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 꼭 봐줘

쓰니2020.12.02
조회81

엄청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진짜 변명없이 쓴거야


그녀가 어떤 곳에서 공부한다는 소식을 친구에게 전해 듣고 공부할 겸 혹시라도 볼 수 있을까 봐 거기로 가서 어떤 날은 그녀가 있는 독서실에서 또 어떤 날에는 친구가 있는 독서실에서 공부했어


수능이 얼마 안 남아서 수능이 끝나면 서로 다른 곳으로 갈 테니까 수능 치기 전까지만이라도 보고 싶어서 그랬어 몇 번 마주친 거 같은데 시력이 너무 안 좋아서 알아보진 못했어


친구들과 동네를 걸으면서도 마주쳤던 거 같아 딱히 그녀를 찾아다닌 건 아니야 그냥 내 친구들 하루 일과가 그렇다 해서 따라 걸었어


상가에 신기한 통로도 지나가보고 공원에서 운동도 하고 그랬어 마주치고 나면 친구들이 항상 그녀라고 나에게 알려줬어 전번을 따고 싶기도 했고 sns로 연락하고 싶기도 했어


근데 내가 어떻게 그래 그녀는 너무 이쁘고 밝고 명랑했거든 마음속 깊은 곳에 상처를 갖고 있는 나한테는 너무 과분했어


게다가 내가 중학교 때 제일 친한 친구한테 배신당하고 무리한테 은따를 당해서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어


고3이 되면서 반에 아는 친구 한 명이 없게 되니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상처에 완전히 잡아먹혔어 학교는 물론 일상생활도 불가능했어 학교는 숙려제를 써서 쉬었지만 나는 너무 힘들었어 자살 생각도 여러 번 했고 매일 울면서 나는 왜 이렇냐고 대체 내가 뭘 잘못했냐고 신을 원망했어 항상 양보했고 배려했어


내가 덜하더라도 친구가 좋다면 난 괜찮았어 이런 과정에 나는 점점 착한 호구가 되어갔고 만만한 사람이 됐어 '돈을 빌려도 안 갚아도 되는 사람' '약속을 어겨도 봐주는 사람' 말로만 듣던 그 호구가 됐어


상담을 받으면서 정신적으로 조금 안정을 찾은 뒤 아무 일 없었단 듯이 학교로 돌아왔어 겉으로는 티를 안 냈지만 돌아와서도 너무 힘들었어 반에 친구 하나 없어서 등교부터 하교까지 혼자였어


고 1 2때 친구들에게도 아무말 안해서 그 친구들도 모르는 상태였어 항상 밝은 척 하는 나를 보고 아무것도 달라진게 없다고 생각했을거야 그냥 학교가 오기 싫어서 꾀병부렸다고 생각했겠지 내 상처가 드러나는게 싫었던 나는 밝은 척 했어


이렇게 자존감이 밑바닥을 쳐버린 나는 아무 것도 못한 체 그냥 바라보는 게 다였어 그러다 결국 익명톡을 걸게 됐어 나에 대해서 힌트를 많이 주고 대화를 하다가 내가 말실수를 해버렸어


그녀의 제일 친한 친구를 까는 느낌의 말을 해버린 거야 (내 친구랑 썸을 탔는데 끝나고 얼마 안지나서 친한남사친이랑 둘이서 노는 모습을 나랑 내 친구가 밥을 먹다가 봤어) 삼각관계라고 말하고 내 친구가 불쌍하다는 식으로 말했어 내가 생각이 너무 짧았었지 저렇게 말을 하면 그녀의 친구와 남사친을 까는게 되는건데 그녀와의 대화가 너무 좋아서 너무 행복해서 말이 막 나온거 같아.. 내 실수가 너무 확실해


그 뒤로 그녀의 말투는 차가워졌고 나는 내가 실수했단 걸 깨달았어 너무 미안했어 당황한 나는 횡설수설하다가 사과를 하고 언제나 그렇듯 바보같이 도망쳤어


하지만 그녀는 많은 힌트들로 나를 아는 상태였고 나를 안 좋게 봤을 거야 남 험담이나 하는 놈을 어떻게 좋게 볼 수 있겠어 제대로 연락 한 번 해보기도 전에 끝났버렸어


그날 나는 잠을 아예 못 잤어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심장이 쉴 새 없이 빠르게 뛰었고 동시에 너무 아팠어 밤새 오해를 풀 방법을 생각하며 결국 내 이미지를 다 날리더라도 직접 진심으로 사과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하고 싶은 말을 메모했었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 점심이 지나고 난 후 다시 그곳에 간 나는 그녀에게 얘기할 시간을 조금만 내어 달라고 하려 했어 하지만 가는 길에 친구에게 그녀의 에스크에 스토커라는 질문이 있다고 연락을 받았어 (해명할 때 그녀도 시력이 안좋아서 나를 마주친 줄 몰랐다 했어서 나인지는 모르겠어 맞는거 같은데 맞다고 하기엔..)


우연히 마주치기만 했던 나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말하는 건지 불분명했어 그대로 서서 움직일 수 없었어 혹시라도 나를 말한 거라면?


내가 그녀에게 가서 대화를 하자고 하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매우 불편하고 무서울 수 있다고 생각했어 내가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상대방이 그렇게 느꼈으면 그런거니까..


결국 직접 사과는 포기하고 인스타 디엠으로 친구를 통해 오해를 풀고 싶다고 그녀에게 전했어 오해를 풀려고 연락했을 때도 익명 톡 때처럼 싸늘했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고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지만 그 반응은 당연했어 오해들을 하나씩 해명해가며 사과했어


그전에 물론 내 실수에 거론되었던 내 친구들에게도 사과했고 해명하고 난 뒤 그녀의 친구에게도 따로 사과했어 뒷담도 그렇고 남 욕하는 건 어떤 대화에서든 절대 해서는 안된다고 항상 생각하고 지금까지 그래왔는데 대체 내가 왜 그랬을까 왜 하필 제일 중요한 대화에서 그렇게 말 해버린걸까


이제 내 안에 나에 대해 아주 조금 남아있던 자기애는 아예 사라져버렸어 이런 내가 싫어 대화하는 법조차 잊어버린 나는 이제 너무 지쳐


그래도 그녀가 너무 좋아 놀이터에서 뛰어놀며 웃던 그녀를 처음 봤던 그날이 잊히지 않아 가슴 깊은 곳에 상처를 지닌 나와는 비교될 정도로 밝은 그녀가 너무 보고 싶어


내가 어쩌다 이렇게 망가졌을까 내가 망가진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실수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전번이라도 따러 갔을까 내가 망가진 장난감 같은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속이 너무 쓰리고 가슴이 답답하고 웃지 못하고 눈물만 나와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