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들의 변심에 관대했던 예카테리나여제

ㅇㅇ2020.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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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들의 변심에 관대했던 예카테리나 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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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tartour.pe.kr/Information/knowledge/knowledge_20-Big%20Penis.htm

 

 

중요부분은 여기 앞부분에 다시 언급함/////////

 

남성적 매력으로 예카테리나2세의 총애를 받은 포템킨은 드물게 12년간이나 여제와 동거하였으며 둘의 관계가 시들해지자 스스로 뚜쟁이를 자처하여 여제의 애인들을 직접 고르는 역할을 맡는다. 4차에 걸친 애인 선발 시스템도 그가 만든 것이다.

 

 

 또한 그는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아 이후 우크라이나와 크리미아 등 남부 러시아 전역을 다스리는 총독의 자리까지 승진한다.

 

 

 

 

 

 예카테리나는 죽기 전까지 약 20명의 정부를 두었으며, 애인을 갈아치운 뒤에도 옛 정부들의 처우를 소홀히 하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는 애인인 상태에서 정부가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고백하면, 관대하게 재물을 내려 떠나가게 했다.

 

 

 

 

 

 헨리 8세나 루이 15세 같은 유럽 왕들이 정부에게 싫증이 나면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워 목을 자르거나 수도원에 보낸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사생아들도 모두 똑같이 신분을 보장해주고 재물을 내린 덕분에 갈등이 없었다고 한다.

 

 

 

 

 사후에 예카테리나 2세의 업적은 인정하지 않고, 남성 편력만 부풀려 '색을 밝힌 악녀'라고 악의적 평가를 내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남성 군주들의 행태와 비교하면 여제의 사생활은 몹시 당당하고 떳떳하게 느껴진다.

 

 

 여러모로 보아, 그녀가 보기 드문 '여걸'이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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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시아(프로이센)의 작은 공국의 공주였던 그녀는 14세 때 러시아 황실에 들어왔다.

 

 남편인 표트르 3세(Peter III)는 장난감 병정 놀이에만 열을 올리는 정치적 저능아였다.

 

정치에 죽을 쑬 뿐만 아니라 자신을 몰아내고 정부를 황후 자리에 앉히려 하자, 왕실 경호대를 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남편인 표트르 3세를 퇴위시키고 황위에 오른 예카테리나 황제의 정치적으로 명석하고 영리함을 러시아 사회도 반겼다.

 

 그녀는 계몽사상가 볼테르에 경도되어 계몽군주임을 자처하고 학예와 교육에 큰 관심을 쏟으며 사회 각 층의 대표를 소집해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반면, 농노제를 유지하고 여러 정부(情夫)를 거느리며 이들에게 국정의 요직이나 봉토를 하사하기도 하고 사치와 향락을 즐긴 것으로도 유명했다.

 

 사실 포템킨 빌리지의 어원인 포템킨 공도 그녀의 정부 중 한 사람으로서 여러 고위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포템킨이 거친 직책 중 최고위직은 예카테리나 황제가 새로 합병한 지역인 '뉴러시아(우크라이나)'의 지사직이었다. 뉴러시아는 당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크림반도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포템킨은 이 지역을 풍요롭게 탈바꿈시켜 황제의 사코자 했다.

 

 

 

 포템킨 촌락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계몽군주인 예카테리나 2세(캐서린 2세)는 새로이 러시아에 편입된 우크라이나에서 자신의 통치가 성공했음을 확인해 보려고 했다. 높아진 러시아의 국격을 만천하에 보여주고 싶어 했다. 1787년 여제는 화려하게 치장한 신복들과 외국대사들을 대동하고 화려한 갤리선을 타고 드네프르 강을 따라 내려갔다.

 

 우크라이나 평원을 바라보며 여행을 즐기던 외국대사들은 깜짝 놀랐다.

 

 당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인데 강 주변에는 꽃장식과 개선아치를 갖춘 아름다운 촌락들이 있었다. 이 아름다운 촌락에는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 활발한 상거래, 번성하는 모습이 있었다. 여제와 외국대사들에게 새로 편입된 우크라이나는 태평성대를 누리는 유토피아와 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그러나 사실은 여제의 애인이었던 포템킨 공이 급조해서 만든 무대장치였다.

 

 이른바 ‘포템킨 촌락’이라는 연출된 세계를 통과하는 여행이었다. 환호하는 백성들은 사실 러시아 농노들이었으며, 촌락은 무대장치에 불과했다. 이들의 역할은 여제의 여행길을 따라 이동하면서 환호하는 배우였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명백한 역사적 증거는 없다.

 

 포템킨과 황제의 은밀하고도 가까운 관계나 서신 또는 메모와 같은 사료를 종합할 때, 당시 포템킨의 적대 세력이었던 러시아 주재 작센(Saxony) 공사 헬비크가 포템킨을 폄하하기 위해 퍼뜨린 소문이라는 설이 있기도 하다.

 

 (조엘 레비, 서지원 역, <비밀과 음모의 세계사> (휴먼앤북스, 2010), p.188 참고)

 

 

 

 정치용어로 "포템킨 촌락(빌리지" 혹은 "포템킨주의"란 말이 있다.

 

 그말은 국민들과 외국을 기만하기 위한 정치적인 겉치레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한다.

 

 남성적 매력으로 예카테리나2세의 총애를 받은 포템킨은 드물게 12년간이나 여제와 동거하였으며 둘의 관계가 시들해지자 스스로 뚜쟁이를 자처하여 여제의 애인들을 직접 고르는 역할을 맡는다. 4차에 걸친 애인 선발 시스템도 그가 만든 것이다.

 

 또한 그는 정치적 능력을 인정받아 이후 우크라이나와 크리미아 등 남부 러시아 전역을 다스리는 총독의 자리까지 승진한다.

 

 

 

 예카테리나는 죽기 전까지 약 20명의 정부를 두었으며, 애인을 갈아치운 뒤에도 옛 정부들의 처우를 소홀히 하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는 애인인 상태에서 정부가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고백하면, 관대하게 재물을 내려 떠나가게 했다.

 

 

 

 헨리 8세나 루이 15세 같은 유럽 왕들이 정부에게 싫증이 나면 터무니없는 누명을 씌워 목을 자르거나 수도원에 보낸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사생아들도 모두 똑같이 신분을 보장해주고 재물을 내린 덕분에 갈등이 없었다고 한다.

 

 

 

 사후에 예카테리나 2세의 업적은 인정하지 않고, 남성 편력만 부풀려 '색을 밝힌 악녀'라고 악의적 평가를 내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남성 군주들의 행태와 비교하면 여제의 사생활은 몹시 당당하고 떳떳하게 느껴진다.

 

 여러모로 보아, 그녀가 보기 드문 '여걸'이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러시아 혁명의 동기의 하나가 되었던 전함(戰艦)을 포템킨, 그 이름으로 명명한 것을 보아도 비록 예카떼리나와의 염문속에 살았던 포템킨이지마는 러시아제국의 영웅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