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雪化) 12. 후계자 담이 눈을 뜨자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맑고 힘찬 얼굴이 걱정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담이를 내려다 보고 있다. “아저씨는...?” “몸은 어때? 아프지 않아?” 담이는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기억나?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지...” “아뇨... 여기가 어디에요? 아저씨는 어떻게 오신거에요? 아저씨가 절 데려오신건가요?” 이때 무록이 종과 함께 탕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들어오며 담이의 말을 들은 듯 했다. “후후... 주부의 장자로 장차 대모달이 되실 분께 아저씨라니... 결님이 들으시면 박장대소 하시겠군요.” 담이는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무록의 말뜻을 생각하려는 듯 미간을 모았다. “흠흠... 무록은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그래...” “아가씨 이름은 뭐죠?” “...담...담이에요.”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비명처럼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아버지!” “......기억이 나니?” 담이는 갑자기 휘의 팔을 부여잡고 안타깝게 소리쳤다.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죠? 어디 계신지 아세요?” 휘는 고개를 저었다. 담이는 휘의 품 안으로 쓰러지듯 무너졌다. “아아... 제발... 우리 아버지를 구해주세요... 어디 계시는지... 무사하신지...” 며칠간 죽은 듯 잠만 잤음에도 담이에게서 묘한 향기가 났다. 휘는 아찔해졌다. 휘가 담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진정시키는 동안, 결이 들어왔다. 결 역시도 다른 이유로 아찔해졌다. 무록은 방안의 이상한 공기를 눈치채고, 탕을 들고 담이에게 다가가 앉았다. “자, 진정하고 따뜻한 탕을 마셔요. 그리고... 저기 계신분은 우리 부족의 형으로 아가씨를 구해오신 분입니다. 먼저 이걸 들고나서 예를 갖추도록 하지요.” 담이는 힘없이 고개를 저어 무록이 내민 탕을 거부했다. 그리고 목석처럼 서 있는 결에게 시선을 돌렸다. 담이의 시선을 맞받자 결은 심호흡을 하며 잠시 자신을 추스렸다. “...마침내 깨어났군.” 그리고 마침내 만났군... 담은 고개를 깊이 숙여 절을 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가 그럼... 절노부인가요?” 세 청년의 표정이 묘해졌다. “여긴... 계루부다.” 담이가 또다시 놀라며 눈이 동그래졌다. “분명... 서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방향을 잘못 잡았군요...” 라고 무록은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운명이 방향을 잡아준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는 절노부로 가야만 해요! 아버지와 만나야 해요!” “안타깝지만 넌 여기외에는 갈곳이 없다.” “어째서요?” “...네가 도망친 노비라는 것을 우리도 알고있듯 절노부에서도 알고있다.” “아버지는 모함을 받으셨어요!” “하지만 이미 도망친 죄인을 잡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난 죽어도 절노부로 가야겠어요!” 담이의 표정은 결연하다 못해 험악하기까지 했다. “날 계루부로 넘길건가요?” 휘가 결의 말보다 빨랐다. “우린 널 살리고자 하는 거야.” “전 죽어도 좋아요. 절노부로 가다 죽겠다고 분명히 말했어요.” “...할 수 없군. 몸이나 낫거든 얘기하자.” “전 이제 괜찮아요!” 담이는 무리하게 일어섰다가 그만 비틀거리며 무록의 어깨를 짚고 말았다. 무록이 미소 지었다. “보통의 소녀였다면 사나흘은 운신하기 힘들었을텐데, 이 정도면 회복이 빠르지 않습니까?” 결은 대답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종을 불러들였다. “이 아이를 내가 말한 곳으로 데려가라.” 담이는 불안한 듯 결을 쳐다 보았다. “어디로 가나요? 여기 있으면 안되나요?” “여긴 무록의 처소다. 네가 정신을 잃고있어, 무록이 특별히 방을 내어준 것이다. 이젠 어느정도 회복하였으니 거처를 옮겨야 하지 않겠느냐?” 담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아... 그랬군요... 정말 죄송해요.” 무록이 담이의 손을 잡으며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몸이 빨리 낫고 있어서 다행이에요. 내가 상태를 보러 들르도록 하죠.” 담이는 무록이 덮어주는 두루마기를 어깨에 걸치고 종들의 부축을 받아 방을 나섰다. 담이는 노비들이 쓰는 거처로 자신을 옮기는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종들이 담이를 안내한곳은 놀랍게도 결의 처소에 딸려있는 별채였다. 계루부의 관리들은 야만적이라 예도 인정도 없을 줄 알았는데... 거기다 휘가 계루부 사람인데다 주부의 장자라니... 그것 역시 놀랄일이었다. “따뜻한 물을 채워놓았으니 몸을 닦으세요. 그리고 새 옷도 침상위에 있습니다.” 목욕시중을 들려는 종들을 한사코 물리치고 담이는 혼자 통에 들어갔다. 무슨 약초를 풀었는지 물 빛깔은 연한 초록빛이었다.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이름모를 꽃에선 은은한 향기가 났다. 담이는 긴장된 근육이 풀리고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호사속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몸만 더 가벼워지면... 아버지와 아옥이를 찾아 나서리라... 담은 커다란 포로 몸을 감싸고 통 앞에 드리워진 천을 들추며 방으로 나왔다. 순간, 담은 충격으로 몸이 얼어붙었다. 족장의 후계자였다. 아무리 자신의 별채를 내줬다고는 하지만 여자아이가 목욕을 하는동안 들어올 권리는 없단 말이다! 하지만 담은 화를 내지도 못하고 애꿎은 포만 꽉 움켜쥔채 서 있었다. 이미 해가 지고 달이 떠, 방안은 낮은 달빛과 두터운 침묵으로 가득찼다. 달빛은 짖궂게도 훤히 드러난 담이의 매끄럽고 하얀 어깨를 비추고 있었다. “예...예의가 없군요. 족장의 후계자는 아무 때나, 아무곳이나 들어갈 권리가 있나요?” “...물론이다.” 담이는 할 말을 잃었다. 희미한 빛속에서도 후계자에게선, 위험할 정도의 강함과 위엄이 동시에 느껴졌다. 갑자기 후계자가 한숨을 쉬었다. “춥다. 옷을 입어라.” 그리고 후계자는 창쪽으로 다가가 등을 보였다. 담이는 잠시 망설이다 급한걸음으로 다가가 두서없이 옷을 입기 시작했다. 결은 고개는 돌리지 않았지만 사그락 대는 소릴 들으며 나지막히 미소짓고 있었다. “흠, 흠...” “돼... 됐어요.” 이런... 젠장할... 옷을 입으면 겨우 포로 가렸을때보다는 보기가 수월할 줄 알았더니... 머리를 올려 드러난 가느다란 목선이 다시 결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여긴 왜 오신거죠?” “...네 아비의 소식을 알아보라 사람을 풀었다. 그러니 떠나는 것을 조급히 생각하지 마라. 너도 쫓기는 몸이니 무사히 절노부땅에 들어간다 한들, 아비를 찾는게 수월치 않을거다.” “어째서... 어째서 제게 이렇듯 사치스런 호의를 베푸시는거죠?” “......인연이라고 해두자.” “나같은 하급관리의 딸과 부족의 형이 대체 어떤...” “밤이 늦었으니 이만 쉬거라. 배가 고프면 언제든지 종에게 말하고.” 결은 무슨 말인가를 더 할 듯 했으나 그대로 방을 나갔다. 담은 결이 나가자 그제서야 방안에 공기가 밀려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와 아옥이에 대한 걱정으로 담이에게는 길고 힘든 밤이었다. 13. 담이의 청 담이가 결에게 구출된 후 여러날이 흘렀다. 무록의 말처럼 담이는 과연 회복이 빨랐다. 그날 이후 결은 찾아오지 않았지만, 무록이 몇 번 들려 담이의 회복상태를 돌보아주었다. 또 다시 찾아온 무록은 담이와 함께 뒤뜰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무록님은, 부모님이 함께 사시나요?” “...아니에요. 부모님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 미안해요...” “아니에요. 내가 워낙 늦게 태어났기 때문에 두 분 다 나이가 많으셨지요. 아버지가 병으로 누워계시기도 했지만, 두 분 다 무척 행복하게 돌아가셨답니다.” “무록은 정말 미래가 보이나요? 나도 내 미래를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도 바로 앞에 일어날 일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주 먼 미래를 어렴풋이 보는 것 뿐이죠.” 무록은 점괘에 담이가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담이가 확실히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꿈은 담이를 가리키고 있다는걸 무록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가씨 팔에 있는 상처는 뭐죠? 어깨뒤로도 똑같은 상처가 있던데...” “아아... 이거요? 뱀에 물린자국이에요.” “...!” “후계자는 어떤 분이에요? 보기엔 굉장히 무뚝뚝하고... 무섭기도 해요.” 무록은 동요한 빛을 감추며 미소지었다. “어렸을때부터 누가봐도 후계자감이었어요. 열 살때부터 병사를 통솔하고, 족장님이 먼 길을 떠날땐 모시고 다니곤 했으니까요. 아가씨 부족인 관노부도 그때 이미 여러차례 다녀왔답니다. 물론 내가 눈으로 다 본건 아닙니다. 전 결님보다 나이가 어립니다. 후후후...” 이때 휘가 들어왔다. 담이에게서 반가움의 기색이 흘렀다. 그나마 휘라면 마을에서 만난 유일한 사람 아닌가. 그리고 무서운 후계자보다는 말하기도 편했다. “야아... 정말 체력이 무쇠인게군. 벌써 이렇게 돌아 다니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록이 엉터리인 것 아니야? 병자의 몸을 함부로 움직이게 하다니...” “아, 아니에요- 제가 답답하다고 나오자 졸랐어요. 그리고 이젠 몸도 가볍고 거뜬한걸요~” “착한 소녀네... 엉터리 편을 들어주다니.” 담이가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을 짓자, 무록과 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엉터리는 이만 물러 가렵니다.” “어라? 도망치는거야?” “엉터리를 필요로 하는 분이 계셔서요... 누군지 아시지요?” “풉... 그럼, 그녀석도 엉터리인게지.” 무록은 문을 향해 걸어가며 짖궂게 소리쳤다. “아아, 휘님 그럼 그 말을 족장님께 전해 드리지요!” “헉...! 겨, 결이 아니었단 말야?” “큭...” 이번엔 휘의 당황하는 얼굴을 보며 담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젠장. 무록과는 말장난을 하면 안된다니까. 항상 내쪽만 곤란해지니...” “푸풋... 먼저 트집을 잡은건 휘님이잖아요~” “그런데... 여긴 굉장히 조용한데... 종들은 다 어디갔나?” “제가 내보냈어요.” “아니, 왜? 그러고보니... 결이 내린 옷들도 다 물리쳤다고 하던데...” “전 갈아입을 옷 두 벌이면 돼요. 호사를 누릴 처지는 아니잖아요.” “...아버지 때문에 그러니?” “꼭 그것때문만은 아니구요... 모함을 받았다고 해도, 어차피 몰락한 하급귀족의 혈육으로 노비신세인걸요...”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는법이야.” “그럴까요? 작은 마을의 조세를 걷는 자에게 씌워진 누명을 누가 벗기겠어요? 아버지를 따르는 사람들은 고작 주변 마을의 순박한 농부들이에요. 고관들에게는 미움을 받고, 힘없는 하층민들에게 사랑받는 자는 억울해도 그 뿐이에요.” 담이 말이 정확하므로 휘는 더 이상 위로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 참... 이거...” 휘는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담이에게 건넸다. “어머, 이건...!” 휘가 주었던 단검이었다. 분명 자신을 향해 활시위를 겨누고 있던 자에게 날렸는데... “저, 저는... 이걸 사람을 향해 던졌었는데... 혹시, 그 자가 죽었나요?” 휘는 잠시 단검을 발견했던 때를 떠올렸다. 단검은 정확히 죽은 사내의 심장가운데 박혀 있었다. 휘는 담이가 두려움으로 떨고 있음을 알았다. “아니야... 이건 산 속 나무에 박혀 있었어. 마침 지나다 발견한건데, 내 칼이라 금세 알아봤지.” “아아... 그랬군요. 다행이에요... 그땐 너무 다급해서...” “담아.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죄가 아니야. 다음에 그런 상황이 다시 와도 넌 살아남기 위해 죽을힘을 다 해야 한다. 알았니?” “...네. 하지만, 그래도 죽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담이는 겨우 안도하며 웃음을 지었다. “저... 전에 제 목숨을 구해주겠다고 약속하신거 기억하세요?” “그래.” “그럼 그 약속이라 생각하시고 제 청 하나만 들어 주실래요?” “좋다. 뭐든지 말해라.” “... 저와 함께 길을 떠난 몸종 아옥이를 찾아주세요. 저와 산어귀에서 헤어졌는데... 우린 절노부 경계에 있는 파사달이란 마을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었거든요-” “파사달이라면...” “어쩌면 아직 거기까지 못갔을거에요. 아옥이는 영리하니, 어쩌면 우리가 헤어진 곳에 남아있을지도 모르구요. 제발... 아옥이도 저희 집안 때문에 고향에 돌아갈수도 없는 처지에요. 그 앨 찾아주세요... 네?” “...그러마. 꼭 찾아서 데려올께.” “저, 정말이죠?” 담이 눈에 감격의 눈물이 어렸다. “혹시, 파사달이란 곳까지 가시게 되면요, 그곳에 중림이란 약재사가 있대요. 그 약재사에게 제 말을 좀 전해 주시겠어요?” “뭐라 전하리?” “원이 오라버니에게 제가 무사하다는걸 말해 주라 하세요.” “...원이?” “저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하실거에요. 제가 무사함을 알리고 싶어요.” “하지만, 계루부 사람에게 네 행방을 알리면 안된다는것쯤은 너도 알텐데?” “원이 오라버니는 괜찮아요!” “......알았다.” “...원이라...” 결은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왜, 아는자야?” “원이라... 아아... 그 자로군.” “누군데?” “계루부 조의두대형 모사달이란 자의 장자다. 나와는 육년전 잠깐 스친적이 있었지.” “허어... 그런 대단한 집안의 장자와 담이는 어떤 관계인거지?” “......알 수 없지. 그래, 알았다. 담이 청대로 해주어라.” “이놈, 무게는 왜 잡아? 내가 너에게 허락을 구하러 온 줄 알아?” “허허... 감히 형에게 대드는거냐? 그러다 목이 떨어지고 싶어서?” “내 목은 떨어지는데, 네 목은 쇠붙이라도 되는 냥 붙어있을줄 아나보지?” 하하하하! 휘와 호탕하게 웃음을 나눈뒤였지만, 결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휘가 방을 나간후 결은 더욱 험악해진 얼굴로 혼잣말을 되뇌었다. “원이라... 조의두대형...모사달이라...”
#9 설화(雪化)
설화(雪化)
12. 후계자
담이 눈을 뜨자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맑고 힘찬 얼굴이 걱정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담이를 내려다 보고 있다.
“아저씨는...?”
“몸은 어때? 아프지 않아?”
담이는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기억나?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됐는지...”
“아뇨... 여기가 어디에요? 아저씨는 어떻게 오신거에요? 아저씨가 절 데려오신건가요?”
이때 무록이 종과 함께 탕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들어오며 담이의 말을 들은 듯 했다.
“후후... 주부의 장자로 장차 대모달이 되실 분께 아저씨라니... 결님이 들으시면 박장대소 하시겠군요.”
담이는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무록의 말뜻을 생각하려는 듯 미간을 모았다.
“흠흠... 무록은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그래...”
“아가씨 이름은 뭐죠?”
“...담...담이에요.”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비명처럼 한마디 말을 내뱉었다.
“아버지!”
“......기억이 나니?”
담이는 갑자기 휘의 팔을 부여잡고 안타깝게 소리쳤다.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죠? 어디 계신지 아세요?”
휘는 고개를 저었다.
담이는 휘의 품 안으로 쓰러지듯 무너졌다.
“아아... 제발... 우리 아버지를 구해주세요... 어디 계시는지... 무사하신지...”
며칠간 죽은 듯 잠만 잤음에도 담이에게서 묘한 향기가 났다.
휘는 아찔해졌다.
휘가 담이의 어깨를 다독이며 진정시키는 동안, 결이 들어왔다.
결 역시도 다른 이유로 아찔해졌다.
무록은 방안의 이상한 공기를 눈치채고, 탕을 들고 담이에게 다가가 앉았다.
“자, 진정하고 따뜻한 탕을 마셔요. 그리고... 저기 계신분은 우리 부족의 형으로 아가씨를 구해오신 분입니다. 먼저 이걸 들고나서 예를 갖추도록 하지요.”
담이는 힘없이 고개를 저어 무록이 내민 탕을 거부했다.
그리고 목석처럼 서 있는 결에게 시선을 돌렸다.
담이의 시선을 맞받자 결은 심호흡을 하며 잠시 자신을 추스렸다.
“...마침내 깨어났군.”
그리고 마침내 만났군...
담은 고개를 깊이 숙여 절을 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가 그럼... 절노부인가요?”
세 청년의 표정이 묘해졌다.
“여긴... 계루부다.”
담이가 또다시 놀라며 눈이 동그래졌다.
“분명... 서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방향을 잘못 잡았군요...” 라고 무록은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운명이 방향을 잡아준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는 절노부로 가야만 해요! 아버지와 만나야 해요!”
“안타깝지만 넌 여기외에는 갈곳이 없다.”
“어째서요?”
“...네가 도망친 노비라는 것을 우리도 알고있듯 절노부에서도 알고있다.”
“아버지는 모함을 받으셨어요!”
“하지만 이미 도망친 죄인을 잡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난 죽어도 절노부로 가야겠어요!”
담이의 표정은 결연하다 못해 험악하기까지 했다.
“날 계루부로 넘길건가요?”
휘가 결의 말보다 빨랐다.
“우린 널 살리고자 하는 거야.”
“전 죽어도 좋아요. 절노부로 가다 죽겠다고 분명히 말했어요.”
“...할 수 없군. 몸이나 낫거든 얘기하자.”
“전 이제 괜찮아요!”
담이는 무리하게 일어섰다가 그만 비틀거리며 무록의 어깨를 짚고 말았다.
무록이 미소 지었다.
“보통의 소녀였다면 사나흘은 운신하기 힘들었을텐데, 이 정도면 회복이 빠르지 않습니까?”
결은 대답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종을 불러들였다.
“이 아이를 내가 말한 곳으로 데려가라.”
담이는 불안한 듯 결을 쳐다 보았다.
“어디로 가나요? 여기 있으면 안되나요?”
“여긴 무록의 처소다. 네가 정신을 잃고있어, 무록이 특별히 방을 내어준 것이다. 이젠 어느정도 회복하였으니 거처를 옮겨야 하지 않겠느냐?”
담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아... 그랬군요... 정말 죄송해요.”
무록이 담이의 손을 잡으며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몸이 빨리 낫고 있어서 다행이에요. 내가 상태를 보러 들르도록 하죠.”
담이는 무록이 덮어주는 두루마기를 어깨에 걸치고 종들의 부축을 받아 방을 나섰다.
담이는 노비들이 쓰는 거처로 자신을 옮기는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종들이 담이를 안내한곳은 놀랍게도 결의 처소에 딸려있는 별채였다.
계루부의 관리들은 야만적이라 예도 인정도 없을 줄 알았는데...
거기다 휘가 계루부 사람인데다 주부의 장자라니... 그것 역시 놀랄일이었다.
“따뜻한 물을 채워놓았으니 몸을 닦으세요. 그리고 새 옷도 침상위에 있습니다.”
목욕시중을 들려는 종들을 한사코 물리치고 담이는 혼자 통에 들어갔다.
무슨 약초를 풀었는지 물 빛깔은 연한 초록빛이었다.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이름모를 꽃에선 은은한 향기가 났다.
담이는 긴장된 근육이 풀리고 마음이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호사속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몸만 더 가벼워지면... 아버지와 아옥이를 찾아 나서리라...
담은 커다란 포로 몸을 감싸고 통 앞에 드리워진 천을 들추며 방으로 나왔다.
순간, 담은 충격으로 몸이 얼어붙었다.
족장의 후계자였다.
아무리 자신의 별채를 내줬다고는 하지만 여자아이가 목욕을 하는동안 들어올 권리는 없단 말이다! 하지만 담은 화를 내지도 못하고 애꿎은 포만 꽉 움켜쥔채 서 있었다.
이미 해가 지고 달이 떠, 방안은 낮은 달빛과 두터운 침묵으로 가득찼다.
달빛은 짖궂게도 훤히 드러난 담이의 매끄럽고 하얀 어깨를 비추고 있었다.
“예...예의가 없군요. 족장의 후계자는 아무 때나, 아무곳이나 들어갈 권리가 있나요?”
“...물론이다.”
담이는 할 말을 잃었다.
희미한 빛속에서도 후계자에게선, 위험할 정도의 강함과 위엄이 동시에 느껴졌다.
갑자기 후계자가 한숨을 쉬었다.
“춥다. 옷을 입어라.”
그리고 후계자는 창쪽으로 다가가 등을 보였다.
담이는 잠시 망설이다 급한걸음으로 다가가 두서없이 옷을 입기 시작했다.
결은 고개는 돌리지 않았지만 사그락 대는 소릴 들으며 나지막히 미소짓고 있었다.
“흠, 흠...”
“돼... 됐어요.”
이런... 젠장할...
옷을 입으면 겨우 포로 가렸을때보다는 보기가 수월할 줄 알았더니...
머리를 올려 드러난 가느다란 목선이 다시 결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여긴 왜 오신거죠?”
“...네 아비의 소식을 알아보라 사람을 풀었다. 그러니 떠나는 것을 조급히 생각하지 마라. 너도 쫓기는 몸이니 무사히 절노부땅에 들어간다 한들, 아비를 찾는게 수월치 않을거다.”
“어째서... 어째서 제게 이렇듯 사치스런 호의를 베푸시는거죠?”
“......인연이라고 해두자.”
“나같은 하급관리의 딸과 부족의 형이 대체 어떤...”
“밤이 늦었으니 이만 쉬거라. 배가 고프면 언제든지 종에게 말하고.”
결은 무슨 말인가를 더 할 듯 했으나 그대로 방을 나갔다.
담은 결이 나가자 그제서야 방안에 공기가 밀려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와 아옥이에 대한 걱정으로 담이에게는 길고 힘든 밤이었다.
13. 담이의 청
담이가 결에게 구출된 후 여러날이 흘렀다.
무록의 말처럼 담이는 과연 회복이 빨랐다.
그날 이후 결은 찾아오지 않았지만, 무록이 몇 번 들려 담이의 회복상태를 돌보아주었다.
또 다시 찾아온 무록은 담이와 함께 뒤뜰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무록님은, 부모님이 함께 사시나요?”
“...아니에요. 부모님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 미안해요...”
“아니에요. 내가 워낙 늦게 태어났기 때문에 두 분 다 나이가 많으셨지요. 아버지가 병으로 누워계시기도 했지만, 두 분 다 무척 행복하게 돌아가셨답니다.”
“무록은 정말 미래가 보이나요? 나도 내 미래를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저도 바로 앞에 일어날 일은 보이지 않습니다. 아주 먼 미래를 어렴풋이 보는 것 뿐이죠.”
무록은 점괘에 담이가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담이가 확실히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꿈은 담이를 가리키고 있다는걸 무록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가씨 팔에 있는 상처는 뭐죠? 어깨뒤로도 똑같은 상처가 있던데...”
“아아... 이거요? 뱀에 물린자국이에요.”
“...!”
“후계자는 어떤 분이에요? 보기엔 굉장히 무뚝뚝하고... 무섭기도 해요.”
무록은 동요한 빛을 감추며 미소지었다.
“어렸을때부터 누가봐도 후계자감이었어요. 열 살때부터 병사를 통솔하고, 족장님이 먼 길을 떠날땐 모시고 다니곤 했으니까요. 아가씨 부족인 관노부도 그때 이미 여러차례 다녀왔답니다. 물론 내가 눈으로 다 본건 아닙니다. 전 결님보다 나이가 어립니다. 후후후...”
이때 휘가 들어왔다.
담이에게서 반가움의 기색이 흘렀다.
그나마 휘라면 마을에서 만난 유일한 사람 아닌가.
그리고 무서운 후계자보다는 말하기도 편했다.
“야아... 정말 체력이 무쇠인게군. 벌써 이렇게 돌아 다니다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무록이 엉터리인 것 아니야? 병자의 몸을 함부로 움직이게 하다니...”
“아, 아니에요- 제가 답답하다고 나오자 졸랐어요. 그리고 이젠 몸도 가볍고 거뜬한걸요~”
“착한 소녀네... 엉터리 편을 들어주다니.”
담이가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을 짓자, 무록과 휘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엉터리는 이만 물러 가렵니다.”
“어라? 도망치는거야?”
“엉터리를 필요로 하는 분이 계셔서요... 누군지 아시지요?”
“풉... 그럼, 그녀석도 엉터리인게지.”
무록은 문을 향해 걸어가며 짖궂게 소리쳤다.
“아아, 휘님 그럼 그 말을 족장님께 전해 드리지요!”
“헉...! 겨, 결이 아니었단 말야?”
“큭...”
이번엔 휘의 당황하는 얼굴을 보며 담이가 웃음을 터트렸다.
“젠장. 무록과는 말장난을 하면 안된다니까. 항상 내쪽만 곤란해지니...”
“푸풋... 먼저 트집을 잡은건 휘님이잖아요~”
“그런데... 여긴 굉장히 조용한데... 종들은 다 어디갔나?”
“제가 내보냈어요.”
“아니, 왜? 그러고보니... 결이 내린 옷들도 다 물리쳤다고 하던데...”
“전 갈아입을 옷 두 벌이면 돼요. 호사를 누릴 처지는 아니잖아요.”
“...아버지 때문에 그러니?”
“꼭 그것때문만은 아니구요... 모함을 받았다고 해도, 어차피 몰락한 하급귀족의 혈육으로 노비신세인걸요...”
“진실은... 언젠가는 밝혀지는법이야.”
“그럴까요? 작은 마을의 조세를 걷는 자에게 씌워진 누명을 누가 벗기겠어요? 아버지를 따르는 사람들은 고작 주변 마을의 순박한 농부들이에요. 고관들에게는 미움을 받고, 힘없는 하층민들에게 사랑받는 자는 억울해도 그 뿐이에요.”
담이 말이 정확하므로 휘는 더 이상 위로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 참... 이거...”
휘는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담이에게 건넸다.
“어머, 이건...!”
휘가 주었던 단검이었다.
분명 자신을 향해 활시위를 겨누고 있던 자에게 날렸는데...
“저, 저는... 이걸 사람을 향해 던졌었는데... 혹시, 그 자가 죽었나요?”
휘는 잠시 단검을 발견했던 때를 떠올렸다.
단검은 정확히 죽은 사내의 심장가운데 박혀 있었다.
휘는 담이가 두려움으로 떨고 있음을 알았다.
“아니야... 이건 산 속 나무에 박혀 있었어. 마침 지나다 발견한건데, 내 칼이라 금세 알아봤지.”
“아아... 그랬군요. 다행이에요... 그땐 너무 다급해서...”
“담아.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죄가 아니야. 다음에 그런 상황이 다시 와도 넌 살아남기 위해 죽을힘을 다 해야 한다. 알았니?”
“...네. 하지만, 그래도 죽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담이는 겨우 안도하며 웃음을 지었다.
“저... 전에 제 목숨을 구해주겠다고 약속하신거 기억하세요?”
“그래.”
“그럼 그 약속이라 생각하시고 제 청 하나만 들어 주실래요?”
“좋다. 뭐든지 말해라.”
“... 저와 함께 길을 떠난 몸종 아옥이를 찾아주세요. 저와 산어귀에서 헤어졌는데... 우린 절노부 경계에 있는 파사달이란 마을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었거든요-”
“파사달이라면...”
“어쩌면 아직 거기까지 못갔을거에요. 아옥이는 영리하니, 어쩌면 우리가 헤어진 곳에 남아있을지도 모르구요. 제발... 아옥이도 저희 집안 때문에 고향에 돌아갈수도 없는 처지에요. 그 앨 찾아주세요... 네?”
“...그러마. 꼭 찾아서 데려올께.”
“저, 정말이죠?”
담이 눈에 감격의 눈물이 어렸다.
“혹시, 파사달이란 곳까지 가시게 되면요, 그곳에 중림이란 약재사가 있대요. 그 약재사에게 제 말을 좀 전해 주시겠어요?”
“뭐라 전하리?”
“원이 오라버니에게 제가 무사하다는걸 말해 주라 하세요.”
“...원이?”
“저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하실거에요. 제가 무사함을 알리고 싶어요.”
“하지만, 계루부 사람에게 네 행방을 알리면 안된다는것쯤은 너도 알텐데?”
“원이 오라버니는 괜찮아요!”
“......알았다.”
“...원이라...”
결은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눈썹을 찡그리고 있었다.
“왜, 아는자야?”
“원이라... 아아... 그 자로군.”
“누군데?”
“계루부 조의두대형 모사달이란 자의 장자다. 나와는 육년전 잠깐 스친적이 있었지.”
“허어... 그런 대단한 집안의 장자와 담이는 어떤 관계인거지?”
“......알 수 없지. 그래, 알았다. 담이 청대로 해주어라.”
“이놈, 무게는 왜 잡아? 내가 너에게 허락을 구하러 온 줄 알아?”
“허허... 감히 형에게 대드는거냐? 그러다 목이 떨어지고 싶어서?”
“내 목은 떨어지는데, 네 목은 쇠붙이라도 되는 냥 붙어있을줄 아나보지?”
하하하하!
휘와 호탕하게 웃음을 나눈뒤였지만, 결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휘가 방을 나간후 결은 더욱 험악해진 얼굴로 혼잣말을 되뇌었다.
“원이라... 조의두대형...모사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