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창목사 (인조에선교회)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9:4-14)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전9:12)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딤전5:18)신약에 십일조 하라는 말씀이 없다? 얼마 전에 한 사람이 제 블로그에 들어와 '안부게시판'에 비밀글로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었습니다. 십일조는 율법이기 때문에 하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는 십일조 하라는 말씀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십일조만 받았으면 그렇게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과 논쟁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엉터리 주장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마치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고 잘 전하는 것처럼 선전하는 사람들과 그같은 주장을 육체의 기회로삼아 물질의 손실을 줄여보고자 하는 평소에 십일조에 대해 불만을 품은 사람들에게와 또는 십일조를 맹목적으로 드리는 이들에게 올바른 십일조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하여 글로 올립니다. 부족하지만 이 글로 인해 십일조에 대해 의문을 가진 분들의 궁금증이 풀렸으면 합니다. 십일조의 의미 십일조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11지파가 생업에 참여치 못하는 레위지파 사람들에게 소득의 10분의 1을 주어서 그들도 동일한 소득을 얻게하려는 목적에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지키도록 주신 말씀)입니다. 11지파의 소득이 많아지면 레위지파의 소득도 올라갔고, 소득이 적어지면 레위지파도 그만큼 소득이 적어지는 셈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아니지만, 이스라엘 땅에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위해 3년에 한 번씩 십일조를 더 내어서 그들을 구제토록 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정책입니다. 이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십일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맡아하느라 소득이 없는 사람들에게 11사람이 소득의 10분의 1을 모아 그 소득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의 십일조에 대한 당위성 주장 신약에 십일조 하라는 말씀이 안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위해 위의 십일조에 관한 말씀들을 나열해 놓았습니다. 틀림없이 그들은 십일조'라는 글자가 어디있느냐고 반발할 것입니다. 위의 말씀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한 후에 얼마의 헌금을 받은 것에 대해 따지기 좋아하는 똑똑한 사람(?)들의 반발에 대해 해명하는 글인 것 같습니다. 그 헌금은 아마도 다음 선교지의 선교 활동을 위해 교인들이 선교헌금을 후원한 일로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위의 글이 편지 글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진 것을 보면 매달 받는 생활비 차원이 아니라, 선교 헌금을 지원받은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럴지라도 그것은 바울과 바나바의 생활비 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생활비라 하면 그것은 당연히 십일조의 성격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전적으로 맡아 행하느라 소득에 관계된 일을 할 수 없는 사역자들에게 소득에 준하는 생활비를 모아 보내는 것은 십일조라는 글자가 없어도 하나님의 정신에 부합한 십일조와 다름이 없습니다. 글의 내용으로 보아 바울과 바나바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당시에는 초신자들에게 십일조를 요구하면 역효과가 날 것을 우려하여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후에 고린도 교회가 규모가 잡히게 되었을 때에는 선교비를 지원받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위의 말씀들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헌금을 보내는 것에 불만을 품는 지도자격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그것은 '십일조를 해야 된다'는 차원을 넘는 매우 당당한 주장이었으며, 여러 말씀들로 그 당위성을 설명해 놓은 것입니다. 십일조에 관련된 말씀들 위의 말씀들은 십일조(생활비)를 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내용의 바울의 주장입니다. 그는 '먹고 마실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굳이 자비량하지 않고 십일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예로 '누가 월급도 안받고 군인으로 봉사하겠느냐?, 어떤 사람이 포도 농사 지어놓고 그 포도 열매를 안 먹겠느냐?, 양떼를 기른 사람이 양에게서 난 젖을 먹지 않겠느냐?, 모세 율법에도 곡식을 밟아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은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인데 일하고 그 대가를 거두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느냐?, 신령한 복음을 전하고 육신의 헌금을 받는 것이 어찌 지나치다 할 수 있느냐?,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고, 제단을 모시는 자들은 제단에서 나는 것을 먹는 당연한 것 아니냐?'라고 복음 전하는 사역자들이 교인들에게 생활비(11조)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결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사역자가 십일조를 받는 것의 당위성을 강조했습니다.'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9:14) 이 말씀은 복음 전하는 사람이 생활비를 보장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십일조는 복음증거자의 생활비이다복음 전하는 자가 생활비를 보장받으려면 당연히 교인들의 십일조로 충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일조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당연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에 십일조 하라는 말이 어디있느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십일조'라는 글자만 찾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십일조를 안한다 할지라도 '목회자'의 생활비는 교회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으면서 복음을 전하느라 생업에 종사하지 못하는 사역자의 생활비를 몰라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십일조 하라'는 말이 신약에 나와있지 않다고 하여, 안해도 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들이 과연 하나님을 믿기를 원하는 자들이 맞기나 하는지 확인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생활비 지원을 반대하는 무리들 바울이 이처럼 여러가지 말로 생활비 받는 것을 당연하게 말하는 것은 그가 선교비 지원받은 일로 인해 상당한 마음 고생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대상은 아마도 오늘날처럼, 십일조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율법이니 신약시대 이후에는 안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그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당시에도 '바울은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생활비를 안부쳐줘도 된다'고 선교비 지원을 막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의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주장도 일리는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당시에 자비량으로 일했던 것처럼, 다른 곳에서도 생활비를 벌면서 복음을 전할 것이기 때문에 굳이 선교비를 지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라도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정신과는 너무도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의 정신에서 나온 십일조 십일조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신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나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정신이 나타나 전임 사역자의 생활비를 책임지는 일쯤은 누가 말리더라도 나서서 처리할 심성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십일조를 안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황폐한 마음과 정신은 그가 그리스도인일 수 없음을 자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의 정신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 있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십일조를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로 고민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없음을 더 긴급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믿음에 기초한 건전한 십일조 그러나 아직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초신자들이나, 생활형편이 어려워서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는 자는 예외일 것입니다. 또한 남편이 비신자여서 십일조를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10분의 1을 맞춰서 내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재정이 어려울지라도 십일조를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11조로 인해 물질의 복을 받기 때문에 해야 된다며 물질주의나 기복주의를 부추겨서도 안됩니다. 십일조를 할 수 있는 믿음이 될 때까지 복음을 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복음도 알지 못한 채, 십일조를 통한 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복주의에 빠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물질의 축복이 있으리라는 논리로 믿음도 채 갖춰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돈을 빼앗아서는 안됩니다. 도박성 있는 잘못된 십일조 간혹 어떤 사람들은 수입도 없는 사람이 십일조를 선불로 낸다거나, 이후에 크게 부어줄 축복을 스스로 정해서 미리 그 수준에 맞춰서 십일조를 한다든지, 10의 2,3조 또는 9조까지 내면 그만한 큰 축복이 임할 줄 기대하고 내는 도박성 십일조는 기독교 신앙과 관계없는 것들입니다. 그같은 십일조는 하나님이 원하시거나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는대로 거둔다며 많이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대부분 더 많은 물질의 축복을 거두기 위해 내는 헌금이므로 이같은 말씀이 적당하리라 생각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갈6:8)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사행성이나 도박성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혹시 그같은 헌금으로 축복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이 아닙니다. 10분의 1이면 됩니다. 10분의2나 3을 드리고 싶다면 직접 가난한 자나 어려운 자들을 찾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같은 행위가 많을 경우에 많이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내면서 더 많은 축복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십일조는 이미 하나님이 부어주신 복의 10분의 1입니다. 그것을 감사함으로 내십시오. 목회자는 봉급을 받아야 한다 목회자는 감사의 뜻으로 받는 사례비나 생활에 꼭 필요한 수준의 생활비가 아닌, 봉급을 받아야 합니다. 봉급의 수준은 나이와 가족 수를 고려하여 같은 나이 수준의 교인 11명의 십일조를 봉급으로 받아야 합니다. 교회는 그 금액이 많든 적든 관여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봉급 외에는 다른 명목으로 교회에 짐을 지우지 않아야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레위인들도 나머지 11지파의 수입이 많으면 자신의 수입도 많아졌고, 적으면 그에 따라 적었습니다. 그리고 재산 소유도 가능했습니다. 목회자가 청빈해야 하고, 사유재산이 있으면 안된다는 것은 동양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목회자가 더 신령하거나 덜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성경적인 목회자의 수입은 11명의 십일조이어야 하며, 목회자는 그외 다른 명목으로 교회에 청구해서는 안됩니다. 세미나비, 자동차 운영비, 도서비, 자녀 교육비, 사택 관리비 같은 개인적 용도들입니다. 그리고 재산 소유나 생활 수준도 교인들과 같아야 합니다. 단지 어려운 교인들과 비교할 때는 도의적인 면에서 흠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목회자 개인의 문제이지 교인들의 의사가 개입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목회자로서의 사회적인 책임은 져야 할 것입니다. 요구되는 십일조의 바른 집행 그러나 십일조와 관련하여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복음(십자가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교회에서의 '십일조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의 문제입니다. 이는 사실상 십일조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교회 출석에 관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그런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십자가 복음)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3:6) 또 한 가지는 거대화된 교회에서 재정이 넘쳐, 십일조를 해도 사역자의 봉급이 되지 않고 다른 곳에 쓰이는 경우입니다. 참으로 복음적인 교회라면 재정을 나누어서 올바르게 사용하겠지만 그렇지 않는 교회라면 남아도는 교인들의 헌금이 엉뚱한 곳에 쓰여질 때가 적지 않습니다. 이럴 경우 교회 출석을 심각하여 고려해야 할 상황이지만, 여러가지 정황을 살펴볼 때 교회를 옮기기가 어렵다면 복음적인 교회이면서도 재정이 어려운 교회로 보내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런 교회를 모른다면 차라리 그 십일조를 교회에 드리지 말고 주변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누십시오. 그러나 자신의 것처럼 사용하지 말고 주님의 것을 심부름하는 것으로 여기십시오.만일 교회도 복음적이고 재정도 넉넉한 수준이어서 자신의 십일조를 다른 약한 교회로 보낼 마음이 있고, 그 교회의 중직자가 되어 활동할 의사가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적절하고 필요한 곳으로 보내십시오. 올바른 믿음에서 비롯된 십일조성경적인 11조는 전임사역자의 봉급입니다. 자신이 봉급을 받는다면 사역자도 역시 봉급을 받아야 합니다. '십일조를 내라'는 말씀이 신약전서에 없기 때문에 안내겠다고 하는 사람은 기독교 복음의 성격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며 말씀에 대한 이해가 잘 안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만일 11조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십일조 혹은 그 이상이라도 드려서 자기 주변에서 어려움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생활 보장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바울은 봉급을 받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는 봉급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할 수만 있다면 자비량하지 않고 더 많은 시간을 복음 증거에 힘쓸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슬픈 현실은 이 땅에 진정한 복음이 전해지는 교회가 아주 적다는 사실입니다. 그럴지라도 참되고 진정한 복음을 접한 사람은 자신의 십일조를 선하게 사용할 것입니다. 그는 결코 신약성경에 십일조 하라는 말씀이 없기 때문에 안하겠다고 억지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출처- http://cafe.daum.net/intocross/Jh3v/2 ☞http://blog.daum.net/visions72000/507 2)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를 이미 1년 전에 시작했었다.(= 8:10-11 )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연보가 중단되었다. 이는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선생들이 바울을 모함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후 12:16-17)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17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3) 그러나 이제 고린도 교회는 바울 사도를 향하여 간절한 사모함이 일어나게 되었다. 바울은 이런 상태에서 ( 연보 )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이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의 교회들로서 ( 이방 )인의 교회들을 가리킨다.(= 행 17:10-15 ) 4) 즉 바울이 이방인 교회들을 모델로 삼아 연보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유대인의 교회와 이방인의 교회가 ( 일치 )되었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 은혜 )로 구원받는다는 진리가 연보를(= 은혜 ) 통해서 ( 확인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 가운데서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했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 해석하면 많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눅 21: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1) 물론 연보를 많이 넣은 사람은 ( 부자 )들이다. 그러나 과부가 넣은 연보는 생활비 전부였기에 모든 사람보다 ( 많이 ) 넣었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 가난 )한 가운데서 넣은 연보는 부자들이 쓰다가 ( 남은 ) 돈을 넣은 것이 아니라 ( 자신 )을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눅 18:22-23)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3그 사람이 큰 ( 부자 )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 근심 )하더라 2) 큰 부자가 근심한 이유는 ( 돈 ) 때문이었다. 따라서 과부와 부자 두 사람을 비교할 때에, 우리는 각 사람에게 있어서 돈의 ( 위치 )가 어떠한가를 생각하게 된다. 즉 과부는 돈의 ( 주인 )으로서 돈을 삶의 ( 도구 )로 삼고 있었지만, 부자는 돈의 ( 종 )으로서 돈이 인생의 ( 목적 )이었다는 것이다. (눅 20:25)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3) 이 말씀은 돈이 ( 세상 )의 것과 ( 하나님 )의 것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뜻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있어 돈에 대한 ( 가치 )관이 어떠한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당시 마케도니아의 교인들은 돈에 대한 가치관이 ( 변화 )되어 있었기에 풍성한 연보가 가능했다는 말씀인 것이다. 따라서 은혜를 받고 가치관이 ( 변화 ) 된 사람들만이 ( 연보 )를 하는 것이다. 과연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돈은 주인인가 종인가? 도구인가 목적인가? (3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 지나도록 ) 자원하여 ☞http://blog.daum.net/visions72000/507 1) 가난한 상태에서 ( 연보 )까지 하면 그 액수만큼 어려워지는 것은 뻔한 일이다. 더구나 자신의 교회도 아닌 다른 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한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 은혜 )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4-5절) 이 ( 은혜 )와 성도 ( 섬기는 ) 일에 ( 참여 )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 자신 )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1) 따라서 연보란 ( 돈 )을 내는 것이 아니라 ( 자신 )을 주께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주머니가 ( 채워 )지는 것을 ( 복 )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 주머니가 ( 비워 )지는 것을 ( 복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행 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 복 )이 있다 하심을 ( 기억 )하여야 할지니라 2)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번성하고 창대해야 된다는 설교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가난하면 ( 헌금 )을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 부자 )가 되어서 헌금을 넉넉하게 많이 내서 ( 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은혜가 아니라 ( 돈 )으로 일을 하자는 것이다. 물론 이런 설교에는 아멘 연발이다. 설교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성경 말씀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3) 교회가 돈으로 일을 해야 한다면, 하나님께서 ( 부자 ) 몇 사람에게 ( 감동 )을 주시면 된다. 그러면 가난한 마케도니아 교회들이 힘에 ( 지나치게 ) 연보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부자가 돈을 많이 내서 일하는 것은 ( 마귀 )가 일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무엇인가? - ( 은혜 ) 4) 많은 교인들의 헌금에 대한 생각은 주로 이렇다. 즉 하나님께서 ( 부자 )를 보내주셔서 ( 목돈 )을 주시거나 아니면 나를 ( 부자 )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이런 간증이 많다 ) 그러면 나도 교회를 위하여 충성 봉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생각들이 돈의 ( 노예 )가 되어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자기 자신을 주께 드리는 것이 ( 연보 )라는 것을..... 5) 과연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 연보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 금액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연보를 ( 은혜 )로 받으신다는 것이다. 즉 돈이 아니라 ( 은혜 )이기에 하나님께서 ( 받으시는 ) 것이다
십일조는 율법이기 때문에 안 해도 된다는 이들에게
십일조는 율법이기 때문에 안 해도 된다는 이들에게
김윤창목사 (인조에선교회)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누가 양떼를 기르고 그 양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제단을 모시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9:4-14)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고전9:12)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딤전5:18)신약에 십일조 하라는 말씀이 없다?
얼마 전에 한 사람이 제 블로그에 들어와 '안부게시판'에 비밀글로 이런 글을 남긴 적이 있었습니다. 십일조는 율법이기 때문에 하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는 십일조 하라는 말씀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십일조만 받았으면 그렇게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과 논쟁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엉터리 주장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마치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알고 잘 전하는 것처럼 선전하는 사람들과 그같은 주장을 육체의 기회로삼아 물질의 손실을 줄여보고자 하는 평소에 십일조에 대해 불만을 품은 사람들에게와 또는 십일조를 맹목적으로 드리는 이들에게 올바른 십일조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하여 글로 올립니다. 부족하지만 이 글로 인해 십일조에 대해 의문을 가진 분들의 궁금증이 풀렸으면 합니다.
십일조의 의미
십일조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 11지파가 생업에 참여치 못하는 레위지파 사람들에게 소득의 10분의 1을 주어서 그들도 동일한 소득을 얻게하려는 목적에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지키도록 주신 말씀)입니다. 11지파의 소득이 많아지면 레위지파의 소득도 올라갔고, 소득이 적어지면 레위지파도 그만큼 소득이 적어지는 셈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아니지만, 이스라엘 땅에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위해 3년에 한 번씩 십일조를 더 내어서 그들을 구제토록 했습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정책입니다. 이는 사랑이신 하나님의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십일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맡아하느라 소득이 없는 사람들에게 11사람이 소득의 10분의 1을 모아 그 소득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바울의 십일조에 대한 당위성 주장
신약에 십일조 하라는 말씀이 안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위해 위의 십일조에 관한 말씀들을 나열해 놓았습니다. 틀림없이 그들은 십일조'라는 글자가 어디있느냐고 반발할 것입니다. 위의 말씀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복음을 전한 후에 얼마의 헌금을 받은 것에 대해 따지기 좋아하는 똑똑한 사람(?)들의 반발에 대해 해명하는 글인 것 같습니다. 그 헌금은 아마도 다음 선교지의 선교 활동을 위해 교인들이 선교헌금을 후원한 일로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위의 글이 편지 글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진 것을 보면 매달 받는 생활비 차원이 아니라, 선교 헌금을 지원받은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럴지라도 그것은 바울과 바나바의 생활비 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생활비라 하면 그것은 당연히 십일조의 성격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전적으로 맡아 행하느라 소득에 관계된 일을 할 수 없는 사역자들에게 소득에 준하는 생활비를 모아 보내는 것은 십일조라는 글자가 없어도 하나님의 정신에 부합한 십일조와 다름이 없습니다. 글의 내용으로 보아 바울과 바나바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당시에는 초신자들에게 십일조를 요구하면 역효과가 날 것을 우려하여 자비량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후에 고린도 교회가 규모가 잡히게 되었을 때에는 선교비를 지원받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위의 말씀들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헌금을 보내는 것에 불만을 품는 지도자격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그것은 '십일조를 해야 된다'는 차원을 넘는 매우 당당한 주장이었으며, 여러 말씀들로 그 당위성을 설명해 놓은 것입니다.
십일조에 관련된 말씀들
위의 말씀들은 십일조(생활비)를 받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는 내용의 바울의 주장입니다. 그는 '먹고 마실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굳이 자비량하지 않고 십일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 예로 '누가 월급도 안받고 군인으로 봉사하겠느냐?, 어떤 사람이 포도 농사 지어놓고 그 포도 열매를 안 먹겠느냐?, 양떼를 기른 사람이 양에게서 난 젖을 먹지 않겠느냐?, 모세 율법에도 곡식을 밟아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은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인데 일하고 그 대가를 거두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느냐?, 신령한 복음을 전하고 육신의 헌금을 받는 것이 어찌 지나치다 할 수 있느냐?,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고, 제단을 모시는 자들은 제단에서 나는 것을 먹는 당연한 것 아니냐?'라고 복음 전하는 사역자들이 교인들에게 생활비(11조)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결정적으로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사역자가 십일조를 받는 것의 당위성을 강조했습니다.'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전9:14) 이 말씀은 복음 전하는 사람이 생활비를 보장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십일조는 복음증거자의 생활비이다복음 전하는 자가 생활비를 보장받으려면 당연히 교인들의 십일조로 충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일조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당연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약에 십일조 하라는 말이 어디있느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십일조'라는 글자만 찾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십일조를 안한다 할지라도 '목회자'의 생활비는 교회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으면서 복음을 전하느라 생업에 종사하지 못하는 사역자의 생활비를 몰라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기를 원하는 자들이 '십일조 하라'는 말이 신약에 나와있지 않다고 하여, 안해도 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들이 과연 하나님을 믿기를 원하는 자들이 맞기나 하는지 확인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생활비 지원을 반대하는 무리들
바울이 이처럼 여러가지 말로 생활비 받는 것을 당연하게 말하는 것은 그가 선교비 지원받은 일로 인해 상당한 마음 고생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대상은 아마도 오늘날처럼, 십일조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율법이니 신약시대 이후에는 안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그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당시에도 '바울은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생활비를 안부쳐줘도 된다'고 선교비 지원을 막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의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주장도 일리는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할 당시에 자비량으로 일했던 것처럼, 다른 곳에서도 생활비를 벌면서 복음을 전할 것이기 때문에 굳이 선교비를 지원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럴지라도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정신과는 너무도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의 정신에서 나온 십일조
십일조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신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나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정신이 나타나 전임 사역자의 생활비를 책임지는 일쯤은 누가 말리더라도 나서서 처리할 심성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십일조를 안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황폐한 마음과 정신은 그가 그리스도인일 수 없음을 자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의 정신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 있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십일조를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로 고민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없음을 더 긴급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믿음에 기초한 건전한 십일조
그러나 아직 십일조를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수준에 이르지 못한 초신자들이나, 생활형편이 어려워서 드리고 싶어도 드릴 수 없는 자는 예외일 것입니다. 또한 남편이 비신자여서 십일조를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10분의 1을 맞춰서 내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재정이 어려울지라도 십일조를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11조로 인해 물질의 복을 받기 때문에 해야 된다며 물질주의나 기복주의를 부추겨서도 안됩니다. 십일조를 할 수 있는 믿음이 될 때까지 복음을 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복음도 알지 못한 채, 십일조를 통한 축복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복주의에 빠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물질의 축복이 있으리라는 논리로 믿음도 채 갖춰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돈을 빼앗아서는 안됩니다.
도박성 있는 잘못된 십일조
간혹 어떤 사람들은 수입도 없는 사람이 십일조를 선불로 낸다거나, 이후에 크게 부어줄 축복을 스스로 정해서 미리 그 수준에 맞춰서 십일조를 한다든지, 10의 2,3조 또는 9조까지 내면 그만한 큰 축복이 임할 줄 기대하고 내는 도박성 십일조는 기독교 신앙과 관계없는 것들입니다. 그같은 십일조는 하나님이 원하시거나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는대로 거둔다며 많이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대부분 더 많은 물질의 축복을 거두기 위해 내는 헌금이므로 이같은 말씀이 적당하리라 생각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갈6:8)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사행성이나 도박성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혹시 그같은 헌금으로 축복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이 아닙니다. 10분의 1이면 됩니다. 10분의2나 3을 드리고 싶다면 직접 가난한 자나 어려운 자들을 찾아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그같은 행위가 많을 경우에 많이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내면서 더 많은 축복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십일조는 이미 하나님이 부어주신 복의 10분의 1입니다. 그것을 감사함으로 내십시오.
목회자는 봉급을 받아야 한다
목회자는 감사의 뜻으로 받는 사례비나 생활에 꼭 필요한 수준의 생활비가 아닌, 봉급을 받아야 합니다. 봉급의 수준은 나이와 가족 수를 고려하여 같은 나이 수준의 교인 11명의 십일조를 봉급으로 받아야 합니다. 교회는 그 금액이 많든 적든 관여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봉급 외에는 다른 명목으로 교회에 짐을 지우지 않아야 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레위인들도 나머지 11지파의 수입이 많으면 자신의 수입도 많아졌고, 적으면 그에 따라 적었습니다. 그리고 재산 소유도 가능했습니다. 목회자가 청빈해야 하고, 사유재산이 있으면 안된다는 것은 동양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목회자가 더 신령하거나 덜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성경적인 목회자의 수입은 11명의 십일조이어야 하며, 목회자는 그외 다른 명목으로 교회에 청구해서는 안됩니다. 세미나비, 자동차 운영비, 도서비, 자녀 교육비, 사택 관리비 같은 개인적 용도들입니다. 그리고 재산 소유나 생활 수준도 교인들과 같아야 합니다. 단지 어려운 교인들과 비교할 때는 도의적인 면에서 흠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목회자 개인의 문제이지 교인들의 의사가 개입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목회자로서의 사회적인 책임은 져야 할 것입니다.
요구되는 십일조의 바른 집행
그러나 십일조와 관련하여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복음(십자가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교회에서의 '십일조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의 문제입니다. 이는 사실상 십일조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교회 출석에 관한 문제입니다. 성경은 '그런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십자가 복음)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살후3:6) 또 한 가지는 거대화된 교회에서 재정이 넘쳐, 십일조를 해도 사역자의 봉급이 되지 않고 다른 곳에 쓰이는 경우입니다. 참으로 복음적인 교회라면 재정을 나누어서 올바르게 사용하겠지만 그렇지 않는 교회라면 남아도는 교인들의 헌금이 엉뚱한 곳에 쓰여질 때가 적지 않습니다. 이럴 경우 교회 출석을 심각하여 고려해야 할 상황이지만, 여러가지 정황을 살펴볼 때 교회를 옮기기가 어렵다면 복음적인 교회이면서도 재정이 어려운 교회로 보내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런 교회를 모른다면 차라리 그 십일조를 교회에 드리지 말고 주변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누십시오. 그러나 자신의 것처럼 사용하지 말고 주님의 것을 심부름하는 것으로 여기십시오.만일 교회도 복음적이고 재정도 넉넉한 수준이어서 자신의 십일조를 다른 약한 교회로 보낼 마음이 있고, 그 교회의 중직자가 되어 활동할 의사가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적절하고 필요한 곳으로 보내십시오. 올바른 믿음에서 비롯된 십일조성경적인 11조는 전임사역자의 봉급입니다. 자신이 봉급을 받는다면 사역자도 역시 봉급을 받아야 합니다. '십일조를 내라'는 말씀이 신약전서에 없기 때문에 안내겠다고 하는 사람은 기독교 복음의 성격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며 말씀에 대한 이해가 잘 안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만일 11조에 대한 언급이 성경에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은 십일조 혹은 그 이상이라도 드려서 자기 주변에서 어려움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없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생활 보장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바울은 봉급을 받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는 봉급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할 수만 있다면 자비량하지 않고 더 많은 시간을 복음 증거에 힘쓸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슬픈 현실은 이 땅에 진정한 복음이 전해지는 교회가 아주 적다는 사실입니다. 그럴지라도 참되고 진정한 복음을 접한 사람은 자신의 십일조를 선하게 사용할 것입니다. 그는 결코 신약성경에 십일조 하라는 말씀이 없기 때문에 안하겠다고 억지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출처- http://cafe.daum.net/intocross/Jh3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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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런데 고린도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를 이미 1년 전에 시작했었다.(= 8:10-11 )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연보가 중단되었다. 이는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 선생들이 바울을 모함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고후 12:16-17)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17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3) 그러나 이제 고린도 교회는 바울 사도를 향하여 간절한 사모함이 일어나게 되었다. 바울은 이런 상태에서 ( 연보 )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이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의 교회들로서 ( 이방 )인의 교회들을 가리킨다.(= 행 17:10-15 )
4) 즉 바울이 이방인 교회들을 모델로 삼아 연보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유대인의 교회와 이방인의 교회가 ( 일치 )되었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 은혜 )로 구원받는다는 진리가 연보를(= 은혜 ) 통해서 ( 확인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환난의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 가운데서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했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 해석하면 많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눅 21: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1) 물론 연보를 많이 넣은 사람은 ( 부자 )들이다. 그러나 과부가 넣은 연보는 생활비 전부였기에 모든 사람보다 ( 많이 ) 넣었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 가난 )한 가운데서 넣은 연보는 부자들이 쓰다가 ( 남은 ) 돈을 넣은 것이 아니라 ( 자신 )을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눅 18:22-23)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3그 사람이 큰 ( 부자 )인 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 근심 )하더라
2) 큰 부자가 근심한 이유는 ( 돈 ) 때문이었다. 따라서 과부와 부자 두 사람을 비교할 때에, 우리는 각 사람에게 있어서 돈의 ( 위치 )가 어떠한가를 생각하게 된다. 즉 과부는 돈의 ( 주인 )으로서 돈을 삶의 ( 도구 )로 삼고 있었지만, 부자는 돈의 ( 종 )으로서 돈이 인생의 ( 목적 )이었다는 것이다.
(눅 20:25)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3) 이 말씀은 돈이 ( 세상 )의 것과 ( 하나님 )의 것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뜻이 아니라, 각 사람에게 있어 돈에 대한 ( 가치 )관이 어떠한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당시 마케도니아의 교인들은 돈에 대한 가치관이 ( 변화 )되어 있었기에 풍성한 연보가 가능했다는 말씀인 것이다. 따라서 은혜를 받고 가치관이 ( 변화 ) 된 사람들만이 ( 연보 )를 하는 것이다. 과연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돈은 주인인가 종인가? 도구인가 목적인가?
(3절)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 지나도록 ) 자원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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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난한 상태에서 ( 연보 )까지 하면 그 액수만큼 어려워지는 것은 뻔한 일이다. 더구나 자신의 교회도 아닌 다른 교회를 위하여 연보를 한다는 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 은혜 )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4-5절) 이 ( 은혜 )와 성도 ( 섬기는 ) 일에 ( 참여 )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 자신 )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1) 따라서 연보란 ( 돈 )을 내는 것이 아니라 ( 자신 )을 주께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주머니가 ( 채워 )지는 것을 ( 복 )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 주머니가 ( 비워 )지는 것을 ( 복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행 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 복 )이 있다 하심을 ( 기억 )하여야 할지니라
2)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번성하고 창대해야 된다는 설교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가난하면 ( 헌금 )을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 부자 )가 되어서 헌금을 넉넉하게 많이 내서 ( 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은혜가 아니라 ( 돈 )으로 일을 하자는 것이다. 물론 이런 설교에는 아멘 연발이다. 설교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성경 말씀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3) 교회가 돈으로 일을 해야 한다면, 하나님께서 ( 부자 ) 몇 사람에게 ( 감동 )을 주시면 된다. 그러면 가난한 마케도니아 교회들이 힘에 ( 지나치게 ) 연보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부자가 돈을 많이 내서 일하는 것은 ( 마귀 )가 일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무엇인가? - ( 은혜 )
4) 많은 교인들의 헌금에 대한 생각은 주로 이렇다. 즉 하나님께서 ( 부자 )를 보내주셔서 ( 목돈 )을 주시거나 아니면 나를 ( 부자 )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이런 간증이 많다 ) 그러면 나도 교회를 위하여 충성 봉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런 생각들이 돈의 ( 노예 )가 되어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자기 자신을 주께 드리는 것이 ( 연보 )라는 것을.....
5) 과연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 연보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 금액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연보를 ( 은혜 )로 받으신다는 것이다. 즉 돈이 아니라 ( 은혜 )이기에 하나님께서 ( 받으시는 )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