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는 반면, 야고보서 2장은 아브라함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두 가지의 칭의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양자 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경에서는 사람의 칭의를 두 가지로 논하고 있다. 하나는 믿음으로 인한 칭의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로 인한 칭의이다. 이것을 우리는 아래의 몇 구절의 성경 말씀으로 증명할 수 있다.
사도행전 13장 39절은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는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다]고 말한다. 로마서 3장 28절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두 바울이 한 말이다. 이것은 칭의가 믿음에 의한 것임을 분명이 보여준다.
고린도 전서 4장 4절은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앞의 두 말씀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상급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있는 칭의는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선한 행위의 상급이다. 이것 또한 바울이 말한 것이다. 바울이 한 면으로는 믿음으로 인한 칭의를 언급하였고, 또 다른 한 면으로는 행위로 인한 칭의를 언급하였음을 볼 수 있다.
성경은 상급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행위로 말미암은 칭의를 언급했으며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말하면서도 행위로 말미암은 칭의를 언급했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에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믿음으로 인한 칭의를 말하고 있고, 야고보서는 행위로 인한 칭의를 언급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믿음으로 인한 칭의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야고보가 그 부족함을 보충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행위로 인한 칭의를 언급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부정확한 것이다. 왜냐하면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쓸 때,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사람들에게 칭의가 믿음으로 인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아마도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모르고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것을 모르고 또한 보혈의 효능을 몰라서 믿음만으로 불충분하고 사람의 행위가 추가하여야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생각할까봐 아브라함의 사실을 인용하여 칭의가 믿음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야고보가 행위로 인한 칭의를 말할 때에도 아브라함의 일을 인용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칭의에 있어 믿음으로 인한 것과 행위로 인한 것이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울과 야고보가 말한 것은 한가지 사실이나 서로 충돌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이 양자의 내면의 관계가 도대체 어떤 것이며 이 두 가지는 어떻게 연계되는가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먼저 로마서 4장 말씀을 보기로 하자.
2절부터 4절까지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고 말한다. 9절부터 10절까지는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고 말한다. 이 부분은 우리에게 아브라함이 아직 할례 받기 전에 이미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가장 중요한 행위로 보고 있다. 유대인들이 볼 때 할례를 받지 않는 이방인들은 돼지나 개와 같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할례받기 전에 이미 믿음으로 인해 칭의를 얻었다.
11절은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할례는 마치 하나님이 하나의 인을 찍는 것과 같아서, 믿음으로 인해 의롭게 되는 것은 다시 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한 것은 결코 이것으로 인해 그를 의롭다고 칭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에 하나의 인을 새겨서 믿음으로 인한 칭의의 사실이 변할 수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후에 설령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지 않았을지라도 아브라함은 여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칭의를 확고하게 한다는 것이다.
12절은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에게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할례받는 것 또한 믿음이 있어야함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우리에게 한 사람의 죄인이 율법을 행함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믿는이들이 율법을 행함으로 거룩케 될 수 없음을 우리에게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고 믿음으로 인해 거룩케 된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시작하였는데 육신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될 수 있는가? 이미 인을 쳤기 때문에 믿음을 근복적으로 삼은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얻게 되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야고보서 2장을 보기로 하자.
14절은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말한다. 야고보가 이 말씀을 쓴 목적은 무엇인가? 그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 말한 것인가? 어떤 사람은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나 행위가 없는데 만약 그 사람을 금지시키지 않는다며 교회는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지켜져야 하며 사람 앞에서 공허한 말로 자랑해서는 안 된다. 믿음은 반드시 행위와 어울려야 한다. 무릇 단지 스스로 믿음만 있다고 말하면서 행위가 없다면 그 믿음은 그를 구원할 수 없다.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말은 몇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바울은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빌1:19) 라고 말했다. 설마 바울이 아직 구원받지 않았단 말인가? 이것은 당연히 믿는이들의 영생을 얻는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감옥으로부터 석방된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1장 10절에서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죄의 형벌로부터 벗어나도록 구원하시려고 죽으셨고, 지금은 하늘에서 우리의 중보가 되셔서 우리를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도록 구원하셨으며, 장래에 주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의 몸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여기에서 결코 이러한 뜻으로 말하지 않았으며 여기에서의 구원은 모두 주님이 그들의 몸을 환난으로부터 구원해 내신다는 것이다. 이 구절의 문맥을 읽어보면 그들은 이전에 아시아에서 환난을 만나 살 소망까지도 끊어질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주님이 그들을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구원하셨기 때문에 바울은 주님이 지금도 여전히 그들을 고난으로부터 구원해 내실 것임을 믿으며 또한 주님이 장래에도 그들을 고난으로부터 구원해 내실 것이라고 믿었음을 알 수 있다. 야고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은 환경 가운데에서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는 말로서 우리가 아래 문장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15절부터 16절까지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누구든지]는 바로 빈말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을 결코 옷과 음식이 부족한 형제 자매에게 공급하지 않으면서 빈말로 너희들이 평안히 돌아가길 원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는 결코 장래에 천국 가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육체가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게 하는 문제를 말하고 있다. 야고보가 말하고자 한 것은 당신이 말로만 믿음을 가졌다고 하고 당신의 형제 자매의 어려움을 도와주지 않으면 그것은 공허한 일이라는 것이다.
17절은 [이와 같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야고보가 내리는 판단이다. 야고보가 말하고자 한 것은 [너희들은 그들이 배부르고 따뜻하게 되길 믿으면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지 않으면, 이러한 행위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죽은 것이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믿음은 마음 속에서 자애로운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따뜻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게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며 동시에 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몸에 필요로 하는 것을 그들에게 공급하게 한다.
18절은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한다. 빈말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어떤 사람이 그에게 반박할 것이다. 당신이 당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당신의 믿음은 어디로부터 나타나는가? 당신이 단지 입에서만 말한다면 실제로 어려움에 봉착하였을 때, 당신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믿음이 없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믿음이 있는 체 하였다. 당신에게 믿음이 있다면, 당신은 왜 당신의 소유를 그에게 주지 않는가? 그는 현재 입을 옷이 없어 헐벗고 있으며, 일용할 양식이 부족하여 주리고 있는 반면 당신은 적어도 입을 옷이 있고 또한 먹을 양식이 있는데 왜 당신은 당신의 소유를 그에게 주지 않는가? 당신은 당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무엇으로 당신에게 믿음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가? 당신이 믿음은 단지 공허한 빈 말이며, 죽은 것이고, 궁핍한 사람에게 아무런 이익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나에게 행위가 있어 나는 형제 자매의 필요를 공급함으로 말미암아 나의 믿음을 나타낸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헐벗고 굶주리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으며, 지금 형제 자매들의 필요가 있다면 나는 나의 소유를 그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나의 행위는 나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나의 행위는 나의 믿음의 표현이다. 나는 나의 행위로 말미암아 나의 믿음을 당신에게 보여 준다. 당신이 당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당신의 믿음의 표현은 어디에 있으며 당신은 무엇으로 당신의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가?
19절은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단지 한분임을 믿었는데 이것은 올바른 것이다 그러나 귀신은 하나님이 단지 한분밖에 없음을 믿으나 그들은 여전히 귀신이다. 야고보가 말하는려는 것은 행위가 없는 믿음은 마치 귀신이 하나님을 믿어도 여전히 귀신이라는 것과 같다라는 것이다.
20절은 [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라고 말한다. 허탄한 사람은 빈 말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별칭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사실상 그의 마음에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사람들에게 공급한다면 행위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나중에 행위가 있어야 한다. 진실한 믿음은 반드시 진실한 행위가 있어야 한다. 스스로 믿음이 있다는 빈말만 하고 행위가 없는 사람은 바로 그의 믿음이 죽은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틀린 것이므로 그의 믿음은 죽은 것이다.
21절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말한다. 만약 야고보가 아브라함의 사실을 인용하지 않았다면 혹 어떤 사람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읽고 야고보가 말한 것은 틀린 것이라고 말하고서,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믿음으로 충분하며 더 이상 어떤 행위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야고보가 여기에서 말한 의미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옳은 것이지만 아브라함 또한 행위의 칭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결코 아브라함의 믿음에 의한 칭의를 뒤엎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린 사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의 믿음이 행위로 나타남을 보여준 것일 뿐이다. 아브라함의 그러한 행위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표현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에 의한 칭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행위로 인한 칭의도 받았다. 야고보가 믿음에 의한 칭의를 뒤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행위로 인한 칭의를 말함으로 참된 믿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분명히 하였기 때문에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화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린 이러한 행위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의롭다는 칭함을 받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떠한 행위인가? 이것은 믿음의 행위이다. 히브리서 11장 17절부터 19절까지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말한다. 야고보가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사실을 인용한 것은 우리에게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위가 있어야 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쁘게 받았고 하나님이 그에게 한 말을 믿었다.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엘리에셀이나 이스마엘도 아니었으며 사라에게서도 차후로 출생할 그 어떤 아들도 아니었고 오직 이삭만 이 가업을 계승할 약속의 후예였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하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이 어떠하며 그의 믿음이 어떠한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의 후사가 되도록 정한 이삭을 제단에서 불살라 죽일 것을 요구하시며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그가 만약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길 원할 것이나 이삭을 불살라 죽이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응하고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가? 그가 만약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려면 하나님의 요구에 응할 수 없다. 사람의 시각에서 볼 때 이 두 가지는 모순된 것이며 동일 될 수 없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 그러나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 안에서도 이 두 가지가 모순된 것이 아니고 통일된 것이다. 약속한 분이 하나님이고 제단에 바칠 것을 요구하신 분도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그분 자신을 위반하지 않을 것이며, 약속과 드림 사이에는 또다른 하나의 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활이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로 내가 이삭을 죽여서 불사르고 번제로 드려도 나는 당신이 약속한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는 말씀이 응할 것이며 당신이 이삭을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실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드릴 때에는 필사적인 마음을 먹고 드린 것이다. 그는 실제로 이삭을 묶었고 정말로 칼을 들어 죽이려 하였다. 하나님께 향한 그의 마음은 절대적이었고 조금도 보류하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 마음은 견고했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부르며 그에게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고 말했을 때 그는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했다. 아브라함이 그의 독자를 바친 것은 믿음의 행위이고, 이것이 바로 행위로 인한 칭의이다.
22절은 [내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말한다. [보거니와]라는 글자는 바로 앞에 내용에 이어짐을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린 것이 아브라함의 행위로 인한 칭의의 이유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과 행위가 병행한는 것임을 볼 수 있으며, 혹은 믿음이 행위와 함께 일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행위는 아브라함의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믿음은 행위로 말미암아 완전케 된다] 시험을 거치지 않은 믿음은 믿을 수 없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것은 그의 믿음을 표현한 것이며 그의 믿음은 그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증명되었다.
23절은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으니]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이 의로 간주되었다는 말은 창세기 15장에 기록되고 있다. 이것과 창세기 22장의 이삭을 드리는 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야고보는 이삭을 드린 것이 행위로인한 칭의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왜 창세기 15장을 믿음에 의한 칭의로 이용하였는가? 여기에서 야고보는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라고 말하였다. 행위로 인한 칭의는 믿음에 의한 칭의를 성취한다. 마치 믿음에 의한 칭의가 하나의 예언이라면 행위에 의한 칭의는 이 예언의 성취이다. 사람에게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행위가 있게 된다. 행위는 바로 믿음의 실재를 설명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 또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으며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하나님의 벗이라 일컬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린 이러한 행위가 있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행위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성취한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것은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들에게 입증해 준 것이다.
24절은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말한다. 창세기 22장은 창세기 15장의 성취이고, 행위는 믿음을 표현하고,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행위는 믿음을 온전케 하기 때문에 사람의 칭의는 단지 믿음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행위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야고보가 사람의 칭의는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칭의는 단지 믿음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행위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야고보가 말한 의미는 믿음으로 인한 칭의가 있은 후 반드시 행위로 인한 칭의로 증명해야만 완전한 것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았고 하나님이 그를 시험할 때 행위로 인한 칭의를 받았다.
25절은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말한다. 야고보는 믿음으로 인한 칭의뿐만 아니라 행위의 칭의를 지니고 있는 아브라함과 같은 가장 선한 사람을 먼저 인용하였다. 또한 지금 사자들을 접대하고 그들을 다른 길로 보내주었기 때문에 행위로 인한 칭의를 받은 기생 라합과 같은 여인을 인용하였다. 이 행위는 어떤 행위인가? 히브리서 11장 31절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행위 또한 믿음의 행위이다. 믿음과 행위는 나눌 수 없는 것으로 한 가지 일의 두 방면이다. 그러므로 똑 같은 한가지 사실을 히브리서는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야고보서는 행위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행위는 믿음의 표현이고 믿음은 행위의 근원이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믿음의 행위가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에 의한 칭의가 있어야 하고 또한 행위에 의한 칭의가 있어야 한다.
26절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한다. 야고보서는 2장 14절부터 계속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피상적이고 공허한 말이며, 죽은 것이다. 행위가 있는 믿음은 살아있는 것이다 행위는 믿음을 입증하며, 행위는 믿음을 온전케 한다. 야고보는 아브라함과 라합의 사실을 실례로 들어 우리에게 증명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의 비유를 들었다. 즉 몸에 영혼이 없으면 죽은 것이고 행위가 없는 믿음 또한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살아 있는 믿음은 반드시 행위를 가져야 한다. 무릇 행위가 없는 믿음은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죽은 것이다.
로마서 4장과 야고보서 2장에 관하여
로마서 4장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는 반면, 야고보서 2장은 아브라함이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두 가지의 칭의는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양자 간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성경에서는 사람의 칭의를 두 가지로 논하고 있다. 하나는 믿음으로 인한 칭의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로 인한 칭의이다. 이것을 우리는 아래의 몇 구절의 성경 말씀으로 증명할 수 있다.
사도행전 13장 39절은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는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다]고 말한다. 로마서 3장 28절은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두 바울이 한 말이다. 이것은 칭의가 믿음에 의한 것임을 분명이 보여준다.
고린도 전서 4장 4절은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앞의 두 말씀과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상급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있는 칭의는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선한 행위의 상급이다. 이것 또한 바울이 말한 것이다. 바울이 한 면으로는 믿음으로 인한 칭의를 언급하였고, 또 다른 한 면으로는 행위로 인한 칭의를 언급하였음을 볼 수 있다.
성경은 상급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행위로 말미암은 칭의를 언급했으며 또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말하면서도 행위로 말미암은 칭의를 언급했다. 이것이 우리가 여기에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믿음으로 인한 칭의를 말하고 있고, 야고보서는 행위로 인한 칭의를 언급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은 바울이 믿음으로 인한 칭의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야고보가 그 부족함을 보충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행위로 인한 칭의를 언급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부정확한 것이다. 왜냐하면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쓸 때,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사람들에게 칭의가 믿음으로 인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바울은 아마도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행하신 것을 모르고 그리스도가 성취하신 것을 모르고 또한 보혈의 효능을 몰라서 믿음만으로 불충분하고 사람의 행위가 추가하여야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생각할까봐 아브라함의 사실을 인용하여 칭의가 믿음에 의한 것임을 증명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야고보가 행위로 인한 칭의를 말할 때에도 아브라함의 일을 인용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칭의에 있어 믿음으로 인한 것과 행위로 인한 것이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울과 야고보가 말한 것은 한가지 사실이나 서로 충돌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는 이 양자의 내면의 관계가 도대체 어떤 것이며 이 두 가지는 어떻게 연계되는가를 보아야 한다.
우리는 먼저 로마서 4장 말씀을 보기로 하자.
2절부터 4절까지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고 말한다. 9절부터 10절까지는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고 말한다. 이 부분은 우리에게 아브라함이 아직 할례 받기 전에 이미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유대인들은 할례를 가장 중요한 행위로 보고 있다. 유대인들이 볼 때 할례를 받지 않는 이방인들은 돼지나 개와 같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할례받기 전에 이미 믿음으로 인해 칭의를 얻었다.
11절은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할례는 마치 하나님이 하나의 인을 찍는 것과 같아서, 믿음으로 인해 의롭게 되는 것은 다시 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한 것은 결코 이것으로 인해 그를 의롭다고 칭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에 하나의 인을 새겨서 믿음으로 인한 칭의의 사실이 변할 수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후에 설령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지 않았을지라도 아브라함은 여전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칭의를 확고하게 한다는 것이다.
12절은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에게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할례받는 것 또한 믿음이 있어야함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할례받기 전에 믿음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로마서는 우리에게 한 사람의 죄인이 율법을 행함으로 인하여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믿는이들이 율법을 행함으로 거룩케 될 수 없음을 우리에게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고 믿음으로 인해 거룩케 된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시작하였는데 육신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될 수 있는가? 이미 인을 쳤기 때문에 믿음을 근복적으로 삼은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얻게 되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야고보서 2장을 보기로 하자.
14절은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말한다. 야고보가 이 말씀을 쓴 목적은 무엇인가? 그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 말한 것인가? 어떤 사람은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나 행위가 없는데 만약 그 사람을 금지시키지 않는다며 교회는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지켜져야 하며 사람 앞에서 공허한 말로 자랑해서는 안 된다. 믿음은 반드시 행위와 어울려야 한다. 무릇 단지 스스로 믿음만 있다고 말하면서 행위가 없다면 그 믿음은 그를 구원할 수 없다.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말은 몇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바울은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빌1:19) 라고 말했다. 설마 바울이 아직 구원받지 않았단 말인가? 이것은 당연히 믿는이들의 영생을 얻는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감옥으로부터 석방된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1장 10절에서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주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죄의 형벌로부터 벗어나도록 구원하시려고 죽으셨고, 지금은 하늘에서 우리의 중보가 되셔서 우리를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나도록 구원하셨으며, 장래에 주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의 몸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은 여기에서 결코 이러한 뜻으로 말하지 않았으며 여기에서의 구원은 모두 주님이 그들의 몸을 환난으로부터 구원해 내신다는 것이다. 이 구절의 문맥을 읽어보면 그들은 이전에 아시아에서 환난을 만나 살 소망까지도 끊어질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나 주님이 그들을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구원하셨기 때문에 바울은 주님이 지금도 여전히 그들을 고난으로부터 구원해 내실 것임을 믿으며 또한 주님이 장래에도 그들을 고난으로부터 구원해 내실 것이라고 믿었음을 알 수 있다. 야고보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은 환경 가운데에서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는 말로서 우리가 아래 문장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15절부터 16절까지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누구든지]는 바로 빈말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들을 결코 옷과 음식이 부족한 형제 자매에게 공급하지 않으면서 빈말로 너희들이 평안히 돌아가길 원한다고 말한다. 여기에서는 결코 장래에 천국 가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육체가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게 하는 문제를 말하고 있다. 야고보가 말하고자 한 것은 당신이 말로만 믿음을 가졌다고 하고 당신의 형제 자매의 어려움을 도와주지 않으면 그것은 공허한 일이라는 것이다.
17절은 [이와 같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야고보가 내리는 판단이다. 야고보가 말하고자 한 것은 [너희들은 그들이 배부르고 따뜻하게 되길 믿으면서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지 않으면, 이러한 행위가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죽은 것이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믿음은 마음 속에서 자애로운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따뜻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게 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며 동시에 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몸에 필요로 하는 것을 그들에게 공급하게 한다.
18절은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한다. 빈말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어떤 사람이 그에게 반박할 것이다. 당신이 당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당신의 믿음은 어디로부터 나타나는가? 당신이 단지 입에서만 말한다면 실제로 어려움에 봉착하였을 때, 당신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믿음이 없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믿음이 있는 체 하였다. 당신에게 믿음이 있다면, 당신은 왜 당신의 소유를 그에게 주지 않는가? 그는 현재 입을 옷이 없어 헐벗고 있으며, 일용할 양식이 부족하여 주리고 있는 반면 당신은 적어도 입을 옷이 있고 또한 먹을 양식이 있는데 왜 당신은 당신의 소유를 그에게 주지 않는가? 당신은 당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무엇으로 당신에게 믿음이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가? 당신이 믿음은 단지 공허한 빈 말이며, 죽은 것이고, 궁핍한 사람에게 아무런 이익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나에게 행위가 있어 나는 형제 자매의 필요를 공급함으로 말미암아 나의 믿음을 나타낸다. 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헐벗고 굶주리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으며, 지금 형제 자매들의 필요가 있다면 나는 나의 소유를 그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다. 나의 행위는 나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나의 행위는 나의 믿음의 표현이다. 나는 나의 행위로 말미암아 나의 믿음을 당신에게 보여 준다. 당신이 당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당신의 믿음의 표현은 어디에 있으며 당신은 무엇으로 당신의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가?
19절은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단지 한분임을 믿었는데 이것은 올바른 것이다 그러나 귀신은 하나님이 단지 한분밖에 없음을 믿으나 그들은 여전히 귀신이다. 야고보가 말하는려는 것은 행위가 없는 믿음은 마치 귀신이 하나님을 믿어도 여전히 귀신이라는 것과 같다라는 것이다.
20절은 [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라고 말한다. 허탄한 사람은 빈 말로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별칭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사실상 그의 마음에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사람들에게 공급한다면 행위로 말미암아 그의 믿음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나중에 행위가 있어야 한다. 진실한 믿음은 반드시 진실한 행위가 있어야 한다. 스스로 믿음이 있다는 빈말만 하고 행위가 없는 사람은 바로 그의 믿음이 죽은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틀린 것이므로 그의 믿음은 죽은 것이다.
21절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말한다. 만약 야고보가 아브라함의 사실을 인용하지 않았다면 혹 어떤 사람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읽고 야고보가 말한 것은 틀린 것이라고 말하고서,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믿음으로 충분하며 더 이상 어떤 행위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야고보가 여기에서 말한 의미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인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옳은 것이지만 아브라함 또한 행위의 칭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결코 아브라함의 믿음에 의한 칭의를 뒤엎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린 사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의 믿음이 행위로 나타남을 보여준 것일 뿐이다. 아브라함의 그러한 행위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표현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에 의한 칭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행위로 인한 칭의도 받았다. 야고보가 믿음에 의한 칭의를 뒤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행위로 인한 칭의를 말함으로 참된 믿음이 어떠한 것인가를 분명히 하였기 때문에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화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린 이러한 행위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의롭다는 칭함을 받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떠한 행위인가? 이것은 믿음의 행위이다. 히브리서 11장 17절부터 19절까지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말한다. 야고보가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사실을 인용한 것은 우리에게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위가 있어야 함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쁘게 받았고 하나님이 그에게 한 말을 믿었다.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엘리에셀이나 이스마엘도 아니었으며 사라에게서도 차후로 출생할 그 어떤 아들도 아니었고 오직 이삭만 이 가업을 계승할 약속의 후예였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하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이 어떠하며 그의 믿음이 어떠한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의 후사가 되도록 정한 이삭을 제단에서 불살라 죽일 것을 요구하시며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그가 만약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길 원할 것이나 이삭을 불살라 죽이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응하고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가? 그가 만약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려면 하나님의 요구에 응할 수 없다. 사람의 시각에서 볼 때 이 두 가지는 모순된 것이며 동일 될 수 없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 그러나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 안에서도 이 두 가지가 모순된 것이 아니고 통일된 것이다. 약속한 분이 하나님이고 제단에 바칠 것을 요구하신 분도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그분 자신을 위반하지 않을 것이며, 약속과 드림 사이에는 또다른 하나의 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활이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로 내가 이삭을 죽여서 불사르고 번제로 드려도 나는 당신이 약속한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는 말씀이 응할 것이며 당신이 이삭을 죽음으로부터 부활시키실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드릴 때에는 필사적인 마음을 먹고 드린 것이다. 그는 실제로 이삭을 묶었고 정말로 칼을 들어 죽이려 하였다. 하나님께 향한 그의 마음은 절대적이었고 조금도 보류하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을 믿는 마음은 견고했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부르며 그에게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고 말했을 때 그는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고 했다. 아브라함이 그의 독자를 바친 것은 믿음의 행위이고, 이것이 바로 행위로 인한 칭의이다.
22절은 [내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말한다. [보거니와]라는 글자는 바로 앞에 내용에 이어짐을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린 것이 아브라함의 행위로 인한 칭의의 이유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과 행위가 병행한는 것임을 볼 수 있으며, 혹은 믿음이 행위와 함께 일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행위는 아브라함의 믿음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믿음은 행위로 말미암아 완전케 된다] 시험을 거치지 않은 믿음은 믿을 수 없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것은 그의 믿음을 표현한 것이며 그의 믿음은 그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증명되었다.
23절은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으니]라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이 의로 간주되었다는 말은 창세기 15장에 기록되고 있다. 이것과 창세기 22장의 이삭을 드리는 것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야고보는 이삭을 드린 것이 행위로인한 칭의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왜 창세기 15장을 믿음에 의한 칭의로 이용하였는가? 여기에서 야고보는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라고 말하였다. 행위로 인한 칭의는 믿음에 의한 칭의를 성취한다. 마치 믿음에 의한 칭의가 하나의 예언이라면 행위에 의한 칭의는 이 예언의 성취이다. 사람에게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행위가 있게 된다. 행위는 바로 믿음의 실재를 설명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 또한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으며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하나님의 벗이라 일컬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린 이러한 행위가 있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행위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성취한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것은 하나님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들에게 입증해 준 것이다.
24절은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고 말한다. 창세기 22장은 창세기 15장의 성취이고, 행위는 믿음을 표현하고,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고, 행위는 믿음을 온전케 하기 때문에 사람의 칭의는 단지 믿음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행위에 의한 것이다. 우리는 야고보가 사람의 칭의는 믿음에 의한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칭의는 단지 믿음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행위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야고보가 말한 의미는 믿음으로 인한 칭의가 있은 후 반드시 행위로 인한 칭의로 증명해야만 완전한 것이라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함을 받았고 하나님이 그를 시험할 때 행위로 인한 칭의를 받았다.
25절은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고 말한다. 야고보는 믿음으로 인한 칭의뿐만 아니라 행위의 칭의를 지니고 있는 아브라함과 같은 가장 선한 사람을 먼저 인용하였다. 또한 지금 사자들을 접대하고 그들을 다른 길로 보내주었기 때문에 행위로 인한 칭의를 받은 기생 라합과 같은 여인을 인용하였다. 이 행위는 어떤 행위인가? 히브리서 11장 31절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행위 또한 믿음의 행위이다. 믿음과 행위는 나눌 수 없는 것으로 한 가지 일의 두 방면이다. 그러므로 똑 같은 한가지 사실을 히브리서는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야고보서는 행위로 인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행위는 믿음의 표현이고 믿음은 행위의 근원이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믿음의 행위가 없다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에 의한 칭의가 있어야 하고 또한 행위에 의한 칭의가 있어야 한다.
26절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말한다. 야고보서는 2장 14절부터 계속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피상적이고 공허한 말이며, 죽은 것이다. 행위가 있는 믿음은 살아있는 것이다 행위는 믿음을 입증하며, 행위는 믿음을 온전케 한다. 야고보는 아브라함과 라합의 사실을 실례로 들어 우리에게 증명해 보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의 비유를 들었다. 즉 몸에 영혼이 없으면 죽은 것이고 행위가 없는 믿음 또한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살아 있는 믿음은 반드시 행위를 가져야 한다. 무릇 행위가 없는 믿음은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죽은 것이다.
[출처] 39 . |작성자 kaist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