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혼자 죽어서 어둠뿐인 땅에 묻혀 조금씩 썩어 들어가는 나의 육신을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특히 내가 죽으면 땅에 묻혀 눈이 썩어 들어가면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답답함과 공포 그리고 고독을 생각했었다. 그래서 혼자 잠을 자는 밤이면 귀신이 나타나서 나의 목을 조르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고, 갑자기 달려오는 차량에 치여 죽는 것과 어느 날 괴한에 의해 나의 목숨을 빼앗기는 공포에 몸서리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의 공포를 잊기 위해 신앙심을 가진 적도 있었다. 중학교 시절까지는 친구와 교회도 열심히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목사님은 신앙심이 냐약해서 그렇다며, 더욱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했다. 하나님에게 의지하고 진실한 신앙심만 있다면 모든 고통은 예수님께서 모두 가져가신다고 했다. 당시 내가 신앙심이 약했던 탓일까? 예수님은 나의 고통을 전혀 가져가지 않았고, 하나님은 항상 침묵했다. 내 곁에서 열심히 떠드는 사람은 인간인 목사님의 허망한 믿음에 대한 강요뿐이었다.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고통을 받는 삶보다 차라리 일찍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나 두 차례의 자살에 실패하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도망가거나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그 공포를 극복해야겠다는 자각이 일어났다. 때마침 나는 소설가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라는 단편소설을 접하게 된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우를 위하여>는 군사독재시절에 소수의 부당한 권력자에게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갖는 두려움과 공포심을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를 지닌 작품이었다.
어쨌건 지난 2008년 해외뉴스에도 나왔지만, 미국의 한 마을에 몸무게 100kg나 되는 거구의 곰 한 마리가 숲속에서 내려왔다. 곰은 어슬렁거리며 마을에서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태어난 지 2개월 남짓한 어린 고양이를 발견하고 놀라서 근처의 나무위로 허겁지겁 달아났다. 무려 3시간 동안 곰은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않자 인근 소방대원들이 구조했다고 한다. <아우를 위하여>에서 형은 동생에게 “대상의 실체를 명확히 파악하면 그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거구의 곰이 어린 고양의 실체를 명확히 파악하고 알았다면 두려워 달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벗어나는 방법론을 언급해야겠다. 일단 과거 중국의 진시황제도 서불에게 명령하여 장생불사약(長生不死藥)을 구해서 오래 살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미래 의학과학에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간의 수명을 최대 125세까지 연장할 수 있다고 하지만, 영원히 살기 어렵다고 한다. 즉 인간은 어떤 종교나 권력 그리고 과학으로도 죽음을 절대 피해갈 수는 없다. 이왕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이라면 우리들은 차라리 죽음의 실체를 깨끗이 인정하고, 살아 있는 동안 의미 있고 보람되게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아무리 부정하고 거부해도 언제가 찾아오는 죽음에 대해 유한한 생명의 시간을 지닌 우리가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을 지니고 허무하게 시간을 소비하다가 죽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자살로 일찍 생을 마감하는 것은 더욱 더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차라리 죽음은 결코 반갑지 않는 친구지만 어차피 한 번은 반드시 찾아올 친구라 생각하자. 그래서 열심히 즐겁고 행복하게 살다가 반갑지 않은 그 죽음이 찾아와 손을 내밀면 함께 손잡고 가면되는 것이다. 비록 인간의 육체는 소멸해도 그 아름다운 정신(종교적 의미의 영혼은 아님)은 남는다. 아름다운 정신으로 살아가도록 하자.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특별한 방법?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특별한 방법?
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혼자 죽어서 어둠뿐인 땅에 묻혀 조금씩 썩어 들어가는 나의 육신을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특히 내가 죽으면 땅에 묻혀 눈이 썩어 들어가면서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답답함과 공포 그리고 고독을 생각했었다. 그래서 혼자 잠을 자는 밤이면 귀신이 나타나서 나의 목을 조르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고, 갑자기 달려오는 차량에 치여 죽는 것과 어느 날 괴한에 의해 나의 목숨을 빼앗기는 공포에 몸서리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의 공포를 잊기 위해 신앙심을 가진 적도 있었다. 중학교 시절까지는 친구와 교회도 열심히 다녔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목사님은 신앙심이 냐약해서 그렇다며, 더욱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했다. 하나님에게 의지하고 진실한 신앙심만 있다면 모든 고통은 예수님께서 모두 가져가신다고 했다. 당시 내가 신앙심이 약했던 탓일까? 예수님은 나의 고통을 전혀 가져가지 않았고, 하나님은 항상 침묵했다. 내 곁에서 열심히 떠드는 사람은 인간인 목사님의 허망한 믿음에 대한 강요뿐이었다.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고통을 받는 삶보다 차라리 일찍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중학교 3학년 때, 나는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나 두 차례의 자살에 실패하고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도망가거나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그 공포를 극복해야겠다는 자각이 일어났다. 때마침 나는 소설가 황석영의 <아우를 위하여>라는 단편소설을 접하게 된다. 나중에 알았지만, <아우를 위하여>는 군사독재시절에 소수의 부당한 권력자에게 절대다수의 국민들이 갖는 두려움과 공포심을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를 지닌 작품이었다.
어쨌건 지난 2008년 해외뉴스에도 나왔지만, 미국의 한 마을에 몸무게 100kg나 되는 거구의 곰 한 마리가 숲속에서 내려왔다. 곰은 어슬렁거리며 마을에서 먹을 것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태어난 지 2개월 남짓한 어린 고양이를 발견하고 놀라서 근처의 나무위로 허겁지겁 달아났다. 무려 3시간 동안 곰은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않자 인근 소방대원들이 구조했다고 한다. <아우를 위하여>에서 형은 동생에게 “대상의 실체를 명확히 파악하면 그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거구의 곰이 어린 고양의 실체를 명확히 파악하고 알았다면 두려워 달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벗어나는 방법론을 언급해야겠다. 일단 과거 중국의 진시황제도 서불에게 명령하여 장생불사약(長生不死藥)을 구해서 오래 살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미래 의학과학에서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인간의 수명을 최대 125세까지 연장할 수 있다고 하지만, 영원히 살기 어렵다고 한다. 즉 인간은 어떤 종교나 권력 그리고 과학으로도 죽음을 절대 피해갈 수는 없다. 이왕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이라면 우리들은 차라리 죽음의 실체를 깨끗이 인정하고, 살아 있는 동안 의미 있고 보람되게 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아무리 부정하고 거부해도 언제가 찾아오는 죽음에 대해 유한한 생명의 시간을 지닌 우리가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을 지니고 허무하게 시간을 소비하다가 죽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자살로 일찍 생을 마감하는 것은 더욱 더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차라리 죽음은 결코 반갑지 않는 친구지만 어차피 한 번은 반드시 찾아올 친구라 생각하자. 그래서 열심히 즐겁고 행복하게 살다가 반갑지 않은 그 죽음이 찾아와 손을 내밀면 함께 손잡고 가면되는 것이다. 비록 인간의 육체는 소멸해도 그 아름다운 정신(종교적 의미의 영혼은 아님)은 남는다. 아름다운 정신으로 살아가도록 하자.
http://www.cyworld.com/1004soung
※ 저의 미니홈피를 방문하는 분들은 반드시 저의 작품 <빵을 굽는 시간>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정신을 찾고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