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업 중인 중환자실 의사다

MICU2020.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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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척추병원에서 고작 핑거에네마 한다고 본인은 환자 곁을 지키는 정의로운 의료의 수호자라 자위하는가.

대학병원 의사 중 핑거에네마 안 해 본 의사가 대한민국에 어디 있을까. 그 정도는 너무 간단하고 기본적이어서 했노라고 입에 올리지도 않는 것을. 죽어 가는 환자가 토하는 피를 온몸에 맞으면서도 그 피를 닦을 겨를도 없이 환자의 가슴을 압박해 본 적 없는 대학병원 의사는 또 어디 있을까. 의사가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돈으로만 봐서 파업을 한다? 수없는 죽음을, 검게 변하는 환자의 손 끝을, 퍼득거리며 경련하는 환자의 몸을, 절규하는 가족들의 울음을 경험해 보지도 않고 함부로 말 하지 마라. 생명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절망감은 나의 일상이고, 살릴 수도 있지 않았나 하는 회한은 까맣게 잊은 듯 하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와 나를 저 밑바닥까지 끌어 내리는 족쇄다.

중환자실 의사인 나의 다른 이름은 죄인이다. 나는 죽음과의 전투에서 수없이 패배한 패잔병이며 지금은 의사의 본분을 잊은 탈주범이 되었다. 나는 파업으로 환자를 등지고 교수님들께 그 무거운 짐을 떠넘겼다. 내가 밤을 지새우던 좁디 좁은 당직실 침대를 교수님이 고단한 몸으로 넘겨 받으셨다. 걱정 말고 잘 다녀 오라 해주신 교수님의 눈 밑은 검었다. 죄책감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환자 곁을 지킨다는 알량한 자기 위안에 기대기에는 현 상황이 너무 무겁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죄인일테지만 종이 한장만큼이라도 더 떳떳한 죄인이 되려고 가운을 벗고 환자 곁을 떠나 있다.

역설적이게도 생명의 무게가 무거움을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나는 가운을 벗고 파업을 한다. 나는 앞으로도 수없는 죽음을 업고 살아 가야 하는 의사로서, 이번 법안이 많은 환자들을 죽음으로 한발짝 더 떠미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알아서다. 참담한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뭇사람들의 비난을 못 견뎌 내 두 눈을 가린다면, 과연 내가 앞으로 자기혐오에서 벗어나 의사를, 그것도 중환자실 의사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앞으로도 죽음을 보고 또 보아야 하는데.

비난이 어찌 아프지 않고 비아냥이 어찌 따갑지 않을까. 지나온 인생의 대부분을 책상 앞과 병원 안에서만 살아온 이 무지렁이는 의연한 척 꾸미고 있을 뿐 비난이, 비아냥이, 집단사직이, 강제업무복귀명령이, 형사처벌이 너무도 무섭고 두렵다. 그 놈의 밥그릇, 밥그릇, 밥그릇 타령. 내가 밥그릇을 욕심냈다면 진즉에 중환자실을 박차고 나가 요양병원에서 많은 연봉을 받으며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고 밤에 침대에 눕는 평범하고 무탈한 생활을 택했을 텐데. 나는 어째서 가족과 지인들의 걱정어린 만류를 뿌리치고 죽음의 곁을 걷는 삶을 택하여 이러한 상황을 맞닥뜨려 벌벌 떨며 버티고 있는가. 승산이 보이지 않아 내 자신이 미련하기 짝이 없다.

파업이 아닌 다른 방법이 있으면 제발 누가 알려달라. 우리는 지속적으로 잘못된 정책임을 주장하였으나 묵살되었다. 우리의 목소리 제발 들어달라 호소하였으나 정부는 우리와는 한 번도 논의하려 하지 않았다. 의료에 관한 법안을 논의하는 데 있어 그 분야의 전문가인 의사가 제외되었다. 파업이라는 초강수에 겨우 눈길을 받았으나 그 뿐이다. 정부의 대화 의지를 의사들이 거부하였다고 언론은 대서특필 하였으나 그 이면으로 정부는 정책을 절대 철회할 수 없다는 입장 역시 분명히 하였다. 모르겠다. 우리는 멍청하여 파업 외에 다른 방법이 있긴 한 건지 정말 모르겠다. 이 악법은 무고한 죽음을 늘릴 것이 자명한데도.

나의 가운은 헤지고 구멍이 나 있다. 검붉은 핏자국이 깊어 세탁을 두세 번만 맡겨도 낡아져서 돌아 온다. 내가 이러한 흰 가운을 함부로 벗어 던졌다고 매도하는가. 당신이 보는 나의 가운은 그저 하얗기만 한가. 장황하게 지껄였지만 종국에 내가 할 말은 이 뿐이다. 나는 결코 가볍게 흰 가운을 벗어 던진 것이 아니다. 나 뿐이 아니다. 우리 모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