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우선 글이 많이 길어요. 그 점 유의하시고 읽어주심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글을 읽고 누군가 추측이 된다고 해도 댓글엔 달지말아주세요..결시친이 제일 사람들이 많이 보신다고 해서 카테고리 설정을 이렇게 해뒀어요. 절대로 삶에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업로드하는 글이 아니며, 익명의 온라인 속에서라도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정말 만약 나중에 털어놓을 기회를 놓치거나 못하게 되는 날이 올까 봐 미리 끄적여둡니다. 친구가 네이트판에 업로드 하면 제 블로그보다 더 퍼져나갈수도 있다고 추천해줘서 이곳까지 글을 복사해 가지고 오게됐네요.아마 그때는 출처 없고 의미 없는 글로 떠다니게 될 수도 있겠지만요.온라인 속에서라도 솔직해지려고요. 저는 숨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니까..저는 올해 스물한 살이 된 2001년생입니다.가족은 아버지 한 분 계세요. 연세도 많으시고 선천적인 소아마비로 인해 지체장애도 있으시고, 온갖 지병과 과거 뇌종양 합병증도 앓고 계신데평생을 오로지 저만을 위해 일 집 일 집 하시며 지내오시다,결국엔 반강제로 정년퇴직 권고를 받아 쉬고 계신지 이제 일 년 하고도 조금 지났네요.부모님은 아버지 한 분이 전부인데 사실은 총 네 명이에요.저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빛을 구경 할 시간도 없이 바로 입양시설에 맡겨졌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 글에선 제 전부와도 같은 절 사랑으로 키워주신 아버지를 양아버지라고 적을게요.그 당시 양아버지께서는 양어머니와 결혼생활 몇 년 동안 아이를 갖기위해 노력을 하셨지만 결국에는양어머니의 나이가 노산을 넘어가고, 아버지도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하고 더 했지만 결국엔 친아이를 갖지 못하셨어요. 그래서 입양을 알아보게 됐고, 몇 개월 아니 거의 일 년 동안 입양 자격 심사를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셨죠.그러다 승인이 났고,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어요.저는 당시 시설에서 제일 어렸었고어리다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신생아 그 자체였어요. 아버지께선 어떤 아이여도 좋다. 남자아이더라도 여자 아이더라도 나이가 적어도 많아도 건강해도 건강하지 않아도..부모로서 꼭 품고 싶다. 아무런 희망사항이 없다며 상담을 받으셨고 아마 그때 제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아이들을 전부 다 보셨대요.심장이 너무 뛰더래요, 본인이 엄청난 재력가였으면 그 시설에 있는 모든 아이를 품고 싶다까지 생각하셨대요.저희 아버지가 본인 집안에서도 엄청난 늦둥이시고,태어나자마자 장애로 인해 일찍 죽을 거라고 믿으셨던 아버지의 부모님은 절에 아버지를 맡기셨대요.이름도 있고 가족도 있었지만절에서 3년 정도는 머무셨다고 해요.할머니께서 이 아이는 우리가 보낼 아이는 아니구나 아시고서 다시 데려오셨지만시골 동네가 좁고 그 작은 동네 중에서도 가장 큰 집안이라서,혹여 갑자기 나타난 아이를 보고 흉흉한 소문이 돌게 될까 염려하셔당시 연세와 건강 때문에 젖도 돌지 않아서, 제게는 큰어머니인 큰며느리에게 육아를 거의 맡기셨다고 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아버지가 어리실 때 돌아가셨고큰어머니는 자식이 넷이나 있었지만 저희 아버지까지 케어하시며 할아버지 수발까지 도맡아 들어드렸어요. 근데 큰엄마는 과거의 그 시절을 정말 좋게 기억하시고 계세요.제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지 않았냐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냐고 여쭤보면할머니가, 즉 시어머니가 정말 좋은 분이셨대요.남들 죽어난다는 시댁살이도 없었으며 아버지의 형제가 4남매 총 아버지 포함 네 분이신데본인 자식들 대하시듯 며느리도 챙겨주셨었다고, 그래서 힘든 건지도 모르셨고 행복하셨다고 그러셨어요.어려서부터 큰어머니 손에 자식과 다름없이 자라온 저희 아버지는 아직까지도 80대후반이신 큰어머니 앞에선 어린아이처럼 군답니다.그 모습을 보면 얼마나 재밌는지 모르겠어요.호랑이 같고 무뚝뚝하신 아버지가 유일하게 부드러워지시는 얼마 안 되는 상황 중에 하나랍니다. 이야기가 많이 산으로 간 듯하지만 이어 말하자면, 그래서 제 양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완벽하고 화목한 가정의 꿈이 크셨어요.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아이까지사람들이 말하는 평범하다는 가족들에 대한 소망이 있으셨죠. 아이를 전부 보셨는데, 그때 제일 작고 엄청 어렸던 저는 베이비박스 같은 곳에 놓여있었답니다.이렇게 작고 어린아이가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이곳에 있을까 궁금하셨던 아버지는 얼굴만 한번 보려고 하셨대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치 인큐베이터와 같은 형태로 된 곳에 있었다고 해요. 아픈 곳도 없었고 만삭에 출산 한 건강한 아이였는데제 추측으로는 너무 갓난아기라서 그렇게 보호해 두신 것 같아요.제가 성격이 울음도 많고 겁도 많고 시설에서 그동안 돌봤던 또래들 중에서도 유난히 다루기가 어려웠다고 들으셨는데신기하게도 얇은 플라스틱 하나 두고 마주 본 아이는 울지도 않았고,계속 눈을 마주쳤다고 해요. 그렇게 첫 만남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시는 동안에도,집에 와서도 며칠 동안 피하지 않고 계속 맞추던 아가의 눈이 아른거리셨대요.일도 손에 잡히지 않으시고, 눈을 감아도 생각나고, 시설에서 걸려 오는 전화에도 제 근황만 여쭤보셨대요.결국엔 입양을 결정합니다.정이 많으신 아버지는 가족을 기다리는 많은 아이들을 직접 눈으로 보셔서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고,건강하게 지내다가 좋은 곳 갔으면 좋겠다고, 저만 데려온 게 죄스럽다며 기부금도 내셨더랬죠.거의 한 달 동안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려주고 부모라는 걸 인식하게 하기 위한 기간이 있었대요.제가 너무 좋아했대요. 계속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배시시 웃고 아버지 목소리를 듣다가 자장가 삼아 새근새근 잠도 잘 자더래요.그렇게 가족이 됐어요. 아버지가 손이 굉장히 크세요. 정말 아버지보다 큰 손을 가진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이 없을 만큼요.그리고 고생 많이 한 손은 투박하죠. 얼굴에도 생기는 세월의 흔적처럼.그래서 절 다루시는 걸 무척이나 어려워하셨어요. 만지면 닳을까 안으면 부서질까, 투박한 손 때문에 연한 아기의 피부에 생채기라도 생기지 않을까 여자아기라 더욱이 벌벌 떠셨죠. 집안에는 아기를 위한 모든 것들을 주변에서 조언도 들으시고 서점에서 사 오신 육아 서적으로 공부도 하시고정말 엄청나게 많은 아기용품들로 온 집안이 꽉 차있었어요.56년생이시라 동년배 자녀분들은 이미 훌쩍 자랐고, 엄청 늦둥이, 집안의 유일한 여자아이로 예쁨과 관심 무척 많이 받았죠. 당시 사진 속에서도 저를 어색하게 안고 계신 아버지 등 뒤로 아기 용품들이 쌓여있는 걸 보고 한참을 웃었네요.개월 수에 맞지도 않는 미끄럼틀에 자동차에 그네에 자전거에 오로지 저만을 위한 궁전 같았어요.이 시절까지만 설명드린다면 정말 흐뭇하고 다행이며 화목한 가정이지 않나요?간절히 원하던 아이와, 모든 것이 준비된 따뜻한 부모와, 더 바랄 게 없는 화목한 가정이죠. 근데 양어머니는 아니셨나 봅니다. 아이가 말을 못 해도 감정은 느낄 수 있다는 거 다들 아시죠?정말 어렸을 때부터 양어머니는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 가족이 아니구나 느끼며 확신을 할 정도였어요.(이 확신이 먼 훗날 제게 입양사실을 알려 준 계기가 됐네요.)아버지는 공장을 운영하시던 사업가셨고, 어머니는 평범한 전업주부셨어요.그래서 저는 당연히 아버지보다 어머니와 있는 시간이 더 많았죠.제가 사실 최근 논란이었던 가슴 아픈 뉴스의 아이가 머물던 시설 출신이에요. 2000년대 초반엔 가정마다 집 전화가 많이 보편화되어 있었잖아요.제가 짧은 말을 하고 좋고 싫음과 같은 의사 표현을 하게 될 수 있었던 시기부터 아침 일찍 아버지가 출근 준비를 하시는 소리에 놀라 울며 깨고, 집 앞 슈퍼에 가시려고 외투를 걸치시기만 해도 기겁을 하고현관까지 맨발로 뛰어나가 붙잡고 울다 지쳐 쓰러지는 게 일상이고, 퇴근하실 때까지 신발장 주변에서만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대요.아버지의 퇴근시간이 매일 다르니 다 같이 먹는 저녁시간보다 양어머니와 단둘이 먹는 경우가 더 많았는데,아무리 성장기라고 하더라도 아이의 성장이 먹이는 양이 많고 활동량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평균에 미치지 않고,저녁 늦게 들어와 늦은 식사를 드실 때도 배고프다며 곤히 자고 있던 제가 방에서 눈도 덜 뜬 채로 나와아버지 다리에 올라앉아, 성인이 먹는 양을 거의 다 씹지도 않고 허겁지겁 삼켰대요.하루 이틀은 내 딸이 식탐이 생겼구나~, 한참 클 때니까~ 하고 넘기셨는데, 그게 일상이 되다 보니까 문제가 됐고원인을 찾으시려고 노력하셨죠. 혹시나 아내가 제시간에 밥을 주지 않는 건가? 부실하게 주는 건가?부부문제로 넘어갈 정도로 심각한 고민이 됐어요.그래서 매일 제 식사시간 때, 간식시간 때마다 집 전화로 전화를 걸어 확인하셨어요.아무리 원인을 찾으려고 해도 겉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러니 아버지 입장에선 미칠 노릇이었죠. 그러다 하루는 평일에 쉬고 싶으셔서 일찍 퇴근을 하시고 직장과 집이 멀지 않아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고 귀가하셨는데아파트 앞에 아주머니들 모여 담소를 나누실 수 있는 작은 정자가 있었어요.무뚝뚝하고 말주변도 없었던 아버지라 따로 친분이 있었던 주민분이 없으셨는데동 대표 아주머니께서 올라가려는 아버지를 붙잡고 물으셨어요.어린아이가 있는 세대는 한 곳 밖에 없으니 아무리 왕래가 없어도 어린아이 키우는 집은 어느 세대인지 다들 아셨었죠. 소음과 아동학대가 의심돼 주민 신고가 자주 들어왔었나 봐요.그리고 이웃 주민들이 두세 번 정도 경찰에도 신고했었고,아버지는 무슨 말 인지도 못 알아들으셨대요.단 한 번도 그런 소식을 전해 들은 적이 없을뿐더러.. 경찰이라뇨?다른 세대랑 헷갈리시는 거 아니냐며 오히려 되물으시고 상황 파악이 하나도 안되셨대요.정자에 모여계셨던 아주머니들께서 수군수군 거리며 마치 야유하는 분위기였대요. 안 좋은 예감이 드신 아버지는 부리나 캐 집으로 올라가셨고일층에서부터 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대요.사고가 난거 아닐까? 강도가 들었을까? 별별 생각을 다 하시면서 문을 열어보니날이 추웠는데 옷을 하나도 안 입고 .. 혼자서 덩그러니..기저귀도 차지 않고서 거실에서 꺽꺽 숨이 넘어갈 듯 울며 오물을 사방에 발라두고기진맥진 쓰러지다시피 힘겹게 누워있는 절 보시고 너무 놀라 기겁하셨대요.어설프게 포대기로 감싸 안고 제가 아파서 그런 줄 아시고 근처 종합병원 응급실에 가게 됩니다.진단 결과, 영양실조 아버지는 오진이 아닌가 의아하셨죠.영양실조라니요. 본인 입에 들어가는 음식보다 좋은 것만 고르고 골라 배곯지 않게 우리 아가 입에 넣어줬는데요.사실은 제가 아버지랑 같이 먹는 저녁, 아니면 주말에만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거였어요.전화가 올 시간에만 집에 들렀다 나가고, 아이 혼자 두고 본인은 신나게 나가 노는 게 일상이었던 거죠.냉장고엔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요구르트와[매일 요구르트를 배달시켰는데 예전 것은 그대로 넣어놓고 새로운 우유나 음료는 양어머니가 간식으로 전부 드신 거죠.]곰팡이 핀 이유식 통.배변 교육을 위한 플라스틱 유아용 변기엔 배변물을 한 번도 치우지 않아 구더기와 날파리가 득실..베란다 입구쪽에 있어서 아버지가 확인을 늦게 하셨어요.생전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도 그리 서럽게 울어본 적이 없으셨대요.내가 도대체 왜 몰랐을까 하는 죄책감.. 부모로서의 자책..일만 열심히 하고 가정에만 충실하면 되는 줄만 알았던 아버지의 후회..그저 행복한 줄만 알고 제일 가깝다고 믿던 딸아이와의 교감 속에서도 뒤늦게 알아버린 부끄러움..아버지가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시니 영문도 모르는 저까지 덩달아 서럽게 울어 눈물바다가 됐대요. 십수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날을 회상하실 때마다 굳건하신 아버지의 눈엔 눈물이 고입니다,모든 가계 관리와 통장들은 전업주부인 어머니가 관리하셨고, 가지고 계셨던 사유재산 역시 전부 어머니 명의였어요.그날 이후 부부관계는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셨고, 아버지는 어린 저를 데리고 출퇴근을 하시며 업무시간에도 저를 안고 다니셨어요.저도 이건 기억이 선명하네요. 냠냠선생님도 기억나요.이제 관계를 정리해야겠다 다짐하시고 법적인 절차를 정식으로 차근차근 준비를 하시던 찰나의어머니가 사용하신 아버지의 명의 관련 한 사건사고들까지 일이 터지고 한참 지나고서야 아시게 됐죠.서류를 접수한 적도 합의를 한 적도 없는데 합의이혼으로 진작에 처리돼있었고이게 무슨 일인가 파악할 시간도 없이 통장, 땅, 공장, 집, 차 전부 다 담보로 잡혀 경매를 진행하게 되거나 압류되셨어요.전부 다요. 모조리 다. 먼지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속수무책으로 잃으셨어요.양어머니가 공장을 담보로 꽤나 스케일이 큰 주부 도박을 하셨고, 아버지 돈으로 상의도 없이 시댁에 단독주택도 사드렸고, [아직도 그 주택에서 뻔뻔하게 살더군요,ㅎㅎ]신용카드도 한도 없이 본인 사치를 위해 엄청 쓰셨고, 아버지에게 전달돼야 하는 거래처 어음도 대리로 받으셔서 다 놀음하시는데 날리셨고,달마다 시댁에 작게는 몇백, 크게는 몇천씩 용돈이랍시고 퍼날랐고,그 와중에 이 생각까진 어찌한 건지 장모, 장인어른 노후자금까지 대비해 주식이며 땅이며 전부 사줬고, 이 모든 걸 10년 이상을 아이 없이도 함께 한 배우자가 그러리라고 상상도 못하셨던 아버지는,본인이 무지해서 일어난 일이고, 그래서 내 딸도 아픈 걸 뒤늦게 알게 된 것이고,사업가로서 가정과 사업 가계 관리는 구분해 대표인 본인이 했어야 했는데 기본 자격도 없는 바보였다며 자책하셨죠. 아주 치밀하고 오랫동안 완벽하게 계획을 세우고 하나하나 공들여 빼먹을 작정으로 완벽하게 설계된 사기결혼이었죠.첫 만남도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아버지는 인정하는 게 힘드셨어요.하루아침에 예고도 없이 모든 게 산산조각이 난 판국에,내가 몇십 년을 살 맞대고 한 지붕 아래 백년가약을 맺고 같이 산 여자가 사기꾼이라는데 어찌 믿어요. 모든 사실을 부정하고 싶으셨겠죠. 꿈이길 바라셨겠죠..하늘도 무심하시지.. 불쌍한 우리 아빠 저 조차도 반나절 동안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 눈물이 나서 몇 번을 쉬었다 쓰는지 모르겠는데그 당시 우리 아빠는 혼자서 얼마나 고단했을까요.차라리 나라도 포기하고 다시 시설에 데려다주지..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로 정말 바보 같은 사람이에요. 정말 바보예요.제가 뭐라고 그렇게 지키고 싶어 하셨을까요. 안방에 금고라고 하기도 애매한 가정용 사이즈의 금고가 있었는데,그 속에는 제 돌잔치에 들어온 금들과 돌 반지 그리고 100일 잔치에 입었던 진주 드레스가 들어있었어요.사업가 셨으니까 온갖 잔치에 거래처분들도 많이 오셨으니초대된 손님만 몇백 명이었죠. 그때 찍은 테이프만 봐도 보통 잔치 규모가 아니었어요.그러니 제 잔치에 들어온 금이 아주 많았어요.나중에 우리 딸 다 크면 줄 거라고 이건 평생 간직해야 한다며 금고를 따로 구비해 보관할 정도로 많았죠.근데 그걸요. 돌 반지 하나라도 안 남겨두고 싹 가져갔어요.이건 압류가 아니라 어머니가 도망가실 때 훔쳐 가신 거예요.심지어 진주 드레스에 박힌 진주만 떼어가고 옷만 남겨두고 갔어요. 가져갈 수 있는 건 값이 된다면 뭐든 다 가져간 거죠.아버지가 취미로 모으시던 다양한 발효주까지 면허가 없어 남동생까지 합세해 차까지 몰고 와서 다 챙겨갔어요.바보 같은 아빠는 난장판이 된 집안에서 제일 먼저 확인한 게 저 금고에요.돌 반지 하나라도 남겨두고 갔겠지 그랬겠지 하시면서. 드라마 같죠? 소설 같지 않나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저희 아버지는 어떻게 혼자서 저 모든 일을 겪으셨을까요?확인해보니 양어머니는 사기결혼이 처음이 아니셨어요.결혼만 총 4번 모두 다 사업하시던 분들이었고 친자식은 단 한 명도 없었고 (과거 혼인 사실을 아버지는 모르셨어요.)그중에서도 저희 아버지와 제일 오래 사셨더라고요. 아버지는 생전 손 벌려본 적도 없는 큰엄마한테 몇십만 원 을 빌려서 전국을 버스 타고 저 데리고 양어머니만 찾아다니셨어요.제발 다 가져가도 좋으니 살던 집 하나라도 달라고, 내 딸 잘 수 있는 곳만 내어달라고..그 여자 친정을 찾아가길 수차례 문도 열어주지 않으셨죠.편지도 써서 보내셨어요. 죄도 없는데 죄인처럼 거의 빌다시피 죄송하다며 제발 하나만 내어달라며그 이후론 연락도 하지 않을 거고 찾지도 않고 양육권도 본인이 책임질 것이고 어머니를 상대로 먼 훗날 나중에라도 소송을 하지 않겠다며제발 제발.. 비셨어요.번호를 바꿔도 보고,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기도 해보고..그랬더니 그 여자가 번호를 바꾸고 가족이라는 사람들도 전부 연락처를 바꿨어요.그 아픈 다리로 현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며칠 동안 빌었어요. 매번 경찰들이 끌고 가셨지만 그래도 가셔서 빌었어요. 저 같으면요. 그만큼 가져갔으면, 불쌍해서, 아니 거지꼴로 애 데리고 다니면서 죽어가는 목소리로 울고불고 비는 게 재수가 없어서라도 저거 하나는 돌려줬을 거 같아요. 뭐 뻔한 결말이지만 백원 한 개도 못 돌려받으셨죠. 아버지가 절 품기 3년 정도 전에 뇌종양으로 쓰러지시고 응급실에서 수술에 들어가기 전 배우자? 보호자? 동의가 필요했었는데수술해도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의사 말에 그 여자는 바로 아버지를 두고서 병원비를 들고 여행 갔어요. 여행?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하시겠지만 실제로 친구들이랑 놀러 갔어요. 큰엄마와 아버지의 누님이신 작은고모가 그 소식을 들으시고 달려오셔서 수술도 받으셨고, 왜 와이프가 옆에 없는지 찾으셨는데 연락도 안 받았고수술 후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 계시던 아버지를 큰엄마와 작은 고모가 번갈아가며 교대로 간병을 해주셨어요. 그 기간이 꽤 길었어요.그러다가 그 여자가 병원에 찾아왔어요.의사가 말 한 기간을 훌쩍 넘기고도 별다른 연락이 없자 온 거죠.다행인지 불행인지, 개인적으로 저는 불행이라 생각되는 일이지만 회복 잘 되고 있고 곧 의식도 돌아올 거라는 말에그제서야 병간호를 했던 척 연기를 하며 아버지가 일어나길 기다렸죠. 큰엄마와 고모는 와이프가 왜 그랬는지 아무런 까닭도 모르셨으니절대안정이 필요 한 환자고, 본인들 입만 닫는다면 가정의 화목이 지켜질 거라 믿으시고회복하신 아버지께 몇 년이 지나도 사실을 알려주지 않으셨어요.모든 일이 다 터질 대로 터지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 중 하나인 에피소드죠.뭐 저런 건 일도 아닐 정도로 별 장난을 다 치던 여자였으니까..아버지는 그 사실을 몇 년간 알려주지 않았던 큰엄마와 고모를 원망조차 안 하셨어요. 웃프죠.그래서 어떻게 됐냐면요. 요즘 배고파봤다는 가수들이 가사에도 자주 적는 빛도 없는 반지하 단칸방 아시죠.거기서 살았어요. 아빠랑 둘이.아버지는 충격이 크셔서 바로 일을 찾지는 못하셨고 매일 폐인처럼 술을 드셨어요.그래도 제 끼니는 동네 슈퍼에서 외상까지 해가며 삼시 세끼 어떻게든 챙겨주셨어요.본인은 안주도 없이 맨 속에 쓴 술을 들이부었으면서 그 정신에도 저만 챙겼어요.저는 뭐가 뭔지도 모르니까 아빠랑 같이 둘이서 매일같이 노는 게 좋았어요. 그 좁은 집에서 스케치북에 그림 같이 그리고 노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는데뭐가 그렇게 신나고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좋았어요. 목욕 한번 하면 창도 작은 집구석에 현관이며 뭐며 환기시킬 수 있는 모든 구멍들은 몇 시간을 열어놔야 습기가 빠지는 그런 집에서, 곰팡이 가득하고 창문엔 오줌 범벅이고 벌레 천국인 그곳에서 저만 행복했어요. 저만요. 아빠가 팔베개해 주는 것도 좋았고, 잠이 안 온다 칭얼거리면 들려주시던 매일 새로운 내용의 옛이야기도 너무 재밌었고,춥다며 안고 잘 때는 아빠 품속에서 내복을 깨물고 아빠를 꼬집고 놀다가 잠에 드는 것도 좋았고, 이때 아빠 내복을 깨무려는게 팔뚝까지 깨물어 제 유치 자국 그대로 아직까지 흉이 있으세요. ㅎㅎ슈퍼에서 먹고 싶은 걸 다 고르라는 말에 작은 손에 욕심도 많지, 봉투를 바닥에 질질 끌고 집에 갈 정도로 매일 간식을 먹고 싶은 것만, 먹고 싶은 양껏 먹는 것도 좋았고, 밥을 먹을 때도 배부르게 먹어서 좋았고, 좁은 골목에서 돌멩이로 시멘트 바닥에 그림 그려놓고 아빠 보여주고서 잘 그렸다고 역시 내 딸이라며 칭찬받는 것도 전부 다 좋았어요. 진짜로 뭣도 모르고 좋았어요 저는.. 아빠 눈에는 얼마나 가엽고 슬펐을까 이제 와서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지만,전 아빠랑 둘인 게, 우리인 게 너무 좋았어요..그러다 어느 날 아빠가 집에 바퀴가 많이 나온다며 집에 벌레를 죽이는 약을 쳐야겠다고,오늘 밤은 찜질방 가서 자자고 그랬어요.저는 그날도 엄청 신났죠, 찜질방이 얼마나 재밌는데요.실컷 뛰어놀다가 제풀에 지쳐 잠이 들었어요.오줌이 마려워 눈을 떠보니 아빠가 옆에 없었어요.담배를 피우러 간 건가? 찜질방에 들어갔나? 어딜 간 거지? 잠에서 깬 저는 넓은 찜질방을 돌아다니며 아빠를 찾았어요. 없더라고요. 아무리 돌아다녀도 없더라고요.갑자기 겁이 엄청 났어요. 사람들 다 잘 시간이었는데 막 소리 내서 엄청 울었어요. 놀란 매점 카운터 아주머니가 오셨고,부모님 어디 계시냐며 왜 우냐며 달래주시고, 아빠랑 같이 왔는데 눈을 떠보니 없다고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말씀드리니 걱정 말라고 울지 말라고 하시면서, 제 손을 잡고 같이 아버질 찾으러 돌아다녀 주셨어요.근데 못 찾았어요. 없었어요. 아주머니도 당황하셨고, 저는 또 울었죠.그러다 경찰 아저씨가 왔어요. 저는 울기만 하고 말도 잘 못한 거 같아요. 우느라 못했어요.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욕탕 입구에서 저 멀리 오는 아빠를 보고 울며 달려갔어요.아빠 상태도 뭔가 이상했고, 아빠도 절 감싸 안고 길거리에서 그 늦은 시간에 엉엉 우셨어요.다 큰 후에 알았어요. 자살기도를 하셨었대요. 제 앞에서 죽기엔 너무 미안했고 부족한 집안에서 자라기엔 너무 예쁜 아이라며 이미 큰엄마께도 부탁한다고 문자를 보내놨대요.잠이 없으셨던 큰엄마는 새벽에 온 그 문자 한 통을 보고 직감적으로 느끼신 거죠.휴대폰 전원도 꺼져있고, 설마설마하시면서 신고를 하셨는데 경찰이 출동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구급차가 왔고, 그 사이에 아버지는 그 다리로 저부터 보시려고 목욕탕까지 울면서 뛰어오신 거예요.그래서 같이 응급실에 갔어요. 응급 처치를 받아야 하니까..그때 아빠가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서 저보고 하신 말씀이, '이제 엄마 없어. 엄마 보지도 못하고. 하늘나라 갔어.'였어요.저는 충격도 받지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어요. 뭔가 느낌상? 돌아가시지 않았다는것도 대충은 느꼈고요.그래? 괜찮아~ 아빠랑 있는 게 더 좋아~~ 이러고 대답했어요.그러고서 손잡고 같이 집에 갔어요. 엉망이었는데 아빠가 제가 잘 곳만 치워주시고 벽에 기대앉아 제 머리를 계속 쓰담아주시며 자장가를 잠들 때까지 불러주셨어요.그 이후로 글에는 다 담지 못할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힘든 날들이 많았어요.정확하게는 제가 아니라 아버지가 힘드셨던 나날들이죠. 중간중간 있었던 웃픈 에피소드지만, 다니던 사립유치원에서도 학대를 당했는데, 당연한 줄 알고 아버지한테 말씀 안 드리고 지내다가어느날 종일반이라 늦은 시간까지 혼자 기다렸었던 저를 하원 시키려고 오시는 길에 창문 너머로 이사장님이 (남자분) 제 귀를 잡아 올리고서 서울구경이라며 우는데도 놔주질 않는 모습을 보고아버지가 바로 그분을 때리셨고, 그분 코 뼈가 부러지셨고 막 비셨어요. 저희 아버지한테요 ㅋㅋㅋ(낮잠 시간에 단소나 리코더로 이유없이 아이들 발바닥을 때리거나 6-7살 아이들 옷을 전부 벗겨 뒷마당에 세워두는것도 일상, 서울구경은 필수옵션일정도로 지금보면 왜 그때 난 말 안한거지 의아하네요.) 그리고 유치원을 옮겨 까먹고 지냈었는데 뉴스에 그 유치원이 나오더라고요. 아동학대 유치원으로 엄청 핫하게 처음으로 뜬 곳이었어요. 유치원도 망했고요.생각보다 늦게 진실이 밝혀지고 사라진 곳이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네요.그러면서 지내다 저는 나이를 먹었어요. 아빠 피땀 고생으로 헌신 한 모든 것들로 성장할 수 있었죠.여자치고 키도 큰 편이라 아빠랑 거의 맞먹을 만큼 자랐죠.초-중 학생 때는 등골 브레이커 소리 들을 정도로 아버지가 혹여 제가 가난한 티가 날까 봐, 엄마 없이 자란 티 날까 봐서 오히려 좋은 물건들 제가 떼쓰지 않아도 먼저 사주셨고, 용돈도 많이 주셨고, 그만큼 엄하면서도 친구처럼 키워주셨어요.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친구들은 성적관리에 바빴는데 저는 한가했어요. 하고 싶은 것도 목표인 것도 없어서 자퇴가 아닌 미진학을 선택하고 아버지를 설득했었죠.아버지 눈에는 제가 정말 철없어 보였을 거예요. 사실이기도 하고요.아버지를 설득하려면 그럴듯한 계획과 변명이 필요했죠.독학으로 공부해서 애들보다 빨리 검정고시를 치고 졸업할 거다~그러고서 바로 기술직으로 취업할 거다~완강하게 반대하셨어요. 공부만이 살 길이라며 옛날에는 고생하면 고생하는 만큼 편하게 살 수 있는 시대였지만 이젠 그런 시대는 갔다고,내가 너는 고생 안 시키려고 대신 내가 몸이 부서져라 고생했는데 절대로 안 된다며,꼭 고등학교를 들어가 대학도 가고 앉아서 일하는 사무직으로 취업해야 한다고~한동안 이 주제로 아주 집안 분위기가 살벌했어요. 그렇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그러죠? 네 맞아요 결국 제 고집에 두 손 두 발 다 드셨어요.그렇게 드디어 미진학 허락을 받아내고, 친구들은 생기부 챙기고 원서 낼 때 저는 미진학 서류를 썼죠. 그래도 저 거짓말은 아니었어요. 정말 검정고시 독학으로 일찍 따고서 바로 공장에 취업하려고 했어요.그래서 정말 학원 한번 안 다니고 테스트로 본 8월 시험에 합격해서 고졸 자격도 취득했고,바로 다음 해인 2019년에 새해가 되자마자 공장에 정규직 사원으로 입사하려고 여러 군데 알아봤어요.아버지 연세도 있으시고, 집안 사정도 뻔히 아는데 제 주제에 꿈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대학을 가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고졸 자격을 취득한지 얼마 안 됐을 때, 음.. 그러니까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저한테 사고가 생겼어요. 미성년자 성범죄 피해자가 됐어요.여러분 그거 아시나요? 미성년자는 법적으로 성범죄를 신고하게 될 경우 보호자인 부모님이 필수로 알게 되시고,후유증으로 정신과 상담과 같은 치료를 받으려면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해요.저는 몰랐는데 그때 알았어요. 뭐 이런 게 다 있나 정말 죽고 싶었어요.너무너무 신고하고 싶었고, 치료받고 싶었어요. 근데 하나밖에 없는 우리 아빠한테 사실을 털어놓는 게 죽는 것보다 더 두려웠어요.저희 아버지가 얼마나 충격받고 자책하시고 앓아누우실걸 제가 제일 잘 아니까요. 이젠 제가 지켜드려야 할 차례인데 .. 빨리 취업해야 하는데.. 어쩌지.. 많이 힘들었어요.. 덕분에 취업이고 뭐고 다 못하게 됐고, 폐인처럼 집구석에서 외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어쩌다 한번 하고,하루도 빠짐없이 유서를 썼어요. 제 침대가 수납형 침대였거든요? 그 서랍이 가득 찰 정도로 너무 힘든 날에는 하루 종일 유서만 적었어요.아버지한테 들킬까 봐 다 숨겨놓으면서도 매일 썼어요.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서랍이 유서로 꽉 차서 밀어 넣다가 몇 문장 읽어보니 마치 외워서 적은 것처럼 내용들이 다 비슷하더라고요.제발 장례식을 치르지 말아 달라.. 미안하다.. 아빠 너무 사랑한다.. 그리고 사실 나 그런 일 당했다,,그 사람 이름은 뭐고.. 나이는 몇 살이고.. 사는 곳은 어디다.. 너무 힘들게 키워놨는데 못난 짓 해서 미안하다.. 그래도 아빠는 살아달라 제발 부탁이다.. 매일 용돈으로 약국에서 처방 없이 구매 가능 한 수면유도제를 한 갑씩 샀어요.잠을 못 잤거든요.. 악몽만 꿨거든요.. 너무 자고 싶고 하루만 더 버티는 게 매일 소원이었고 아직도 소원이에요.. 내성이 생겨서 10일 치 복용량인 한 갑을 한 번에 다 털어먹어도 잠이 오질 않았고,제발 제발 우리 아빠가 너무 불쌍하니까.. 힘들게 키웠으니까.. 성인이 된 모습만 보여주고 죽자.. 이 악물고 버텼어요. 자해도 제 몸에 작은 상처 하나라도 보이면 걱정하시는 아버지가 모르게 해야 하니까주먹으로 벽을 치거나, 벽에 머리를 박거나, 가슴을 주먹으로 치거나, 샤워를 철 수세미로 하거나 별 짓은 다했어요. 가릴 수 있는 곳이라면..웃기죠. 죽고 싶다면서 정말 너무 살고 싶어서 발악하는 애 같죠.맞아요 너무 살고 싶었는데 너무 죽고 싶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빠 눈을 보면 죄책감만 들었고, 대화가 많았던 부녀지간에 소통이 줄었고,밥도 같이 못 먹었어요. 성인 생일이 되는 날만 기다리며 .. 디데이 숫자를 보면서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으면서도 제발 느리게 갔으면 좋겠었어요. 친구들은 작년 새해에 성인이 됐다고, 신난다고 기뻐할 때 저는요.진짜 시간 얼마 안 남았구나.. 내 생일인 7월까지 어떻게 더 버티지.. 싶으면서도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내 생일날 죽게 되면 너무 비참하지 않나?내 생일날이 내가 떠난 날이 된다면 아빠가 더 슬프지 않을까?그냥 생일 다음날에 죽을까?이딴 고민이나 하고 있었어요.그렇게 악착같이 버티다 여름이 금방 오더라고요.무서우면서도 반가운 여름이요. 오랜만에 친구들과 단체 약속을 잡고 얼굴을 보기로 했었어요. 나갈 준비를 하는데 신나지가 않더라고요. 오늘 나가면 집에 다시 못 들어오겠지? 지금 보는 아빠 모습이 마지막이겠지? 키우는 강아지들도 이제 못 보고 아빠도 못 보고 그러겠지?집을 나서는데 눈물이 뚝뚝 흐르는 게 아니라 줄줄 나오더라고요.오래간만에 공들여서 화장해놓고선.막상 나오니 보고 싶은 친구들이 더 많더라고요. 보진 못해도 연락이라도 남겨둬야지 싶어서뜬금없이 연락을 돌리면서 보고 싶다고 그랬어요. 근데 어떤 한 친구한테 답장이 왔는데,제 연락을 받으니 너무 반갑대요. 자기도 너무 보고 싶대요. 생일 축하한다고 선물 뭐 받고 싶냐며 만날 날을 잡자고 그러더라고요.저는 계획대로면 약속 못하잖아요. 그동안 굳게 다짐했었잖아요. 흔들리면 안 되잖아요. 고생할 만큼 다 했잖아요. 너무 보고 싶은데 약속 날짜 이야기가 나오니 말을 돌리게 됐어요.친구들과 만남이 정리되고 집으로 가는 택시를 잡고 가는 길 내내 펑펑 울었어요.집으로 가면 안 되는데 이미 생각 없이 기사님한테 주소를 불러줬거든요. 그게 너무 서러웠어요. 기사님은 아마 저를 아직까지도 기억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저한테 아가씨 왜 이리 서글프게 우냐며 안절부절 달래주시랴 운전하시랴 고생하셨어요. 진상 고객이죠.집 앞에 쭈그려앉아서 몇 시간을 울었는지 몰라요. 죽는 날만 정했지 어떻게 죽을지까지는 구체적으로 계획을 못 세웠거든요. 그래서 생각날 때까지만 울려고 그랬는데 벌써 날이 지났더라고요. 몇 년 동안 죽을 오늘날을 기다리며 지내왔는데 생일만 그렇게 기다렸는데 시간을 보니 자정을 넘어 다음날이네?허무했어요. 죽지 못한 제가 너무 한심했고, 겁쟁이 같았어요.집에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가놓고 며칠을 침대에서만 있었는지 모르겠어요.죽기 전에 우리 아빠 괴롭혔던 그 아줌마 찾아가서 깽판이라도 쳐볼까?아니면 친부모 찾아가서 우리 아빠 내가 책임져줘야 하는데 곧 나는 죽으니까 제발 .. 님들 대신 나 키워준 사람이니까 그동안 육아비 안 들었던 거 이제서야 쪼개 낸다고 생각하시고 달마다 생활비 입금해 주시면 안 되냐고 사정해볼까? 그럼 일단 죄인은 벌을 받을 테고 이제 아버지가 모르게 접수할 수 있으니 신고도 해보고, 치료도 받아볼까? 그래서 찾아갔고, 찾았고, 신고했고, 약물치료와 상담치료도 받았어요.동네 정신과에 갔다가 심각하다며 대학병원 정밀검사 소견서도 써주셨어요. 심각하대요. 입원할 수준이래요. 외상후스트레스장애,우울, 불안, 공황, 수면장애들이 너무 단계가 높대요.공황장애를 처음 알았어요. 저도 몰랐는데. 그리고그 나쁜 아줌마는 아직도 그러고 살고 있었고, 친 어머니는 많이 젊으셨고 저랑 닮은 곳이 많아 신기했어요. 막상 얼굴을 보니까 저런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생각도 안 났어요.근데 친어머니한테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진 몰라도 다짜고짜 제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털어놓게 됐어요.가정도 있으시고, 말한다고 달라질 거 없는 거 알면서도 쉴 새 없이 털어놨어요.갑자기 살고 싶어지더라고요. 막상 생각만 해봤던 것들 직접 겪어보니 또 하고 싶은 게 생겼으면 좋겠더라고요.친어머니께 저랑 연락하고 지내는 것과, 건강검진을 받게 해달라는 것과,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자고 약속을 했어요. 근데 저 어제 자살기도했어요.그러고서 이렇게 쓰는 중인 거예요.이유가 뭐냐면요. 친엄마가 제 친아빠의 존재를 친한 친구, 가족 그 누구한테도 비밀로 하고 살아와서제발 누군지만 알려달라고, 찾아가지도 않을 거고 그냥 알고만 싶다고 며칠 동안 부탁했는데어제 전화가 왔어요. 친아빠 본인도 누군지 모른다고요.본인도 성범죄 피해자라고요. 근데 제가 본인이랑 너무 똑같이 자라와서 너무 충격이라고요.저는 그렇게 혐오하고 저주하던 범죄자의 피를 가진 사람이었구나 싶어서 전화 끊고 바로 자살기도했어요.제가 그 사건 당시에 느낀 수치보다 더 고통스러웠고 제 자신이 너무 더럽게 느껴져서 토가 나왔어요.저 그래서 인터넷에 이런 글이나 올려요.나중에 말 못 할까 봐요.웃음거리 돼도 좋아요. 저는 제가 소문내고 다닐 자신 없거든요. 정말 비참하고 희망 따위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 재밌는 인생이네요.혹시 제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에 성범죄 피해 사실을 묵인하고 본인을 죽이면서 버티고 계신 분이 있으시다면저처럼 되지 마세요. 빨리 신고하고 빨리 치료받아요.이게 전부입니다.나의 친아버지라는 그 범죄자, 지금 가정도 꾸리고 살겠죠? 언젠간 제 이야기가 당신에게 닿길 빕니다. 당신이 그때 나이트에서 약을 탄 술을 먹이고 범했던 여자는 너무 어렸어요, 집단적으로 일어난 범죄라 피해자가 한둘도 아니고.. 친어머니의 당시 마지막 기억에는 준호 라는 이름과 동갑이었다는 점.. 저 신분이 거짓일수도 있지만.. 그리고 나한테 그랬던 범죄자,꼭 망했으면 좋겠어요. 제 인생 환불도 못 받잖아요. 저 아직까지 이러고 있잖아요. 당신이 몇년형을 받고 몇억을 줘도 그 사건이 생기기 전 내 모습으로 죽어도 못돌아가요.반성도 하지 마시고, 남은 인생 평생 동안 제가 겪은 거 절반이라도 겪으면서 오래오래 살라고 오늘도 기도합니다. 다들 두서없고 내용도 뒤죽박죽인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101
내 인생 즈려밟은 범죄자들에게 언젠간 이 글이 닿기를
안녕하세요.
우선 글이 많이 길어요.
그 점 유의하시고 읽어주심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글을 읽고 누군가 추측이 된다고 해도 댓글엔 달지말아주세요..
결시친이 제일 사람들이 많이 보신다고 해서 카테고리 설정을 이렇게 해뒀어요.
절대로 삶에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업로드하는 글이 아니며, 익명의 온라인 속에서라도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정말 만약 나중에 털어놓을 기회를 놓치거나
못하게 되는 날이 올까 봐 미리 끄적여둡니다.
친구가 네이트판에 업로드 하면 제 블로그보다 더 퍼져나갈수도 있다고 추천해줘서 이곳까지 글을 복사해 가지고 오게됐네요.
아마 그때는 출처 없고 의미 없는 글로 떠다니게 될 수도 있겠지만요.
온라인 속에서라도 솔직해지려고요. 저는 숨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니까..
저는 올해 스물한 살이 된 2001년생입니다.
가족은 아버지 한 분 계세요.
연세도 많으시고 선천적인 소아마비로 인해 지체장애도 있으시고, 온갖 지병과 과거 뇌종양 합병증도 앓고 계신데
평생을 오로지 저만을 위해 일 집 일 집 하시며 지내오시다,
결국엔 반강제로 정년퇴직 권고를 받아 쉬고 계신지 이제 일 년 하고도 조금 지났네요.
부모님은 아버지 한 분이 전부인데 사실은 총 네 명이에요.
저는 세상에 나오자마자 빛을 구경 할 시간도 없이 바로 입양시설에 맡겨졌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 글에선 제 전부와도 같은 절 사랑으로 키워주신 아버지를 양아버지라고 적을게요.
그 당시 양아버지께서는 양어머니와 결혼생활 몇 년 동안 아이를 갖기위해 노력을 하셨지만 결국에는
양어머니의 나이가 노산을 넘어가고, 아버지도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하고 더 했지만 결국엔 친아이를 갖지 못하셨어요.
그래서 입양을 알아보게 됐고, 몇 개월 아니 거의 일 년 동안 입양 자격 심사를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셨죠.
그러다 승인이 났고,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어요.
저는 당시 시설에서 제일 어렸었고
어리다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신생아 그 자체였어요.
아버지께선 어떤 아이여도 좋다. 남자아이더라도 여자 아이더라도 나이가 적어도 많아도 건강해도 건강하지 않아도..
부모로서 꼭 품고 싶다. 아무런 희망사항이 없다며 상담을 받으셨고
아마 그때 제 이야기도 나오지 않았을까 짐작해봅니다.
아이들을 전부 다 보셨대요.
심장이 너무 뛰더래요, 본인이 엄청난 재력가였으면 그 시설에 있는 모든 아이를 품고 싶다까지 생각하셨대요.
저희 아버지가 본인 집안에서도 엄청난 늦둥이시고,
태어나자마자 장애로 인해 일찍 죽을 거라고 믿으셨던 아버지의 부모님은 절에 아버지를 맡기셨대요.
이름도 있고 가족도 있었지만
절에서 3년 정도는 머무셨다고 해요.
할머니께서 이 아이는 우리가 보낼 아이는 아니구나 아시고서 다시 데려오셨지만
시골 동네가 좁고 그 작은 동네 중에서도 가장 큰 집안이라서,
혹여 갑자기 나타난 아이를 보고 흉흉한 소문이 돌게 될까 염려하셔
당시 연세와 건강 때문에 젖도 돌지 않아서, 제게는 큰어머니인 큰며느리에게
육아를 거의 맡기셨다고 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아버지가 어리실 때 돌아가셨고
큰어머니는 자식이 넷이나 있었지만 저희 아버지까지 케어하시며
할아버지 수발까지 도맡아 들어드렸어요.
근데 큰엄마는 과거의 그 시절을 정말 좋게 기억하시고 계세요.
제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지 않았냐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냐고 여쭤보면
할머니가, 즉 시어머니가 정말 좋은 분이셨대요.
남들 죽어난다는 시댁살이도 없었으며
아버지의 형제가 4남매 총 아버지 포함 네 분이신데
본인 자식들 대하시듯 며느리도 챙겨주셨었다고, 그래서 힘든 건지도 모르셨고 행복하셨다고 그러셨어요.
어려서부터 큰어머니 손에 자식과 다름없이 자라온 저희 아버지는
아직까지도 80대후반이신 큰어머니 앞에선 어린아이처럼 군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얼마나 재밌는지 모르겠어요.
호랑이 같고 무뚝뚝하신 아버지가 유일하게 부드러워지시는 얼마 안 되는 상황 중에 하나랍니다.
이야기가 많이 산으로 간 듯하지만 이어 말하자면,
그래서 제 양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완벽하고 화목한 가정의 꿈이 크셨어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아이까지
사람들이 말하는 평범하다는 가족들에 대한 소망이 있으셨죠.
아이를 전부 보셨는데, 그때 제일 작고 엄청 어렸던 저는 베이비박스 같은 곳에 놓여있었답니다.
이렇게 작고 어린아이가 무슨 일로 이렇게 일찍 이곳에 있을까 궁금하셨던 아버지는 얼굴만 한번 보려고 하셨대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마치 인큐베이터와 같은 형태로 된 곳에 있었다고 해요.
아픈 곳도 없었고 만삭에 출산 한 건강한 아이였는데
제 추측으로는 너무 갓난아기라서 그렇게 보호해 두신 것 같아요.
제가 성격이 울음도 많고 겁도 많고 시설에서 그동안 돌봤던 또래들 중에서도 유난히 다루기가 어려웠다고 들으셨는데
신기하게도 얇은 플라스틱 하나 두고 마주 본 아이는 울지도 않았고,
계속 눈을 마주쳤다고 해요. 그렇게 첫 만남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시는 동안에도,
집에 와서도 며칠 동안 피하지 않고 계속 맞추던 아가의 눈이 아른거리셨대요.
일도 손에 잡히지 않으시고, 눈을 감아도 생각나고, 시설에서 걸려 오는 전화에도 제 근황만 여쭤보셨대요.
결국엔 입양을 결정합니다.
정이 많으신 아버지는 가족을 기다리는 많은 아이들을 직접 눈으로 보셔서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고,
건강하게 지내다가 좋은 곳 갔으면 좋겠다고, 저만 데려온 게 죄스럽다며 기부금도 내셨더랬죠.
거의 한 달 동안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려주고 부모라는 걸 인식하게 하기 위한 기간이 있었대요.
제가 너무 좋아했대요. 계속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배시시 웃고
아버지 목소리를 듣다가 자장가 삼아 새근새근 잠도 잘 자더래요.
그렇게 가족이 됐어요.
아버지가 손이 굉장히 크세요. 정말 아버지보다 큰 손을 가진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이 없을 만큼요.
그리고 고생 많이 한 손은 투박하죠. 얼굴에도 생기는 세월의 흔적처럼.
그래서 절 다루시는 걸 무척이나 어려워하셨어요. 만지면 닳을까 안으면 부서질까,
투박한 손 때문에 연한 아기의 피부에 생채기라도 생기지 않을까
여자아기라 더욱이 벌벌 떠셨죠.
집안에는 아기를 위한 모든 것들을 주변에서 조언도 들으시고 서점에서 사 오신 육아 서적으로 공부도 하시고
정말 엄청나게 많은 아기용품들로 온 집안이 꽉 차있었어요.
56년생이시라 동년배 자녀분들은 이미 훌쩍 자랐고, 엄청 늦둥이, 집안의 유일한 여자아이로 예쁨
과 관심 무척 많이 받았죠.
당시 사진 속에서도 저를 어색하게 안고 계신 아버지 등 뒤로 아기 용품들이 쌓여있는 걸 보고 한참을 웃었네요.
개월 수에 맞지도 않는 미끄럼틀에 자동차에 그네에 자전거에 오로지 저만을 위한 궁전 같았어요.
이 시절까지만 설명드린다면 정말 흐뭇하고 다행이며 화목한 가정이지 않나요?
간절히 원하던 아이와, 모든 것이 준비된 따뜻한 부모와, 더 바랄 게 없는 화목한 가정이죠.
근데 양어머니는 아니셨나 봅니다.
아이가 말을 못 해도 감정은 느낄 수 있다는 거 다들 아시죠?
정말 어렸을 때부터 양어머니는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 가족이 아니구나 느끼며 확신을 할 정도였어요.
(이 확신이 먼 훗날 제게 입양사실을 알려 준 계기가 됐네요.)
아버지는 공장을 운영하시던 사업가셨고, 어머니는 평범한 전업주부셨어요.
그래서 저는 당연히 아버지보다 어머니와 있는 시간이 더 많았죠.
제가 사실 최근 논란이었던 가슴 아픈 뉴스의 아이가 머물던 시설 출신이에요.
2000년대 초반엔 가정마다 집 전화가 많이 보편화되어 있었잖아요.
제가 짧은 말을 하고 좋고 싫음과 같은 의사 표현을 하게 될 수 있었던 시기부터
아침 일찍 아버지가 출근 준비를 하시는 소리에 놀라 울며 깨고, 집 앞 슈퍼에 가시려고 외투를 걸치시기만 해도 기겁을 하고
현관까지 맨발로 뛰어나가 붙잡고 울다 지쳐 쓰러지는 게 일상이고, 퇴근하실 때까지 신발장 주변에서만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대요.
아버지의 퇴근시간이 매일 다르니 다 같이 먹는 저녁시간보다 양어머니와 단둘이 먹는 경우가 더 많았는데,
아무리 성장기라고 하더라도 아이의 성장이 먹이는 양이 많고 활동량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평균에 미치지 않고,
저녁 늦게 들어와 늦은 식사를 드실 때도 배고프다며 곤히 자고 있던 제가 방에서 눈도 덜 뜬 채로 나와
아버지 다리에 올라앉아, 성인이 먹는 양을 거의 다 씹지도 않고 허겁지겁 삼켰대요.
하루 이틀은 내 딸이 식탐이 생겼구나~, 한참 클 때니까~ 하고 넘기셨는데, 그게 일상이 되다 보니까 문제가 됐고
원인을 찾으시려고 노력하셨죠. 혹시나 아내가 제시간에 밥을 주지 않는 건가? 부실하게 주는 건가?
부부문제로 넘어갈 정도로 심각한 고민이 됐어요.
그래서 매일 제 식사시간 때, 간식시간 때마다 집 전화로 전화를 걸어 확인하셨어요.
아무리 원인을 찾으려고 해도 겉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러니 아버지 입장에선 미칠 노릇이었죠.
그러다 하루는 평일에 쉬고 싶으셔서 일찍 퇴근을 하시고 직장과 집이 멀지 않아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고 귀가하셨는데
아파트 앞에 아주머니들 모여 담소를 나누실 수 있는 작은 정자가 있었어요.
무뚝뚝하고 말주변도 없었던 아버지라 따로 친분이 있었던 주민분이 없으셨는데
동 대표 아주머니께서 올라가려는 아버지를 붙잡고 물으셨어요.
어린아이가 있는 세대는 한 곳 밖에 없으니 아무리 왕래가 없어도 어린아이 키우는 집은 어느 세대인지 다들 아셨었죠.
소음과 아동학대가 의심돼 주민 신고가 자주 들어왔었나 봐요.
그리고 이웃 주민들이 두세 번 정도 경찰에도 신고했었고,
아버지는 무슨 말 인지도 못 알아들으셨대요.
단 한 번도 그런 소식을 전해 들은 적이 없을뿐더러.. 경찰이라뇨?
다른 세대랑 헷갈리시는 거 아니냐며 오히려 되물으시고 상황 파악이 하나도 안되셨대요.
정자에 모여계셨던 아주머니들께서 수군수군 거리며 마치 야유하는 분위기였대요.
안 좋은 예감이 드신 아버지는 부리나 캐 집으로 올라가셨고
일층에서부터 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대요.
사고가 난거 아닐까? 강도가 들었을까? 별별 생각을 다 하시면서 문을 열어보니
날이 추웠는데 옷을 하나도 안 입고 .. 혼자서 덩그러니..
기저귀도 차지 않고서 거실에서 꺽꺽 숨이 넘어갈 듯 울며 오물을 사방에 발라두고
기진맥진 쓰러지다시피 힘겹게 누워있는 절 보시고 너무 놀라 기겁하셨대요.
어설프게 포대기로 감싸 안고 제가 아파서 그런 줄 아시고 근처 종합병원 응급실에 가게 됩니다.
진단 결과, 영양실조
아버지는 오진이 아닌가 의아하셨죠.
영양실조라니요. 본인 입에 들어가는 음식보다 좋은 것만 고르고 골라 배곯지 않게 우리 아가 입에 넣어줬는데요.
사실은 제가 아버지랑 같이 먹는 저녁, 아니면 주말에만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거였어요.
전화가 올 시간에만 집에 들렀다 나가고, 아이 혼자 두고 본인은 신나게 나가 노는 게 일상이었던 거죠.
냉장고엔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요구르트와
[매일 요구르트를 배달시켰는데 예전 것은 그대로 넣어놓고 새로운 우유나 음료는 양어머니가 간식으로 전부 드신 거죠.]
곰팡이 핀 이유식 통.
배변 교육을 위한 플라스틱 유아용 변기엔 배변물을 한 번도 치우지 않아 구더기와 날파리가 득실..
베란다 입구쪽에 있어서 아버지가 확인을 늦게 하셨어요.
생전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도 그리 서럽게 울어본 적이 없으셨대요.
내가 도대체 왜 몰랐을까 하는 죄책감.. 부모로서의 자책..
일만 열심히 하고 가정에만 충실하면 되는 줄만 알았던 아버지의 후회..
그저 행복한 줄만 알고 제일 가깝다고 믿던 딸아이와의 교감 속에서도 뒤늦게 알아버린 부끄러움..
아버지가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시니 영문도 모르는 저까지 덩달아 서럽게 울어 눈물바다가 됐대요.
십수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날을 회상하실 때마다 굳건하신 아버지의 눈엔 눈물이 고입니다,
모든 가계 관리와 통장들은 전업주부인 어머니가 관리하셨고, 가지고 계셨던 사유재산 역시 전부 어머니 명의였어요.
그날 이후 부부관계는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셨고,
아버지는 어린 저를 데리고 출퇴근을 하시며 업무시간에도 저를 안고 다니셨어요.
저도 이건 기억이 선명하네요. 냠냠선생님도 기억나요.
이제 관계를 정리해야겠다 다짐하시고 법적인 절차를 정식으로 차근차근 준비를 하시던 찰나의
어머니가 사용하신 아버지의 명의 관련 한 사건사고들까지 일이 터지고 한참 지나고서야 아시게 됐죠.
서류를 접수한 적도 합의를 한 적도 없는데 합의이혼으로 진작에 처리돼있었고
이게 무슨 일인가 파악할 시간도 없이 통장, 땅, 공장, 집, 차 전부 다 담보로 잡혀 경매를 진행하게 되거나 압류되셨어요.
전부 다요. 모조리 다. 먼지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속수무책으로 잃으셨어요.
양어머니가 공장을 담보로 꽤나 스케일이 큰 주부 도박을 하셨고,
아버지 돈으로 상의도 없이 시댁에 단독주택도 사드렸고, [아직도 그 주택에서 뻔뻔하게 살더군요,ㅎㅎ]
신용카드도 한도 없이 본인 사치를 위해 엄청 쓰셨고,
아버지에게 전달돼야 하는 거래처 어음도 대리로 받으셔서 다 놀음하시는데 날리셨고,
달마다 시댁에 작게는 몇백, 크게는 몇천씩 용돈이랍시고 퍼날랐고,
그 와중에 이 생각까진 어찌한 건지 장모, 장인어른 노후자금까지 대비해 주식이며 땅이며 전부 사줬고,
이 모든 걸 10년 이상을 아이 없이도 함께 한 배우자가 그러리라고 상상도 못하셨던 아버지는,
본인이 무지해서 일어난 일이고, 그래서 내 딸도 아픈 걸 뒤늦게 알게 된 것이고,
사업가로서 가정과 사업 가계 관리는 구분해 대표인 본인이 했어야 했는데 기본 자격도 없는 바보였다며 자책하셨죠.
아주 치밀하고 오랫동안 완벽하게 계획을 세우고 하나하나 공들여 빼먹을 작정으로 완벽하게 설계된 사기결혼이었죠.
첫 만남도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아버지는 인정하는 게 힘드셨어요.
하루아침에 예고도 없이 모든 게 산산조각이 난 판국에,
내가 몇십 년을 살 맞대고 한 지붕 아래 백년가약을 맺고 같이 산 여자가 사기꾼이라는데 어찌 믿어요.
모든 사실을 부정하고 싶으셨겠죠. 꿈이길 바라셨겠죠..
하늘도 무심하시지.. 불쌍한 우리 아빠
저 조차도 반나절 동안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 눈물이 나서 몇 번을 쉬었다 쓰는지 모르겠는데
그 당시 우리 아빠는 혼자서 얼마나 고단했을까요.
차라리 나라도 포기하고 다시 시설에 데려다주지..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로 정말 바보 같은 사람이에요. 정말 바보예요.
제가 뭐라고 그렇게 지키고 싶어 하셨을까요.
안방에 금고라고 하기도 애매한 가정용 사이즈의 금고가 있었는데,
그 속에는 제 돌잔치에 들어온 금들과 돌 반지 그리고 100일 잔치에 입었던 진주 드레스가 들어있었어요.
사업가 셨으니까 온갖 잔치에 거래처분들도 많이 오셨으니
초대된 손님만 몇백 명이었죠. 그때 찍은 테이프만 봐도 보통 잔치 규모가 아니었어요.
그러니 제 잔치에 들어온 금이 아주 많았어요.
나중에 우리 딸 다 크면 줄 거라고 이건 평생 간직해야 한다며 금고를 따로 구비해 보관할 정도로 많았죠.
근데 그걸요. 돌 반지 하나라도 안 남겨두고 싹 가져갔어요.
이건 압류가 아니라 어머니가 도망가실 때 훔쳐 가신 거예요.
심지어 진주 드레스에 박힌 진주만 떼어가고 옷만 남겨두고 갔어요. 가져갈 수 있는 건 값이 된다면 뭐든 다 가져간 거죠.
아버지가 취미로 모으시던 다양한 발효주까지 면허가 없어 남동생까지 합세해 차까지 몰고 와서 다 챙겨갔어요.
바보 같은 아빠는 난장판이 된 집안에서 제일 먼저 확인한 게 저 금고에요.
돌 반지 하나라도 남겨두고 갔겠지 그랬겠지 하시면서.
드라마 같죠? 소설 같지 않나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저희 아버지는 어떻게 혼자서 저 모든 일을 겪으셨을까요?
확인해보니 양어머니는 사기결혼이 처음이 아니셨어요.
결혼만 총 4번 모두 다 사업하시던 분들이었고 친자식은 단 한 명도 없었고 (과거 혼인 사실을 아버지는 모르셨어요.)
그중에서도 저희 아버지와 제일 오래 사셨더라고요.
아버지는 생전 손 벌려본 적도 없는 큰엄마한테 몇십만 원 을 빌려서 전국을 버스 타고 저 데리고 양어머니만 찾아다니셨어요.
제발 다 가져가도 좋으니 살던 집 하나라도 달라고, 내 딸 잘 수 있는 곳만 내어달라고..
그 여자 친정을 찾아가길 수차례 문도 열어주지 않으셨죠.
편지도 써서 보내셨어요.
죄도 없는데 죄인처럼 거의 빌다시피 죄송하다며 제발 하나만 내어달라며
그 이후론 연락도 하지 않을 거고 찾지도 않고 양육권도 본인이 책임질 것이고 어머니를 상대로 먼 훗날 나중에라도 소송을 하지 않겠다며
제발 제발.. 비셨어요.
번호를 바꿔도 보고,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기도 해보고..
그랬더니 그 여자가 번호를 바꾸고 가족이라는 사람들도 전부 연락처를 바꿨어요.
그 아픈 다리로 현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며칠 동안 빌었어요. 매번 경찰들이 끌고 가셨지만 그래도 가셔서 빌었어요.
저 같으면요. 그만큼 가져갔으면,
불쌍해서, 아니 거지꼴로 애 데리고 다니면서 죽어가는 목소리로 울고불고 비는 게 재수가 없어서라도 저거 하나는 돌려줬을 거 같아요.
뭐 뻔한 결말이지만 백원 한 개도 못 돌려받으셨죠.
아버지가 절 품기 3년 정도 전에 뇌종양으로 쓰러지시고 응급실에서 수술에 들어가기 전 배우자? 보호자? 동의가 필요했었는데
수술해도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의사 말에 그 여자는 바로 아버지를 두고서 병원비를 들고 여행 갔어요.
여행?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하시겠지만 실제로 친구들이랑 놀러 갔어요.
큰엄마와 아버지의 누님이신 작은고모가 그 소식을 들으시고 달려오셔서 수술도 받으셨고, 왜 와이프가 옆에 없는지 찾으셨는데 연락도 안 받았고
수술 후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 계시던 아버지를 큰엄마와 작은 고모가 번갈아가며 교대로 간병을 해주셨어요.
그 기간이 꽤 길었어요.
그러다가 그 여자가 병원에 찾아왔어요.
의사가 말 한 기간을 훌쩍 넘기고도 별다른 연락이 없자 온 거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개인적으로 저는 불행이라 생각되는 일이지만 회복 잘 되고 있고 곧 의식도 돌아올 거라는 말에
그제서야 병간호를 했던 척 연기를 하며 아버지가 일어나길 기다렸죠.
큰엄마와 고모는 와이프가 왜 그랬는지 아무런 까닭도 모르셨으니
절대안정이 필요 한 환자고, 본인들 입만 닫는다면 가정의 화목이 지켜질 거라 믿으시고
회복하신 아버지께 몇 년이 지나도 사실을 알려주지 않으셨어요.
모든 일이 다 터질 대로 터지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 중 하나인 에피소드죠.
뭐 저런 건 일도 아닐 정도로 별 장난을 다 치던 여자였으니까..
아버지는 그 사실을 몇 년간 알려주지 않았던 큰엄마와 고모를 원망조차 안 하셨어요. 웃프죠.
그래서 어떻게 됐냐면요.
요즘 배고파봤다는 가수들이 가사에도 자주 적는 빛도 없는 반지하 단칸방 아시죠.
거기서 살았어요. 아빠랑 둘이.
아버지는 충격이 크셔서 바로 일을 찾지는 못하셨고 매일 폐인처럼 술을 드셨어요.
그래도 제 끼니는 동네 슈퍼에서 외상까지 해가며 삼시 세끼 어떻게든 챙겨주셨어요.
본인은 안주도 없이 맨 속에 쓴 술을 들이부었으면서 그 정신에도 저만 챙겼어요.
저는 뭐가 뭔지도 모르니까 아빠랑 같이 둘이서 매일같이 노는 게 좋았어요.
그 좁은 집에서 스케치북에 그림 같이 그리고 노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는데
뭐가 그렇게 신나고 좋았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좋았어요.
목욕 한번 하면 창도 작은 집구석에 현관이며 뭐며 환기시킬 수 있는 모든 구멍들은 몇 시간을 열어놔야 습기가 빠지는 그런 집에서, 곰팡이 가득하고 창문엔 오줌 범벅이고 벌레 천국인 그곳에서
저만 행복했어요. 저만요.
아빠가 팔베개해 주는 것도 좋았고, 잠이 안 온다 칭얼거리면 들려주시던 매일 새로운 내용의 옛이야기도 너무 재밌었고,
춥다며 안고 잘 때는 아빠 품속에서 내복을 깨물고 아빠를 꼬집고 놀다가 잠에 드는 것도 좋았고, 이때 아빠 내복을 깨무려는게 팔뚝까지 깨물어 제 유치 자국 그대로 아직까지 흉이 있으세요. ㅎㅎ
슈퍼에서 먹고 싶은 걸 다 고르라는 말에 작은 손에 욕심도 많지, 봉투를 바닥에 질질 끌고 집에 갈 정도로 매일 간식을
먹고 싶은 것만, 먹고 싶은 양껏 먹는 것도 좋았고, 밥을 먹을 때도 배부르게 먹어서 좋았고, 좁은 골목에서 돌멩이로 시멘트 바닥에 그림 그려놓고 아빠 보여주고서 잘 그렸다고 역시 내 딸이라며 칭찬받는 것도 전부 다 좋았어요. 진짜로 뭣도 모르고 좋았어요 저는..
아빠 눈에는 얼마나 가엽고 슬펐을까 이제 와서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지만,
전 아빠랑 둘인 게, 우리인 게 너무 좋았어요..
그러다 어느 날 아빠가 집에 바퀴가 많이 나온다며 집에 벌레를 죽이는 약을 쳐야겠다고,
오늘 밤은 찜질방 가서 자자고 그랬어요.
저는 그날도 엄청 신났죠, 찜질방이 얼마나 재밌는데요.
실컷 뛰어놀다가 제풀에 지쳐 잠이 들었어요.
오줌이 마려워 눈을 떠보니 아빠가 옆에 없었어요.
담배를 피우러 간 건가? 찜질방에 들어갔나? 어딜 간 거지?
잠에서 깬 저는 넓은 찜질방을 돌아다니며 아빠를 찾았어요. 없더라고요. 아무리 돌아다녀도 없더라고요.
갑자기 겁이 엄청 났어요. 사람들 다 잘 시간이었는데 막 소리 내서 엄청 울었어요.
놀란 매점 카운터 아주머니가 오셨고,
부모님 어디 계시냐며 왜 우냐며 달래주시고, 아빠랑 같이 왔는데 눈을 떠보니 없다고
눈물 콧물 다 흘리면서 말씀드리니 걱정 말라고 울지 말라고 하시면서, 제 손을 잡고 같이 아버질 찾으러 돌아다녀 주셨어요.
근데 못 찾았어요. 없었어요. 아주머니도 당황하셨고, 저는 또 울었죠.
그러다 경찰 아저씨가 왔어요. 저는 울기만 하고 말도 잘 못한 거 같아요. 우느라 못했어요.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욕탕 입구에서 저 멀리 오는 아빠를 보고 울며 달려갔어요.
아빠 상태도 뭔가 이상했고, 아빠도 절 감싸 안고 길거리에서 그 늦은 시간에 엉엉 우셨어요.
다 큰 후에 알았어요. 자살기도를 하셨었대요.
제 앞에서 죽기엔 너무 미안했고 부족한 집안에서 자라기엔 너무 예쁜 아이라며 이미 큰엄마께도 부탁한다고 문자를 보내놨대요.
잠이 없으셨던 큰엄마는 새벽에 온 그 문자 한 통을 보고 직감적으로 느끼신 거죠.
휴대폰 전원도 꺼져있고, 설마설마하시면서 신고를 하셨는데 경찰이 출동한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구급차가 왔고,
그 사이에 아버지는 그 다리로 저부터 보시려고 목욕탕까지 울면서 뛰어오신 거예요.
그래서 같이 응급실에 갔어요. 응급 처치를 받아야 하니까..
그때 아빠가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서 저보고 하신 말씀이,
'이제 엄마 없어. 엄마 보지도 못하고. 하늘나라 갔어.'
였어요.
저는 충격도 받지 않았고 슬프지도 않았어요. 뭔가 느낌상? 돌아가시지 않았다는것도 대충은 느꼈고요.
그래? 괜찮아~ 아빠랑 있는 게 더 좋아~~ 이러고 대답했어요.
그러고서 손잡고 같이 집에 갔어요.
엉망이었는데 아빠가 제가 잘 곳만 치워주시고 벽에 기대앉아 제 머리를 계속 쓰담아주시며 자장가를 잠들 때까지 불러주셨어요.
그 이후로 글에는 다 담지 못할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고, 힘든 날들이 많았어요.
정확하게는 제가 아니라 아버지가 힘드셨던 나날들이죠.
중간중간 있었던 웃픈 에피소드지만,
다니던 사립유치원에서도 학대를 당했는데, 당연한 줄 알고 아버지한테 말씀 안 드리고 지내다가
어느날 종일반이라 늦은 시간까지 혼자 기다렸었던 저를 하원 시키려고 오시는 길에 창문 너머로 이사장님이 (남자분) 제 귀를 잡아 올리고서 서울구경이라며 우는데도 놔주질 않는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바로 그분을 때리셨고, 그분 코 뼈가 부러지셨고 막 비셨어요. 저희 아버지한테요 ㅋㅋㅋ
(낮잠 시간에 단소나 리코더로 이유없이 아이들 발바닥을 때리거나 6-7살 아이들 옷을 전부 벗겨 뒷마당에 세워두는것도 일상, 서울구경은 필수옵션일정도로 지금보면 왜 그때 난 말 안한거지 의아하네요.)
그리고 유치원을 옮겨 까먹고 지냈었는데 뉴스에 그 유치원이 나오더라고요. 아동학대 유치원으로 엄청 핫하게 처음으로 뜬 곳이었어요. 유치원도 망했고요.
생각보다 늦게 진실이 밝혀지고 사라진 곳이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네요.
그러면서 지내다 저는 나이를 먹었어요. 아빠 피땀 고생으로 헌신 한 모든 것들로 성장할 수 있었죠.
여자치고 키도 큰 편이라 아빠랑 거의 맞먹을 만큼 자랐죠.
초-중 학생 때는 등골 브레이커 소리 들을 정도로 아버지가 혹여 제가 가난한 티가 날까 봐, 엄마 없이 자란 티 날까 봐서 오히려 좋은 물건들 제가 떼쓰지 않아도 먼저 사주셨고, 용돈도 많이 주셨고, 그만큼 엄하면서도 친구처럼 키워주셨어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친구들은 성적관리에 바빴는데 저는 한가했어요.
하고 싶은 것도 목표인 것도 없어서 자퇴가 아닌 미진학을 선택하고 아버지를 설득했었죠.
아버지 눈에는 제가 정말 철없어 보였을 거예요. 사실이기도 하고요.
아버지를 설득하려면 그럴듯한 계획과 변명이 필요했죠.
독학으로 공부해서 애들보다 빨리 검정고시를 치고 졸업할 거다~
그러고서 바로 기술직으로 취업할 거다~
완강하게 반대하셨어요. 공부만이 살 길이라며 옛날에는 고생하면 고생하는 만큼 편하게 살 수 있는 시대였지만 이젠 그런 시대는 갔다고,
내가 너는 고생 안 시키려고 대신 내가 몸이 부서져라 고생했는데 절대로 안 된다며,
꼭 고등학교를 들어가 대학도 가고 앉아서 일하는 사무직으로 취업해야 한다고~
한동안 이 주제로 아주 집안 분위기가 살벌했어요.
그렇지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그러죠? 네 맞아요 결국 제 고집에 두 손 두 발 다 드셨어요.
그렇게 드디어 미진학 허락을 받아내고, 친구들은 생기부 챙기고 원서 낼 때 저는 미진학 서류를 썼죠.
그래도 저 거짓말은 아니었어요. 정말 검정고시 독학으로 일찍 따고서 바로 공장에 취업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정말 학원 한번 안 다니고 테스트로 본 8월 시험에 합격해서 고졸 자격도 취득했고,
바로 다음 해인 2019년에 새해가 되자마자 공장에 정규직 사원으로 입사하려고 여러 군데 알아봤어요.
아버지 연세도 있으시고, 집안 사정도 뻔히 아는데 제 주제에 꿈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대학을 가는 건 욕심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고졸 자격을 취득한지 얼마 안 됐을 때, 음.. 그러니까 두 달밖에 지나지 않았을 때 저한테 사고가 생겼어요.
미성년자 성범죄 피해자가 됐어요.
여러분 그거 아시나요? 미성년자는 법적으로 성범죄를 신고하게 될 경우 보호자인 부모님이 필수로 알게 되시고,
후유증으로 정신과 상담과 같은 치료를 받으려면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해요.
저는 몰랐는데 그때 알았어요.
뭐 이런 게 다 있나 정말 죽고 싶었어요.
너무너무 신고하고 싶었고, 치료받고 싶었어요.
근데 하나밖에 없는 우리 아빠한테 사실을 털어놓는 게 죽는 것보다 더 두려웠어요.
저희 아버지가 얼마나 충격받고 자책하시고 앓아누우실걸 제가 제일 잘 아니까요. 이젠 제가 지켜드려야 할 차례인데 .. 빨리 취업해야 하는데.. 어쩌지.. 많이 힘들었어요..
덕분에 취업이고 뭐고 다 못하게 됐고, 폐인처럼 집구석에서 외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어쩌다 한번 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유서를 썼어요. 제 침대가 수납형 침대였거든요? 그 서랍이 가득 찰 정도로 너무 힘든 날에는 하루 종일 유서만 적었어요.
아버지한테 들킬까 봐 다 숨겨놓으면서도 매일 썼어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서랍이 유서로 꽉 차서 밀어 넣다가 몇 문장 읽어보니 마치 외워서 적은 것처럼 내용들이 다 비슷하더라고요.
제발 장례식을 치르지 말아 달라.. 미안하다.. 아빠 너무 사랑한다.. 그리고 사실 나 그런 일 당했다,,
그 사람 이름은 뭐고.. 나이는 몇 살이고.. 사는 곳은 어디다.. 너무 힘들게 키워놨는데 못난 짓 해서 미안하다.. 그래도 아빠는 살아달라 제발 부탁이다..
매일 용돈으로 약국에서 처방 없이 구매 가능 한 수면유도제를 한 갑씩 샀어요.
잠을 못 잤거든요.. 악몽만 꿨거든요.. 너무 자고 싶고 하루만 더 버티는 게 매일 소원이었고 아직도 소원이에요..
내성이 생겨서 10일 치 복용량인 한 갑을 한 번에 다 털어먹어도 잠이 오질 않았고,
제발 제발 우리 아빠가 너무 불쌍하니까.. 힘들게 키웠으니까.. 성인이 된 모습만 보여주고 죽자.. 이 악물고 버텼어요.
자해도 제 몸에 작은 상처 하나라도 보이면 걱정하시는 아버지가 모르게 해야 하니까
주먹으로 벽을 치거나, 벽에 머리를 박거나, 가슴을 주먹으로 치거나, 샤워를 철 수세미로 하거나 별 짓은 다했어요. 가릴 수 있는 곳이라면..
웃기죠. 죽고 싶다면서 정말 너무 살고 싶어서 발악하는 애 같죠.
맞아요 너무 살고 싶었는데 너무 죽고 싶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아빠 눈을 보면 죄책감만 들었고, 대화가 많았던 부녀지간에 소통이 줄었고,
밥도 같이 못 먹었어요. 성인 생일이 되는 날만 기다리며 .. 디데이 숫자를 보면서 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으면서도 제발 느리게 갔으면 좋겠었어요.
친구들은 작년 새해에 성인이 됐다고, 신난다고 기뻐할 때 저는요.
진짜 시간 얼마 안 남았구나.. 내 생일인 7월까지 어떻게 더 버티지.. 싶으면서도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내 생일날 죽게 되면 너무 비참하지 않나?
내 생일날이 내가 떠난 날이 된다면 아빠가 더 슬프지 않을까?
그냥 생일 다음날에 죽을까?
이딴 고민이나 하고 있었어요.
그렇게 악착같이 버티다 여름이 금방 오더라고요.
무서우면서도 반가운 여름이요.
오랜만에 친구들과 단체 약속을 잡고 얼굴을 보기로 했었어요. 나갈 준비를 하는데 신나지가 않더라고요.
오늘 나가면 집에 다시 못 들어오겠지? 지금 보는 아빠 모습이 마지막이겠지? 키우는 강아지들도 이제 못 보고 아빠도 못 보고 그러겠지?
집을 나서는데 눈물이 뚝뚝 흐르는 게 아니라 줄줄 나오더라고요.
오래간만에 공들여서 화장해놓고선.
막상 나오니 보고 싶은 친구들이 더 많더라고요. 보진 못해도 연락이라도 남겨둬야지 싶어서
뜬금없이 연락을 돌리면서 보고 싶다고 그랬어요.
근데 어떤 한 친구한테 답장이 왔는데,
제 연락을 받으니 너무 반갑대요. 자기도 너무 보고 싶대요. 생일 축하한다고 선물 뭐 받고 싶냐며 만날 날을 잡자고 그러더라고요.
저는 계획대로면 약속 못하잖아요. 그동안 굳게 다짐했었잖아요. 흔들리면 안 되잖아요. 고생할 만큼 다 했잖아요.
너무 보고 싶은데 약속 날짜 이야기가 나오니 말을 돌리게 됐어요.
친구들과 만남이 정리되고 집으로 가는 택시를 잡고 가는 길 내내 펑펑 울었어요.
집으로 가면 안 되는데 이미 생각 없이 기사님한테 주소를 불러줬거든요.
그게 너무 서러웠어요. 기사님은 아마 저를 아직까지도 기억하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한테 아가씨 왜 이리 서글프게 우냐며 안절부절 달래주시랴 운전하시랴 고생하셨어요. 진상 고객이죠.
집 앞에 쭈그려앉아서 몇 시간을 울었는지 몰라요.
죽는 날만 정했지 어떻게 죽을지까지는 구체적으로 계획을 못 세웠거든요.
그래서 생각날 때까지만 울려고 그랬는데 벌써 날이 지났더라고요.
몇 년 동안 죽을 오늘날을 기다리며 지내왔는데 생일만 그렇게 기다렸는데 시간을 보니 자정을 넘어 다음날이네?
허무했어요. 죽지 못한 제가 너무 한심했고, 겁쟁이 같았어요.
집에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가놓고 며칠을 침대에서만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죽기 전에 우리 아빠 괴롭혔던 그 아줌마 찾아가서 깽판이라도 쳐볼까?
아니면 친부모 찾아가서 우리 아빠 내가 책임져줘야 하는데 곧 나는 죽으니까 제발 .. 님들 대신 나 키워준 사람이니까 그동안 육아비 안 들었던 거 이제서야 쪼개 낸다고 생각하시고 달마다 생활비 입금해 주시면 안 되냐고 사정해볼까?
그럼 일단 죄인은 벌을 받을 테고 이제 아버지가 모르게 접수할 수 있으니 신고도 해보고, 치료도 받아볼까?
그래서 찾아갔고, 찾았고, 신고했고, 약물치료와 상담치료도 받았어요.
동네 정신과에 갔다가 심각하다며 대학병원 정밀검사 소견서도 써주셨어요. 심각하대요. 입원할 수준이래요.
외상후스트레스장애,우울, 불안, 공황, 수면장애들이 너무 단계가 높대요.
공황장애를 처음 알았어요. 저도 몰랐는데.
그리고
그 나쁜 아줌마는 아직도 그러고 살고 있었고,
친 어머니는 많이 젊으셨고 저랑 닮은 곳이 많아 신기했어요. 막상 얼굴을 보니까 저런 말이 안 나오더라고요. 생각도 안 났어요.
근데 친어머니한테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진 몰라도 다짜고짜 제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 털어놓게 됐어요.
가정도 있으시고, 말한다고 달라질 거 없는 거 알면서도 쉴 새 없이 털어놨어요.
갑자기 살고 싶어지더라고요. 막상 생각만 해봤던 것들 직접 겪어보니 또 하고 싶은 게 생겼으면 좋겠더라고요.
친어머니께 저랑 연락하고 지내는 것과, 건강검진을 받게 해달라는 것과,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자고 약속을 했어요.
근데 저 어제 자살기도했어요.
그러고서 이렇게 쓰는 중인 거예요.
이유가 뭐냐면요.
친엄마가 제 친아빠의 존재를 친한 친구, 가족 그 누구한테도 비밀로 하고 살아와서
제발 누군지만 알려달라고, 찾아가지도 않을 거고 그냥 알고만 싶다고 며칠 동안 부탁했는데
어제 전화가 왔어요. 친아빠 본인도 누군지 모른다고요.
본인도 성범죄 피해자라고요.
근데 제가 본인이랑 너무 똑같이 자라와서 너무 충격이라고요.
저는 그렇게 혐오하고 저주하던 범죄자의 피를 가진 사람이었구나 싶어서 전화 끊고 바로 자살기도했어요.
제가 그 사건 당시에 느낀 수치보다 더 고통스러웠고
제 자신이 너무 더럽게 느껴져서 토가 나왔어요.
저 그래서 인터넷에 이런 글이나 올려요.
나중에 말 못 할까 봐요.
웃음거리 돼도 좋아요. 저는 제가 소문내고 다닐 자신 없거든요.
정말 비참하고 희망 따위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는 재밌는 인생이네요.
혹시 제 글을 읽고 계신 분들 중에 성범죄 피해 사실을 묵인하고 본인을 죽이면서 버티고 계신 분이 있으시다면
저처럼 되지 마세요. 빨리 신고하고 빨리 치료받아요.
이게 전부입니다.
나의 친아버지라는 그 범죄자, 지금 가정도 꾸리고 살겠죠? 언젠간 제 이야기가 당신에게 닿길 빕니다.
당신이 그때 나이트에서 약을 탄 술을 먹이고 범했던 여자는 너무 어렸어요, 집단적으로 일어난 범죄라 피해자가 한둘도 아니고.. 친어머니의 당시 마지막 기억에는 준호 라는 이름과 동갑이었다는 점.. 저 신분이 거짓일수도 있지만..
그리고 나한테 그랬던 범죄자,
꼭 망했으면 좋겠어요. 제 인생 환불도 못 받잖아요. 저 아직까지 이러고 있잖아요. 당신이 몇년형을 받고 몇억을 줘도 그 사건이 생기기 전 내 모습으로 죽어도 못돌아가요.
반성도 하지 마시고, 남은 인생 평생 동안 제가 겪은 거 절반이라도 겪으면서 오래오래 살라고 오늘도 기도합니다.
다들 두서없고 내용도 뒤죽박죽인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