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雪化) 16. 봄 담이가 계루부에 몸을 의탁한지 벌써 한 계절이 지났다. 휘가 열심히 찾은 덕분에 담이 아버지가 절노부 깊은 산속에 위치한 대장장이 집에 은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소식도 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담이나 아버지가 움직이기엔 아직 위험했다. “아가씨이이이! 아가씨!” “왠 호들갑이야?” “아이구 숨차... 들으셨어요?” “뭘?” “지금, 결이님이 집채만한 곰을 잡아서 끌고 오고 있대요~” “곰?” “예에! 다른 애들 말로는, 곰 팔뚝이 오래된 나무둘레만 하답니다요!” “치이... 그게 뭐가 신기하다구.” “아가씨도 곰은 본 적 없으시면서~ 킬킬... 곰이 너무 커서 장정 다섯이 끄는데도 꿈쩍도 안했대요~” “그런 곰을 어찌 죽였다는거야?” “화살이 정수리에 하나, 심장에 하나씩 박혀 있는데요, 그걸 맞고도 살아 있었는지, 결이님이 칼을 들고 직접 싸웠다나봐요~” 담이는 못 이기는척 아옥이가 이끄는 대로 안채로 향했다. 과연, 정말 곰을 잡긴 잡았는지 안채 마당엔 집안의 노비들이 모두 모여있는 듯 했다. 아옥이는 이리저리 길을 트며 담이를 앞쪽으로 안내했다. 담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과연 엄청난 굵기의 곰 다리였다. 하지만 이내 손으로 입을 움켜쥐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마당이 온통 곰이 흘린 피로 흥건했던 것이다. “야만인...!” “뭐라구요, 아가씨?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난 이만 갈래.” “아니, 저 좋은 구경을 왜 하다말고 가요?” 담이는 돌아가려 했지만 자꾸만 앞으로 나서는 노비들 때문에 쉽게 틈을 찾지 못했다. “어머나... 저를 어째...” 한 여자노비의 걱정스런 말에 담이가 고개를 틀었다. 문으로 마악 결이 들어오고 있었다. 결이의 팔과 가슴이 피로 젖어 있었다. 여자노비들이 안채에서 천과 약초들을 들고 달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곰의 피만 묻은게 아닌 듯 했다. 결이 웃옷을 벗자, 곰에게 긁힌 자국이 어깨부터 가슴아래까지 패여있었다. 노비들이 놀라 웅성거리자, 결이 고갤 들었다. 결은 단번에 담이를 찾아냈다. 결은 왠지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에 어깨를 곧추폈다. 하지만, 담이의 표정을 본 결의 표정역시 굳었다. 담이얼굴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던 것이다. 결은 성큼성큼 담이 앞으로 걸어갔다. “가서 무록을 데려와.” “네? 제...가요?” “가는길은 알지?” “...네.” 결의 명령이 떨어지자 담이앞쪽 노비들이 길을 텄다. 담이는 속으로 거만한 후계자를 마구 욕하며 무록의 처소로 향했다. “큭...” “왜 웃으세요? 그냥 보기에도 많이 다친 듯 했어요. 어서 가요~” “날 찾는건, 죽기 일보 직전이거나 아니면 죽고싶을때지요. 오늘은 왜 엄살을 부린담?” “네? 하지만 상처가...” “내가 약초를 좀 줄테니 전해줘요.” “시, 싫어요...! 무록을 데려오라고 했단 말이에요!” “이 말을 전해요. 바쁜 사람 오라가라 할 정신 있으면 직접 걸어오라고.” 할 수 없이 담이는 무록이 싸준 약초 꾸러미를 들고 다시 결이의 처소로 되돌아왔다. 그새 곰과 노비들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곰의 피가 묻었던 마당도 흙으로 깨끗이 덮혀 있었다. 담이는 결이의 시중을 드는 노비에게 약초만 전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이의 처소는 사람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결이님...” “들어와.” 결은 침상에 기대 앉아 있었다. 담이는 시선을 맞출 엄두가 나지 않아 고개를 내리깔았다. “무록은?” “그러니까... 무록님은...” “내가 무록을 데려오라 하지 않았던가?” “저, 전했는데요... 무록님이...” “그런데?” “무록님이 지금 한창 바쁘셔서...” “뭐야? 감히 형의 명령을 거역하고 오지 않았단 말이야?” “그, 그게 아니에요. 무록님이 상처가 어떤지 물으시길래 제가 보기엔 많이 다치신 것 같지 않아서...” “...그럼 네가 내 명을 우습게 여긴 것이냐?” “...네. 아, 아뇨... 그건 아니에요.” 무록을 감싸려고 거짓변명을 해대며 당황하는 담이를 보며 결은 내심 웃음을 참고 있었다. 담이는 발끈 화가 치솟았다. “곰 좀 잡다 조금 다친걸 갖고 그렇게 수선을 피울 필요는 없잖아요! 부족의 형이 그 정도 상처에 징징대면 어떻게 부족을 다스려요? 사람을 오라가라 할 정신이 있으면 직접 걸어가 치료받는게 시간도 아끼고 좋을 것 같은데요?” “곰 좀 잡다가라... 아무나 잡는게 곰인줄 아는가보군?” 아... 난 이제 쫓겨 날지도 몰라... 일개 부족 후계자의 성질을 건드려놨으니... 곰의 밥이나 되라고 깊은 산속에 거꾸로 매달지도 모르지. “그 약초는 어찌 쓰라던?” “네?” 결이 갑자기 화제를 바꾸자 담은 당황했다. “아... 그러니까... 따뜻한 물에 이걸 풀어서 상처를 소독하고, 그 다음에는 이걸 빻아서 여기 이거하고 이거를 섞은후에...” “아아- 됐다. 무록이 일러준대로 해라.” “...네?” “그럼, 그 약초를 전부 내가 조제해서 직접 치료하란 말이냐?” “그, 그건 아니지만...” 담이가 밖을 흘끔 살피자, 결이 핀잔하듯 말을 뱉었다. “노비들은 다 곰을 따라갔다. 난 여기 버려두고.” 담이는 웃을 뻔 했다. 무게만 잡는 줄 알았더니, 어리광도 부리네... 담은 약초를 푼 물에 천을 적셔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서보니 생각보다 깊이 패인 상처였다. 아플 것 같아 담이는 쉽게 천을 대지 못했다. “뭐하는거냐? 상처가 더 벌어져서 내가 빨리 죽기라도 바라는거냐?” 내가 첩자야? 무슨 말을 저따위로 한담... 담이는 신경질 적으로 상처를 닦았다. 상처가 벌어져 죽는게 아니라, 내가 문지른게 너무 아파서 죽어버려! 하지만 담이 바램과는 달리 결은 눈썹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몸이 무쇠라도 되는거야? 어쩜 속살이 드러날 정도로 패인 상처를 손대는데 저렇게 태연할 수 있담? “사냥하는게 그렇게 즐겁다면, 작은 동물을 잡아도 되지 않아요? 곰을 잡아야 꼭 힘자랑이 되는 건가요? 곰은 새끼도 많이 낳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혹시 어미를 잃었을 새끼생각은 하지 않아요? 내 보기엔 야만인 같은 짓이에요.” 담이는 하마터면 천을 놓칠 뻔 했다. 자신을 노려보는 결의 눈빛이 너무 차고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 자가 화나면 얼마나 무서워지는지 두 번 다시 확인하지 않으리라. “오늘 내가 잡은 녀석은 몇해전부터 숲 근처 마을로 내려와 작물을 모두 해쳤다.” “그런 이유라면 진즉 잡았을것 아니에요?” “녀석이 데리고 다니던 새끼가 모두 커서 어미곁을 떠났다.” 곰을 죽였다고 힐난하던 담이는 할 말을 잃었다. 마을을 위해 한 일인데다 몇해간은 새끼를 위해 살려뒀었다니... 모두가 결을 존경하며 떠받든다더니, 그 이유를 짐작하겠다. “내가 무슨일을 해도 날 비난할 부족민은 없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의 얼굴이 너무 바짝 붙어있어 담이는 숨이 막혔다. 어째서 이 사람 주위엔 공기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까. 문득 결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있는 땀이 눈에 들어왔다. 상처가... 아팠던거군... “상처가 빨리 아물려면 천을 단단히 매야 한다고 무록이 일러줬어요. 그러니 아파도 참아요-” 담은 있는 힘껏 천을 감아맸다. 담이의 이마에도 땀이 맺혔다. 갸날픈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야물게 천을 동여매고 있는 담이를 보자 결은 화는 금새 사라지고 웃음이 터지려 했다. “결이님, 잠깐 나와 보셔야겠는데요-” “무슨일이냐?” “곰을 통째로 날라놓고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며 다들 손을 놓고 있습니다요.” 결이 자리에서 일어나다 움찔하는 것을 담이가 보았다. 담은 결의 팔을 잡았다. “그 몸으로 뭘 하시려구요- 그런건 여기서 말씀하셔도 되잖아요.” “글쎄... 뭐라고 하면 좋겠느냐?” “그거야... 가죽을 다루는 자에게 털을 벗기라 하고, 고기를 다루는 자에게 부위별로 나눠 저장을 하라고 하면 되지 않겠어요?” 결은 탄복했다. 어찌 조그만 소녀의 머리가 저리 영특하단 말인가... 결은 곧 밖에 서 있는 자에게 담이 말대로 명령을 내렸다. “곰을 잡는건 싫어하는 것 같더니, 처리하는 건 칼같구나.” “그거야... 기왕 잡은거니...” 담이의 얼굴이 무안함으로 붉어졌다. “그럼 전 이만...” 담이가 몸을 돌리려 하자, 결이 손을 잡아챘다. 결 역시 자신의 행동이 무안했는지 조금 머뭇거렸다. “내일 와서... 상처를 돌보라.” “......네.” 달리 대답하면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아 담은 하는 수 없이 그렇게 대답하고 급하게 방을 나갔다. 문을 사이에 두고, 담이와 결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17. 비(悲) 담이 시냇가에서 한참을 보내고 돌아온 날이었다. “아옥아! 이것 좀 봐! 벌써 꽃이 이렇게 많이 피었어!” “아가씨...” “앗, 휘님! 저 지금 시냇가에 가서 꽃을 띄우고 오는 길이에요. 어쩌면 우리 마을까지 흘러갈지도 몰라요.” 아옥이는 차마 못 보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고, 휘 역시 참담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담이는 이내 이상한 분위기를 알아채고 불안한 마음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뭐에요...? 그렇게 우두커니들 서서...” 아옥이는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고, 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뭐에요? 무슨 일이에요? 네?” “담아...” 담이의 머릿속엔 온통 아버지에 대한 불길한 예감 뿐이었다. “무슨... 나쁜일이라도...? 우리... 아버지...?” “담아... 아버지는...” 한참 말을 못잇던 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돌아가셨다.” “...네?” “조만간 이곳으로 오시기로 하셨었다... 헌데...” “거짓말...” “담아...!” “무슨... 무슨 그런 끔찍한 농을 하세요... 그런 농은 안들은걸로 할래요.” “담아, 믿기 싫겠지만 사실이야.” “거짓말 말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신걸 봤어요? 봤냐구요! 난 내 눈으로 시신을 보기 전엔 믿지 않을거에요! 아옥아! 떠날 채비를 해!” 담이는 정신없이 방안에 들어가 옷을 걸치고 나왔다. “아옥아!” “대체 왜 이러니? 어딜 간다고 이러는거야?” “그야 아버지 계신 곳이죠.” 휘는 거칠게 담이의 두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제발 내 말을 들어! 넌 거기 갈 수 없다! 아버지는 병이 나신것도 아니고, 사고가 나신것도 아니야. 누군가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셨다.” “......!”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야. 수상한 사람들이 너의 행방도 쫓고있다고 하더라. 너도 죽이러 뒤지고 다니는 것이야.” “...어째서...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를 왜...” “계루부의 지방관리와 중앙관리들이 연루된 듯 하다.” “믿을 수 없어요...” “시신은 그곳 대장장이가 수습했다 하더라. 곧 유골을 모셔올거다.” 담이는 그만 휘청거리며 쓰러질뻔 했다. 휘가 재빨리 담이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들어가 눕자.”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눈을 감은 담이의 눈에서 폭포같은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담이는 거의 실신상태로 휘에게 안겨들어와 방안에 눕혀졌다. 그리고 눕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아옥아, 아가씨를 잘 지켜라. 혹시 아버지께 가겠다고 할지 모르니 눈을 떼면 안된다.” “네, 걱정 마세요. 목숨처럼 지킬거에요.” 결과 휘가 만났다. “이제 어쩌면 좋지?” “내가 알아낸건, 관료들이 담이 아비에게 뭔가 꼬리가 잡혔다는 것 뿐이야. 담이 아비가 관료들을 차례로 만났더군. 그리고... 거기에 원이란 작자의 아비도 포함되어있다. 조의대두형 모사달.” “허나 우리가 캐낼 명분이 없지않아? 담이를 데리고 있는것만도 그쪽에서 알면 곤란한데...” “...그렇지.” “담이에게 뭐라고 하지?” “......” 담이는 고통을 잊으려는 듯 며칠간 겨우 물만 마시며 계속 잠만 잤다. 그러던 어느날 밤, 담이는 홀연히 눈을 떴다. 걸을 기운도 없는 담은 죽을힘을 다해 결의 처소로 향했다. 이미 밤이 늦어 집안은 텅 빈것처럼 적막하기만 했다. 담은 조용한 결의 방앞에서 지붕을 한 번 쳐다보았다. 지키는 자가 아무도 없는 듯 하지만,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담이는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결은 침상에 누워 깊이 잠들어 있는 듯 했다. 침상 가까이까지 걸어간 담이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단검을 꺼냈다. 단검이 번뜩이며 빛을 반사하자 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칼을 쥐었다. “왠놈이냐!” 창밖으로 스스스하며 달나미가 움직이는 가벼운 소리가 났다. “너는...!” 달나미가 밖에서 일을 처리하지 않고 방까지 들인 이유가 있었군. “...노비로 삼아주세요.” “...!” 결은 당황했다. 달빛을 받은 담이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 보였다. “무슨 말이냐?” “...대신 일년간만 자유를 주세요.” “넌... 노비가 아니다.” “노비가 되겠어요.” “대체 원하는게 무엇이냐? 아비 이야기는... 들었다.” 담이의 눈동자는 왠지 공허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뒤에 숨어있는 타오르는 의지를 결은 느끼고 있었다. “아버지를 죽인자를 찾겠어요. 제가 아니면 아무도 아버지가 모함을 받은 이유를 알아낼리 없어요.” “무모한 짓이다. 그렇다고 노비를 자청하는 이유는 무어냐?” “전 갈곳이 없어요. 여기서 나가면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기도 전에 제가 먼저 죽을지도 모르죠. 지금 저를 도와주신다면, 평생 시키는대로 다 할거에요.” “......돌아가라.” 담이가 단도를 들었다. “거절하시면 여기서 죽을거에요.” “...!” 결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담이는 단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담이의 칼끝이 정말 심장을 향하고 있다는걸 안 결은 몸을 날렸다. 담이는 양손을 결에게 잡힌채 뒤로 넘어졌다. “미련한것...! 정말로 찌를참이었구나!” “나는... 정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죽든가, 아버지의 한을 풀던가...” “알았으니 돌아가라.” 담이는 눈을 질끈감고 겨우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널 내 노비로 삼고자 두고두고 생각한것이 아니니라... 네가 내게 빛이 됨과 동시에 어둠이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은 동이 틀때까지 아련한 뭉클함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11 설화(雪化)
설화(雪化)
16. 봄
담이가 계루부에 몸을 의탁한지 벌써 한 계절이 지났다.
휘가 열심히 찾은 덕분에 담이 아버지가 절노부 깊은 산속에 위치한 대장장이 집에 은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소식도 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담이나 아버지가 움직이기엔 아직 위험했다.
“아가씨이이이! 아가씨!”
“왠 호들갑이야?”
“아이구 숨차... 들으셨어요?”
“뭘?”
“지금, 결이님이 집채만한 곰을 잡아서 끌고 오고 있대요~”
“곰?”
“예에! 다른 애들 말로는, 곰 팔뚝이 오래된 나무둘레만 하답니다요!”
“치이... 그게 뭐가 신기하다구.”
“아가씨도 곰은 본 적 없으시면서~ 킬킬... 곰이 너무 커서 장정 다섯이 끄는데도 꿈쩍도 안했대요~”
“그런 곰을 어찌 죽였다는거야?”
“화살이 정수리에 하나, 심장에 하나씩 박혀 있는데요, 그걸 맞고도 살아 있었는지, 결이님이 칼을 들고 직접 싸웠다나봐요~”
담이는 못 이기는척 아옥이가 이끄는 대로 안채로 향했다.
과연, 정말 곰을 잡긴 잡았는지 안채 마당엔 집안의 노비들이 모두 모여있는 듯 했다.
아옥이는 이리저리 길을 트며 담이를 앞쪽으로 안내했다.
담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과연 엄청난 굵기의 곰 다리였다.
하지만 이내 손으로 입을 움켜쥐고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마당이 온통 곰이 흘린 피로 흥건했던 것이다.
“야만인...!”
“뭐라구요, 아가씨?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난 이만 갈래.”
“아니, 저 좋은 구경을 왜 하다말고 가요?”
담이는 돌아가려 했지만 자꾸만 앞으로 나서는 노비들 때문에 쉽게 틈을 찾지 못했다.
“어머나... 저를 어째...”
한 여자노비의 걱정스런 말에 담이가 고개를 틀었다.
문으로 마악 결이 들어오고 있었다.
결이의 팔과 가슴이 피로 젖어 있었다.
여자노비들이 안채에서 천과 약초들을 들고 달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곰의 피만 묻은게 아닌 듯 했다.
결이 웃옷을 벗자, 곰에게 긁힌 자국이 어깨부터 가슴아래까지 패여있었다.
노비들이 놀라 웅성거리자, 결이 고갤 들었다.
결은 단번에 담이를 찾아냈다.
결은 왠지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에 어깨를 곧추폈다.
하지만, 담이의 표정을 본 결의 표정역시 굳었다.
담이얼굴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던 것이다.
결은 성큼성큼 담이 앞으로 걸어갔다.
“가서 무록을 데려와.”
“네? 제...가요?”
“가는길은 알지?”
“...네.”
결의 명령이 떨어지자 담이앞쪽 노비들이 길을 텄다.
담이는 속으로 거만한 후계자를 마구 욕하며 무록의 처소로 향했다.
“큭...”
“왜 웃으세요? 그냥 보기에도 많이 다친 듯 했어요. 어서 가요~”
“날 찾는건, 죽기 일보 직전이거나 아니면 죽고싶을때지요. 오늘은 왜 엄살을 부린담?”
“네? 하지만 상처가...”
“내가 약초를 좀 줄테니 전해줘요.”
“시, 싫어요...! 무록을 데려오라고 했단 말이에요!”
“이 말을 전해요. 바쁜 사람 오라가라 할 정신 있으면 직접 걸어오라고.”
할 수 없이 담이는 무록이 싸준 약초 꾸러미를 들고 다시 결이의 처소로 되돌아왔다.
그새 곰과 노비들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곰의 피가 묻었던 마당도 흙으로 깨끗이 덮혀 있었다.
담이는 결이의 시중을 드는 노비에게 약초만 전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이의 처소는 사람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결이님...”
“들어와.”
결은 침상에 기대 앉아 있었다.
담이는 시선을 맞출 엄두가 나지 않아 고개를 내리깔았다.
“무록은?”
“그러니까... 무록님은...”
“내가 무록을 데려오라 하지 않았던가?”
“저, 전했는데요... 무록님이...”
“그런데?”
“무록님이 지금 한창 바쁘셔서...”
“뭐야? 감히 형의 명령을 거역하고 오지 않았단 말이야?”
“그, 그게 아니에요. 무록님이 상처가 어떤지 물으시길래 제가 보기엔 많이 다치신 것 같지 않아서...”
“...그럼 네가 내 명을 우습게 여긴 것이냐?”
“...네. 아, 아뇨... 그건 아니에요.”
무록을 감싸려고 거짓변명을 해대며 당황하는 담이를 보며 결은 내심 웃음을 참고 있었다.
담이는 발끈 화가 치솟았다.
“곰 좀 잡다 조금 다친걸 갖고 그렇게 수선을 피울 필요는 없잖아요! 부족의 형이 그 정도 상처에 징징대면 어떻게 부족을 다스려요? 사람을 오라가라 할 정신이 있으면 직접 걸어가 치료받는게 시간도 아끼고 좋을 것 같은데요?”
“곰 좀 잡다가라... 아무나 잡는게 곰인줄 아는가보군?”
아... 난 이제 쫓겨 날지도 몰라...
일개 부족 후계자의 성질을 건드려놨으니...
곰의 밥이나 되라고 깊은 산속에 거꾸로 매달지도 모르지.
“그 약초는 어찌 쓰라던?”
“네?”
결이 갑자기 화제를 바꾸자 담은 당황했다.
“아... 그러니까... 따뜻한 물에 이걸 풀어서 상처를 소독하고, 그 다음에는 이걸 빻아서 여기 이거하고 이거를 섞은후에...”
“아아- 됐다. 무록이 일러준대로 해라.”
“...네?”
“그럼, 그 약초를 전부 내가 조제해서 직접 치료하란 말이냐?”
“그, 그건 아니지만...”
담이가 밖을 흘끔 살피자, 결이 핀잔하듯 말을 뱉었다.
“노비들은 다 곰을 따라갔다. 난 여기 버려두고.”
담이는 웃을 뻔 했다. 무게만 잡는 줄 알았더니, 어리광도 부리네...
담은 약초를 푼 물에 천을 적셔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서보니 생각보다 깊이 패인 상처였다.
아플 것 같아 담이는 쉽게 천을 대지 못했다.
“뭐하는거냐? 상처가 더 벌어져서 내가 빨리 죽기라도 바라는거냐?”
내가 첩자야? 무슨 말을 저따위로 한담...
담이는 신경질 적으로 상처를 닦았다.
상처가 벌어져 죽는게 아니라, 내가 문지른게 너무 아파서 죽어버려!
하지만 담이 바램과는 달리 결은 눈썹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몸이 무쇠라도 되는거야? 어쩜 속살이 드러날 정도로 패인 상처를 손대는데 저렇게 태연할 수 있담?
“사냥하는게 그렇게 즐겁다면, 작은 동물을 잡아도 되지 않아요? 곰을 잡아야 꼭 힘자랑이 되는 건가요? 곰은 새끼도 많이 낳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혹시 어미를 잃었을 새끼생각은 하지 않아요? 내 보기엔 야만인 같은 짓이에요.”
담이는 하마터면 천을 놓칠 뻔 했다.
자신을 노려보는 결의 눈빛이 너무 차고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 자가 화나면 얼마나 무서워지는지 두 번 다시 확인하지 않으리라.
“오늘 내가 잡은 녀석은 몇해전부터 숲 근처 마을로 내려와 작물을 모두 해쳤다.”
“그런 이유라면 진즉 잡았을것 아니에요?”
“녀석이 데리고 다니던 새끼가 모두 커서 어미곁을 떠났다.”
곰을 죽였다고 힐난하던 담이는 할 말을 잃었다.
마을을 위해 한 일인데다 몇해간은 새끼를 위해 살려뒀었다니...
모두가 결을 존경하며 떠받든다더니, 그 이유를 짐작하겠다.
“내가 무슨일을 해도 날 비난할 부족민은 없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의 얼굴이 너무 바짝 붙어있어 담이는 숨이 막혔다.
어째서 이 사람 주위엔 공기가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까.
문득 결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있는 땀이 눈에 들어왔다.
상처가... 아팠던거군...
“상처가 빨리 아물려면 천을 단단히 매야 한다고 무록이 일러줬어요. 그러니 아파도 참아요-”
담은 있는 힘껏 천을 감아맸다.
담이의 이마에도 땀이 맺혔다.
갸날픈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야물게 천을 동여매고 있는 담이를 보자 결은 화는 금새 사라지고 웃음이 터지려 했다.
“결이님, 잠깐 나와 보셔야겠는데요-”
“무슨일이냐?”
“곰을 통째로 날라놓고 어찌해야할지 모르겠다며 다들 손을 놓고 있습니다요.”
결이 자리에서 일어나다 움찔하는 것을 담이가 보았다.
담은 결의 팔을 잡았다.
“그 몸으로 뭘 하시려구요- 그런건 여기서 말씀하셔도 되잖아요.”
“글쎄... 뭐라고 하면 좋겠느냐?”
“그거야... 가죽을 다루는 자에게 털을 벗기라 하고, 고기를 다루는 자에게 부위별로 나눠 저장을 하라고 하면 되지 않겠어요?”
결은 탄복했다. 어찌 조그만 소녀의 머리가 저리 영특하단 말인가...
결은 곧 밖에 서 있는 자에게 담이 말대로 명령을 내렸다.
“곰을 잡는건 싫어하는 것 같더니, 처리하는 건 칼같구나.”
“그거야... 기왕 잡은거니...”
담이의 얼굴이 무안함으로 붉어졌다.
“그럼 전 이만...”
담이가 몸을 돌리려 하자, 결이 손을 잡아챘다.
결 역시 자신의 행동이 무안했는지 조금 머뭇거렸다.
“내일 와서... 상처를 돌보라.”
“......네.”
달리 대답하면 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아 담은 하는 수 없이 그렇게 대답하고 급하게 방을 나갔다.
문을 사이에 두고, 담이와 결은 동시에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17. 비(悲)
담이 시냇가에서 한참을 보내고 돌아온 날이었다.
“아옥아! 이것 좀 봐! 벌써 꽃이 이렇게 많이 피었어!”
“아가씨...”
“앗, 휘님! 저 지금 시냇가에 가서 꽃을 띄우고 오는 길이에요. 어쩌면 우리 마을까지 흘러갈지도 몰라요.”
아옥이는 차마 못 보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고, 휘 역시 참담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담이는 이내 이상한 분위기를 알아채고 불안한 마음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뭐에요...? 그렇게 우두커니들 서서...”
아옥이는 문을 박차고 뛰어나갔고, 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뭐에요? 무슨 일이에요? 네?”
“담아...”
담이의 머릿속엔 온통 아버지에 대한 불길한 예감 뿐이었다.
“무슨... 나쁜일이라도...? 우리... 아버지...?”
“담아... 아버지는...”
한참 말을 못잇던 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돌아가셨다.”
“...네?”
“조만간 이곳으로 오시기로 하셨었다... 헌데...”
“거짓말...”
“담아...!”
“무슨... 무슨 그런 끔찍한 농을 하세요... 그런 농은 안들은걸로 할래요.”
“담아, 믿기 싫겠지만 사실이야.”
“거짓말 말아요! 아버지가 돌아가신걸 봤어요? 봤냐구요! 난 내 눈으로 시신을 보기 전엔 믿지 않을거에요! 아옥아! 떠날 채비를 해!”
담이는 정신없이 방안에 들어가 옷을 걸치고 나왔다.
“아옥아!”
“대체 왜 이러니? 어딜 간다고 이러는거야?”
“그야 아버지 계신 곳이죠.”
휘는 거칠게 담이의 두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제발 내 말을 들어! 넌 거기 갈 수 없다! 아버지는 병이 나신것도 아니고, 사고가 나신것도 아니야. 누군가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셨다.”
“......!”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야. 수상한 사람들이 너의 행방도 쫓고있다고 하더라. 너도 죽이러 뒤지고 다니는 것이야.”
“...어째서...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를 왜...”
“계루부의 지방관리와 중앙관리들이 연루된 듯 하다.”
“믿을 수 없어요...”
“시신은 그곳 대장장이가 수습했다 하더라. 곧 유골을 모셔올거다.”
담이는 그만 휘청거리며 쓰러질뻔 했다.
휘가 재빨리 담이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들어가 눕자.”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눈을 감은 담이의 눈에서 폭포같은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담이는 거의 실신상태로 휘에게 안겨들어와 방안에 눕혀졌다.
그리고 눕자마자 정신을 잃었다.
“아옥아, 아가씨를 잘 지켜라. 혹시 아버지께 가겠다고 할지 모르니 눈을 떼면 안된다.”
“네, 걱정 마세요. 목숨처럼 지킬거에요.”
결과 휘가 만났다.
“이제 어쩌면 좋지?”
“내가 알아낸건, 관료들이 담이 아비에게 뭔가 꼬리가 잡혔다는 것 뿐이야. 담이 아비가 관료들을 차례로 만났더군. 그리고... 거기에 원이란 작자의 아비도 포함되어있다. 조의대두형 모사달.”
“허나 우리가 캐낼 명분이 없지않아? 담이를 데리고 있는것만도 그쪽에서 알면 곤란한데...”
“...그렇지.”
“담이에게 뭐라고 하지?”
“......”
담이는 고통을 잊으려는 듯 며칠간 겨우 물만 마시며 계속 잠만 잤다.
그러던 어느날 밤, 담이는 홀연히 눈을 떴다.
걸을 기운도 없는 담은 죽을힘을 다해 결의 처소로 향했다.
이미 밤이 늦어 집안은 텅 빈것처럼 적막하기만 했다.
담은 조용한 결의 방앞에서 지붕을 한 번 쳐다보았다.
지키는 자가 아무도 없는 듯 하지만,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담이는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결은 침상에 누워 깊이 잠들어 있는 듯 했다.
침상 가까이까지 걸어간 담이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단검을 꺼냈다.
단검이 번뜩이며 빛을 반사하자 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칼을 쥐었다.
“왠놈이냐!”
창밖으로 스스스하며 달나미가 움직이는 가벼운 소리가 났다.
“너는...!”
달나미가 밖에서 일을 처리하지 않고 방까지 들인 이유가 있었군.
“...노비로 삼아주세요.”
“...!”
결은 당황했다. 달빛을 받은 담이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 보였다.
“무슨 말이냐?”
“...대신 일년간만 자유를 주세요.”
“넌... 노비가 아니다.”
“노비가 되겠어요.”
“대체 원하는게 무엇이냐? 아비 이야기는... 들었다.”
담이의 눈동자는 왠지 공허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 뒤에 숨어있는 타오르는 의지를 결은 느끼고 있었다.
“아버지를 죽인자를 찾겠어요. 제가 아니면 아무도 아버지가 모함을 받은 이유를 알아낼리 없어요.”
“무모한 짓이다. 그렇다고 노비를 자청하는 이유는 무어냐?”
“전 갈곳이 없어요. 여기서 나가면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기도 전에 제가 먼저 죽을지도 모르죠. 지금 저를 도와주신다면, 평생 시키는대로 다 할거에요.”
“......돌아가라.”
담이가 단도를 들었다.
“거절하시면 여기서 죽을거에요.”
“...!”
결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담이는 단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담이의 칼끝이 정말 심장을 향하고 있다는걸 안 결은 몸을 날렸다.
담이는 양손을 결에게 잡힌채 뒤로 넘어졌다.
“미련한것...! 정말로 찌를참이었구나!”
“나는... 정말...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죽든가, 아버지의 한을 풀던가...”
“알았으니 돌아가라.”
담이는 눈을 질끈감고 겨우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널 내 노비로 삼고자 두고두고 생각한것이 아니니라...
네가 내게 빛이 됨과 동시에 어둠이 될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은 동이 틀때까지 아련한 뭉클함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