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머니들의 증언.. +++

THIS-2004.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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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필기 할머니의 증언

 

맏딸로 태어나
나는 1925년에 경남 진양군 지수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구멍가게를 했다. 가게에서는 고구마, 생선, 감, 과자 등을 팔았다. 가게일은 어머니가 주로 하고 아버지는 장에서 물건을 사들이거나 팔러 다니곤 했다. 그리고 우리 소유의 논밭도 있었다.


형제자매는 2남 9녀였다. 딸 아홉 중 셋은 어렸을 때 죽었다. 어머니가 아들을 못 낳는다고 작은 어머니 몸에서 아들을 낳아 여섯 살 때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그 후 어머니가 마흔한 살에 아들을 낳았다.
어렸을 때 내 이름은 미요코(美代子)였다. 나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내가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쌀 한 말을 팔아 보통학교에 넣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시나는 공부하면 여우가 된다”고 입학한 지 5일 만에 학교를 찾아와 교실에서 나를 끌어내고 책을 모두 태워 버렸다. 그래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 일로 나는 아버지에게 맞기도 많이 맞았고 결국은 집에서 쫓겨나 큰집에 가 있었다. 다시는 공부를 안 하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부모 안 보는 데서 공부해 똑똑한 사람이 되어 세상을 바로 살아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촌사람 만나 결혼하면 내 장래가 매양 그 꼴 일거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크게 가지려 하였다. 나는 정말 공부를 하고 싶었다. 내가 아들이었다면 공부를 원껏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내 위로 언니들이 어려서 죽었으므로 내가 맏이 노릇을 했다. 나는 아홉 살 때부터 집에서 살림하고 밭일도 하고 목화도 따고 물레질과 길쌈도 했다. 그리고 구멍가게 일도 거들었다. 구멍가게에서 삶은 고구마도 팔았는데 그 고구마 삶는 것도 내 몫이었다. 농사일은 사람을 사서 하였으므로 끼니때가 되면 밥을 해서 내다주었다. 집안일은 매우 힘들었다. 큰딸 감으로 태어난 것이 죄라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했다.

- 하도 공부가 하고 싶어서

진양군의 우리 마을에는 일본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50대 정도의 아저씨가 살았다. 어느 날 그 아저씨가 나에게 말하기를 공부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 주겠다고 했다. 나는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공부시켜 준다는 말에 솔깃하여 승낙을 했다. 그러나 부모에게 그 사실을 말하면 호되게 매를 맞을 것 같아 숨겼다. 그때가 내가 열여덟 살 되던 해인 1943년 가을이었다. 그때 나는 집안일도 고되고, 아버지가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하게 하였으므로 집을 떠나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싶었다.
며칠 후 저녁 무렵에 그 아저씨가 찾아와 잠깐 다녀올 데가 있으니 나오라고 해서 부모 몰래 나갔다. 그랬더니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한적한 곳에 짐 싣는 트럭을 세워 놓고 있었다. 거기에는 우리 동네 파출소에 근무하는 일본인 순사 다나카도 와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나를 트럭에 태워 부산으로 데려갔다. 집에서 입고 있던 검은 치마와 저고리를 그대로 입은 채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그들을 따라가게 되었다.
나를 데려간 곳은 부산의 어떤 미용실이었다. 미용실에서 내 긴머리를 자르려 해서 못 자르게 반항했으나 결국은 잘렸다. 그 후 우리 동네 아저씨는 나를 일본인 순사 다나카에게 넘겨주고 가면서 공부시켜 줄 테니 말 잘 들으라고 했다.
집에서는 치마저고리를 입고 갔는데 자주색 원피스를 가져와 갈아입으라고 했다. 내가 입고 간 치마저고리는 더러워서 안 된다며 깨끗하고 예쁜 옷으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그곳에는 나 말고도 조선인 여자 네 명이 더 있었다. 그들 중에는 학생복을 입은 이도 있었다.
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후 같이 있던 조선인 여자 네 명과 함께 부산역을 출발하였다. 우리가 탄 기차는 민간인이 타는 칸도 있고 군인이 타는 칸도 있었는데 우리는 군인 칸에 탔다. 일본 군인이 우리를 인솔해갔는데 그들은 우리들을 따로따로 앉혀 서로 이야기도 못하게 하였다. 서울, 평양, 신의주를 거쳐 만주로 들어갔다. 가는 동안 두 차례에 걸쳐 대여섯 명의 우리 같은 조선인 처녀들을 또 태웠다.

- 반항하며, 맞으며, 당하며

기차에 같이 타고 갔던 우리들은 모두 만주에 있는 군위안소에 배치되었다. 위안소가 있었던 지명과 부대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곳의 겨울은 매우 길고 아주 추웠다. 여름은 짧았고 우리나라의 가을 날씨 같았다. 부대에 도착했을 때에도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지조차도 몰랐다.
위안소에는 30 명가량의 위안부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조선인 위안부들이었다. 주로 이북여자들이 많았고 그 외에도 부산 사람이 있었다. 위안부들은 대개 18~19세 가량 되었다. 위안부들 중에는 학교 다니다가 끌려온 사람도 있었다. 내 이름이 미요코였기 때문에 위안소에서는 나를 ‘미짱’이라고 불렸다. 나는 기요코와 가장 친했다. 얼굴이 갸름하고 잘 생긴 기요코는 평양 기생이었는데 좋은 곳에 소개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서 위안부가 되었다고 했다. 위안소에 있는 조선인 남자가 여자를 데려오라는 일본 군인의 부탁을 받고 고향에 가서 기요코를 속여서 위안소로 데리고 왔다고 한다. 위안소에는 위안부들 외에 이북이 고향인 조선인 남자 두 명과 청소, 심부름 등을 하는 중국사람 한 명이 있었다. 한 조선인 남자의 부인은 이북에 사는데 가끔씩 위안소에 다니러 와서 밥과 김치 등을 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위안소에서 가까운 부대소속 군인들이 교대로 파견 나와 보초를 섰다.
위안소에서 우리를 감독하고 돈표를 모아서 계산하는 일을 하는 조선인 남자 두 명이 있었다. 그들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옷 색깔은 노랑에 풀색이 섞인 색이었고 가슴에는 배지를 달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우리들을 괴롭히지는 않았으나, 키가 작은 또 다른 군속은 우리를 회초리로 때리고 지독하게 굴었다. 특히 위안부들이 일본인 군인들과 싸우거나 군인을 상대하지 않으려 하면 심하게 때렸다.
위안소는 일본식 집이었는데 위안소 주변에는 부대가 있었다. 위안소 건물은 ‘ㄴ’자 형태이고 2층집이었는데 1층과 2층을 모두 위안소로 사용했다. 위안소의 간판은 있었으나 글을 몰랐기 떄문에 뭐라고 씌어 있었는지 모른다. 위안소 건물 주위를 둘러싼 담도 있었다. 1층에는 우리를 감독하던 조선인 남자 두 명의 숙소와 식당이 있었다. 2층에는 위안부들의 방이 있었는데 다다미 한 장 반 정도의 크기였다. 난방은 밖에서 한쪽 벽으로 석탄을 때서 벽이 따뜻해지게 하는 페치카 방식이었다. 위안부 한 사람이 한 개의 방을 사용했다. 방안에는 이불과 옷걸이, 화장품 등이 있었다.
처음에 위안소에 도착하자 성병이 있는지 처녀인지 등을 검사했다. 그 후 군의는 나에게 몇 달 동안 간호부일을 시켰다. 그래서 부상병의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로 감는 일을 배워서 했다. 그리고 병원의 빨래도 했다. 낮에는 병원 일을 하고 밤에는 군의가 나에게 자러 왔다. 나는 그 군의에게 처음으로 정조를 빼앗겼다. 여자에게 정조가 중요하다고 듣고 자랐고 내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으므로 내 몸을 버렸다는 생각에 많이 울었다. 간호부 일을 하는 동안은 군의 외에 다른 군인들은 상대하지 않았으나, 몇달 후에는 간호부일을 그만두게 하고 위안부짓을 시켰다. 그러나 위안부짓을 하면서도 부상자들이 많을 때는 가끔씩 병원에 가서 간호부일을 해야 했다.
위안부들은 모두 똑같은 원피스를 입었다. 옷은 부족하지 않게 여러 벌을 주었다. 여름을 제외하고는 방안의 한쪽 벽을 따뜻하게 난방 해 주므로 내복을 입은 적은 없었다. 빨래는 우리들이 각자 했다. 머리는 단발머리를 했었다.
식사로는 조밥과 단무지, 양배추 김치를 주로 먹었다. 아침에는 된장국이 나왔다. 일본의 국경일에는 고기반찬이 나올 때도 있었다. 아침과 저녁으로 하루 두 끼의 식사만 주었다. 밥은 우리가 교대로 했다.
위안소에 있을 때 월경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가 병에 걸린 줄 알고 깜짝 놀랐으나, 기요코 언니가 가제로 생리대를 만들어 주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 군인들이 많은 토요일, 일요일에는 월경 중에도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그때는 참 괴로웠다.
평일 날 아침에 일어나면 함께 모여 조회를 하고 가끔 군인들이 나와서 방공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조회는 일주일에 서너 번 정도 했는데 위안소 마당에 모여 일본에 충성하자는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우고 일본 군가도 불렀다. 그러나 일요일에는 장교들이 자고 가므로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이 대중없었다.
평일에는 군인들이 싸움터에 나가느라 낮에는 거의 오지 않고 저녁부터 왔다. 가끔 외출 나온 군인들이 낮에 왔다. 그래서 평일은 열 명 내외의 군인이 다녀갔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아침 여덟 시부터 군인들이 왔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점심밥도 주므로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있었다. 밥 먹는 시간 외에는 계속 군인을 받아야 했다. 저녁 일곱 시 이후에는 장교들이 왔다. 장교들은 초저녁부터 와서 긴 밤을 자고 다음날 새벽이나 아침에 갔다. 군인들은 모두 일본인이었다. 조선인이 들어오면 붙잡고 실컷 울기라도 하겠는데 3년 동안 조선인 군인은 한번도 못 보았다. 다른 위안부들 중에는 조선인을 보았다는 이도 있었다.
군인들은 위안소에 왔다갈 때 손바닥 반 만한 크기의 누런 색 돈표를 내고 갔다. 장교는 사병보다 더 많은 액수의 돈표를 냈다. 어떤 군인은 돈표를 안 내려는 이도 있었다. 규정시간을 넘긴 사람에게는 돈표를 더 내놓으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불쌍해서 그냥 내보내기도 했다. 돈표를 받으면 우리가 갖지 않고 우리를 관리하던 조선인 남자에게 갖다 주었다. 그러면 그 개수를 세어서 위안부 각자가 하루 몇 명의 군인을 받았나를 막대그래프로 크게 그려 벽에 붙여놓았다. 나는 다른 위안부들보다 군인을 적게 받는 편이어서 자주 혼났다. 군인이 적은 평일은 열 명 내외를 상대했고, 토?일요일은 40~50명을 상대해야 했다. 우리는 돈표를 갖다 주기만 했지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저금을 한 적도 없고 돈을 내놓으라고 항의한 적도 없다. 군인들이 와서 따로 돈을 주고 간 적도 없었다.
평일 낮에는 주로 내 옷을 빨거나 삿쿠를 씻었다. 군인들이 쓰고 간 삿쿠를 안팎으로 깨끗이 씻어서 소독하고 약을 발랐다가 다시 사용했다. 토?일요일에 군인들이 쓰고 간 삿쿠를 받아서 모았다가 씻어서 다시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삿쿠를 씻을 줄 몰라 한 달 가량 다른 여자들 하는 것을 보며 배웠다. 대개 위안부 1인당 삿쿠 40~50개씩을 보관하고 있다가 군인들이 들어오면 끼워 주었다. 보통 세 번 사용하면 버리고 새 삿쿠로 바꾸어 주었다.
군인들 중에는 ‘사면발이’1) (사면발이(phthirus pubis)는 음모(陰毛)에 기생하는 이로, 물리면 음부에 양진증(痒疹症)을 일으킨다.)라는 ‘이’가 있는 사람이 많아 대부분의 위안부들이 이에 옮았다. 기요코 언니와 나는 서로 음부에 붙어 있는 이를 핀으로 떼내 주었다.
군인들은 문 밖에 줄을 서 있다가 차례로 들어왔는데 서로 먼저 들어오려고 자기들끼리 싸우곤 했다. 그들은 각반을 벗고 기다렸다. 앞 사람이 위안소 안에 오래 있으면 빨리 나오라고 문을 두드리고 법석을 떨었다. 군인들은 위안소에 한번 들어오면 사병은 삼십 분, 장교는 한 시간 있을 수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5분 내외면 끝내고 나갔다.
군인들은 위안소에 들어와서 반드시 삿쿠를 사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군인들 대부분은 성병이 무서워 삿쿠를 사용했다. 군인들 중에는 자기가 직접 삿쿠를 가지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삿쿠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군인도 있었다. 나는 성병이 무서워 세상없어도 삿쿠를 해야 한다고 끝까지 버텼다. 삿쿠를 사용하지 않으면 상사에게 이른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하고 성병이 옮으면 서로 좋지 않으니 삿쿠를 끼라고 타이르기도 했다. 부모형제를 떠나서 끌려온 것도 억울한데 병까지 옮으면 어떻게 하냐고 반항했다.
군인 한 사람을 상대하고 나면 1층에 있는 목욕탕에 내려가서 소독약을 넣은 물로 밑을 씻고 와서 다시 군인을 받았다. 소독약이 목욕탕에 있었다.
군인들 중에는 여자를 오래 못 봐서 그런지 들어오자마자 사정해 버리는 이도 많았다. 나를 괴롭히거나 못되게 구는 군인에게는 죽을힘을 다해 반항했다. 그래서 군인과 싸우고 있으면 밖에 줄서서 기다리던 군인들은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나오라고 욕했다. 또 군인과 싸우면 많이 맞기도 했다.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어떤 군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받아 주지 않는다고 술을 먹고 와서 칼을 뽑아 들고 행패를 부렸다. 또 어떤 군인은 술 먹고 위안소에 들어와 칼을 다다미에 꽂아놓고 성행위를 하는 사람이 많아 방바닥에 칼자국이 많이 있었다. 이것은 자기 하고픈 대로 실컷하게 해달라는 위협이었다. 그러다 안되면 칼을 가지고 덤벼드는데 이럴 때는 빨리 피하거나 혹은 누가 찾는다고 거짓말을 시켜 내보내곤 했다.
그곳에 간 지 1년쯤 되었을 때 어떤 군인이 너무 괴롭히길래 나도 화가 나서 발로 찼더니 그는 내 옷을 다 찢고 발가벗겨 때리고 칼을 들이댔다. 그리고는 밖에 나가서 시벌겋게 달구어진 인두 모양의 불쑤시개를 가지고 들어와 내 겨드랑이를 지졌다. 그 상처로 석 달 동안 고생했다.
특히 긴밤 자는 장교들은 여러 번 접촉을 요구하며 아주 귀찮게 굴어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또 긴밤 자는 장교 중에는 술이 잔뜩 취해 들어와서는 밤새도록 다 토하고 잘 되지도 않으면서 접촉을 하려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비위가 상해 참을 수가 없었다.
군인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왜 부모 말을 안 듣고 이 신세가 되었나 싶어 후회가 막심했다. 결국은 내 자신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해만 지면 부모 생각에 가슴이 저미었다. 차라리 부모가 시집가라 했을 때 말을 들을 걸, 공부가 뭐길래 공부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이곳에 와서 이 신세가 되었나 생각하며 절망하였다. 가족들이 미칠 듯이 그리워 매일 울고 남의 슬픈 소리를 조금만 들어도 울곤 했다. 나는 집 생각, 엄마 생각으로 마음에 병이 나서 몸져 눕기도 했었다. 살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 나를 잘 봐주던 군의는 특별히 나에게 영양제와 안정제를 주기도 했다.
그 군의와 함께 마차를 타고 극장에 가서 ‘쓰바키히메’라는 제목의 일본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가 허락을 받아 주어서 위안소 주변을 구경한 적이 한 번 있었다. 그 외에는 외출해 본 적이 없다. 보초병들이 늘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도망갈 계획을 짤까 봐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도 못하게 했다. 그래서 위안부들끼리도 서로 잘 몰랐다.
우리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병원에 가서 성병검사를 받기 위해 소변 검사, 피 검사 등을 받았다. 위안소에 있을 때 나는 임질에 걸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606호 주사도 맞고 약도 발라 나았다. 성병이 걸렸을 때는 군인을 상대하지 않고 쉬었기 때문에 그래도 지내기가 좀 나았다. 그 외에 다른 병을 앓은 적은 없었다.
내가 글을 모르므로 평양에서 온 위안부 기요코가 우리집에 보내는 편지를 대신 써줘서 딱 한번 집에 편지를 했다. 내가 있는 곳의 주소는 쓰지 않고 집주소만 써서 보냈다. 편지는 위안소에서 일하는 중국인 보이에게 몰래 부탁하여 부쳤다. 나는 공부가 한이 되어 공부시켜 준다는 말에 속아 이런 곳에 왔기 때문에 동생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공부를 시키라고 편지에 썼다. 내가 위안부로 있다는 이야기는 쓰지 않고 그저 잘 있다고만 했다.

- 고향으로 돌아오긴 했으나

내가 위안소에 간 지 3년째 되는 스무 살에 종전이 되었다. 갑자기 군인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위안소에 오질 않아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소련 군인들이 위안소에 들어와 총을 들이댔다.
그들은 우리의 옷을 벗기려 했다. 일본 군인들이 도망가고 나니까 이제 소련 군인들이 우리를 겁탈하려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를 관리하던 이북 출신의 조선인 남자가 큰일났으니 쓰던 물건 모두 팽개치고 어서 도망가자고 했다. 그래서 그와 그의 부인, 기요코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 함께 얼굴에 시커멓게 칠을 하고 위안소 건물 뒤로 돌아나와 도망쳤다. 나머지 위안부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각자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는 중국에서 뚜껑도 없는 화차를 타고 압록강까지 와 걸어서 흥남에 도착했다. 기요코와 조선인 부부는 고향이 이북이므로 여기서 그들과 헤어졌다. 그후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밤낮으로 걸어서 평양과 개성을 거쳐서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역에 도착하여 주먹밥과 고향가는 기차표를 얻었다. 그 표를 받고는 이제 고향에 돌아가는구나 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고향집에 돌아가니 식구들은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왔다고 깜짝 놀래며 나더러 귀신이 아니냐고 했다.

- 방황의 세월

고향에 돌아와 보니 아버지는 이미 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나를 시집보내려고 성화였으나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위안부였는데 누구와 결혼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내가 위안부였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공부도 하고 공장에도 취직했었다고 말했다.
나는 마음이 괴로워 더 이상 집에 있을 수가 없어 고향에 돌아온 지 1년 만에 온다간다 말도 없이 집을 나왔다. 나와서는 진주에 있는 사촌 이모집에 갔다. 이모는 여관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모집에서 일을 거들어주며 지냈다. 그후 이모집을 나와 목포, 광주, 전주 등의 술집에 있다가 남자들이 하도 귀찮게 굴어 그만두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내가 위안부였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볼까 봐 두려워 자꾸 옮겨다녔다.
돈을 마련하여 신마산으로 나와 전세를 얻어 하숙집, 대폿집 등을 했다. 그때 주위 사람들은 젊은 여자가 대폿집하지 말고 시집을 가라고 했다.
마산에서 대폿집을 하다가 서른여섯 살에 철도의 선로꾼을 만나 서울로 와서 살림을 차렸다. 나와는 여덟 살 차이였는데 그와 별로 정분도 없었다. 서울 와서 그는 철도의 선로꾼일을 하고 나는 집안에서 살림을 했다. 그러다가 집안형편이 어려워 나도 따라다니며 노동일을 많이 했다. 그는 매일 술을 먹고 내 속을 썩였다. 그는 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결혼을 해서 부인과 자식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나를 속인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몇 번을 헤어지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되었다. 혼인신고도 안하고 살았는데 결국 그는 병들어 빚만 남기고 죽었다.
현재는 동생의 손주를 데려다 자식처럼 키우고 있다. 내가 외로워서 네 살 때부터 데려다 키웠다. 그리고 새마을 취로사업을 나가 벌어 먹고 산다. 또 일거리가 있을 때는 밤에 이웃집에 가서 한 시간에 1,000원씩 받고 부업을 한다. 지금 사는 방은 반지하 방으로 보증금 150만원에 월 7만원씩 낸다.

- 하도 억울해서

동네 문방구에 가서 정신대에 관해 써붙여 놓은 것을 보았고, 또 TV에서 위안부 출신 할머니들의 증언을 들었다. 그래서 나도 신고해서 억울함을 면할까 싶어 1992년 6월에 신고했다. 처음에는 신고하는 것을 매우 망설였으나 지금까지 내 가슴속에만 넣고 있던 것을 다 털어놓고 나니 가슴이 후련하다

 

- 김순덕 할머니 의 증언 / 나눔 의 집 ...

 찌들린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나는 1921년 경남 의령군 대의면에서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갈아 먹을 논도 없었다. 그래서 살기가 어려워 대나무 바구니를 만들어 생계를 꾸리고 있던 큰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곳은 지리산 밑의 산청군 삼장면 평촌리였다. 여기서 아버지는 담배농사를 지었다. 산에는 송이버섯과 산나물이 많아서 따먹기도 하고 장으로 가져가서 쌀이나 돈으로 바꾸기도 했다. 아버지가 농사지은 담배잎은 전매품이라 싼 값으로 수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담배잎을 따고 나면 담배 둥치에서 새 순이 돋 나오는데 그것은 말려서 피웠다.

 아버지는 그것을 모아두곤 하다가 일본 순사에게 발각되어 잡혀가서 모진 매를 맞고 온 후, 시름시름앓다가 돌아가셨다. 오빠 둘, 언니, 나, 여동생, 이렇게 다섯명의 자식을 데리고 어머니가 어렵게 생활을 꾸려가셨다. 거의 굶어죽을 지경이었다. 나무뿌리를 캐먹기도 하고, 하루종일 디딜방아를 찧어주고 딩기를 얻어다가 시래기를 넣고 끓여 먹기도 했다. 일본에 붙어먹는 사람은 그 당시에도 고무신도 얻어 신곤 했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항상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산다. 나와 올케는 콩이나 팥의 푸른 잎을 말려두었다가 겨울에 삶아 먹기도 했다. 오빠가 중국으로 돈벌러 가서 올케만 우리와 함께 살고 있었다. 나는 쌀과 보리쌀로 묽은 죽을 쑤어 먹으면서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있다가는 굶어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 한입이라도 줄이고 돈도 벌게, 남의집살이를 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동네에서 나와 같이 나물하러 다니던 애가 진주 부잣집으로 식모살이를 하러 갔는데, 집에 다니러 왔다가 나를 진주의 은행원 집에 소개해주었다. 내가 열두살 때였다. 그 집은 아이 다섯, 어른 여섯 명의 대식구였는데 주인 여자가 독해서 모진 고생을 했다. 저녁 설겆이를 하고 밤 한두시까지 5리나 떨어진 곳에 가서 물을 길어와야 하기도 했다. 이때 한 고생은 말로 다할 수 없다. 이렇게 몇해를 지내다 열다섯살이 되니 그동안 어리다고 주지 않던 월급을 조금씩 주기 시작했다. 열여섯살이 되어 돈이 조금 모여, 어머니 옷 해드리려고 광목 조금 사고 장 담그는 콩도 한 말 사서 집으로 찾아갔다.

그 사이에 우리집은 이모가 논을 조금 가지고 살고 있던 합천군 삼가면에 있는 헌 집으로 이사를 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그전과 같이 나물 뜯고 집안일을 돕다가 일본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하는 소문을 들었다. 산더미 같이 큰 배를 타고 내가 17세 때(1937년)의 음력 정월 보름인가 2월초쯤 되었을 때였다. 취직시켜준다고 여자들을 모집하여 간다는 말을 들었다. 얼마 전에도 우리가 살던 평촌에서 몇명을 데려갔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나도 갈 걸?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참에 평촌으로 조선인 남자가 일본 공장에서 일할 여자들을 모집하러 또 왔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평촌에 가서 그 사람을 만나보고 일본에 가기로 약속을 했다. 그 사람에게 떠날 장소와 시간을 약속받은 후, 삼가면의 우리집으로 돌아와 일본에 갈 준비를 했다. 당시는 지금같지 않아 세상이 어수룩했고, 특히 학교도 다니지 않은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공장에 돈벌러 가는 줄만 알았고 그것이 위험하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떠나는 날 약속 장소인 의령의 버스 정류장으로 나갔다. 평촌에서 모집하러 왔던 사람이 나왔다. 이 사람은 우리를 부산까지 인솔했다. 떠나는 날에는 합천, 마산 등지에서 온 여자들이 30명쯤 되었다.

나이가 나보다 적은 사람, 많은 사람, 여러 층이었고 그중에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적이 있는 여자도 있었다. 그런 여자들은 대개 남편이 일본으로 갔다고 했다. 이 여자들과는 나중에 조선으로 돌아올 때까지 내내 함께 있었다. 의령에서 빈 버스가 와서 우리 일행만 태우고 갔다. 정암다리를 지나면서 우리는 울면서 ?정암다리야 잘 있거라. 돈 벌어 올 때까지 너 잘 있거라?라며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다. 우리들은 곧 서로 언니 동생 하며 다정해졌다. 나는 동생 축에 끼었다. 이중 나보다 세 살 많은 여자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고아로 남의 집에 살다가 일본에 가게 되었다고 했다.

나중에 서울에 와서 우연히 이 사람을 만나게 되어 왕래하며 살았는데 6?25 때 헤어졌다. 군북역에 도착, 버스에서 내려 기차로 갈아 탔다. 일반인이 타는 완행열차였다. 이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왔다. 부산에서 배를 타면서 인솔자는 새로운 조선인 남녀 2명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집이 상해라고 했다. 부산에서 탄 배는 엄청나게 컸다. 연락선이어서 보통 사람들도 많이 탔다. 여러 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우리 일행은 계단을 한참 내려가서 방 같은 곳의 바닥에 누워 갔다. 연락선 선원이 사람들에게 식빵과 물을 갖다주었다. 이 배를 타고 나가사키까지 갔다.

나가사키에 도착하니 버스같이 생긴 차가 와서 우리 일행을 태워 여관으로 갔다. 여관에 들어간 날부터 군인 같은 사람이 우리를 지켰다.나는 ?왜 우리를 여기에 가두나요? 앞으로 우리는 무슨 일을 할 것인가요??라고 물으니, 그 사람은 ?명령이 있어야 안다?고만 대답했다. 첫날밤 나는 계급이 높은 군인에게로 끌려가서 강간을 당했다. 그 군인은 권총을 차고 있었다. 피도 나오고 무서워서 내가 도망을 가려고 하니까 그 군인은 내 등을 두드려주면서 아무 때 당해도 당하니까 그런 줄 알라며 달랬다.

몇번만 참으면 곧 괜찮아진다고 말했다. 우리 여자들은 매일밤 군부대 안의 계급이 높은 군인들의 방으로 이곳저곳 끌려가서 강간을 당했다. 닷새쯤 되던 날, 나는 군인에게 ?왜 우리를 이방 저방 남자들에게 보내는 거예요?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이 무엇이에요? 남자와 자는 것이에요??라고 따졌다. 그 사람은 ?명령이 있어야 어디로 가는 줄 안다. 무엇을 할지는 가봐야 안다?고 했다. 이렇게 나가사키에서 1주일을 보낸 후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조선인 인솔자를 따라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갈 때 탄 배는 부산에서 탄 것과 비교도 안될 만큼 큰 것이었다. 산더미만했다.

조그만 배로 큰 배에 옮겨 탔다. 쇠줄 난간을 잡고 올라갔다. 이 배에는 군인도 타고 민간인도 타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서 복도 같은 곳을 지나 안으로 들어 가니 허허벌판같이 큰 방이 있었다. 누워서 옆을 보면 사람들이 끝없이 누워 있는 것이 보였다. 이 배를 타고 며칠을 갔다. 내려서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상해라고 했다. 군대를 따라 이동하며 상해 부두에 내리니 트럭이 와서 우리를 싣고 갔다. 철도도, 버스도, 택시도 없었다. 어수선한 상해 거리를 지나 변두리로 생각되는 곳에 닿았다. 육군부대 바깥에 있는 큰 집에 머물게 되었다. 이 집은 부서진 곳도 많고 조그만 방이 많이 있는 집이었다.

가보니 일본인 여자 2명과 조선인 여자 스무명쯤이 더 있어, 의령에서부터 같이 갔던 30명과 합쳐 여자가 모두 50명 정도가 되었다. 일본인 여자들은 유곽에 있다가 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나이가 27-28세 정도로 조선 여자들보다 대개 열살쯤 많았다. 군인들은 일본 여자보다 한국 여자들이 깨끗하다고 더 좋아했다. 본래 있었던 조선인 여자들은 전라도, 충청도 등지에서 왔다고 하는데 우리들과 나이는 비슷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같이 간 사람들끼리만 어울렸다. 나는 여기서 ?란짱?으로 불렸다. 우리 50여명 중에서 아픈 사람, 사정있는 사람 등을 빼놓고 매일 평균 35명쯤이 일했다고 생각된다. 그 큰 집은 나무판자로 칸을 막아서 한 사람 누울 만큼 크기의 방들을 많이 만들어놓았다. 방 안에는 침대가 있었고 거기서 기거했다. 식당은 따로 있었다. 집은 단층이었고 집앞에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위안소?라고 써 있었던 같다. 우리를 인솔해간 조선 사람이 주인인 듯했지만 군인들이 와서 먹는 것, 집의 청결사항 등의 검사를 자주 했다. 상해에서 부대를 따라 전방으로 전방으로 몇번인가 이동하여 마지막으로 남경에 있다가 귀향했다. 위안소는 특정 부대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았다.

부대가 이동하면 위안소도 곧 뒤?아 따라가곤 했다. 위안소가 이동할 때는 배를 타고 가기도 하고 트럭을 타기도 했는데 군대와 같이 이동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위안소는 대개 도심이 아니고 외딴 곳에 자리잡았고 가는 곳마다 위안소의 상황은 거의 비슷했다. 전쟁으로 주변 상황은 참혹했다. 매일 총소리가 들렸고 여기저기 시체가 널려 있고 개가 시체를 물고 다니기도 했다. 옷은 요즈음도 보통 많이 입는 치마와 웃도리를 입었고, 겨울에는 두꺼운 옷을 입었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교대로 밥을 먹고 나면 9시쯤부터 군인들이 줄을 서서 오기 시작했다.

저녁 6시 이후부터는 계급이 높은 사람들이 왔고, 자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 평균 30-40명이 와서 잠도 못 잘 정도로 바빴다. 전투가 있는 때는 찾아오는 군인들의 수가 적었다. 방마다 콘돔을 박스 속에 수북이 갖다놓아서 군인들은 방에 와서 이것을 집어서 사용했다. 간혹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군인들도 있었으나 절반 이상은 사용했다. 사용하지 않으려는 군인에게는 내가 나쁜 병이 있으니 옮지 않으려면 콘돔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판에 병에 걸리면 무슨 대수냐고 하면서 막무가내로 덤비는 사람이 많았다. 이럴 때 나는 정말 성병에 걸릴까봐 환장할 지경이었다. 콘돔은 한번 사용하면 버렸고 늘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다. 한두달에 한번씩 병원에 가서 군의관에게 검진을 받았다. 만일 병이 있으면 며칠 쉬도록 명령이 내려졌다. 병원으로 가서 검진을 받았는데 상해에서 검진할 때는 다른 위안소에서 온 여자들까지 있어 여자들이 아주 많았다. 중국 여자들이 늘어서 있는 것도 보았다.

중국 여자들은 귀걸이를 주렁주렁 이상하게 하고 옷도 조선 사람이나 일본 사람들하고는 다르게 입었다. 중국여자들을 일본 군인들이 위안부로 잡아오면 도망치고 자살하는 여자가 많았다고 위안소에서 심부름하던 사람이 말했다. 병원에는 검사대 같은 것이 놓여져 있어서 여기에 올라가서 두 다리를 벌리면 군의관이 나팔 같기도 하고 오리주둥이 같기도 한 것을 밑으로 넣어서 보았다. 병이 있으면 606호를 놓아주었는데 나는 이 주사를 맞은 적이 없다. 나는 성병은 없었지만 아래에서 피가 흐르고 소변을 못 보는 병(방광염인 듯함)에 걸려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다른 여자들 중에도 밑이 바늘 들어갈 구멍도 없이 훌떡 뒤집어지도록 붓고 피가 나는 사람이 많았다. 멀쩡한 처녀들을 데려다가 날이면 날마다 이런 일들을 시키니 오죽했겠는가? 아이를 낳은 여자는 없었지만 임신을 해서 주사맞거나 약을 먹어서 떼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성병은 없었지만, 최근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으니 어려서 하도 많이 자궁을 사용하여 자궁이 비뚤어졌다고 한다.

아프고 괴로울 때는 죽으려고도 해보았지만 죽지 못했다. 강물에 뛰어들려고도 했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보려고도 했고, 차에 뛰어들려고도 했지만 차마 하지 못했다. 이럴 때 고향의 엄마생각이 가슴이 저리도록 났다. 도망가려 해도 어디가 어디인지 몰라서 갈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포기하고 별로 반항도 하지 않았다. 무서워서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군인들도 그다지 포악하게 굴지 않았다. 개중에는 싸움을 하는 방, 물건이 없어졌다고 난리가 나는 방, 여자가 도망치다가 붙잡혀오는 방, 여자가 군인에게 발길로 채여 소리지르는 방 들도 있었지만, 나는 뺨을 맞은 적도 욕을 들은 기억도 별로 없다. 전투를 마치고 돌아오는 군인들은 비교적 난폭하고 콘돔도 잘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얼굴, 옷, 신발 등이 온통 먼지투성이었다. 전투를 하러 나가는 사람들은 다소 온순하고, 이제 자기는 필요없다고 잔돈 부스러기를 놓아두고 가기도 했다. 전투에 나가면서 무섭다고 우는 군인들도 있었다. 그럴 때 나는 꼭 살아서 돌아오라고 위로해주기도 했다. 정말 살아서 다시 오면 같이 반가와하고 기뻐했다. 이러는 중에 단골로 오는 군인들도 꽤 되었다. ?사랑한다?, ?결혼하자?는 말도 수없이 들었다. 군인들이 올 때마다 조그만 표(요즘의 경로우대증 같이 생김)를 주고 갔는데 그것을 모아다가 조선 사람 주인에게 갖다주면 공책같은 데다 매일 기록했다.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면 팔자를 고치게 해준다고 했으나 따로 급료를 준 적은 없었다.

나는 일본이 이겨야 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일본이 이기라고 기도하기도 했다. 주인은 옷, 화장품, 먹을 것은 나누어주고 나중에 한꺼번에 돈을 줄 때 제한다고 했다. 여자들이 주인에게 시장에서 무엇을 사다달라고도 했는데 그러면 사다주면서 나중에 가지고 나갈 돈액수가 적어진다고 했다. 식사는 밥, 국, 그리고 두세가지 반찬 등으로 먹었다. 계급이 아주 높은 군인들을 위해서 예쁘고 똑똑한 여자들을 골라 차를 태워 부대 안으로 데리고 가기도 했다. 이런 중에 나도 불려가 이즈미라는 군인과 특별히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내가 몇 살이냐고 물으니 이 사람은 손가락 다섯개를 펴보였다.나는 속으로 ?아마 50살 정도인가보다?라고 생각했다. 계급도 아주 높아 보였다. 이즈미를 만나기 위해 부대 안으로 들어갈 때나 이즈미와 함께 밖에 바람쐬러 나갈 때면 군인들이 양옆으로 끝도 없이 줄을 섰다. 그리고 총을 높이 들고 무엇이라 큰 소리로 외쳐댔다.

이즈미의 방은 넓었고 그 안에 큰 침대가 있었으며 번쩍거리는 총과 군복이 있었다. 어깨에 번쩍번쩍하는 계급장이 달려 있었다. 이 사람은 전투가 잠잠하여 시간이 날 때는 졸병을 시켜서 나를 불러들여 이삼일간 자기 방에서 재웠다. 전투가 있을 때는 몇달간 소식이 없다가 잠잠해지면 자주 불렀다. 부대가 먼저 이동해서 위안소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면 배를 타고 가서 만나기도 했다. 어느날 이즈미를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는데, 강물이 핏물로 빨갛게 물들고 강을 메우도록 많은 시체가 떠내려가다가 배가 지나가는 길 양옆으로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이즈미를 자주 만나면서 나는 이 사람을 아버지겸 남편겸, 한식구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숫자와 일본어도 직접 손을 붙들고 가르쳐주는 등 나에 대한 이즈미의 애정은 말할 수 없이 극진했다. 매일매일 사랑한다고 말했고, 전쟁이 끝나면 일본에 데리고 들어가서 고생 안 시키고 학교도 보내주면서 같이 살 것이라고 늘 말했다. 조선으로 돌아온 후에도 계속 자주 편지를 주고 받았다. 이즈미의 도움으로 귀향 위안소 생활을 한 지 3년쯤 지난(1940년) 2, 3월경, 이즈미는 내가 자주 아프고 전쟁도 점점 위험하게 될 것 같으니 안되겠다고 하면서 고향의 집에 돌아가라고, 가 있으면 꼭 찾으러 가겠다고 했다. 조선으로 갈 때 누구를 데리고 가겠느냐고 해서 같이 있던 친구 4명과 같이 나가겠다고 했다.

이즈미는 주인에게 이 5명을 보내라고 했다. 높은 군인의 명령이므로 거부할 수는 없으면서도 주인은 곧 일본이 전쟁에서 이길텐데, 그러면 돈도 받을 수 있고 좋은데 왜 가느냐고 하면서 싫어했다. 이즈미가 사람을 보내서 우리 일행 5명이 떠나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벌어놓은 돈이 아까와서 전쟁이 끝나면 돈을 받으러 다시 오겠다고 말했다. 이즈미는 나중에 일본으로 불러서 돈을 줄지 모르니 여기로 다시 올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하는 수없이 위안소에서 돈도 받지 못하고 떠나왔다. 떠날 때 이즈미가 100엔을 주어 가지고 나왔는데, 다른 여자들도 어디서 났는지 50-100엔을 가지고 있었다.

이즈미는 귀향증을 여러 장 만들어 봉투에 넣어주었다. 도장이 찍힌 서류 모양이 꼭 호적등본 같았다. 이것을 역에서 보이면 기차를 태워주고, 기차에서 내리면 트럭이나 배도 태워주었다. 먹을 것, 잘 곳 등도 아무 불편 없이 해주었다. 어느 역인가에서는 도시락을 우리들 수만큼 주기도 했다. 중간에 평양인가 어디에서 어떤 조선사람이 이 사람(이즈미)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이즈미가 준 종이에는 ?이 사람은 군에 와서 일하다가 병이 나서 조선에 병 고치러 가니, 경상남도 어디까지 가는 차편, 식사를 제공하라?고 써 있었다고 한다.

20일쯤 걸려서 합천군 삼가면의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스무살되던 해였다. 집에 와서 어머니가 삼베 치마, 적삼을 주셔서 입었는데 선들선들한 느낌이었으므로 4월쯤 이었던 것같다. 사랑하던 남편도 죽고 집에 와보니 사람들이 수근대는 것같고 사는 것도 가난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이즈미에게서는 계속 편지가 왔다. 나도 답장을 했고 소포도 보냈다. 내가 미숫가루, 고춧가루 같은 것을 보내면 잘 먹었다고 하고, 고춧가루는 먹고 매워서 죽을 뻔했다고 나를 죽이려고 했느냐고 농담을 하기도 하고, 편지 철자법이 틀렸다고 웃기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내가 서울로 올라와서 답장을 자주 못했지만 이즈미에게서는 편지가 남경에서 몇년간 계속 오다가 해방 한두해 전에 끊어졌다.

이 편지들은 6?25 때 폭격으로 전부 없어졌다. 종로의 낚시여관에도 있다가 남의 집살이도 했다. 그러다가 가방공장에도 다니고 구멍가게도 하면서 살았다. 6?25 전에 장사하다가 당시 부인은 이북 사리원에 있어 자식만 있는 사람을 만나 같이 살게 되었다. 시부모가 가까운 곳에 따로 살아서 내가 시부모 살림을 도왔다. 6?25 때 사리원에 있던 부인이 나와 시부모와 같이 살게 되었다. 나는 남편과 같이 시부모와는 따로 살았다. 본부인의 아이들 공부도 시켰다. 본처 아들은 대학을 나와 미국 LA에 살면서 지금도 나에게 편지한다. 본처는 현재 잘사는 딸집에 산다.

나와 본처는 처음부터 사이가 좋았으며 지금도 서로 왕래하며 사이좋게 지낸다. 나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은 6?25 때 죽고 현재 큰아들과 산다. 아이들은 본처 호적에 올라 있었는데 얼마 전 재판해서 내 앞으로 옮겼다. 남편은 철도청 조역이었는데 20년 전쯤 심장마비로 죽었다. 나와 같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 신고한 문필기라는 사람의 남편이 나의 남편이 일하던 곳의 수장이었다. 우

리는 정대협에서 만나 반가와하면서 세상에 인연이 참 모질기도 하다고 한탄했다. 큰아들은 현재 트럭운전을 한다. 그동안 따로 살던 내가, 맏며느리가 빚지고 집을 나가 이혼하여 혼자가 된 큰아들집에 들어와 살림을 해주고 있다. 손주가 둘이다. 작은 아들은 대학을 나와서 같이 대학나온 여자와 결혼하여 사업을 하는데 잘 안되는 모양이다. 위안부 생활에서 얻은 방광염, 자궁병, 정신불안 등 많은 병이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담석도 있고 빈혈도 심하고. 정대협에 신고한 후로는 답답해서 집에 있지를 못한다.

부천의 연립주택의 방 한칸을 얻어서 네식구가 다리도 뻗지 못하고 살고 있다. 식구들이 비관한다 텔리비전에서 김학순씨의 증언과 정신대에 관한 여러 프로를 보았다. 지금까지 원통하고 분한 것을 혼자 가슴에 묻어두었는데 그것을 보고 밤잠을 못 자게 되었다. 내가 공부를 시킨 조카(친정 큰오빠의 아들)가 고등학교 선생을 하고 있는데 찾아가서 과거를 말하고 신고할까 의논했다.

이 조카는 '태평양유족회 재판도 다 소용없더라구요. 괜히 귀찮기만 하고 자식들이 충격받으니 신고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대전에 사는 또 다른 조카에게 가서 의논했다. 이 조카도 울면서 '아들 가슴에 못 박아요. 미국에 있는 애가 알면 어쩌게요? 하면서 말렸다. 그래도 마음이 께름직하고 통 잠을 잘 수가 없어서 하루는 방송국을 찾아나섰다. 방송국을 찾아가서 말하니 정대협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다음날 파출소에 가 도움을 받아 정대협에 신고했다. 신고하고 나서 1주일간 못 잔 잠을 잤다. 할 말을 하고 나니 한이 반은 풀린 것같다.

신고하고 큰아들에게 말하니 아들은 '그렇게 험한 과거를 가지고 어머니 열심히 잘 사셨우. 장하우'라고 말하며 막 울었다. 어머니 마음껏 어디든지 다니시라고 한다. 그러나 작은 며느리는 이 사실을 알고 비관에 빠져 있다. 작은 아들도 맥이 하나도 없다. 나는 이 아이들 모습을 보면 가슴이 메어진다. 그래도 내 마음은 점점 더 정대협의 모임에 쏠리고 있다.

나는 정대협이 주관하는 일본 대사관 앞의 수요시위에 빠지지 않고 나간다. 내가 외출이 잦아지면서 부산에 사시는 언니가 와서 살림을 해주기도 한다. 한국정부도 책임져라 일본도 나쁘지만 그 앞잡이 짓을 한 조선 사람이 더 밉다.

한국정부에 할 말이 많다. 한국정부도 우리들에게 보상해주어야 한다. 집이 없어 너무 고생이 심하다. 정부에서 살 집이라도 마련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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