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雪化) 11. 설화(雪花 )라 불리는 아이 북쪽인데다 높은지대여서 바람은 한겨울처럼 차고 매서웠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하늘에서는 진눈깨비가 바람에 섞여 내리고 있었다. 말등에 엎드린채 떨어질 듯 위태로운 담이가 안개같은 바람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말도 많이 지쳤는지 걸음이 무디다. 고삐를 잡은 담이의 손이 주루륵 미끄러졌다. 정신을 잃은 것이 틀림 없었다. 이때, 어디선가 나타난 사내의 손이 담이가 탄 말의 고삐를 쥐었다. 그리고 사내는 담이를 말에서 조심스럽게 내리기 시작했다. 문득 사내는 무엇엔가 놀란 듯 멈칫했다. 담이의 팔과 등은 화살이 스치고 지나간 상처들로 그야말로 피범벅이었던 것이다. 담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앞에 태운 사내는 천천히 말을 산 아래로 몰기 시작했다. 산 아래는 춥긴했지만 바람이나 진눈깨비는 없었다. 잔잔한 평지에 도착하자 이윽고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육년 전, 담이의 허리를 잡았다가 무안을 당했던 소년. 열일곱이 된 결의 모습이었다. “무록은?” “족장님께 가셨습니다.” “그럼 너는 가서 무록이 나오길 살피다가, 곧장 이리로 모셔오거라. 그리고 너는, 더운물과 깨끗한 천, 외상에 쓰는 약초들을 갖고 오너라. 넌 탕을 끓이고.” “예-” 호기심을 감추지 못해 뒤에서 서성거리는 종들을 뒤로하고 결은 담이를 안은채 무록의 방에 들어섰다. 결은 담이를 무록의 침상에 눕히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채 입을 열었다. “이련아- 넌 휘를 찾아라. 일이 끝났다고 돌아오라 전해라.” 기척도 없었던 방밖으로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 결의 명령에만 움직이는 호위대 달나미였다. 종들이 물건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결은 종을 모두 내보내고 담이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피가 굳으며 옷이 들러붙어 여간 힘든일이 아니었다. 정신을 잃고 있는게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은 뜨거운 물에 약초를 풀고 천을 적셨다. 일단은 엉겨붙은 피와 더러운 흙들을 깨끗이 닦아내야한다. 어차피 치료는 무록이 할터이니 결이 할일이라곤 이것밖에 없었다. 뜨거운 수건을 데자 담이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팔과 등, 어깨를 수차례 닦아내고 나서야 결은 천을 치웠다. 다행히 큰 부상은 입지 않은 것 같았다. 결은 멍하니 담이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몇 살일까... 육년전에 보았던 어린 소녀는 이제 완전히 성숙한 여인이 되있었다. 흙과 먼지를 닦아낸 담이의 살은 유독 희고 깨끗해 눈이 부실지경이었다. 결은 좀전에 느꼈던 촉감이 떠오르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 했다. 어린 토끼털보다 부드럽고 향기로운 감촉... 세상에서 가장 여리고 약한것을 만진 느낌이었다. 정신없이 담이의 모습에 빠져있던 결은 무록이 들어와 어깨를 치는 순간까지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대체 무슨일입니까?” “아아, 무록 와주었군...” “계집종의 이야기를 들으니, 정신을 잃은 여자애를 몸소 데려왔다구요?” “허락도 없이 네 침상에 눕혔다.” “약초 냄새군요. 상처를 닦았습니까?” “그렇다. 치료를 맡기마.” 무록은 담이 앞에 앉으려다 말고 잠시 주춤했다. “왜, 뭐가 잘못됐느냐?” “......여기 소녀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관노부 소녀다.” “...!” “아무리 우리 부족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다친사람은 치료해주어야 할 것 아니냐?” 무록은 담이의 팔을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더듬었다. 치료때문이라고 하지만 결은 순간 타오르는 질투심을 느꼈다. “가벼운 상처입니다. 보셔서 아시겠지요?” “그래. 그런 것 같다.” “탈수에 허기와 지친것까지 겹쳐 정신을 잃은 것 뿐입니다. 푹 쉬고난 뒤 탕을 먹이고 요양하면 금세 나을 겁니다. 더군다나...” “...?” “이 아이는 무공을 연마한 듯 싶습니다. 회복이 빠를겁니다.” 무공이라니... 여자아이가 무공을 어떻게... 역시, 내가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군. 이 아인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었지. 결은 무록을 무심코 쳐다보다 깜짝 놀랐다. 무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던 것이다. “왜? 뭐가 잘못됐느냐?” “아아... 아닙니다...” “그 아이에게 뭔가 있는게냐?” “아닙니다... 조금 피곤해서...” “몸이 안좋으냐?” “이 소녀는 여기 두고 정신이 들면 그때 거처를 옮기도록 하지요.” “으음... 하지만 네가...” “전 다른 곳에 잠시 머물면 되지요. 무리하게 옮기는것보단 낫습니다.” “...알았다.” 결은 무록이 탕재를 섞는동안 할 일 없이 앉아있는 것이 무안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들르마.” “...예.” 결이 나가자 무록은 탕재 섞는일을 멈추고 글자와 그림이 그려진 괘를 꺼냈다. 무록은 탁자에 괘를 엎어놓고 한참을 섞더니, 이윽고 한 개씩 차례로 두개를 뒤집었다. 괘의 모양을 알고자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던 무록의 얼굴에 체념과 괴로운 표정이 교차했다. 무록이 뒤집은 괘는 뱀을 그려놓은것과, 점이 그려진 괘였다. 무록은 이 점을 전에도 여러차례 보았었다. 무록이 고른 괘는 언제나 똑같았다. 그러나 무록은 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담이의 팔에는... 점과 똑같은 모양의 흉터가 남아 있었다... 어렸을때 뱀에 물린 자국이다.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원이는 4관등인 조의대두형 모사달의 장자이다. 원이는 아버지 처소에 불려나와 한참 꾸지람을 듣고 있었다. “지금 때가 어느땐데 매일 자리를 비우는게야?” “하지만 아버지... 담이가...!” “그 계집 얘기라면 더 듣고싶지 않다! 그 계집의 아버지가 사형을 명받은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우리가문과 사돈이라도 맺었다면 어찌할 뻔 했느냐?” “그것은 틀림없는 모함입니다. 담이의 아버지는 그런일을 하실분이...” “이런, 이런 이 녀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감히 12관위에도 못 미치는 집안이 조의두대형의 집안과 혼인을 바라다니, 그것부터가 괘씸한 일이야!” “아버지! 말씀이 전과 다르지 않으십니까!” “그거야 그때는 그 집안의 신의와 덕망을 믿었으니 하는 말이었지. 이제 네 정혼자는 이 아비가 정할터니이 그렇게 알거라!” “아버지!” “아비 입에서 두 번 소리가 나오게 할테냐?” “......” “앞으로 한 번만 담이인가 그 계집을 찾으러 도성 밖으로 나다니면 알아서 하거라. 병사를 풀어 그 집안 씨를 말려 버릴테니.” “......!” 담이는 악몽에 시달렸다. 아버지가 불 길속에서 담이를 쳐다보고 계셨다. 미친 듯 아버지를 향해 뛰어가는 담이를 뒤에서 누군가가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담이는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그 자를 돌아 보았다. 원이 오라버니였다. “오라버니...!” 그러나 이내 그 얼굴은 흐릿해지며 알 수 없는 자의 얼굴로 변해갔다. 담이는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그 자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거대한 불길속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담이가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기 직전, 이마에 와 닿는 차고 부드러운 손길을 느꼈다. 근심과 고통을 잊게 해주는 손길이었다. 담이는 아버지로부터도, 자신을 끌어 당기는 남자에 대해서도 자유로와지며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 “정신이 좀 드나요?” 담이는 맑고 부드러운 음성에 눈을 떴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의 이마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담이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말이 되서 나오지는 않았다. “여기가 어딘지, 자신은 누군지...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비워요. 그런 생각은 몸이 다 낳은 후에 해도 늦지 않아요.” 목소리의 주인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담이는 불안함이 사라지며 마치 집에 돌아온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휘는 말이 아닌 몰골로 나타났다. 결이 깜짝 놀랄만했다. 휘는 쉬지도 않고 곧장 결의 처소부터 들른 듯 했다. “찾은거냐?” “...그래. 수고했다.” “젠장. 장곳마루에서 찾았다던데... 조금만 있었으면 내가 따라 잡았겠다.” “하하... 헛걸음한게 분하냐?” “다쳤더냐?” “조금. 지금 무록 처소에서 치료받고있다.” “정신은 차렸고?” “...아직.” “그 아비 소식은 알아 봤어?” “...음.” “뭐라고 할거야? 곁에 둘거야?” “그럴거야.” 결의 대답은 결심에 가까웠다. 휘는 한쪽 가슴이 왠지 아렸다. “잘 생각해서 결정해라. 관노부의 아이를, 그것도 죄인의 여식을 이유도 없이 머물게 하면 물고 늘어지는 자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처소를 나왔다. 그리고 발걸음을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 결국 휘가 향하는 곳은 무록의 처소였다. 그 애가 무사한 것을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8 설화(雪化)
설화(雪化)
11. 설화(雪花 )라 불리는 아이
북쪽인데다 높은지대여서 바람은 한겨울처럼 차고 매서웠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하늘에서는 진눈깨비가 바람에 섞여 내리고 있었다.
말등에 엎드린채 떨어질 듯 위태로운 담이가 안개같은 바람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말도 많이 지쳤는지 걸음이 무디다.
고삐를 잡은 담이의 손이 주루륵 미끄러졌다.
정신을 잃은 것이 틀림 없었다.
이때, 어디선가 나타난 사내의 손이 담이가 탄 말의 고삐를 쥐었다.
그리고 사내는 담이를 말에서 조심스럽게 내리기 시작했다.
문득 사내는 무엇엔가 놀란 듯 멈칫했다.
담이의 팔과 등은 화살이 스치고 지나간 상처들로 그야말로 피범벅이었던 것이다.
담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자신의 앞에 태운 사내는 천천히 말을 산 아래로 몰기 시작했다.
산 아래는 춥긴했지만 바람이나 진눈깨비는 없었다.
잔잔한 평지에 도착하자 이윽고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육년 전, 담이의 허리를 잡았다가 무안을 당했던 소년.
열일곱이 된 결의 모습이었다.
“무록은?”
“족장님께 가셨습니다.”
“그럼 너는 가서 무록이 나오길 살피다가, 곧장 이리로 모셔오거라. 그리고 너는, 더운물과 깨끗한 천, 외상에 쓰는 약초들을 갖고 오너라. 넌 탕을 끓이고.”
“예-”
호기심을 감추지 못해 뒤에서 서성거리는 종들을 뒤로하고 결은 담이를 안은채 무록의 방에 들어섰다.
결은 담이를 무록의 침상에 눕히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채 입을 열었다.
“이련아- 넌 휘를 찾아라. 일이 끝났다고 돌아오라 전해라.”
기척도 없었던 방밖으로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
결의 명령에만 움직이는 호위대 달나미였다.
종들이 물건들을 가지고 들어왔다.
결은 종을 모두 내보내고 담이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피가 굳으며 옷이 들러붙어 여간 힘든일이 아니었다.
정신을 잃고 있는게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은 뜨거운 물에 약초를 풀고 천을 적셨다.
일단은 엉겨붙은 피와 더러운 흙들을 깨끗이 닦아내야한다.
어차피 치료는 무록이 할터이니 결이 할일이라곤 이것밖에 없었다.
뜨거운 수건을 데자 담이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소리를 냈다.
팔과 등, 어깨를 수차례 닦아내고 나서야 결은 천을 치웠다.
다행히 큰 부상은 입지 않은 것 같았다.
결은 멍하니 담이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몇 살일까...
육년전에 보았던 어린 소녀는 이제 완전히 성숙한 여인이 되있었다.
흙과 먼지를 닦아낸 담이의 살은 유독 희고 깨끗해 눈이 부실지경이었다.
결은 좀전에 느꼈던 촉감이 떠오르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 했다.
어린 토끼털보다 부드럽고 향기로운 감촉...
세상에서 가장 여리고 약한것을 만진 느낌이었다.
정신없이 담이의 모습에 빠져있던 결은 무록이 들어와 어깨를 치는 순간까지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대체 무슨일입니까?”
“아아, 무록 와주었군...”
“계집종의 이야기를 들으니, 정신을 잃은 여자애를 몸소 데려왔다구요?”
“허락도 없이 네 침상에 눕혔다.”
“약초 냄새군요. 상처를 닦았습니까?”
“그렇다. 치료를 맡기마.”
무록은 담이 앞에 앉으려다 말고 잠시 주춤했다.
“왜, 뭐가 잘못됐느냐?”
“......여기 소녀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관노부 소녀다.”
“...!”
“아무리 우리 부족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다친사람은 치료해주어야 할 것 아니냐?”
무록은 담이의 팔을 손가락 끝으로 부드럽게 더듬었다.
치료때문이라고 하지만 결은 순간 타오르는 질투심을 느꼈다.
“가벼운 상처입니다. 보셔서 아시겠지요?”
“그래. 그런 것 같다.”
“탈수에 허기와 지친것까지 겹쳐 정신을 잃은 것 뿐입니다. 푹 쉬고난 뒤 탕을 먹이고 요양하면 금세 나을 겁니다. 더군다나...”
“...?”
“이 아이는 무공을 연마한 듯 싶습니다. 회복이 빠를겁니다.”
무공이라니...
여자아이가 무공을 어떻게...
역시, 내가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군.
이 아인 뭔가 다르다고 생각했었지.
결은 무록을 무심코 쳐다보다 깜짝 놀랐다.
무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던 것이다.
“왜? 뭐가 잘못됐느냐?”
“아아... 아닙니다...”
“그 아이에게 뭔가 있는게냐?”
“아닙니다... 조금 피곤해서...”
“몸이 안좋으냐?”
“이 소녀는 여기 두고 정신이 들면 그때 거처를 옮기도록 하지요.”
“으음... 하지만 네가...”
“전 다른 곳에 잠시 머물면 되지요. 무리하게 옮기는것보단 낫습니다.”
“...알았다.”
결은 무록이 탕재를 섞는동안 할 일 없이 앉아있는 것이 무안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들르마.”
“...예.”
결이 나가자 무록은 탕재 섞는일을 멈추고 글자와 그림이 그려진 괘를 꺼냈다.
무록은 탁자에 괘를 엎어놓고 한참을 섞더니, 이윽고 한 개씩 차례로 두개를 뒤집었다.
괘의 모양을 알고자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던 무록의 얼굴에 체념과 괴로운 표정이 교차했다.
무록이 뒤집은 괘는 뱀을 그려놓은것과, 점이 그려진 괘였다.
무록은 이 점을 전에도 여러차례 보았었다.
무록이 고른 괘는 언제나 똑같았다.
그러나 무록은 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담이의 팔에는...
점과 똑같은 모양의 흉터가 남아 있었다... 어렸을때 뱀에 물린 자국이다.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원이는 4관등인 조의대두형 모사달의 장자이다.
원이는 아버지 처소에 불려나와 한참 꾸지람을 듣고 있었다.
“지금 때가 어느땐데 매일 자리를 비우는게야?”
“하지만 아버지... 담이가...!”
“그 계집 얘기라면 더 듣고싶지 않다! 그 계집의 아버지가 사형을 명받은 것을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우리가문과 사돈이라도 맺었다면 어찌할 뻔 했느냐?”
“그것은 틀림없는 모함입니다. 담이의 아버지는 그런일을 하실분이...”
“이런, 이런 이 녀석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감히 12관위에도 못 미치는 집안이 조의두대형의 집안과 혼인을 바라다니, 그것부터가 괘씸한 일이야!”
“아버지! 말씀이 전과 다르지 않으십니까!”
“그거야 그때는 그 집안의 신의와 덕망을 믿었으니 하는 말이었지. 이제 네 정혼자는 이 아비가 정할터니이 그렇게 알거라!”
“아버지!”
“아비 입에서 두 번 소리가 나오게 할테냐?”
“......”
“앞으로 한 번만 담이인가 그 계집을 찾으러 도성 밖으로 나다니면 알아서 하거라. 병사를 풀어 그 집안 씨를 말려 버릴테니.”
“......!”
담이는 악몽에 시달렸다.
아버지가 불 길속에서 담이를 쳐다보고 계셨다.
미친 듯 아버지를 향해 뛰어가는 담이를 뒤에서 누군가가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담이는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그 자를 돌아 보았다.
원이 오라버니였다.
“오라버니...!”
그러나 이내 그 얼굴은 흐릿해지며 알 수 없는 자의 얼굴로 변해갔다.
담이는 손을 뿌리치려고 했으나 그 자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거대한 불길속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담이가 고통으로 비명을 지르기 직전, 이마에 와 닿는 차고 부드러운 손길을 느꼈다.
근심과 고통을 잊게 해주는 손길이었다.
담이는 아버지로부터도, 자신을 끌어 당기는 남자에 대해서도 자유로와지며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
“정신이 좀 드나요?”
담이는 맑고 부드러운 음성에 눈을 떴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자신의 이마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담이는 입술을 움직였지만 말이 되서 나오지는 않았다.
“여기가 어딘지, 자신은 누군지...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비워요. 그런 생각은 몸이 다 낳은 후에 해도 늦지 않아요.”
목소리의 주인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았다.
담이는 불안함이 사라지며 마치 집에 돌아온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리고 이내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휘는 말이 아닌 몰골로 나타났다.
결이 깜짝 놀랄만했다.
휘는 쉬지도 않고 곧장 결의 처소부터 들른 듯 했다.
“찾은거냐?”
“...그래. 수고했다.”
“젠장. 장곳마루에서 찾았다던데... 조금만 있었으면 내가 따라 잡았겠다.”
“하하... 헛걸음한게 분하냐?”
“다쳤더냐?”
“조금. 지금 무록 처소에서 치료받고있다.”
“정신은 차렸고?”
“...아직.”
“그 아비 소식은 알아 봤어?”
“...음.”
“뭐라고 할거야? 곁에 둘거야?”
“그럴거야.”
결의 대답은 결심에 가까웠다.
휘는 한쪽 가슴이 왠지 아렸다.
“잘 생각해서 결정해라. 관노부의 아이를, 그것도 죄인의 여식을 이유도 없이 머물게 하면 물고 늘어지는 자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처소를 나왔다.
그리고 발걸음을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
결국 휘가 향하는 곳은 무록의 처소였다.
그 애가 무사한 것을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