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100여년의 짧은 역사속에서 한국만큼 부흥한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선교의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은 멸망을 한치 앞둔 조선의 마지막 절정이었습니다. 1876년 조일강화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1882년에는 조미통상조약과 조독수호조약을 각각 체결하였습니다. 1884년에는 러시아, 1886년에는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함으로서 유럽미주열강들의 먹이감이 되었습니다. 자율이 아닌 타율에 의해 개방된 문호는 근대적 제도와 서양의 기술을 취득하는 계기와 함께 도래함으로서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정치군사적으로 이미 국가존립의 위기에 직면한 상태에서 경제적으로도 국가의 재정은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관료사회의 부패로 농민의 원성은 갈수록 높아만 갔습니다.
한국의 역사를 통하여 전성시대를 이루었던 불교와 유교의 정신은 형식과 명분만 남은 채 국가종교로서의 역할과 사명에 충실하지 못하였습니다. 유교는 윤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점을 드러내며 양반사회와 관료사회의 체제유지에 이용되었습니다. 불교는 산으로 들어가 세상과 담을 쌓으며 자신의 유익에만 급급하였습니다. 1953년, 내부적으로는 불교와 유교가 지배하는 구조가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나 외부의 시선은 전혀 다르게 해석되었습니다. 하멜(Hendrik Hamel)은 한국사회는 사상적 개념을 가진 그 어떤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적 공백상태속에서 백성은 희망을 잃고 나라에 기댈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한 것이었습니다.
1866년,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B.A) 선교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토마스는 북경에서 조선인 중국사신을 만난 자리에서 조선내에 로마 카톨릭의 수난사를 듣게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중국만주 주재원인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의 중재로 1865년 9월4일, 중국을 출발하여 조선의 서해안 자라리에 도착하였습니다. 로마카톨릭 교인과 만나 우리말을 배운 토마스는 경성에서 전도할 마음으로 범선을 이용해 한강으로 향하였지만 심한 폭풍으로 인해 만주에 표류하는 극적 생환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선교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토마스는 1866년,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갔습니다. 대동강 입구에서 평안도 감사의 거절로 평양까지 올라가려 하였지만 배가 모래와 진흙속에 빠지는 불상사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상선은 조선의 포화에 소실되어 버리고 토마스선교사는 선원들과 함께 전원 살해 되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에 의해 중국어 신약성경이 조선땅에 전해졌고, 1893년 11월 모페트(Samuel A. Moffett)선교사의 학습교인반에 이것을 전해 받은 조선인이 있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선교사는 북미장로교의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이었습니다 의료선교사인 알렌은 갑신정변 우정국 사건당시 민영익을 치료해 준 댓가로 왕실부 시의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으며 선교의 사명을 열어 갔습니다. 1885년 4월5일,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 등 3명이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5월3일에는 감리교 윌리암 스크랜턴(Wm B. Scranton)과 모친인 스크랜턴(Mrs. M. F. Scranton)여사가 함께 입국하였습니다.
1890년 이후 조선은 일대 변동을 겪게 되었습니다. 개화기의 학술지에서는 유교를 비판하는 글들이 게재되었고, 불교를 신봉하던 개화파 인사들도 기독교에 대한 선입견을 해소하는 견해를 조금씩 열어갔습니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선교를 허락하지 않았고 기독교는 여전히 금지되었습니다. 1898년 6월10일, 스왈론 선교사에게 외국인 국내체류인증서인 호조(護照)를 발행함으로서 마침내 선교의 자유가 부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계열강들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였으나 경쟁구도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순교자가 발생하고 조선인들의 토착적인 종교사상에 의해 복음전파가 한계점에 부딪히자 조선 주재 선교사들은 1890년, 존 네비우스 박사(Dr. John Nevius)를 초청하였습니다. 그는 "선교사업의 방법"(Methods of Mission Work)이라는 저서에서 아홉 가지의 선교정책을 제시하였습니다. ① 선교사들의 일대일 복음전도와 순회전도 ② 자립선교 ③ 자립정치 ④자립보급 ⑤ 체계적인 성경연구와 성경중심의 활동 ⑥ 성경교훈에 따른 엄격한 생활훈련과 처리 ⑦ 타교회와 기관의 협력과 일치의 노력, 그리고 선교영역이 중복되지 않는 지역분할 전도 ⑧ 지역과 프로그램 분할 이후에는 상호 절대 간섭하지 않음 ⑨ 경제적 문제와 상담에 있어서는 서로 돕는 정신
감리교는 탐색과 순회전도를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아펜젤러는 조선입국 4개월만에 2명의 학생으로 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감리교는 학교와 교육을 통한 전도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육사업은 복음사업의 부진을 가져올 만큼 정책적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리교의 교육사업의 성과는 훗날 한국의 지성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1895~6년, 교회의 세례 교인수가 폭발적으로 증가 하였습니다. 경성의 상황은 변화와 대각성의 징조였습니다. 평양은 개척전도의 단계를 지나 교회는 발전하고 성장을 피부로 느낄 정도였습니다. 조선 선교의 특징은 세례교인과 초신자들의 열정적인 복음 전도활동 이었습니다. 1900년, 한 해동안 세례교인수는 30%이상 증가되었습니다.
"신자들"(adherevts)의 동의어인 "공동체"(Community)는 주한장로교 선교사회(Presbyterian Council of Mission In Korea)의 정의로서 세례교인,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이, 학습과정의 구도자, 정기적인 출석교인, 기독교의 감화속에 속한 교인 들을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1898년, 교회공동체와 세례교인의 비율이 36:1이었습니다 1907~1942년까지 평균비율은 2.6:1이었습니다. 이것은 세례교인이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모든 비기독교적인 종교행사를 폐지시킨 비율로서 조선의 선교가 기적에 가까운 영적 부흥을 가져왔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이러한 기적적인 부흥은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
1907년, 성령의 불의 발화지점은 1903년, 원산이었습니다. 하디(R. A. Hardie)선교사를 중심으로 한주간동안 성령사경회를 개최하여 대각성회개운동을 일으켰습니다. 하디 선교사를 선두로 시작된 회개의 고백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성경학교가 곳곳에 세워지고 성경공부가 하루내내 지속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원산에서 일어난 작은 불꽃은 소멸되지 않은 채 번져 갔으며 한반도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우는 평양으로 이어졌습니다.
영국웨일즈의 부흥운동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오순절 성령운동에 영향을 받은 1907년 대 부흥운동은 1901년, 장로공의회에서 교회의 비정치화를 결의한 후 1903년 원산부흥운동과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 일본제국의 식민지화가 본격화됨으로서 일어난 구국기도회의 연장선에서 1906년 평양에서는 연합사경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때를 같이하여 목포에서도 선교사들의 부흥사경회가 거세게 일어났고 12월26일~1907년 1월15일까지 20일간 부흥사경회를 위한 정오기도회가 계속되었습니다.
1907년 1월6~15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는 겨울남자사경회가 개최되었고, 특히 14일과 15일에는 성경의 임재함을 경험함으로서 폭발적인 부흥의 절정기를 이루었습니다. 이어 17~19일까지 개최된 여자사경회에서도 이같은 성령의 역사는 동일하게 일어났습니다. 부흥회는 오전의 성경공부 사경회, 정오의 기도회, 그리고 저녁의 집회로 이어지는 3박자의 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일(1907년 1월20일)오후 예배시간 길선주 목사는 성령을 체험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용기를 드러내었습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모든 교인들이 다함께 대각성회개를 하는 성령의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났던 성령운동은 오순절성령운동과 미세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순절성령의 역사적 특징이 모든 사람의 방언에 있다면 장대현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그런 흔적을 거의 찾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조상숭배의 전통적 관습과 사주관상의 무당적 미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숭배하였던 이중적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과오를 회개함으로서 우상과 관습의 단절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급격한 진전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제국주의적 천황사상과 좌우익의 이데올로기가 성행하던 시기에 성령운동의 전개는 이러한 세속적 오염원으로 부터 차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순수한 복음, 순결한 복음,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절대자로 섬기는 전환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었습니다. 조선말기 종말적 사상에서 기독교적 부활과 재림의 교리는 억눌린 백성들의 심리적 허탈감을 달래주는 유일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성령의 부흥운동은 이들을 일깨우는데 그치지 않고 복음전파의 열정적인 증인으로 나아가게 하는 구령의 역사를 가져왔고 이것은 100만인의 구령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1907년 1월과 2월, 평양에서는 미션스쿨에도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등 성령의 거센 바람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하디 선교사와 길선주목사는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집회를 인도하며 한반도의 영적 불길을 살려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해 7월20일 고종황제는 강제폐위되고 조선에는 지도자 없는 말세적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독노회를 조직하고 7명에게 목사안수를 주는 등 영적 세상은 육적 세상과 다른 방향으로 큰 부흥의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1909년 10월, 장로교감리교연합공회(1905년 결성)는 "백만인 구령운동"을 계획하였으며, 1900년 초를 성령의 꺼지지 않는 불길로 이끄는 대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은 민족최대의 시련과 고통의 시작이었습니다. 위기의 시대, 종말론적 사상에 놓여있던 기독교인의 눈물과 기도가 아니었다면 조선반도는 영구적인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의 기쁨의 날이 오기까지 조선인의 기도와 눈물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광복의 하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1936년 5월25일, 로마카톨릭교회가 신사참배 성명서를 발표한 이후, 1938년 2월8일 주기철목사가 평양감옥에 구금되고 12일에는 장로교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결의하는 등 순교의 길을 가는 듯 하였으나, 9월10일 일제총독부의 강제에 의해 한국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총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0월에는 YMCA, YWCA가 강제해산되고 일본기독교 청년회라는 제국주의 종속단체에 귀속되고 말았습니다. 1943년엔 주일밤예배와 수요기도회를 금지하는 포고령이 발표되고, 1944년 4월21일에는 주기철목사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순교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광복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나서야 찾아 왔습니다.
(2) 한국전쟁과 그 후
100만인의 구령운동이 빛을 보기도 전에 한일합방과 일제식민지의 시대가 본격화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이 투옥되고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또다시 터진 한반도내의 이념전쟁, 6.25가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으로 몰고온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념의 늪지대에서 600여명의 목회자와 10,000여명의 지도자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습니다. 무기를 들지 않은 교회는 군인들의 사령부와 같이 초토화되고 성경은 화염에 휩싸이며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3년에 걸친 전쟁으로 이 땅에는 더 이상의 기독교인이 없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불씨는 곳곳에서 되살아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1년 9월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교가 설립되는 등 지역별로 미션스쿨이 설립되어 교육부흥운동에 앞장서는가 하면 120개의 신학교가 설립되어 부족한 목회자들을 배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2년 12월15일에는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그래함목사가 서울과 부산에서 각각 전도부흥집회를 개최하였고 이를 통하여 잠에서 깨어난 한국기독교는 다시금 용기와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54년 12월15일에는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사인 CBS기독교방송이 개국하고, 1956년 12월23일에는 극동방송이 개국하는 등 방송전도에 대한 본격적인 구령이 시작되었습니다. 1957년 11월에는 CCC가 설립되어 학원선교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1958년 9월에는 국방부내 군종과를 발족하여 3군에 목사를 파견하는 등 군대복음화에도 기초를 제공하였습니다.
1973년 5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그레함 전도대회에는 100만명의 성도들이 참석하여 기적적인 체험을 이루었으며, 1974년의 엑스폴로74에서는 150만명, 1977엑스폴로는 200만명, 1980엑스폴로는 220만명에 달하는 성도가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을 눈으로 확인한 한국성도들은 천만인 구령을 목표로 새로운 도약을 선언하였습니다.
조선초기부터 선교사를 파송해 온 해외선교사업은 2005년 12월, 14,086명을 파송하여 미국에 이어 2위의 선교사 파송국가로 부상하였으며, 2008년 1월 현재, 168개국가에 17,697명의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습니다. 2005년 한국선교대회는 MT 2030Project를 발표하며 2030년까지 10만명의 선교사를 세계 모든 국가에 파송할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75만명의 성도를 자랑하는 세계최대의 여의도 순복음교회와 55만명의 성도를 자랑하는 은혜와 진리교회, 그리고 사랑의 교회, 온누리 교회, 인천순복음교회 등 하나의 거대한 도시를 방불케하는 메가 처치가 한국에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령운동으로 팽창하였던 198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교회는 양적팽창에 치우친 나머지 교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회개운동이 눈을 감는 이 시대, 한국교회는 개독교라는 불명예와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으며, 각종 이단의 성행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한 때 850만명에 달하였던 성도는 750만명으로 줄어 들었지만 목회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80만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1907년, 장대현 교회의 대각성회개운동을 부르짖는 교계의 지도자들이 있지만 성령의 불씨는 좀 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 역사의 개요 :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한국전쟁후
한국 기독교 역사의 개요
선교100여년의 짧은 역사속에서 한국만큼 부흥한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유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가 선교의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은 멸망을 한치 앞둔 조선의 마지막 절정이었습니다. 1876년 조일강화조약으로 문호를 개방한 조선은 1882년에는 조미통상조약과 조독수호조약을 각각 체결하였습니다. 1884년에는 러시아, 1886년에는 프랑스와 조약을 체결함으로서 유럽미주열강들의 먹이감이 되었습니다. 자율이 아닌 타율에 의해 개방된 문호는 근대적 제도와 서양의 기술을 취득하는 계기와 함께 도래함으로서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정치군사적으로 이미 국가존립의 위기에 직면한 상태에서 경제적으로도 국가의 재정은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관료사회의 부패로 농민의 원성은 갈수록 높아만 갔습니다.
한국의 역사를 통하여 전성시대를 이루었던 불교와 유교의 정신은 형식과 명분만 남은 채 국가종교로서의 역할과 사명에 충실하지 못하였습니다. 유교는 윤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점을 드러내며 양반사회와 관료사회의 체제유지에 이용되었습니다. 불교는 산으로 들어가 세상과 담을 쌓으며 자신의 유익에만 급급하였습니다. 1953년, 내부적으로는 불교와 유교가 지배하는 구조가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나 외부의 시선은 전혀 다르게 해석되었습니다. 하멜(Hendrik Hamel)은 한국사회는 사상적 개념을 가진 그 어떤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신적 공백상태속에서 백성은 희망을 잃고 나라에 기댈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한 것이었습니다.
1866년, 대동강변에서 순교한 로버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B.A) 선교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토마스는 북경에서 조선인 중국사신을 만난 자리에서 조선내에 로마 카톨릭의 수난사를 듣게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중국만주 주재원인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의 중재로 1865년 9월4일, 중국을 출발하여 조선의 서해안 자라리에 도착하였습니다. 로마카톨릭 교인과 만나 우리말을 배운 토마스는 경성에서 전도할 마음으로 범선을 이용해 한강으로 향하였지만 심한 폭풍으로 인해 만주에 표류하는 극적 생환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선교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토마스는 1866년,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갔습니다. 대동강 입구에서 평안도 감사의 거절로 평양까지 올라가려 하였지만 배가 모래와 진흙속에 빠지는 불상사를 겪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상선은 조선의 포화에 소실되어 버리고 토마스선교사는 선원들과 함께 전원 살해 되었습니다. 그러나 토마스에 의해 중국어 신약성경이 조선땅에 전해졌고, 1893년 11월 모페트(Samuel A. Moffett)선교사의 학습교인반에 이것을 전해 받은 조선인이 있었습니다.
한국 최초의 선교사는 북미장로교의 알렌(Horace N. Allen 1858-1932)이었습니다 의료선교사인 알렌은 갑신정변 우정국 사건당시 민영익을 치료해 준 댓가로 왕실부 시의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고종과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으며 선교의 사명을 열어 갔습니다. 1885년 4월5일,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 등 3명이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5월3일에는 감리교 윌리암 스크랜턴(Wm B. Scranton)과 모친인 스크랜턴(Mrs. M. F. Scranton)여사가 함께 입국하였습니다.
1890년 이후 조선은 일대 변동을 겪게 되었습니다. 개화기의 학술지에서는 유교를 비판하는 글들이 게재되었고, 불교를 신봉하던 개화파 인사들도 기독교에 대한 선입견을 해소하는 견해를 조금씩 열어갔습니다. 그러나 고종황제는 선교를 허락하지 않았고 기독교는 여전히 금지되었습니다. 1898년 6월10일, 스왈론 선교사에게 외국인 국내체류인증서인 호조(護照)를 발행함으로서 마침내 선교의 자유가 부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계열강들의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였으나 경쟁구도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순교자가 발생하고 조선인들의 토착적인 종교사상에 의해 복음전파가 한계점에 부딪히자 조선 주재 선교사들은 1890년, 존 네비우스 박사(Dr. John Nevius)를 초청하였습니다. 그는 "선교사업의 방법"(Methods of Mission Work)이라는 저서에서 아홉 가지의 선교정책을 제시하였습니다. ① 선교사들의 일대일 복음전도와 순회전도 ② 자립선교 ③ 자립정치 ④자립보급 ⑤ 체계적인 성경연구와 성경중심의 활동 ⑥ 성경교훈에 따른 엄격한 생활훈련과 처리 ⑦ 타교회와 기관의 협력과 일치의 노력, 그리고 선교영역이 중복되지 않는 지역분할 전도 ⑧ 지역과 프로그램 분할 이후에는 상호 절대 간섭하지 않음 ⑨ 경제적 문제와 상담에 있어서는 서로 돕는 정신
감리교는 탐색과 순회전도를 원칙으로 하였습니다. 아펜젤러는 조선입국 4개월만에 2명의 학생으로 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감리교는 학교와 교육을 통한 전도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육사업은 복음사업의 부진을 가져올 만큼 정책적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리교의 교육사업의 성과는 훗날 한국의 지성사회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1895~6년, 교회의 세례 교인수가 폭발적으로 증가 하였습니다. 경성의 상황은 변화와 대각성의 징조였습니다. 평양은 개척전도의 단계를 지나 교회는 발전하고 성장을 피부로 느낄 정도였습니다. 조선 선교의 특징은 세례교인과 초신자들의 열정적인 복음 전도활동 이었습니다. 1900년, 한 해동안 세례교인수는 30%이상 증가되었습니다.
"신자들"(adherevts)의 동의어인 "공동체"(Community)는 주한장로교 선교사회(Presbyterian Council of Mission In Korea)의 정의로서 세례교인, 유아세례를 받은 어린이, 학습과정의 구도자, 정기적인 출석교인, 기독교의 감화속에 속한 교인 들을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1898년, 교회공동체와 세례교인의 비율이 36:1이었습니다 1907~1942년까지 평균비율은 2.6:1이었습니다. 이것은 세례교인이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모든 비기독교적인 종교행사를 폐지시킨 비율로서 조선의 선교가 기적에 가까운 영적 부흥을 가져왔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이러한 기적적인 부흥은 1907년 평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 1907년 평양 대 부흥운동
1907년, 성령의 불의 발화지점은 1903년, 원산이었습니다. 하디(R. A. Hardie)선교사를 중심으로 한주간동안 성령사경회를 개최하여 대각성회개운동을 일으켰습니다. 하디 선교사를 선두로 시작된 회개의 고백에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성경학교가 곳곳에 세워지고 성경공부가 하루내내 지속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습니다. 원산에서 일어난 작은 불꽃은 소멸되지 않은 채 번져 갔으며 한반도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우는 평양으로 이어졌습니다.
영국웨일즈의 부흥운동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오순절 성령운동에 영향을 받은 1907년 대 부흥운동은 1901년, 장로공의회에서 교회의 비정치화를 결의한 후 1903년 원산부흥운동과 1905년 을사조약을 통해 일본제국의 식민지화가 본격화됨으로서 일어난 구국기도회의 연장선에서 1906년 평양에서는 연합사경회가 개최되었습니다. 때를 같이하여 목포에서도 선교사들의 부흥사경회가 거세게 일어났고 12월26일~1907년 1월15일까지 20일간 부흥사경회를 위한 정오기도회가 계속되었습니다.
1907년 1월6~15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는 겨울남자사경회가 개최되었고, 특히 14일과 15일에는 성경의 임재함을 경험함으로서 폭발적인 부흥의 절정기를 이루었습니다. 이어 17~19일까지 개최된 여자사경회에서도 이같은 성령의 역사는 동일하게 일어났습니다. 부흥회는 오전의 성경공부 사경회, 정오의 기도회, 그리고 저녁의 집회로 이어지는 3박자의 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일(1907년 1월20일)오후 예배시간 길선주 목사는 성령을 체험하며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용기를 드러내었습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모든 교인들이 다함께 대각성회개를 하는 성령의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났던 성령운동은 오순절성령운동과 미세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순절성령의 역사적 특징이 모든 사람의 방언에 있다면 장대현교회의 성령의 역사는 그런 흔적을 거의 찾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조상숭배의 전통적 관습과 사주관상의 무당적 미신과 하나님을 동시에 숭배하였던 이중적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과오를 회개함으로서 우상과 관습의 단절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급격한 진전을 이룬 것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제국주의적 천황사상과 좌우익의 이데올로기가 성행하던 시기에 성령운동의 전개는 이러한 세속적 오염원으로 부터 차단되었을 뿐만 아니라 순수한 복음, 순결한 복음,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절대자로 섬기는 전환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었습니다. 조선말기 종말적 사상에서 기독교적 부활과 재림의 교리는 억눌린 백성들의 심리적 허탈감을 달래주는 유일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성령의 부흥운동은 이들을 일깨우는데 그치지 않고 복음전파의 열정적인 증인으로 나아가게 하는 구령의 역사를 가져왔고 이것은 100만인의 구령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1907년 1월과 2월, 평양에서는 미션스쿨에도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등 성령의 거센 바람은 거침이 없었습니다. 하디 선교사와 길선주목사는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집회를 인도하며 한반도의 영적 불길을 살려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해 7월20일 고종황제는 강제폐위되고 조선에는 지도자 없는 말세적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독노회를 조직하고 7명에게 목사안수를 주는 등 영적 세상은 육적 세상과 다른 방향으로 큰 부흥의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1909년 10월, 장로교감리교연합공회(1905년 결성)는 "백만인 구령운동"을 계획하였으며, 1900년 초를 성령의 꺼지지 않는 불길로 이끄는 대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은 민족최대의 시련과 고통의 시작이었습니다. 위기의 시대, 종말론적 사상에 놓여있던 기독교인의 눈물과 기도가 아니었다면 조선반도는 영구적인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의 기쁨의 날이 오기까지 조선인의 기도와 눈물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광복의 하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1936년 5월25일, 로마카톨릭교회가 신사참배 성명서를 발표한 이후, 1938년 2월8일 주기철목사가 평양감옥에 구금되고 12일에는 장로교 평양신학교 학생들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결의하는 등 순교의 길을 가는 듯 하였으나, 9월10일 일제총독부의 강제에 의해 한국 기독교는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총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0월에는 YMCA, YWCA가 강제해산되고 일본기독교 청년회라는 제국주의 종속단체에 귀속되고 말았습니다. 1943년엔 주일밤예배와 수요기도회를 금지하는 포고령이 발표되고, 1944년 4월21일에는 주기철목사가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순교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광복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나서야 찾아 왔습니다.
(2) 한국전쟁과 그 후
100만인의 구령운동이 빛을 보기도 전에 한일합방과 일제식민지의 시대가 본격화 되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이 투옥되고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또다시 터진 한반도내의 이념전쟁, 6.25가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으로 몰고온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념의 늪지대에서 600여명의 목회자와 10,000여명의 지도자들의 목숨을 빼앗아 갔습니다. 무기를 들지 않은 교회는 군인들의 사령부와 같이 초토화되고 성경은 화염에 휩싸이며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3년에 걸친 전쟁으로 이 땅에는 더 이상의 기독교인이 없는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불씨는 곳곳에서 되살아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1년 9월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신학교가 설립되는 등 지역별로 미션스쿨이 설립되어 교육부흥운동에 앞장서는가 하면 120개의 신학교가 설립되어 부족한 목회자들을 배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52년 12월15일에는 세계적인 부흥사 빌리그래함목사가 서울과 부산에서 각각 전도부흥집회를 개최하였고 이를 통하여 잠에서 깨어난 한국기독교는 다시금 용기와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54년 12월15일에는 한국 최초의 민간방송사인 CBS기독교방송이 개국하고, 1956년 12월23일에는 극동방송이 개국하는 등 방송전도에 대한 본격적인 구령이 시작되었습니다. 1957년 11월에는 CCC가 설립되어 학원선교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1958년 9월에는 국방부내 군종과를 발족하여 3군에 목사를 파견하는 등 군대복음화에도 기초를 제공하였습니다.
1973년 5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빌리그레함 전도대회에는 100만명의 성도들이 참석하여 기적적인 체험을 이루었으며, 1974년의 엑스폴로74에서는 150만명, 1977엑스폴로는 200만명, 1980엑스폴로는 220만명에 달하는 성도가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성장을 눈으로 확인한 한국성도들은 천만인 구령을 목표로 새로운 도약을 선언하였습니다.
조선초기부터 선교사를 파송해 온 해외선교사업은 2005년 12월, 14,086명을 파송하여 미국에 이어 2위의 선교사 파송국가로 부상하였으며, 2008년 1월 현재, 168개국가에 17,697명의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습니다. 2005년 한국선교대회는 MT 2030Project를 발표하며 2030년까지 10만명의 선교사를 세계 모든 국가에 파송할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75만명의 성도를 자랑하는 세계최대의 여의도 순복음교회와 55만명의 성도를 자랑하는 은혜와 진리교회, 그리고 사랑의 교회, 온누리 교회, 인천순복음교회 등 하나의 거대한 도시를 방불케하는 메가 처치가 한국에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령운동으로 팽창하였던 198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교회는 양적팽창에 치우친 나머지 교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회개운동이 눈을 감는 이 시대, 한국교회는 개독교라는 불명예와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으며, 각종 이단의 성행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한 때 850만명에 달하였던 성도는 750만명으로 줄어 들었지만 목회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80만명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1907년, 장대현 교회의 대각성회개운동을 부르짖는 교계의 지도자들이 있지만 성령의 불씨는 좀 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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