 해서 손목 긋는게 덜 아팠을 정도였다. 어느날, 우연히 엄마가 외삼촌이랑 통화하다가 실력은 없으면서 눈만 높다고 나를 뒷담하는 걸 들게 됐다. 그때 들은 한자성어를 잊을 수가 없다. 안고수비.


다행히 서울로 올라오면서 처음 정신적 자유를 맛봤다.

엄마와 떨어져 사니까 마치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이 사이가 좋아졌다. 근데 이상하게도 나는 입시실패한 후 재수는 못하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학교에 들어가면서 나에 대한 실망감이 뒤늦게 밀려들어왔다. 4년 내내 학교에 마음 붙이기가 힘들었다. 괜히 모든게 싫고, 한심했다. 공부도 대충해서, 간신히 4점대 찍고 엄마가 원하는 교직 이수 합격햇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공부에 흥미가 없어서, 벼락치기를 하다 3점대 후반으로 떨어졌다. 이제 취준해야하는 4학년 막학기가 됐다. 더이상 뭘 해야될지도 모르겠지만, 문제는 뭘 엄청 성공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없다. 서류도 중요하지만, 면접에서 밝고 활발한 인상을 심어줘야하는데, 나는 아직 어둡고 침침하다. 그나마 괜찮았던 시기에 만났던 동아리 선배가 “너는 밝으려고 하는게 보여. 속은 슬픈데.”라는 말을 들었던 적, 교생 실습 가서 수석교사한테 “능력도 있고, 성실한 것도 잘 알겠는데, 다가가기 어려운 성격은 나중에 사회생활할 때 꼭 고쳐야할 것 같다.”라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어서 그런지 막막하다. 내가 가린다고 해도, 남들은 뻔히 다 보인다.


나는 취준 실패하고 도태되는게 두렵지 않다.

나는 원래 주변에 사람도 없었고, 그가 사람없이도 살아왔기 때문이다. 최근에 같은 동아리에서 2-3년 가족보다 더 자주 보고, 챙겨줬던 후배들을 나를 무시하는 사건들을 겪고 나서는 이제는 정말 학교 사람들 중에서 가까운 사람 하나 없다. 오히려 이제 잘 보여야할 후배들이 없어서 맘 편하다.


내가 처음으로 싫어하게 된 사람은 유부남 꼬신 아줌마였다.

외국에서 살던 막내 이모가 왔다. 처음으로 본 사촌 동생들을 열심히 놀아줬다. 다음에 보면 성인이 될지도 모르는 사촌 동생들이었어서 일분 일초가 소중했다. 어렸을 때 이모가 나를 참 이뻐했던 때를 기억하고 그 은혜 갚으려는 마음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다 아빠한테 혼난 날이었다. 예전에 아빠한테 짜증 한번 냈다가 아빠가 화내서 나를 방까지 쫓아와서 욕설을 퍼부으면 닫힌 방문을 연신 발로 찼던 기억이 생각났다. 엄마는 아빠는 내게 관심 없으니 신경 거스르지 않게 조심하라 경고하고는, 철밥통들의 직장에서 애 둘 딸린 아줌마가 승진하려고 아빠와 바람 피는 것을 알려줬다. 하긴 혼자 멀리 떨어진 곳에서 할 짓이 없으면 그나마 한시간 거리인 홍대에서 데이트밖에 할 게 더 없을 수도 있다. 그래도 10년 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길 바랬는데, 어떻게 이번에는 저번처럼 아가씨가 아닌 아줌마랑 그런 걸 보면, 아빠가 정말 궁했거나 여자가 여우같거나. 사진보니 사각턱이지만, 선해보이는 인상이다. 엄마는 눈꼬리 끝이 올라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번이 3번째라고 정정해줬다. 의문이 들었다. 평생 직장이 바꾸지 않는 폐쇄적 철밥통 사회에서, 애 둘 딸린 상사랑 바람 펴도 소문이 안 날 거라 생각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만 만나달라는 우리 엄마의 연락에 시치미 떼고 불쾌하다고 말한 아줌마가 천벌 받길 기도하고 있다. 초등학교 다닐 법한 아줌마 아들 두명이, 나와 10살 어린 내 동생처럼 부모가 바람피는 걸 알고 피눈물 흘리고 실망하고 원망하길 간절히 바란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처벌받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하나님의 세상에서는 남한테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배로 고통받을거라 믿는다.


어느 날, 엄마는 내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시기 시작했다.

20살 때부터 혼자 살았던 여자 너무 외롭고 무서웠다. 연애 한 번 안 하고 대학 다니고, 직장 다니다가 친구 소개로 7살 많은 남자를 만났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혼기 찬 노총각은 끊임 없이 엄마한테 대시했다. 관련 있는 배경설명은 아닐 수 있지만, 당시 여자는 큰 주택에 혼자 살았고, 남자는 가족 7명이 단칸 방에 살았기 때문에, 여자는 가족이 없어 외로웠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가 필요했다. 나는 그렇게 추측한다. 처음 둘이서 술을 마신 날, 남자는 여자를 덮쳤다. 술에 잔득 취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몸부림을 쳐도 소용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해야만 하는 줄 알았단다. 여자의 부모는 결혼을 반대했다. 남자가 좋은 사람, 사랑에 빠진 사람 같아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는 결혼을 해야만 하는 몸이라 생각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뭘 해야하는 지 깨달았다.


시간이 흘러, 이민 갈 수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10년 전에 신청한 가족초청 이민 비자가 이제야 통과돼어, 성인이 된 나는 제외하고 동생과 엄마는 갈 수 있게 됐다. 엄마는 내게 외국에서 공부 잘했고, 또 공부 하는 걸 좋아하니까 대학원 준비하는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하지만 해외유학은 철없던 시절의 꿈이라는 생각이 들어 포기한 지 한지 한참이었다. 돈도 많이 드는데, 재수도 못 해서 자존심, 자존감 버릴 수 밖에 없었던 형편에 유학은 터무니도 없다 생각했다. 여지껏 학회도, 학술 활동도, 친한 교수님도 전혀 준비가 안 돼있는 상황이었고, 대학원 간 선배들은 가벼운 생각으로 오지 말라도 그건 취업유예라고 일침 해줬기 때문에, 엄마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저 한국을 떠나고 싶은 엄마와 동생이 외국에 가서 더 행복해지면 되는 그만이다.


최근에 엄마가 아파서 담낭제거술을 받았다. 이제 엄마가 좋아하던 튀김, 생라면, 돈까스, 초콜릿 등을 자제해야 한다. 신기하게도 엄마는 3일만에 소파에서 일어나 운전을 시작했다. 요즘 따라 외국에 있는 외할머리랑 이모가 자주 연락한다. 아픈 엄마 잘 모시라고 잘 부탁하기 위해서다. 원래였다면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말들이 갑자기 잔인하게 느껴졌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14년 전에 갔을 때도, 1년 전에 잠깐 한국 방문하셨을 때도, 내게는 항상 엄마한테 잘하라고 당부하셨었다. 그때마다 외할머니는 미안하다면서 당신 탓을 하셨기 때문에 그게 슬펐던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잘할 거라고 대답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원망스럽다. 그동안 외가가 전부 미국에 있어서, 친가가 모두 못됐기 때문에, 엄마가 마음이 많이 아팠기 때문에, 나도 가족이 없는 것처럼 혼자 컸고, 외로웠고, 괴로웠다. 그런데도 엄마는 엄마 편이 있다. 나만 내 편이 없다. 엄마와 동생은 외가와 아침마다 화상통화를 한다. 방에 있던 나는 통화가 끝나기 전까지 나가지 않는다. 나는 가족이 아니니까. 이제 곧 모든게 원래 자리대로 돌아갈 것만 같다. 이제 나만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아프지 않게 증발해버리면, 엄마의 세상이 전보다 나아질 것 같다.


물론 나의 세상도 나아질 것 같다. 내가 본래 태어난 목적이었던 엄마 보필하기를 잘 달성했고, 그리고 더이상 착하다는 이유로 배려를 강요받거나 8살 어린 동생한테 “너무 착해서 다른 사람들한테 상처 받을 것 같아서 대들었다.”는 말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동생이 버릇 없는 건 하루이틀 아니지만, 엄마가 동생 편만 드는게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단지 엄마한테만, 동생한테만 내 편한테만 착한 거였다. 나도 마냥 해프게 착하지는 않은데. 모든 이야기를 듣고, 엄마 아빠 싸우는 것 다 보고 큰 나는 왜 착하고, 아무것도 모르고 큰 저 아이는 왜 나한테 함부로 말할 정도로 나쁠 수 있는지 억울하다.


앞으로 영원히 혼자 살면 될 것 같다. 연애하는 족족 다 조각난다. 내가 너무 아픈 사람이라, 내 아픔밖에 보지 못한다. 그리고 나조차도 내가 한심한데, 다른 그 누구와 가까워진다 할 지언정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헤어지는 것 밖에 못한다. 나는 사랑을 갈구하지도, 매달리지도 못하고, 나 때문에 힘든 사람이 더 행복할 수 있게 이별을 고한다. 어린 애처럼 옛날 일로 갑자기 밤새 울고, 세상 제일 불쌍한 사람인 것처럼 피해자 코스프레하는 것도 지겨울 만도 한데 나는 양심도 없이 내가 한심하기보다 불쌍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