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정거장에서

럽이2006.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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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정거장에서

김점미

그랬다. 우리가 서서히 서로의 열기 속에서 빠져 나오려 할 때쯤, 지상에는 눈이 내렸다. 나는 정거장 저편에 있는 너를 보고도 보지 못했다. 너에 관한 기억들이 바람 속으로 흩어지면서 머리가 텅 비었다. 레일이 놓인 불과 1미터의 거리 사이에 세상의 시작과 끝이 있었다. 그리고 불과 1분 후면 기차가 지나가고 다시 쏟아지는 사람들 속으로 우리의 존재는 흩어지고 말겠지. 한 인간이 타인에게 흡수될 수 있는 시간은 얼마일까. 저 사람들 사이에서 또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너를 다시 만날 것인가. 차창으로 나를 따라 온 저 많은 하얀 꽃들. 유리를 뚫고 하나씩 흩어지는 꽃잎들. 눈이 뽀도독 내는 소리가 울려온다. 어쩌면 너는 다음 기차에 탔을 것이고 꽃잎이 내 안부를 전했을 것이다. 이제 다시 1분 후면 기차는 나를 우리들의 따뜻하고 그리운 집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집안에서 모락모락 연기를 올리며 너는 내 육체를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이었다. 꺾어진 나뭇가지에 앉아 파리하게 떨고 있던 새 한 마리가 창유리에 부딪혀 철철 피 흘리는 것을 보고 있어야 할 것이었다.

그랬다. 우리가 서로의 찬 몸을 채 데우기도 전에 나는 떠나버린 기차 꽁무니만 잡고 있는 정거장의 이편에 서 있었다. 나의 금지된 사랑이 줄 수 있었던 입구와 출구. 정거장 저편에 아무리 많은 네가 섰더라도 모두 한결 같은 얼굴들, 실체가 사라진 유령의 얼굴들. 이 정거장을 벗어나면 기억들은 와르르 레일 속으로 빠져들어야 한다.

대설주의보가 내려지고 스르르 기차가 움직인다. 텅 빈 너의 자리로 폭설이 쏟아진다. 정거장 이편에 눈 높이 만한 나무 한 그루 우뚝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