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년이 되어 이자춘이 사망한 후, 이성계는 전주 이씨 가문의 수장으로서 가별초라 불리는 가문 직속의 최정예 사병집단을 이끌고 요동에서 한반도 남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지역을 누비면서 꾸준하게 고려군의 장수로 맹활약했다. 이 때의 활약은 가히 유금필, 척준경과 함께 한반도와 만주를 통틀어 역사상 최강의 돌격형 무장이자 인간 공성병기로 불릴 만한 위업이었으며, 특히 활을 잘 쏘아서 '신궁(神弓)'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성계의 눈부신 활약상에 관해서는 여러 영웅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으며, 30여 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고려에 귀순했으며 귀순 후 왕의 호위직인 애마를 맡아서 했다. 공민왕이 보낸 고려군과 내응해 쌍성총관부를 함락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고려의 무장으로서 고려를 침략해 오는 몽골, 왜구, 홍건적, 여진족과 반란군들을 물리치면서 엄청난 공적을 세웠다. 최영과 함께 고려의 수호신으로 불렸을 정도. 이성계가 벌인 전투들. 위로는 홍건적, 나하추, 여진족, 원나라와 맞붙었고, 아래로는 왜구, 그리고 위화도 회군으로 인한 고려 중앙군까지 당대 동북아시아의 모든 군사집단과 전투했으며 모두 승리했다. 그야말로 고려판 불패신화. 세세한 전공을 제외하고 굵직한 전공만 따져도 다음과 같다.1361년 10월 독로강(禿魯江) 만호(萬戶)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고 박의를 죽였다.1361년 10월 반성(潘誠)·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주원수(朱元帥) 등이 이끄는 20만 홍건적의 고려 침공. 삭주(朔州)·이성(泥城)·무주(撫州)·안주가 함락되고, 흥의역(興義驛)에 이르러 개경(開京)까지 위협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광주(廣州)를 거쳐 복주(福州)로 파천(播遷)하고 수도 개경이 결국 홍건적들의 대군세에 함락되자 이성계가 고려인과 여진족 2천으로 구성된 사병조직(가별초)으로 개경 탈환에 성공해서 가장 먼저 입성하고 홍건적 두목을 활로 쏴 죽였다.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원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적을 치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친내 함흥 평야에서 적을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1364년 1월 최유가 원나라 황제에 의해 고려왕에 봉해진 덕흥군을 받들고,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평안도지방에 쳐들어오자 이에 최영과 함께 수주 달천에서 이들을 모두 섬멸했다. 이 때 압록강을 건너 도망간 자는 겨우 17기뿐이었다.1364년 1월 여진족들이 삼선(三善)과 삼개(三介)의 지휘 아래 동북면에 침범하여 함주까지 함락당하자 이를 모두 물리치고 동북면이 평온을 되찾게 만들었다. 이후 밀직부사. 단성양절익대공신에 책봉되었고,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 화령부윤이 되었다.1370년 11월 지용수 등과 함께 만주의 동녕부(東寧府)를 점령하고 요동성을 함락시킴. (제1차 요동정벌)1377년 우왕 3년 크게 창궐하던 왜구들을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대파했다.1378년 수도 개경을 위협하던 왜구의 대군에 맞서 최영이 싸우다가 위기에 빠졌는데 직접 기병을 이끌고 구원하여 왜구의 대군을 격퇴하였다.1380년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발도가 지휘하는 왜구의 대군세를 운봉에서 섬멸했다. 그 전과는 역사상 황산대첩으로 알려질 만큼 혁혁한 것이었다. 황산 대첩은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30]1382년 여진인 호바투가 4만 기병들을 이끌고 동북면 일대를 침공하여 그 피해가 극심했다. 이에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이듬 해 이지란과 함께 길주에서 호바투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이어서 안변책을 건의했다.1384년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어 함주를 공격한 왜구를 대파했다.1388년 수문하시중이 되어 최영과 함께 이인임을 유배시킴. 또한 임견미, 염흥방을 척살했다. 이 시기 이성계의 활약을 보면 그야말로 전쟁을 위해 태어난 남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준이다.[31] 고려 국내에 침입한 왜구, 여진족, 원나라 군벌, 홍건적 등과 싸워서 전승했으며, 비록 일시적이긴 하나 공민왕 때의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요동성을 직접 함락시켜 점령하기도 했다. 고려조 이후의 한국사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성을 점령한 처음이자 마지막 장군이다. 특히 이성계 최대의 전공이라 할 수 있는 황산대첩 때에는 왜구의 피로 바위가 피로 물들어 그 바위를 '피바위'라 했을 정도로 왜구를 모조리 전멸시켰다. 이 시기의 왜구들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냐 하면,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고려라는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는 수준이었다. 명장 이성계의 눈부신 전공 3
그뿐만이 아니다. 여진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1362년 당대에 상당한 네임드였던 나하추를 우주관광 태워버렸다. 당시 나하추는 휘하의 가장 뛰어난 장수에게 붉은 기를 주었는데, 이걸 가지고 이성계와의 싸움에 나선 장수는 관우 앞의 안량과 문추 꼴이 되었다. 이에 열 받은 나하추는 다음 날 장수 5명을 한꺼번에 출진시켜서 이성계를 공격했는데, 5명 모두 올킬. 이는 원사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나하추의 부인이 나하추에게 이르기를 "공(公)이 세상에 두루 다닌 지가 오랜 세월이지만 저런 장수를 본 적이 있습니까? 어서 피하여 속히 돌아오십시오" 하였으나 나하추가 듣지 않았다. 나하추는 모든 병력을 함흥 평야로 이끌고 나왔으나, 오히려 이성계의 거짓 패퇴에 휩쓸려 완패한다.
결국 나하추는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면서, 공민왕과 이성계에게 좋은 말(馬)을 각각 선물하며 예를 차렸다. 더하여 이성계에게는 '부고'라는 진군할 때 울리는 북을 선물하였다. 진중에서 이성계의 무공을 지켜본 나하추의 누이까지도 "이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겠다"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1376년 우왕이 나하추에게 개성 부윤 황숙경을 사신으로 보내었는데, 나하추가 말하길 당시 공민왕이 이성계를 보내어 거의 죽을 뻔했다며, 이성계는 군사를 부리는 재주가 신(神)과 같다면서 안부를 물으며 이성계는 장차 큰일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엄연히 적장이었는데도 말이다!
1361년 음력 10월에 고려 조정의 부름을 받고 출전하여 독로강 만호(禿魯江萬戶) 박의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같은 달에 다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1차 침입 때의 5배 병력인 2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영내에 침입했다. 고려는 서경을 포함한 서북면 전역을 포기하는 청야전술까지 구사하며 수도 개경을 지키려고 저항하였으나 삽시간에 개경까지 함락되었다. 다급한 고려 조정은 노비들을 해방한다는 명분까지 내세워 20만 군사를 모았지만 급하게 모병한 군대이다 보니 쉽지 않았다.
이렇게 홍건적이 수도 개경에 머물며 남녀 백성들을 불에 태워 굽고 인육을 먹는 등[32]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사이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조직(가별초) 2,000명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서 적장의 목을 베어버리며 적을 대파하였다. 이성계 군대가 선두에 서서 개경에 입성하자 따르던 군대들도 입성하여 홍건적 10만의 목을 베었다. 나머지 홍건적 10만 명은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 이 때를 계기로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일개 변방의 장수가 아닌 인물로 주목하기 시작한다. 이 때 이성계가 보여준 무공은 그야말로 '항우의 재림'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성을 공격하던 날, 적(홍건적)들은 궁지에 몰려 위축되기는 했으나, 보루를 쌓고 굳게 지키므로 모든 아군 부대들이 진격해 포위망을 좁혀들어 갔다. 태조는 길 가의 민가에 머물고 있었는데, 밤중에 적들이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태조가 말을 달려 동문(東門)에 도달하였으나 성문에서 피아간에 마구 뒤섞여 전투를 벌이는 통에 문을 나갈 수가 없었다. 그때 뒤에서 적이 달려들어 창으로 태조의 오른쪽 귀 뒤를 찔러 형세가 위급해졌다. 태조가 칼을 빼어 앞을 가로막는 적병 칠팔 명을 쳐서 죽이고 말을 몰아 성을 뛰어넘었는데도 말이 넘어지지 않자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고려사』 권113, 열전26 안우·김득배·이방실1364년에는 기황후가 사주하여 최유가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쳐들어와 의주에서 고려군이 패퇴하고 안주로 후퇴하자 공민왕은 최영을 도순무사로 삼고, 이성계에게도 동북면 출신의 기병 천 명을 이끌고 가서 최영을 돕게 하였다. 그런데 이귀수, 지용수, 나세, 안우경, 이순, 우제,박춘 같은 기라성 같은 고려의 장수들이 패전을 거듭하고 와서 전장에서 머뭇거리며 나아가려고 하지 않자, 이성계가 이들을 무시하며 보란 듯이 나선다. 여타 장수들은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는 심보로 중앙, 좌, 우군 삼군의 모든 선봉을 이성계의 군대에게 맡겼다. 그런데 선봉에 선 이성계가 적장을 활로 쏴 말에서 떨어뜨리며 이성계 군대가 중앙 돌파에 성공하면서 덕흥군 주력 부대를 격파하자 나머지 군사들이 흩어진 덕흥군 좌우 군대를 공격하였다. 살아남은 덕흥군 군사는 17기뿐이었다. 한마디로 '네가 잘하면 얼마나 잘하나 보자' 식으로 엿을 먹어보라는 거였지만 문제는 저런 정신나간 상황에서도 이겼다는 것. 거록대전을 치른 항우의 일화를 연상케 하는 대목인데, 자신의 군사적 능력에 도취돼 오만과 포악성에 고삐가 풀려버린 항우와 달리 이후 이성계는 겸손의 미덕을 깨닫게 되고 오만한 행동을 줄이게 된다. 눈앞의 적보다 등 뒤의 아군이 등을 돌리면 더욱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중요한 경험이었던 셈. 이 때 이성계의 나이는 갓 서른 살(만으로 29세)이었다.
가능성은 크지 않으나 아마 우왕 때의 2차 요동 정벌이 성공했다면 물론이고, 실패했어도 비극적으로 장렬히 전사한 희대의 영웅, 명장으로 추앙되었을 명장이었다. 아무튼 살펴볼수록 어마어마한데, 후대에 명장 소리 듣던 신립같은 경우와 비교하면 이성계의 전공들이 얼마나 사기적인 수준인지 알 수 있다.전공도 전공이지만, 이성계의 활솜씨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자랑한다. 가히 궁술만으로 항우에 비견되는 한국사 최강의 보우마스터라 할 정도인데, 정말 무서운 점은 그 궁술이 야사뿐만 아니라 정사에도 많이 기록되었다는 것. 역사에 기록된 이성계의 활솜씨를 보면, 멀리서 저격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마궁술, 즉 말 타고 돌격하면서 활로 적들을 갈아버린적도 꽤 된다.
물론 정사인 고려사나 고려사절요가 조선시대, 그러니까 이 사람이 세운 왕조에서 쓰였으므로 리스펙트 차원의 미화와 과장이 들어갔을 가능성은 감안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성계의 활솜씨가 뛰어났다는 설 자체를 허구로 볼 수는 없다. 중국의 정사인 원사나 일본 측의 기록에서도 일부 교차검증이 되기 때문. 기록에 나타난 이성계의 궁술에 관한 일화들 몇 개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젊었을 때에는 훗날 정빈 김씨로 추봉되는 이자춘의 첩이자 여종이었던 김씨(의안대군 이화의 어머니)가 우연히 까마귀 5마리를 보고는 태조에게 활로 쏘아달라고 부탁하였다. 태조가 한 번의 활을 쏘아 5마리를 동시에 맞히자,[34] 김씨는 태조에게 절대로 이러한 일을 아무 데에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출처는 태조실록 1권 총서.보통 사람이 쓰는 것보다 훨씬 튼튼한 강궁을 썼는데, 이자춘이 이 활을 보고 인간이 쓸 물건이 아니라며 감탄했다고 전해진다.[35]1차 요동정벌 당시 동녕부의 추장 고안위(高安慰)가 오녀산성에 웅거하면서 항전을 하자 이성계는 편전(애기살) 70발을 쏴 성벽 위에 있던 고안위의 부하 70명의 얼굴을 하나씩 쏘아 모두 맞혔다. 이를 보고 고안위는 기겁하여 도망갔으며, 나머지 적군들의 사기가 떨어져 곧 항복을 하였다. 이것을 보고 주위 여러 성들이 항복하였는데 그 수가 1만여 호나 되었다. 출처는 태조대왕실록.[36]동녕부의 오녀산성을 점령한 후, 요동성 전투에서 처명이라는 적장을 사로잡기 위해서 한 발은 투구에, 한 발은 허벅지에 맞힌 후 "마지막 한 발은 네놈 얼굴에 맞히겠다!"라고 하자 용맹한 처명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항복한 처명은 이후 이성계 막하에서 부장으로 활약하여 황산 대첩 때에도 참전했다.황산대첩 때 왜구 적장 아기발도의 투구를 활로 맞혀 벗겼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 뒤를 이어 이지란이 얼굴에 화살을 맞혀서 쓰러뜨렸다고 한다. 아기발도는 온몸을 감싸는 갑옷을 입고 얼굴을 가리는 구리투구까지 쓰고 있었는데, 일본 투구에는 원래 얼굴을 가리는 철가면인 멘구(面具)라는 부품이 있다. 이성계가 투구꼭지를 맞혀 투구가 떨어지면 이지란이 쏘는 걸로 되어 있었다. 물론 이성계는 투구꼭지를 맞혔으나 투구가 기울어질 뿐 떨어지지 않았고, 아기발도가 다시 쓴 투구를 이성계가 다시 맞혀서 투구가 떨어지자 이지란이 얼굴을 쏴서 죽였다고 한다. 이 무협소설에 나와도 욕먹을 먼치킨 스토리가 야사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정사인 고려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일본 갑옷의 투구를 보면 이성계가 맞히었다는 정자 부위가 상당히 큰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투구는 그 부분이 상당히 작으나 일본 투구에는 화려하다 못해 너무 크다 싶을 정도인 장식이 달렸기 때문에 정자도 크다. 그렇다 해도 전투 중이라서 필시 움직이는 상태였을 상대를 2번 다 같은 위치에 맞혔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이건 현대 저격수들도 어려운 일이다.이성계는 왜구와의 격전을 앞두고 150보 떨어진 곳에서 투구를 놓아두고 3번 쏴 3번 다 맞히어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1보가 대략 1.2m니, 180m 거리를 백발백중으로 맞히는 실력이었던 셈이다. 이 정도 사거리는 웬만한 초기 화약병기를 상회하는 수준이다. 또한 가지고 있던 화살 20개중 17개를 쏘아 모두 맞히었는데 모두 왼쪽 눈초리에 명중했다고 한다. 출처는 역시 태조대왕실록.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백보(120m) 밖에 있는 배나무를 쏴서 가지에 달려 있는 배를 떨어뜨려 그 배로 손님을 대접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 역시 태조실록에 나오는 이야기. 심지어 이런 일화도 있다.5월, 경상도 원수(慶尙道元帥) 우인열(禹仁烈)이 비보(飛報)하기를, "나졸(邏卒)들이 말하기를, '왜적이 대마도(對馬島)로부터 바다를 뒤덮고 오는데 돛대가 서로 바라다보인다.' 하니, 도와서 싸울 원수(元帥)를 보내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때 왜적이 있는 곳은 가득히 찼으므로, 태조에게 명하여 가서 이를 치게 하였다. 태조가 행군하여 아직 이르지 않으니 인심(人心)이 흉흉하여 두려워하였다. 인열(仁烈)의 비보(飛報)가 계속해 이르므로, 태조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가서 적군과 지리산(智異山) 밑에서 싸우는데, 서로의 거리가 2백여 보(步)나 되었다. 적 한 명이 등(背)을 세워 몸을 숙이고 손으로 그 궁둥이를 두드리며 두려움이 없음을 보이면서 욕설을 하므로, 태조가 편전(片箭)을 사용하여 이를 쏘아서 화살 한 개에 넘어뜨렸다. 이에 적군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기운이 쑥 빠졌으므로, 곧 크게 이를 부수었다. 적의 무리가 낭패를 당하여 산에 올라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 임(臨)하여 칼과 창을 고슴도치 털처럼 드리우고 있으니, 관군(官軍)이 올라갈 수가 없었다. 태조가 비장(裨將)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치게 했더니, 비장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바위가 높고 가팔라서 말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태조가 이를 꾸짖고, 또 상왕(上王, 정종 이방과)으로 하여금 휘하의 용감한 군사를 나누어 그와 함께 가게 했더니, 상왕도 돌아와서 아뢰기를 또한 비장(裨將)의 말과 같았다. 태조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친히 가서 보겠다" 하면서, 이에 휘하의 군사들에게 이르기를, "내 말이 먼저 올라가면 너희들은 마땅히 뒤따라 올라올 것이다" 하였다. 드디어 말을 채찍질하여 함께 달려가서 그 지세(地勢)를 보고는 즉시 칼을 빼어 칼등으로 말을 때리니, 이때 해가 한낮이므로 칼빛이 번개처럼 번득였다. 말이 한번에 뛰어서 오르니, 군사들이 혹은 밀고 혹은 더위잡아서 따랐다. 이에 분발하여 적군을 냅다 치니, 적군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이 반수 이상이나 되었다. 마침내 남은 적군까지 쳐서 이들을 다 죽였다. 태조는 평소에 인심을 얻었고, 또 사졸들이 뛰어나게 날래었으므로, 싸우면 이기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주군(州郡)에서 그를 구름과 무지개처럼 우러러보았다. 【원전】 1 집 7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외교(外交) / *역사(歷史)이 이야기는 정도전(드라마)에서 황산대첩 직전에 각색이 가해져서 재현되었다. 사실은 황산 대첩 3년 전에 있었던 일화지만, 이성계의 활솜씨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로 보인다.어느 날 신하들이 공민왕 앞에서 활을 내었는데 이성계가 100번을 쏴 다 맞히어 "오늘날의 활쏘기는 다만 이성계(李成桂) 한 사람뿐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또한 원나라에서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한 찬성사(贊成事) 황상(黃裳)이 이성계와 활쏘기 실력을 겨룬 적이 있었는데, 족히 수백 발을 쏘았다고 한다. 이 때 황상은 50발을 연달아 맞힌 후 맞히기도 하고 못 맞히기도 하였으나 이성계는 단 한 발도 빗나간 것이 없다고 한다.[37]여진 정벌 당시 여진족 기병의 말의 눈을 쏘아 넘어뜨리기도 했으며, 온 몸에 갑옷을 입은 장수가 달려오자 투구를 쏘아 맞혔는데, 그 장수가 놀라서 입을 벌리자 입 안으로 화살을 쏘아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그 외에 의형제인 이지란을 만났을 때 사냥한 사슴을 가지고 다투다가 서로에게 활을 쏘는 대결을 했는데 이지란의 화살을 모두 피하는 신기를 보였다. 여진족과 싸울 때도 여진족들의 화살을 말 위에서 모두 피해 냈다고 한다. 또한 이지란이 길거리를 걷는 아낙네의 머리에 얹은 물동이에 구멍을 내자 솜을 끼운 화살을 쏴 그 구멍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야사도 아니고 정사에 나온다.야사에는 화살 3발을 한 번에 쏴 모든 과녁에 명중, 그것도 마상에서 해냈다는 기절초풍할 이야기도 있으나, 야사인 만큼 반 정도는 깎아서 접수하도록 하자. 기록에 따르면 활솜씨만이 아니라 검술(劍術), 마술(馬術)에도 능했던 듯 하다. 척준경까지는 아니지만 적병 7, 8명 정도는 썰어버렸다는 기록이 몇 군데 있다.[38]
퇴마록 국내편 3권에서 이성계가 화살이 없이 기(氣)만으로 활을 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인들의 인식도 대부분 명궁이라고 알고 있고 아는 사람들의 인식은 신궁. 역시 용장으로 이름난 송의 조광윤처럼 개국군주로서 특히 무예가 뛰어났다.[39]
원래 무골(武骨)이라서 그런지 노인이 되어도 정력이 강건하기 그지없어서, 60대 중후반쯤에 딸(숙신옹주)을 얻었다. 또한 훗날 나이가 들어 태상왕 시절 밖에 놀러 나갔다가 만취해서 가마를 타고 궁궐로 돌아올 때 주위에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말 타고 갈 거니까 당장 말 가져와!"라며 징징댔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태조의 그림(위)을 보아도 어깨가 떡 벌어진 강인한 체격임을 알 수 있다. 창작물에서는 활 쏘는 사람들을 여리여리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실전을 위한 활을 쏘기 위해서는 상당한 근육 단련이 필요한데다가, 위에서 언급하였듯 이성계는 장수들이 놀랄 정도의 강력한 활을 사용하였으므로 저렇게 체격이 다부진 게 당연하기는 하다.
명실상부 한국사 최강의 무인 군주
이성계가 벌인 전투들. 위로는 홍건적, 나하추, 여진족, 원나라와 맞붙었고, 아래로는 왜구, 그리고 위화도 회군으로 인한 고려 중앙군까지 당대 동북아시아의 모든 군사집단과 전투했으며 모두 승리했다. 그야말로 고려판 불패신화.
세세한 전공을 제외하고 굵직한 전공만 따져도 다음과 같다.1361년 10월 독로강(禿魯江) 만호(萬戶)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고 박의를 죽였다.1361년 10월 반성(潘誠)·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주원수(朱元帥) 등이 이끄는 20만 홍건적의 고려 침공. 삭주(朔州)·이성(泥城)·무주(撫州)·안주가 함락되고, 흥의역(興義驛)에 이르러 개경(開京)까지 위협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광주(廣州)를 거쳐 복주(福州)로 파천(播遷)하고 수도 개경이 결국 홍건적들의 대군세에 함락되자 이성계가 고려인과 여진족 2천으로 구성된 사병조직(가별초)으로 개경 탈환에 성공해서 가장 먼저 입성하고 홍건적 두목을 활로 쏴 죽였다.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원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적을 치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친내 함흥 평야에서 적을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1364년 1월 최유가 원나라 황제에 의해 고려왕에 봉해진 덕흥군을 받들고,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평안도지방에 쳐들어오자 이에 최영과 함께 수주 달천에서 이들을 모두 섬멸했다. 이 때 압록강을 건너 도망간 자는 겨우 17기뿐이었다.1364년 1월 여진족들이 삼선(三善)과 삼개(三介)의 지휘 아래 동북면에 침범하여 함주까지 함락당하자 이를 모두 물리치고 동북면이 평온을 되찾게 만들었다. 이후 밀직부사. 단성양절익대공신에 책봉되었고,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 화령부윤이 되었다.1370년 11월 지용수 등과 함께 만주의 동녕부(東寧府)를 점령하고 요동성을 함락시킴. (제1차 요동정벌)1377년 우왕 3년 크게 창궐하던 왜구들을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대파했다.1378년 수도 개경을 위협하던 왜구의 대군에 맞서 최영이 싸우다가 위기에 빠졌는데 직접 기병을 이끌고 구원하여 왜구의 대군을 격퇴하였다.1380년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발도가 지휘하는 왜구의 대군세를 운봉에서 섬멸했다. 그 전과는 역사상 황산대첩으로 알려질 만큼 혁혁한 것이었다. 황산 대첩은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30]1382년 여진인 호바투가 4만 기병들을 이끌고 동북면 일대를 침공하여 그 피해가 극심했다. 이에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이듬 해 이지란과 함께 길주에서 호바투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이어서 안변책을 건의했다.1384년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어 함주를 공격한 왜구를 대파했다.1388년 수문하시중이 되어 최영과 함께 이인임을 유배시킴. 또한 임견미, 염흥방을 척살했다.
이 시기 이성계의 활약을 보면 그야말로 전쟁을 위해 태어난 남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준이다.[31] 고려 국내에 침입한 왜구, 여진족, 원나라 군벌, 홍건적 등과 싸워서 전승했으며, 비록 일시적이긴 하나 공민왕 때의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요동성을 직접 함락시켜 점령하기도 했다. 고려조 이후의 한국사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성을 점령한 처음이자 마지막 장군이다. 특히 이성계 최대의 전공이라 할 수 있는 황산대첩 때에는 왜구의 피로 바위가 피로 물들어 그 바위를 '피바위'라 했을 정도로 왜구를 모조리 전멸시켰다. 이 시기의 왜구들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냐 하면,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고려라는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는 수준이었다. 명장 이성계의 눈부신 전공 3
그뿐만이 아니다. 여진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1362년 당대에 상당한 네임드였던 나하추를 우주관광 태워버렸다. 당시 나하추는 휘하의 가장 뛰어난 장수에게 붉은 기를 주었는데, 이걸 가지고 이성계와의 싸움에 나선 장수는 관우 앞의 안량과 문추 꼴이 되었다. 이에 열 받은 나하추는 다음 날 장수 5명을 한꺼번에 출진시켜서 이성계를 공격했는데, 5명 모두 올킬. 이는 원사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나하추의 부인이 나하추에게 이르기를 "공(公)이 세상에 두루 다닌 지가 오랜 세월이지만 저런 장수를 본 적이 있습니까? 어서 피하여 속히 돌아오십시오" 하였으나 나하추가 듣지 않았다. 나하추는 모든 병력을 함흥 평야로 이끌고 나왔으나, 오히려 이성계의 거짓 패퇴에 휩쓸려 완패한다.
결국 나하추는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면서, 공민왕과 이성계에게 좋은 말(馬)을 각각 선물하며 예를 차렸다. 더하여 이성계에게는 '부고'라는 진군할 때 울리는 북을 선물하였다. 진중에서 이성계의 무공을 지켜본 나하추의 누이까지도 "이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겠다"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1376년 우왕이 나하추에게 개성 부윤 황숙경을 사신으로 보내었는데, 나하추가 말하길 당시 공민왕이 이성계를 보내어 거의 죽을 뻔했다며, 이성계는 군사를 부리는 재주가 신(神)과 같다면서 안부를 물으며 이성계는 장차 큰일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엄연히 적장이었는데도 말이다!
1361년 음력 10월에 고려 조정의 부름을 받고 출전하여 독로강 만호(禿魯江萬戶) 박의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같은 달에 다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1차 침입 때의 5배 병력인 2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영내에 침입했다. 고려는 서경을 포함한 서북면 전역을 포기하는 청야전술까지 구사하며 수도 개경을 지키려고 저항하였으나 삽시간에 개경까지 함락되었다. 다급한 고려 조정은 노비들을 해방한다는 명분까지 내세워 20만 군사를 모았지만 급하게 모병한 군대이다 보니 쉽지 않았다.
이렇게 홍건적이 수도 개경에 머물며 남녀 백성들을 불에 태워 굽고 인육을 먹는 등[32]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사이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조직(가별초) 2,000명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서 적장의 목을 베어버리며 적을 대파하였다. 이성계 군대가 선두에 서서 개경에 입성하자 따르던 군대들도 입성하여 홍건적 10만의 목을 베었다. 나머지 홍건적 10만 명은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 이 때를 계기로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일개 변방의 장수가 아닌 인물로 주목하기 시작한다. 이 때 이성계가 보여준 무공은 그야말로 '항우의 재림'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성을 공격하던 날, 적(홍건적)들은 궁지에 몰려 위축되기는 했으나, 보루를 쌓고 굳게 지키므로 모든 아군 부대들이 진격해 포위망을 좁혀들어 갔다. 태조는 길 가의 민가에 머물고 있었는데, 밤중에 적들이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태조가 말을 달려 동문(東門)에 도달하였으나 성문에서 피아간에 마구 뒤섞여 전투를 벌이는 통에 문을 나갈 수가 없었다. 그때 뒤에서 적이 달려들어 창으로 태조의 오른쪽 귀 뒤를 찔러 형세가 위급해졌다. 태조가 칼을 빼어 앞을 가로막는 적병 칠팔 명을 쳐서 죽이고 말을 몰아 성을 뛰어넘었는데도 말이 넘어지지 않자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고려사』 권113, 열전26 안우·김득배·이방실1364년에는 기황후가 사주하여 최유가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쳐들어와 의주에서 고려군이 패퇴하고 안주로 후퇴하자 공민왕은 최영을 도순무사로 삼고, 이성계에게도 동북면 출신의 기병 천 명을 이끌고 가서 최영을 돕게 하였다. 그런데 이귀수, 지용수, 나세, 안우경, 이순, 우제,박춘 같은 기라성 같은 고려의 장수들이 패전을 거듭하고 와서 전장에서 머뭇거리며 나아가려고 하지 않자, 이성계가 이들을 무시하며 보란 듯이 나선다. 여타 장수들은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는 심보로 중앙, 좌, 우군 삼군의 모든 선봉을 이성계의 군대에게 맡겼다. 그런데 선봉에 선 이성계가 적장을 활로 쏴 말에서 떨어뜨리며 이성계 군대가 중앙 돌파에 성공하면서 덕흥군 주력 부대를 격파하자 나머지 군사들이 흩어진 덕흥군 좌우 군대를 공격하였다. 살아남은 덕흥군 군사는 17기뿐이었다. 한마디로 '네가 잘하면 얼마나 잘하나 보자' 식으로 엿을 먹어보라는 거였지만 문제는 저런 정신나간 상황에서도 이겼다는 것. 거록대전을 치른 항우의 일화를 연상케 하는 대목인데, 자신의 군사적 능력에 도취돼 오만과 포악성에 고삐가 풀려버린 항우와 달리 이후 이성계는 겸손의 미덕을 깨닫게 되고 오만한 행동을 줄이게 된다. 눈앞의 적보다 등 뒤의 아군이 등을 돌리면 더욱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중요한 경험이었던 셈. 이 때 이성계의 나이는 갓 서른 살(만으로 29세)이었다.
가능성은 크지 않으나 아마 우왕 때의 2차 요동 정벌이 성공했다면 물론이고, 실패했어도 비극적으로 장렬히 전사한 희대의 영웅, 명장으로 추앙되었을 명장이었다. 아무튼 살펴볼수록 어마어마한데, 후대에 명장 소리 듣던 신립같은 경우와 비교하면 이성계의 전공들이 얼마나 사기적인 수준인지 알 수 있다.전공도 전공이지만, 이성계의 활솜씨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자랑한다. 가히 궁술만으로 항우에 비견되는 한국사 최강의 보우마스터라 할 정도인데, 정말 무서운 점은 그 궁술이 야사뿐만 아니라 정사에도 많이 기록되었다는 것. 역사에 기록된 이성계의 활솜씨를 보면, 멀리서 저격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마궁술, 즉 말 타고 돌격하면서 활로 적들을 갈아버린적도 꽤 된다.
물론 정사인 고려사나 고려사절요가 조선시대, 그러니까 이 사람이 세운 왕조에서 쓰였으므로 리스펙트 차원의 미화와 과장이 들어갔을 가능성은 감안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성계의 활솜씨가 뛰어났다는 설 자체를 허구로 볼 수는 없다. 중국의 정사인 원사나 일본 측의 기록에서도 일부 교차검증이 되기 때문. 기록에 나타난 이성계의 궁술에 관한 일화들 몇 개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젊었을 때에는 훗날 정빈 김씨로 추봉되는 이자춘의 첩이자 여종이었던 김씨(의안대군 이화의 어머니)가 우연히 까마귀 5마리를 보고는 태조에게 활로 쏘아달라고 부탁하였다. 태조가 한 번의 활을 쏘아 5마리를 동시에 맞히자,[34] 김씨는 태조에게 절대로 이러한 일을 아무 데에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출처는 태조실록 1권 총서.보통 사람이 쓰는 것보다 훨씬 튼튼한 강궁을 썼는데, 이자춘이 이 활을 보고 인간이 쓸 물건이 아니라며 감탄했다고 전해진다.[35]1차 요동정벌 당시 동녕부의 추장 고안위(高安慰)가 오녀산성에 웅거하면서 항전을 하자 이성계는 편전(애기살) 70발을 쏴 성벽 위에 있던 고안위의 부하 70명의 얼굴을 하나씩 쏘아 모두 맞혔다. 이를 보고 고안위는 기겁하여 도망갔으며, 나머지 적군들의 사기가 떨어져 곧 항복을 하였다. 이것을 보고 주위 여러 성들이 항복하였는데 그 수가 1만여 호나 되었다. 출처는 태조대왕실록.[36]동녕부의 오녀산성을 점령한 후, 요동성 전투에서 처명이라는 적장을 사로잡기 위해서 한 발은 투구에, 한 발은 허벅지에 맞힌 후 "마지막 한 발은 네놈 얼굴에 맞히겠다!"라고 하자 용맹한 처명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항복한 처명은 이후 이성계 막하에서 부장으로 활약하여 황산 대첩 때에도 참전했다.황산대첩 때 왜구 적장 아기발도의 투구를 활로 맞혀 벗겼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 뒤를 이어 이지란이 얼굴에 화살을 맞혀서 쓰러뜨렸다고 한다. 아기발도는 온몸을 감싸는 갑옷을 입고 얼굴을 가리는 구리투구까지 쓰고 있었는데, 일본 투구에는 원래 얼굴을 가리는 철가면인 멘구(面具)라는 부품이 있다. 이성계가 투구꼭지를 맞혀 투구가 떨어지면 이지란이 쏘는 걸로 되어 있었다. 물론 이성계는 투구꼭지를 맞혔으나 투구가 기울어질 뿐 떨어지지 않았고, 아기발도가 다시 쓴 투구를 이성계가 다시 맞혀서 투구가 떨어지자 이지란이 얼굴을 쏴서 죽였다고 한다. 이 무협소설에 나와도 욕먹을 먼치킨 스토리가 야사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정사인 고려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일본 갑옷의 투구를 보면 이성계가 맞히었다는 정자 부위가 상당히 큰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투구는 그 부분이 상당히 작으나 일본 투구에는 화려하다 못해 너무 크다 싶을 정도인 장식이 달렸기 때문에 정자도 크다. 그렇다 해도 전투 중이라서 필시 움직이는 상태였을 상대를 2번 다 같은 위치에 맞혔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이건 현대 저격수들도 어려운 일이다.이성계는 왜구와의 격전을 앞두고 150보 떨어진 곳에서 투구를 놓아두고 3번 쏴 3번 다 맞히어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1보가 대략 1.2m니, 180m 거리를 백발백중으로 맞히는 실력이었던 셈이다. 이 정도 사거리는 웬만한 초기 화약병기를 상회하는 수준이다. 또한 가지고 있던 화살 20개중 17개를 쏘아 모두 맞히었는데 모두 왼쪽 눈초리에 명중했다고 한다. 출처는 역시 태조대왕실록.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백보(120m) 밖에 있는 배나무를 쏴서 가지에 달려 있는 배를 떨어뜨려 그 배로 손님을 대접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 역시 태조실록에 나오는 이야기.
심지어 이런 일화도 있다.5월, 경상도 원수(慶尙道元帥) 우인열(禹仁烈)이 비보(飛報)하기를, "나졸(邏卒)들이 말하기를, '왜적이 대마도(對馬島)로부터 바다를 뒤덮고 오는데 돛대가 서로 바라다보인다.' 하니, 도와서 싸울 원수(元帥)를 보내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때 왜적이 있는 곳은 가득히 찼으므로, 태조에게 명하여 가서 이를 치게 하였다. 태조가 행군하여 아직 이르지 않으니 인심(人心)이 흉흉하여 두려워하였다. 인열(仁烈)의 비보(飛報)가 계속해 이르므로, 태조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가서 적군과 지리산(智異山) 밑에서 싸우는데, 서로의 거리가 2백여 보(步)나 되었다.
적 한 명이 등(背)을 세워 몸을 숙이고 손으로 그 궁둥이를 두드리며 두려움이 없음을 보이면서 욕설을 하므로, 태조가 편전(片箭)을 사용하여 이를 쏘아서 화살 한 개에 넘어뜨렸다. 이에 적군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기운이 쑥 빠졌으므로, 곧 크게 이를 부수었다. 적의 무리가 낭패를 당하여 산에 올라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 임(臨)하여 칼과 창을 고슴도치 털처럼 드리우고 있으니, 관군(官軍)이 올라갈 수가 없었다. 태조가 비장(裨將)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치게 했더니, 비장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바위가 높고 가팔라서 말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태조가 이를 꾸짖고, 또 상왕(上王, 정종 이방과)으로 하여금 휘하의 용감한 군사를 나누어 그와 함께 가게 했더니, 상왕도 돌아와서 아뢰기를 또한 비장(裨將)의 말과 같았다. 태조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친히 가서 보겠다" 하면서, 이에 휘하의 군사들에게 이르기를, "내 말이 먼저 올라가면 너희들은 마땅히 뒤따라 올라올 것이다" 하였다. 드디어 말을 채찍질하여 함께 달려가서 그 지세(地勢)를 보고는 즉시 칼을 빼어 칼등으로 말을 때리니, 이때 해가 한낮이므로 칼빛이 번개처럼 번득였다. 말이 한번에 뛰어서 오르니, 군사들이 혹은 밀고 혹은 더위잡아서 따랐다. 이에 분발하여 적군을 냅다 치니, 적군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이 반수 이상이나 되었다. 마침내 남은 적군까지 쳐서 이들을 다 죽였다. 태조는 평소에 인심을 얻었고, 또 사졸들이 뛰어나게 날래었으므로, 싸우면 이기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주군(州郡)에서 그를 구름과 무지개처럼 우러러보았다. 【원전】 1 집 7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외교(外交) / *역사(歷史)이 이야기는 정도전(드라마)에서 황산대첩 직전에 각색이 가해져서 재현되었다. 사실은 황산 대첩 3년 전에 있었던 일화지만, 이성계의 활솜씨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로 보인다.어느 날 신하들이 공민왕 앞에서 활을 내었는데 이성계가 100번을 쏴 다 맞히어 "오늘날의 활쏘기는 다만 이성계(李成桂) 한 사람뿐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또한 원나라에서 활을 잘 쏘기로 유명한 찬성사(贊成事) 황상(黃裳)이 이성계와 활쏘기 실력을 겨룬 적이 있었는데, 족히 수백 발을 쏘았다고 한다. 이 때 황상은 50발을 연달아 맞힌 후 맞히기도 하고 못 맞히기도 하였으나 이성계는 단 한 발도 빗나간 것이 없다고 한다.[37]여진 정벌 당시 여진족 기병의 말의 눈을 쏘아 넘어뜨리기도 했으며, 온 몸에 갑옷을 입은 장수가 달려오자 투구를 쏘아 맞혔는데, 그 장수가 놀라서 입을 벌리자 입 안으로 화살을 쏘아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그 외에 의형제인 이지란을 만났을 때 사냥한 사슴을 가지고 다투다가 서로에게 활을 쏘는 대결을 했는데 이지란의 화살을 모두 피하는 신기를 보였다. 여진족과 싸울 때도 여진족들의 화살을 말 위에서 모두 피해 냈다고 한다. 또한 이지란이 길거리를 걷는 아낙네의 머리에 얹은 물동이에 구멍을 내자 솜을 끼운 화살을 쏴 그 구멍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야사도 아니고 정사에 나온다.야사에는 화살 3발을 한 번에 쏴 모든 과녁에 명중, 그것도 마상에서 해냈다는 기절초풍할 이야기도 있으나, 야사인 만큼 반 정도는 깎아서 접수하도록 하자.
기록에 따르면 활솜씨만이 아니라 검술(劍術), 마술(馬術)에도 능했던 듯 하다. 척준경까지는 아니지만 적병 7, 8명 정도는 썰어버렸다는 기록이 몇 군데 있다.[38]
퇴마록 국내편 3권에서 이성계가 화살이 없이 기(氣)만으로 활을 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인들의 인식도 대부분 명궁이라고 알고 있고 아는 사람들의 인식은 신궁. 역시 용장으로 이름난 송의 조광윤처럼 개국군주로서 특히 무예가 뛰어났다.[39]
원래 무골(武骨)이라서 그런지 노인이 되어도 정력이 강건하기 그지없어서, 60대 중후반쯤에 딸(숙신옹주)을 얻었다. 또한 훗날 나이가 들어 태상왕 시절 밖에 놀러 나갔다가 만취해서 가마를 타고 궁궐로 돌아올 때 주위에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말 타고 갈 거니까 당장 말 가져와!"라며 징징댔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태조의 그림(위)을 보아도 어깨가 떡 벌어진 강인한 체격임을 알 수 있다. 창작물에서는 활 쏘는 사람들을 여리여리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실전을 위한 활을 쏘기 위해서는 상당한 근육 단련이 필요한데다가, 위에서 언급하였듯 이성계는 장수들이 놀랄 정도의 강력한 활을 사용하였으므로 저렇게 체격이 다부진 게 당연하기는 하다.
바로 태조 이성계 ㄷ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