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증발했다. 어이없게도 나에게서만 증발했다. 혹자는 ‘잠수탔다’라고 이야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증발했다’라고 보는게 맞을 것 같다. 알고 지낸 사이였고, 어쩌다 짧은 기간 무척 자주 만났다. 많은 이야기를 했다. 가치관과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우리는 많이 가까워졌다. 살짝 취한 남자는 내가 많이 편하다고 했다. 그리고 곧 남녀 사이에 친구란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혼란스러웠다. 저 한마디 말에 착각했다. 나는 남자보다 나이가 많았고, 남자는 타의적으로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각자의 아킬레스건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떠보는 듯한 말에 솔직하게 헷갈렸다고 말했다. 나도 내 감정의 답을 찾는 중이라 했다. 서로의 아킬레스건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남자는 그런 뜻의 말은 아니지만 자기가 한 말이니 자신의 감정을 다시 생각해보겠다 했다. 그리고 자기는 나이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나의 감정에 답을 찾았다. ‘내가 찾은 답을 알고 싶니?’ 라고 물어보니, 남자는 말하고 싶으면 말하라고 했다. 그래서 말했다. [좋아한다]고. 남자는 고맙다는 말 대신 [용기있네요] 라고 답을 했다. 자신은 내가 싫다고도 좋다고도 답을 해줄 수 없다고 했다. 타의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자신의 삶을 생각하느라 나에 대한 생각까지 도달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런 애매한 대답을 남긴 뒤 몇 번의 연락 후 머지않아 남자는 증발했다. 처음엔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에 증발할 만큼 나의 영향력이 클 리 없다고 믿었다. 얼마전 레나 모제의 ‘인간증발’을 읽었다. 증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읽어보았는데, 수험을 망쳐서 증발한 고등학교 학생의 이야기가 있었다. 엄마가 실망할까 증발을 선택했다고 한다. 아,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이유였지만 증발의 이유는 정말 사소한 것 같다. 같은 동네 같은 모임. 좁디 좁은 곳에서 걷다 보면 아는 사람 마주치기 일쑤인 이 곳에서 남자는 한번을 안 보이더라. 아, 한번 마주쳤다. 무슨 로맨스 영화 마냥 빨간불이 켜진 횡단보도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남자가 날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곧, 파란불로 바뀌고 10cm도 되지 않는 폭을 두고 내 옆을 뛰어가던 남자를 나는 차마 잡지 못했다. 증발 4개월 후, 모임 사람들 중 몇 명이 남자와 연락이 닿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멍청하게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확실하게 알았다. 남자는 나에게서만 증발했다는 사실을… 다시 찾을 생각은 없다. 기다릴 생각도 없다. 하지만 깊었던 만큼 생각보다 후유증은 오래갈 것 같다. 마지막 이별에서 발버둥 쳐도 얻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배우고 마음을 비우고 살았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후 겨우 찾은 감정의 불씨였고 화력은 생각보다 좋았다. 아직도 가끔은 날숨에 울음이 섞여 나올 것만 같아 들숨을 깊게 마셔 폐를 빵빵하게 만들어 보기도 하고, 괜히 나에게 시그널을 보내는 것 같은 자의식 충만한 메신저 프로필을 보고 고민하다가 잠을 못 이루기도 한다. 한동안 아니 긴 시간 동안 가슴 한 켠에 궁금증과 원망을 안고 살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연락이 오면 거절도 못할 것 같다. 어떤 사람이 그랬다. 평생 못 잊는 사람의 유형 중 하나는 이렇게 증발해버린 사람이라고. 문제는 증발한 사람조차 평생 찜찜함을 안고 살 것이라 했다. 마주치지 않도록 도망 아닌 도망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필사적으로 안 마주치려 노력할 남자를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집 창문으로 남자의 집이 내다보이는 이 좁은 동네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할까.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한 이야기인데, 거절할 용기가 없어 증발할 것 같으면 시작을 말았으면 좋겠다. 상처주기 싫어서 증발하는 것이라면, 그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소개팅을 나가도 새로운 누구를 만나도 어딘가 찜찜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인간증발을 겪기 전과 후로 나의 사람 보는 관점이 완전 변해버렸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영화 Call me by your name의 한 장면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몸과 마음도 인생엔 한번만 주어진다.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내가 느껴야 하는 것들이다. 상처받기 싫어서 마음을 너무 도려내 버리면, 다음 만날 인연에게 줄 마음이 없다.” 이 글을 남자가 볼지 모르겠지만 이야기해주고 싶다. 너에게 상처받아 도려낼 마음보다 다음 만날 인연에게 줄 마음이 아직 더 크다고. 2
남자가 증발했다.
남자가 증발했다.
어이없게도 나에게서만 증발했다.
혹자는 ‘잠수탔다’라고 이야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증발했다’라고 보는게 맞을 것 같다.
알고 지낸 사이였고, 어쩌다 짧은 기간 무척 자주 만났다. 많은 이야기를 했다.
가치관과 살아온 이야기를 하고 우리는 많이 가까워졌다.
살짝 취한 남자는 내가 많이 편하다고 했다.
그리고 곧 남녀 사이에 친구란 성립하지 않는다고 했다.
혼란스러웠다. 저 한마디 말에 착각했다.
나는 남자보다 나이가 많았고, 남자는 타의적으로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각자의 아킬레스건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날, 떠보는 듯한 말에 솔직하게 헷갈렸다고 말했다.
나도 내 감정의 답을 찾는 중이라 했다. 서로의 아킬레스건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남자는 그런 뜻의 말은 아니지만 자기가 한 말이니 자신의 감정을 다시 생각해보겠다 했다.
그리고 자기는 나이 따위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나의 감정에 답을 찾았다.
‘내가 찾은 답을 알고 싶니?’ 라고 물어보니,
남자는 말하고 싶으면 말하라고 했다. 그래서 말했다. [좋아한다]고.
남자는 고맙다는 말 대신 [용기있네요] 라고 답을 했다.
자신은 내가 싫다고도 좋다고도 답을 해줄 수 없다고 했다. 타의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자신의 삶을 생각하느라 나에 대한 생각까지 도달하지 못한다고 했다.
이런 애매한 대답을 남긴 뒤 몇 번의 연락 후 머지않아 남자는 증발했다.
처음엔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에 증발할 만큼 나의 영향력이 클 리 없다고 믿었다.
얼마전 레나 모제의 ‘인간증발’을 읽었다.
증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읽어보았는데, 수험을 망쳐서 증발한 고등학교 학생의 이야기가 있었다. 엄마가 실망할까 증발을 선택했다고 한다.
아, 나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이유였지만 증발의 이유는 정말 사소한 것 같다.
같은 동네 같은 모임. 좁디 좁은 곳에서 걷다 보면 아는 사람 마주치기 일쑤인 이 곳에서 남자는 한번을 안 보이더라.
아, 한번 마주쳤다.
무슨 로맨스 영화 마냥 빨간불이 켜진 횡단보도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남자가 날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곧, 파란불로 바뀌고 10cm도 되지 않는 폭을 두고 내 옆을 뛰어가던 남자를 나는 차마 잡지 못했다.
증발 4개월 후, 모임 사람들 중 몇 명이 남자와 연락이 닿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멍청하게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확실하게 알았다.
남자는 나에게서만 증발했다는 사실을…
다시 찾을 생각은 없다. 기다릴 생각도 없다.
하지만 깊었던 만큼 생각보다 후유증은 오래갈 것 같다.
마지막 이별에서 발버둥 쳐도 얻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배우고 마음을 비우고 살았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후 겨우 찾은 감정의 불씨였고 화력은 생각보다 좋았다.
아직도 가끔은 날숨에 울음이 섞여 나올 것만 같아 들숨을 깊게 마셔 폐를 빵빵하게 만들어 보기도 하고, 괜히 나에게 시그널을 보내는 것 같은 자의식 충만한 메신저 프로필을 보고 고민하다가 잠을 못 이루기도 한다.
한동안 아니 긴 시간 동안 가슴 한 켠에 궁금증과 원망을 안고 살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연락이 오면 거절도 못할 것 같다.
어떤 사람이 그랬다. 평생 못 잊는 사람의 유형 중 하나는 이렇게 증발해버린 사람이라고.
문제는 증발한 사람조차 평생 찜찜함을 안고 살 것이라 했다.
마주치지 않도록 도망 아닌 도망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필사적으로 안 마주치려 노력할 남자를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집 창문으로 남자의 집이 내다보이는 이 좁은 동네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할까.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한 이야기인데,
거절할 용기가 없어 증발할 것 같으면 시작을 말았으면 좋겠다.
상처주기 싫어서 증발하는 것이라면, 그게 얼마나 잔인한 일인지 알았으면 좋겠다.
소개팅을 나가도 새로운 누구를 만나도 어딘가 찜찜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인간증발을 겪기 전과 후로 나의 사람 보는 관점이 완전 변해버렸다.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영화 Call me by your name의 한 장면으로 마무리하고 싶다.
“몸과 마음도 인생엔 한번만 주어진다.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내가 느껴야 하는 것들이다.
상처받기 싫어서 마음을 너무 도려내 버리면, 다음 만날 인연에게 줄 마음이 없다.”
이 글을 남자가 볼지 모르겠지만 이야기해주고 싶다.
너에게 상처받아 도려낼 마음보다 다음 만날 인연에게 줄 마음이 아직 더 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