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가난하여 중학교 때는 신문 배달, 고등학교 때는 가정교사로 이어갔고, 대학 때는 서울 종로에 있는 영수학원에서 대학입시 준비생들에게 수학과 영어를 가르치며 어렵게 대학을 졸업했다. 어려운 시험을 거쳐 첫번째 얻은 직장이 돈을 만드는 한국조폐공사였다. 본사는 서울 북창동에 있었고, 대전에는 조폐지와 담배종이를 만드는 공장이 있었으며 부산에는 인쇄공장이 있었다. 신문광고에 게재된 응시 자격에는 공대 졸업생 14명을 선발하여 미국에 보내 1년간 교육을 받는 다는 것이었다. 가난에 찌든 1960년대의 한국이란 경제적으로나 기술적 으로 보잘 것 없을 때라, 조폐공사의 기술사원으로 뽑혀 미국에 간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응시했을까 짐작이 간다…. 막상 14명 중 한 사람으로 뽑혀 입사하고 보니, 나를 포함해 서울대공대를 졸업한 사람이 5명, 기타 대학 졸업생이 3명, 그 이외의 6명은 고등학교도 안 나온 사람들이 끼어 있었다. 고등학교도 안 나온 사람들이 어떻게 공대 졸업생에 끼어서 입사했는지는 그 당시의 한국을 아는 사람이라면 짐작이 갈 것이다. 더욱이 깜짝 놀란 것은 모든 기계가 미제인데 미국에서 업무상의 편지가 오면 과장, 부장, 이사들은 그 영어편지의 아래와 위를 구분 못하는 일자 무식한 자들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였다. 말단에서 노동을 해야 하는 공대 졸업생이 생산에 필요한 약품이나 부속을 하나 사려면 계장부터 시작하여 이사까지 일일이 교육을 시켜야만 결재를 했다. 조폐공사의 생산 과장이라면 조폐지, 권년지 그리고 우표용지 등을 만드는데 전문가라야 하는데 그 때의 생산 과장, 그리고 그 위의 부장등은 외부에서 쌀장사 또는 새우젓 장사가 하루아침에 말단에서 노동을 해야만 하는 공대 졸업생들의 상급자로 둔갑한 것이다. 전부가 정치적 ‘빽’으로 들어 온 사람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빽’으로 들어 온 사람들 보다 위에 앉아서 그런 일자무식쟁이들을 과장이니 부장이니 이사니 하는 자리에 보직을 주는 위정자들이 전혀 애국심이 없는 사람 이라는데 화가 뻗쳐 죽을 지경 이었다. 그런 판국에 조폐공사의 계획이 바뀌어 새로 뽑은 14명을 미국으로 교육 보내는 대신 미국에서 엔지니어 세 명을 한국으로 초청, 한국에서 교육을 받기로 했다는 것이다. 세 사람의 미국 엔지니어들은 자가용을 타고 유성온천에 있는 호텔에서 출,퇴근을 했다. 1960년대에 대전에서 자가용을 가진 사람은 손꼽을 정도였고, 더구나 미국사람이 멋진 미국 자동차를 타는 모습은 선망의 대상이었을 때다. 미국 엔지니어들은 미국에서 조폐지를 만드는 기계의 도면 청사진을 산더미같이 비행기로 실어와 우리 14명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불행하게도 나와 지동범이란 대학 동창 두 사람 뿐이었다. 그러자 미국 엔지니어들은 조폐공사의 직책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기 시작 했다. 즉, 어떻게 된 관공서가 위로 갈수록 무식층의 사람들 이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최소한 자기들이 한국에서 머무는 일 년간은 조폐공사에 대한 모든 지시는 나를 통해서 하겠노라고 엄포를 놨다. 미국 엔지니어들은 농담 삼아 한국 조폐공사의 사장을 위시한 높은 간부들을 브이 아이 피(VIP)라고 불렀다. 브이 아이 피(VIP)란 흔히 매우 중요한 사람 (Very Important Person)을 의미하지만, 미국 엔지니어들의 한국의 고급 관리에 대한 브이 아이 피는 쓰레기 (Very Impossible Piece) 라는 것이었다. 재무부장관, 한국은행 총재등이 대전 공장에 내려 왔을 때는 브이 아이 피 (VIP) 는 만날 필요가 없다며 안 만나곤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게으름 피며 부정직한 사람과는 융합을 못하는 성격 이라서 고등학교도 안 나오고 14명의 공대 졸업생에 끼어들어 온 사람들을 멸시했고, 심하게 다룬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 것도 아닌데 공연히 미국 엔지니어들의 힘을 믿고 그들을 구박한 것은 잘못한 것이었다. 일 년 남짓 후 미국 엔지니어들은 미국으로 돌아 갔다. 조폐공사에서는 서울에서 사장과 간부들이 내려와 앞으로의 대책 회의 같은 것을 열었다. 나는 20대 초반의 젊은 혈기의 엔지니어 였다. 회의 도중 나는 손을 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한 후 “현재의 조폐공사의 직책을 거꾸로 바꾸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사장은 그 것이 무슨 의미냐고 묻자, 나는 “사장님과 이사님들 그리고 부장 및 과장들은 밑으로 내려와 노동을 해야 하고 기술이 있는 내가 사장을 해야겠습니다. 어찌하여 쌀장수가 빽이 있다 하여 갑자기 이사가 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생산부장이 되어 우리를 부릴 수 있습니까?” 라고 답했다. 그러자 주위는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 사실은 나도 떨고 있었다. 회의는 중단되었고 해산했다. 약 일주일 후 나는 ‘무능력자’ 그리고 ‘병역 기피자’ 라는 누명을 쓰고 파면을 당했다. 나는 그 때 나이로 시원하게 바른 말을 했다고 생각한 것이었지만, 부정부패와 싸울 힘은 없었다. 막상 파면을 당하고 나니 집은 가난하지, 당장 먹을 것은 없지, 생각다 못해 미국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당장 비행기표 살 돈도 없었다. 땅 속으로 깊숙이 꺼지는 것 같은 심정 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화병이었는지 다른 병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돌아 가시고 말았다. 형이 한전에서 벌어 오는 박봉에 점심은 굶는다 치더라도 아침과 저녁에 공짜 밥 먹는 것이 무척이나 괴로웠고 나는 큰 죄를 진 죄인같이 느껴졌다. 나는 한국을 떠나야 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영어 원서를 번역 해서 팔았고 친척들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구걸 하다시피하여 겨우 LA까지의 비행기표를 사고 나니 남은 돈은 겨우 45불이 채 안 되었다. 그것도 떠나는 날 남대문 시장에 가 달러 장사 아줌마에게서 바꾸는데 어떤 두 남자가 나의 손을 잡는 것 이었다. “경찰 입니다” 하더니 내 손에 수갑을 채우는 것 이었다. 생전 처음 당 하는 일 이었다. 그들은 나를 끌고 길 건너 한국은행 옆 파출소로 데려 갔다. 그러더니 수갑을 푼 후 호주머니에 있는 것을 전부 책상 위에 꺼내 놓으라고 명령 했다. 호주머니에서 여권이 나왔다 아무리 뒤져 봐도 헌 가방 속 에는 헌 옷과 바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사복 경찰 들은 여권을 훑어보며 미국으로 언제 떠나느냐고 묻기에 오늘 3시 비행기로 간다고 대답 했다. 그들은 돈 가진 것이 이것 뿐 이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 했다. 그들은 내가 몹시 불쌍했던 모양이었다. “이것 갖고 어떻게 가느냐 ?”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게 빨리 가라고 하며 나를 풀어 주었다. 일본에서 비행기를 갈아 타고 LA공항에 도착 하기는 했으나 친척이나 친구 하나 없는 신세 였다. 공항에서 어디를 가야 할 지 전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떤 남자에게 미국에서 가장 싼 숙소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기와 같은 버스를 타면, 내릴 곳을 가리켜 주겠노라 하여 같은 버스를 탔다. 그가 내리라는 곳에서 내렸다. 정처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걸었다. 눈에 띄는 사람들은 모두 흑인들 뿐 이었다. 서울에서 떠날 때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싸 주신 몇 가지 속옷과 작업복 바지와 잠바가 든 헌 가방을 들고 한참동안 걸었다. 그곳은 버몬트와 제퍼슨이라는 곳 이었다. 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흑인 노인에게 “가장 싼 숙소가 어디 있냐” 고 물었다. 그는 내가 서 있는 버몬트와 제퍼슨 코너에 있는 스리프티 드럭 스토어 (지금은 없어졌지만)의 이층으로 나를 안내 했다. 배가 불룩 나온 백인 할머니가 그 흑인 노인게게 고맙다며 1불 짜리 한 장을 주는 것이었다. 그 이층에는 열 개의 방이 있었다. 부엌도 변기도 없는 텅 빈 마루바닥에는 침대도 아닌 매트리스 한 장만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고 그 매트리스는 너무나 더러워서 손을 댈 수도 없었다. 그 심술궂게 생긴 할머니는 월세가 10불이라며 선불을 요구했다. 총 재산에서 20%가 넘는 10불을 주고 나니 무엇인가 압박감을 느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이 이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거지들이었다. 그 곳을 숙소로 정 한 후 아래층에 있는 가게에 내려가 계란을 부치는 후라이팬, 냄비, 전기 곤로, 기름 한병 그리고 담요 한 장을 샀다. 산 것들은 방에 갖다 놓고는 길 건너 정육점에 가서 소꼬리 6파운드를 1불 주고 사니, 소뼈는 언제든지 좋으니깐 와서 그냥 가져 가라는 것 이었다. 그래서 소뼈도 한 봉지 그냥 받았다. 그리고는 버몬트 길을 따라 북쪽으로 조금 가니 조그만 마켓이 있었다. 종이 봉지에 든 쌀 한 봉지를 샀다. 다시 숙소로 돌아 온 나는 소꼬리와 소뼈의 보관을 부탁 하기 위하여 염치 불구하고 열개의 방문을 하나씩 두들겨 갔다. 뜻 밖에도 그 중 한국아줌마를 만났다. 무척 반가웠다. 인사를 하고 사정을 얘기한 후 소꼬리와 소뼈의 보관을 부탁하니 자기는 냉장고가 있다며 맡아 주었다. 좀 염치가 없어 얼굴이 붉어 졌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하루종일 굶은지라 배가 무척 고팠다. 저녁이 되자 맡긴 소꼬리 6파운드 중 1파운드 정도와 한 주먹의 뼈를 찾아와 쌀과 물을 냄비에 넣고 마구 끓였다. 음식 만드는 경험이 없던 나는 밥인지 죽인지 마치 개죽 같은 것을 먹고는 그 더럽고 냄새나는 매트리스에 누워 새로 산 담요를 덮고 잤다. 아침에 일어 나서 전날 저녁에 먹다 남은 개죽 같은 것 으로 요기를 했다. 정신을 차리고 남은 돈을 세어보니 17불과 잔돈이 남아 있었다. 초조하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17불 중 15불만은 비상금으로 절대로 쓰면 안 된다고 결심 했다. 그 때가 지금 부터 39년 전 이니깐 한국 사람은 전혀 볼 수가 없을 때다. 우선 무엇 인가 하여 돈을 벌어야 하겠기에 그 거지 아파트의 주인 할머니 에게 물었더니 9번 버스를 타고 브로드웨이에 가면 직업소개소가 많으니 거기에 가보라고 하였다. 거리를 물으니 3마일 정도 된다고 했다. 버스값이 10센트였으나 1센트가 아까워 길을 물어 가며 걸어서 브로드웨이 까지 갔다. 어느 직업소개소에 들어 가서 신청서에 한국에서의 중, 고등학교와 대학 졸업 까지 적었다. 그 때 나는 너무 바보 였다. 한국에서 입고 온 단벌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일을 찾으러 다녔으니 말이다. 때는 신분을 묻지 않고 사회 보장번호를 그냥 줄 때 였기에 근처의 사무실에 가서 금방 받을 수가 있었다. 사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왔다지만 직업소개소에서 무엇을 할 줄 아느냐고 물으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직업소개소에서 가라는 곳에 바보 같이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찾아가니 두 군데서 전부 써 주질 않았다. 미주중앙신인문학상 당선작 <거지의 꿈 - 이중희> 중에서
거지의 꿈 <1>
집이 가난하여 중학교 때는 신문 배달, 고등학교 때는 가정교사로
이어갔고, 대학 때는 서울 종로에 있는 영수학원에서 대학입시
준비생들에게 수학과 영어를 가르치며 어렵게 대학을 졸업했다.
어려운 시험을 거쳐 첫번째 얻은 직장이 돈을 만드는 한국조폐공사였다.
본사는 서울 북창동에 있었고, 대전에는 조폐지와 담배종이를 만드는
공장이 있었으며 부산에는 인쇄공장이 있었다. 신문광고에 게재된 응시
자격에는 공대 졸업생 14명을 선발하여 미국에 보내 1년간 교육을 받는
다는 것이었다. 가난에 찌든 1960년대의 한국이란 경제적으로나 기술적
으로 보잘 것 없을 때라, 조폐공사의 기술사원으로 뽑혀 미국에 간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응시했을까 짐작이 간다….
막상 14명 중 한 사람으로 뽑혀 입사하고 보니, 나를 포함해 서울대공대를
졸업한 사람이 5명, 기타 대학 졸업생이 3명, 그 이외의 6명은 고등학교도
안 나온 사람들이 끼어 있었다. 고등학교도 안 나온 사람들이 어떻게 공대
졸업생에 끼어서 입사했는지는 그 당시의 한국을 아는 사람이라면 짐작이
갈 것이다.
더욱이 깜짝 놀란 것은 모든 기계가 미제인데 미국에서 업무상의 편지가
오면 과장, 부장, 이사들은 그 영어편지의 아래와 위를 구분 못하는 일자
무식한 자들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였다. 말단에서 노동을 해야 하는 공대
졸업생이 생산에 필요한 약품이나 부속을 하나 사려면 계장부터 시작하여
이사까지 일일이 교육을 시켜야만 결재를 했다.
조폐공사의 생산 과장이라면 조폐지, 권년지 그리고 우표용지 등을
만드는데 전문가라야 하는데 그 때의 생산 과장, 그리고 그 위의 부장등은
외부에서 쌀장사 또는 새우젓 장사가 하루아침에 말단에서 노동을 해야만
하는 공대 졸업생들의 상급자로 둔갑한 것이다. 전부가 정치적 ‘빽’으로
들어 온 사람들이었다. 생각해 보면 ‘빽’으로 들어 온 사람들 보다 위에
앉아서 그런 일자무식쟁이들을 과장이니 부장이니 이사니 하는 자리에
보직을 주는 위정자들이 전혀 애국심이 없는 사람 이라는데 화가 뻗쳐
죽을 지경 이었다.
그런 판국에 조폐공사의 계획이 바뀌어 새로 뽑은 14명을 미국으로 교육
보내는 대신 미국에서 엔지니어 세 명을 한국으로 초청, 한국에서 교육을
받기로 했다는 것이다.
세 사람의 미국 엔지니어들은 자가용을 타고 유성온천에 있는 호텔에서
출,퇴근을 했다. 1960년대에 대전에서 자가용을 가진 사람은 손꼽을 정도였고,
더구나 미국사람이 멋진 미국 자동차를 타는 모습은 선망의 대상이었을 때다.
미국 엔지니어들은 미국에서 조폐지를 만드는 기계의 도면 청사진을
산더미같이 비행기로 실어와 우리 14명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불행하게도 나와 지동범이란 대학 동창 두
사람 뿐이었다. 그러자 미국 엔지니어들은 조폐공사의 직책에 대한 불만을
털어 놓기 시작 했다.
즉, 어떻게 된 관공서가 위로 갈수록 무식층의 사람들 이냐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최소한 자기들이 한국에서 머무는 일 년간은 조폐공사에 대한
모든 지시는 나를 통해서 하겠노라고 엄포를 놨다.
미국 엔지니어들은 농담 삼아 한국 조폐공사의 사장을 위시한 높은
간부들을 브이 아이 피(VIP)라고 불렀다. 브이 아이 피(VIP)란 흔히 매우
중요한 사람 (Very Important Person)을 의미하지만, 미국 엔지니어들의
한국의 고급 관리에 대한 브이 아이 피는 쓰레기 (Very Impossible Piece)
라는 것이었다.
재무부장관, 한국은행 총재등이 대전 공장에 내려 왔을 때는 브이 아이 피
(VIP) 는 만날 필요가 없다며 안 만나곤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게으름 피며 부정직한 사람과는 융합을 못하는 성격
이라서 고등학교도 안 나오고 14명의 공대 졸업생에 끼어들어 온
사람들을 멸시했고, 심하게 다룬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 것도
아닌데 공연히 미국 엔지니어들의 힘을 믿고 그들을 구박한 것은 잘못한
것이었다.
일 년 남짓 후 미국 엔지니어들은 미국으로 돌아 갔다. 조폐공사에서는
서울에서 사장과 간부들이 내려와 앞으로의 대책 회의 같은 것을 열었다.
나는 20대 초반의 젊은 혈기의 엔지니어 였다. 회의 도중 나는 손을 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한 후
“현재의 조폐공사의 직책을 거꾸로 바꾸어야 합니다” 라고 말했다.
사장은 그 것이 무슨 의미냐고 묻자, 나는 “사장님과 이사님들 그리고
부장 및 과장들은 밑으로 내려와 노동을 해야 하고 기술이 있는 내가
사장을 해야겠습니다. 어찌하여 쌀장수가 빽이 있다 하여 갑자기
이사가 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생산부장이 되어 우리를 부릴 수
있습니까?” 라고 답했다. 그러자 주위는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
사실은 나도 떨고 있었다. 회의는 중단되었고 해산했다. 약 일주일 후
나는 ‘무능력자’ 그리고 ‘병역 기피자’ 라는 누명을 쓰고 파면을 당했다.
나는 그 때 나이로 시원하게 바른 말을 했다고 생각한 것이었지만,
부정부패와 싸울 힘은 없었다.
막상 파면을 당하고 나니 집은 가난하지, 당장 먹을 것은 없지, 생각다
못해 미국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당장 비행기표 살 돈도
없었다. 땅 속으로 깊숙이 꺼지는 것 같은 심정 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는 화병이었는지 다른 병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돌아 가시고 말았다. 형이 한전에서 벌어 오는 박봉에 점심은
굶는다 치더라도 아침과 저녁에 공짜 밥 먹는 것이 무척이나 괴로웠고
나는 큰 죄를 진 죄인같이 느껴졌다.
나는 한국을 떠나야 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영어 원서를 번역
해서 팔았고 친척들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구걸 하다시피하여 겨우
LA까지의 비행기표를 사고 나니 남은 돈은 겨우 45불이 채 안 되었다.
그것도 떠나는 날 남대문 시장에 가 달러 장사 아줌마에게서 바꾸는데
어떤 두 남자가 나의 손을 잡는 것 이었다. “경찰 입니다” 하더니 내 손에
수갑을 채우는 것 이었다.
생전 처음 당 하는 일 이었다. 그들은 나를 끌고 길 건너 한국은행 옆
파출소로 데려 갔다. 그러더니 수갑을 푼 후 호주머니에 있는 것을 전부
책상 위에 꺼내 놓으라고 명령 했다. 호주머니에서 여권이 나왔다 아무리
뒤져 봐도 헌 가방 속 에는 헌 옷과 바지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 사복
경찰 들은 여권을 훑어보며 미국으로 언제 떠나느냐고 묻기에 오늘 3시
비행기로 간다고 대답 했다. 그들은 돈 가진 것이 이것 뿐 이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 했다. 그들은 내가 몹시 불쌍했던 모양이었다. “이것 갖고
어떻게 가느냐 ?”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게 빨리 가라고 하며 나를 풀어
주었다.
일본에서 비행기를 갈아 타고 LA공항에 도착 하기는 했으나 친척이나
친구 하나 없는 신세 였다. 공항에서 어디를 가야 할 지 전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어떤 남자에게 미국에서 가장 싼 숙소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자기와 같은 버스를 타면, 내릴 곳을 가리켜 주겠노라 하여 같은
버스를 탔다.
그가 내리라는 곳에서 내렸다. 정처 없이 발길 가는 대로 걸었다.
눈에 띄는 사람들은 모두 흑인들 뿐 이었다. 서울에서 떠날 때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싸 주신 몇 가지 속옷과 작업복 바지와 잠바가 든 헌 가방을
들고 한참동안 걸었다. 그곳은 버몬트와 제퍼슨이라는 곳 이었다. 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흑인 노인에게 “가장 싼 숙소가 어디 있냐” 고 물었다.
그는 내가 서 있는 버몬트와 제퍼슨 코너에 있는 스리프티 드럭 스토어
(지금은 없어졌지만)의 이층으로 나를 안내 했다.
배가 불룩 나온 백인 할머니가 그 흑인 노인게게 고맙다며 1불 짜리
한 장을 주는 것이었다. 그 이층에는 열 개의 방이 있었다. 부엌도 변기도
없는 텅 빈 마루바닥에는 침대도 아닌 매트리스 한 장만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고 그 매트리스는 너무나 더러워서 손을 댈 수도 없었다.
그 심술궂게 생긴 할머니는 월세가 10불이라며 선불을 요구했다.
총 재산에서 20%가 넘는 10불을 주고 나니 무엇인가 압박감을 느꼈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이 이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거지들이었다.
그 곳을 숙소로 정 한 후 아래층에 있는 가게에 내려가 계란을 부치는
후라이팬, 냄비, 전기 곤로, 기름 한병 그리고 담요 한 장을 샀다. 산 것들은
방에 갖다 놓고는 길 건너 정육점에 가서 소꼬리 6파운드를 1불 주고 사니,
소뼈는 언제든지 좋으니깐 와서 그냥 가져 가라는 것 이었다. 그래서 소뼈도
한 봉지 그냥 받았다. 그리고는 버몬트 길을 따라 북쪽으로 조금 가니 조그만
마켓이 있었다. 종이 봉지에 든 쌀 한 봉지를 샀다.
다시 숙소로 돌아 온 나는 소꼬리와 소뼈의 보관을 부탁 하기 위하여 염치
불구하고 열개의 방문을 하나씩 두들겨 갔다. 뜻 밖에도 그 중 한국아줌마를
만났다. 무척 반가웠다. 인사를 하고 사정을 얘기한 후 소꼬리와 소뼈의 보관을
부탁하니 자기는 냉장고가 있다며 맡아 주었다. 좀 염치가 없어 얼굴이 붉어
졌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하루종일 굶은지라 배가 무척 고팠다. 저녁이 되자 맡긴 소꼬리 6파운드
중 1파운드 정도와 한 주먹의 뼈를 찾아와 쌀과 물을 냄비에 넣고 마구
끓였다. 음식 만드는 경험이 없던 나는 밥인지 죽인지 마치 개죽 같은 것을
먹고는 그 더럽고 냄새나는 매트리스에 누워 새로 산 담요를 덮고 잤다.
아침에 일어 나서 전날 저녁에 먹다 남은 개죽 같은 것 으로 요기를 했다.
정신을 차리고 남은 돈을 세어보니 17불과 잔돈이 남아 있었다. 초조하고
걱정이 태산 같았다. 17불 중 15불만은 비상금으로 절대로 쓰면 안 된다고
결심 했다. 그 때가 지금 부터 39년 전 이니깐 한국 사람은 전혀 볼 수가
없을 때다.
우선 무엇 인가 하여 돈을 벌어야 하겠기에 그 거지 아파트의 주인 할머니
에게 물었더니 9번 버스를 타고 브로드웨이에 가면 직업소개소가 많으니
거기에 가보라고 하였다. 거리를 물으니 3마일 정도 된다고 했다. 버스값이
10센트였으나 1센트가 아까워 길을 물어 가며 걸어서 브로드웨이 까지 갔다.
어느 직업소개소에 들어 가서 신청서에 한국에서의 중, 고등학교와 대학
졸업 까지 적었다. 그 때 나는 너무 바보 였다. 한국에서 입고 온 단벌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일을 찾으러 다녔으니 말이다. 때는 신분을 묻지 않고
사회 보장번호를 그냥 줄 때 였기에 근처의 사무실에 가서 금방 받을 수가
있었다. 사실 한국에서 대학을 나왔다지만 직업소개소에서 무엇을 할 줄
아느냐고 물으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직업소개소에서 가라는 곳에 바보 같이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찾아가니
두 군데서 전부 써 주질 않았다.
미주중앙신인문학상 당선작 <거지의 꿈 - 이중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