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보연아!” “무슨 일이야? 언니 뛰어왔어?” “나 너한테 부탁이 있어.” 숨을 헐떡대며 말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다급해 보이겠지.’ “뭔데 이렇게 급해.” “내가 모시는 할아버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겠어. 네가 좀 도와줘.”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언니가 모시는 신에 대해 언니도 잘 몰라?” “응. 정말 급한 일이야. 나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구.” “나 지금 피곤한데.” 보연이는 뭘 그런 일로 그러냐는 듯 얼굴을 찌푸려 보였다. “원하는 게 뭐야?” 이미 보연양에게 적응한 혜림양. 보연이는 그제야 나이에 걸맞는 환한 미소를 보였다. “여름 샌달.” “알았어.” “나연이 것두.” 우애 좋음을 이상한 곳에서 과시하고 있었다. “알았어. 지금 해줄 거지?” 보연이의 손목을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보연이는 진짜 피곤했던 모양인지 집중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일분 일초가 다급한 내게 그 시간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보연이의 얼굴만을 응시한 채 입을 떼기만을 기다렸다. 집중할 때의 표정만큼은 비스크 인형처럼 차갑고 무표정한 것이 조금은 무섭기까지 했다. “이름이 키노모토 다케다.” ‘드디어 말을 하는군. 아까 키노모토 어쩌구 하더니 그게 할아버지의 성이였구나.’ “죽은 지는 한 50년쯤 됐어.” ‘어떻게 저렇게 잘 알까?’ 보연이의 능력이 같은 일을 하는 나에게도 무척이나 신기하게 여겨졌다. “음.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네. 일본사람?” “응. 일본 할아버지야. 왜 한국에 왔대? 무슨 이유로?” 알아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면서도 자꾸 재촉을 하게 됐다. “잠시만. 지금 물어보는 중이야.” 아까보다는 복잡한 질문이라 더욱 정신 집중이 요구되는 모양이었다. 무표정했던 보연이는 힘이 드는지 표정이 약간은 힘든 표정으로 바뀌었다. “언니! 할아버지가 영상을 보내주려나봐. 언니도 집중해봐. 아마 보일 거야.” 나도 곧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보내주는 영상을 보연이와 함께 받았다. 크지 않지만 고급 장식품들로 가득한 방.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상석에 젊은 다케다씨는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있다. 무슨 중요한 얘기인지 목소리가 크지 않게 조곤조곤 말을 하고 있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다케다씨. 할아버지는 뭔가가 적힌 종이를 건네고 그것을 받아든 다케다씨는 여러 차례 읽은 후에 종이를 촛불에 태워버린다. “한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대.” “무슨 일로?” “저 할아버지는 키노모토 가문의 종주래. 종주분에게 명령을 받았대. 한국에 가라고. 가서 민태식을 만나라고.” ‘종주라면 종갓집 큰 어른 정도 되는 건가.’ 사실 나에게도 할아버지의 웅얼거림은 들리고 있었지만 해석을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일본말인 것 같은데. 아니 그럼 보연이가 일본말을 한단 말인가?’ “너 일본어도 할 줄 아는 거야?” “응. 조금. 일본어는 나연이 전문인데. 나는 중국어를 더 잘하고.” ‘대단한 아이네. 잘난 척에도 이유가 있었구나. 나는 저 나이 때 뭐했더라? 매일 집에서 텔레비전보고 미진이랑 수다 떨고 주리랑 떡볶이 만들어 먹은 게 다구나.’ 바다에 큰 배가 떠 있는 것으로 보아 항구인 듯싶다. 배에 오르는 사람들 그들을 환송하는 사람들. 항구는 매우 시끄럽고 혼잡하다. 혼잡한 인파를 헤치고 다케다씨와 다케다의 일행인 듯한 젊은 청년도 함께 배에 오른다. “자기는 한국말을 못했대. 그래서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데리고 갔나봐. 그 사람은 통역만 할 뿐 왜 한국에 가는 지는 몰랐나봐.” ‘어째 좀 약하게 생겼더라니. 통역사일 뿐이었구나.’ 배안인가보다. 배안은 몹시도 흔들리고 있다. 사람들이 빽빽이 자리를 메우고 있는 선실은 어둡고 음산하다. 아까 그 젊은 청년은 배멀미를 몹시 심하게 하는지 꽤 힘든 표정이다. 결국 토악질까지 한다. [히무라!] 다케다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히무라라는 청년을 쳐다보았다. 코를 쥐어막는 주변의 사람들. “이건 말로 안 해줘도 되지?” “응.” “너무 고생스런 여행길이었대.” 낯익은 배경, 낯익은 옷차림. 히무라와 다케다는 한국에 도착한 모양이다. 히무라의 얼굴은 마치 시체 같았다. 다케다는 히무라를 부축하며 배에서 내린다. “한국에 막 도착했을 땐가봐?” 내가 물었다. 이제 조금씩 이해가 되고 있었다. “응.” 보연이가 대답했다. 작은방. 다케다씨는 자고 일어나 히무라부터 살핀다. 그런데 히무라는 흔들어도 아무 반응이 없다. 부들 부들 몸을 떠는 다케다. 당황하는 기색과 분노어린 표정이 교차한다. “그 남자가 죽어서 너무 화가 났대.” 더 이상은 없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자기 가문에서 특사로 보내진 것이었다. 그러다가 암살은 실패하고. “언니 나 피곤해서 더 이상은 못하겠어. 오늘은 그만하자.” “그래.” 애써준 보연이가 너무도 고마웠다. 샌달 두개가 아니라 마음 같아선 반바지 두벌 정도 더 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민태식이라는 사람부터 누군지 알아야겠군.’ 화가 나서 돌아갔던 수암이 돌아왔다.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며 하루를 더 묵고 가지고 했다. 하지만 일찍 돌아가는 것이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색하기만 한 하루였다. 사람들도 나처럼 수암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는지 수암의 농담에도 잘 웃지 않았다. 저녁을 먹은 후에 텔레비전을 보던 사람들은 하나둘 방으로 돌아갔고, 나도 곧 잠자리에 들었다. 옆에 있는 숙희 언니는 피곤했는지 금방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나도 어서 자야하는데.’ 그러나 머리가 복잡해서일까 쉽게 잠은 와주지 않았다. ‘너무 예민해졌나봐. 우선은 건강부터 챙겨야하는데. 그래야 멀대를 도울 수 있지.’ 잠을 청하기 위해 양을 세보기로 했다. ‘양 하나 나 하나. 그게 아닌가?’ 양 한 마리가 울타리를 넘는다. 두 번째 비쩍 마른 양이 울타리를 넘는다. 세 번째 장이 안 좋아 변비 걸린 양이 울타리를 넘는다. ‘그러길래 양주제에 풀이나 먹지 왜 남이 먹던 숏다리는 뺏어 먹니?’ 사백 예순 일곱 번째 양은 겁이 많아 울타리를 넘지 못한다. ‘자 넘어. 넌 할 수 있어.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모양이네. 유 캔 두 잇! 두 유어 베스트! 오케이 컴 온! 컴 온!’ 여전히 울타리를 넘지 못하는 사백 예순 일곱 번째 양이 한마디했다. “수미마셍1).” ‘뭐라는 거야? 아니 쟤도 일본 양? 잠이 안 오니 별 잡생각이 다 드네.’ 언제 잠이 든 것일까? 눈을 뜨자 한방에 자고 있던 숙희 언니는 자신의 잠자리를 정리 하고 있었다. “언니 몇 시야?” “일곱시. 조금 더 자도 돼.” 다시 이불 속에 몸을 파묻었지만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곧 잠자리를 정리 했다. 9-4 아침 9시. 수암과 수련생들 모두 남자 숙소로 모였다. 우리는 어제 콘도를 2개 빌려 남자들과 여자들로 나누어서 따로 잠을 잤고, 방이 두개인 콘도라 나와 숙희 언니 그리고 다른 방에는 쌍둥이 둘이 잠을 잔 것이다. 여자들은 나름대로 잘 쉰 듯한 표정이었지만 영민씨와 수암은 눈 밑이 까맣고 잠을 못 잔 사람들처럼 눈도 충혈 되어 있었다. 혹시 야한 거라도 봤나? 잠시 이상한 상상을 해보았다. 수암은 근처에 인사드릴 곳이 있어 오후에나 올 수 있다며 자기가 돌아와서 출발하자고 했다. 운전을 하는 숙희 언니와 영민씨는 장을 보러 가기로 하였다. 수암이 출발하고 나서 쌍둥이들은 샌달을 사러 가야 한다며 나에게 돈을 받아 가지고는 숙희 언니를 따라 시내로 나갔다. 결국 나 혼자 있게 된 것이다. ‘심심한데 멀대한테 전화나 해봐야겠다.’ 콘도앞 벤치에서 멀대를 만나기로 만나 멀대의 농담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괜히 웃으면서 멀대를 툭툭치는 오버를 보이며 친한 척도 했다. ‘나 왜 이러지? 아직 멀대에 대한 마음 정리가 안 된 건가?’ 한참 웃고 떠들고 있는데 오후 5시쯤에나 온다던 수암이 예정보다 일찍 돌아왔다. “혼자 있었어?” “왜 혼자야. 여봉이 있잖아.” ‘내가 말 실수를 한 모양이네.’ 수암의 표정이 순간 흐려졌다. “어서 가자.” “어딜?” “서울 가야지.”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일단 우리부터 가자. 알아서들 오라고 하면 돼지.” ‘짜증 돌이가 따로 없군. 자기한테 안 맞으면 팩팩 토라져 버리네.’ “꼭 그래야 해? 사람들이랑 같이 가지.” “빨리 짐 챙겨 나와.” “서울 가는 거에요? 나도 지금 가려던 참인데 좀 태워주세요.” 멀대가 눈치도 없이 끼어들었다. “서울 안가요. 우리 속초 갈 거에요.” ‘웬 속초?’ “서울 간다면서?” “지금 생각이 바꿨어. 수련생들한테 미안한 것도 있고. 여기까지 온 김에 바다 구경 좀 하고 가지.” ‘짜증에 변덕까지. 곱게 자라면 다 저러는 건가?’ “그래요? 나도 바다 보고 싶었는데 잘 됐네요.” 멀대의 말은 듣지도 않고, 수암은 내 손을 잡고 끌고 가버렸다. ‘아무리 화가 나도 이건 너무하잖아.’ 속초로 향하는 수암의 운전은 꽤나 거칠었다. “걔는 왜 홍천에 온 거야? 네가 말했어?” “아니야. 아는 형이 그 콘도에 일을 해서 놀러왔대.” “거짓말.” “무슨 거짓말이라고 그래.” “형 보러 온 놈이 왜 여관에 묵냐?” “여관?” “내가 봤다구. 거기서 묵는 것 같던데.” “그럴 수도 있지.” “남자 혼자? 형 때문에 왔다면 콘도에 묵거나 형 집에 묵거나 하는 게 정상이지. 널 보러 온 거라고. 넌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 ‘내가 눈치가 없다고?’ 잔뜩 화가 난 수암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수암이 멀대가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내가 멀대와 즐겁게 떠들고 있는 모습에 질투를 느껴서 일 것이다. 좋아하니까 그런 거겠지 이해하자 마음을 먹었다. “오해 하지마. 우린 그냥 친구야.” 멀대가 내게 주연인 친구일 뿐이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멀대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수암도 화가 많이 풀린 듯 보였다. 분위기가 완화되자 나의 머릿속은 곧 풀지 못한 여러 가지 의문들로 가득차갔다. ‘일단 숙희 언니와 관련된 일부터 물어볼까?’ “오빠, 숙희 언니있잖아. 그 민영효네 집하고는 무슨 사이야?” “숙희씨? 민영효 외손녀야.” 다행히도 수암은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아는 척 할 순간은 놓치지 않는군. 참 단순하단 말이야.’ “그럼 숙희 언니 엄마의 아빠가 민영효?” 다시금 쉬운 말로 확인하는 혜림이. “응.” “그 집하고 사이좋지 않다면서? 저기 무슨 파벌 싸움 하듯이 파가 나뉜 게 아니었어? 어떻게 숙희 언니를 제자로 받아주게 된 거야?” “숙희씨는 실은 민영효와 그다지 상관은 없어. 외손녀이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숙희씨 능력은 탁월했는데 키워줄 생각은 안했나봐. 자기 직계 장손인 월산이 있잖아. 민영효 친손자. 그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이건 무슨 쪽수 싸움도 아니고 사람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잖아.” ‘오빠는 민태식이란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있을까?’ “그럼 오빠 혹시 민태식이란 사람은 알아? 옛날 사람이야. 나이가 많이 들어서 이미 죽은 사람인 것 같고.” “그쪽 집안이랑 관련된 사람이야?” “그건 몰라. 나도. 암튼 우리처럼 신을 받은 사람 같았고 산속에서 공부를 하길래. 그리고 민씨성이 흔한 것은 아니잖아.” “어떻게 알게 된 사람인데?” “할아버지가 과거를 보여주다가.” 할아버지가 민가네 일족에 원한이 있다는 것, 멀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잠깐만. 민태식. 민태식. 민태식이라.” 오빠는 뭔가가 떠오르는 듯 이름을 되뇌었다. “그 사람 옛날 사람이라면 흑술의 창시자 같은데.” “흑술의 창시자?” “민영효의 아버지.” 머리가 띵해지면서도 막혀있던 것이 풀리는 것 같았다.
45. 꿀꿀이 바구미 - 구 [심령청춘물]처녀도사
9-3
“보연아!”
“무슨 일이야? 언니 뛰어왔어?”
“나 너한테 부탁이 있어.”
숨을 헐떡대며 말했다.
‘이 정도는 되어야 다급해 보이겠지.’
“뭔데 이렇게 급해.”
“내가 모시는 할아버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겠어. 네가 좀 도와줘.”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언니가 모시는 신에 대해 언니도 잘 몰라?”
“응. 정말 급한 일이야. 나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구.”
“나 지금 피곤한데.”
보연이는 뭘 그런 일로 그러냐는 듯 얼굴을 찌푸려 보였다.
“원하는 게 뭐야?”
이미 보연양에게 적응한 혜림양.
보연이는 그제야 나이에 걸맞는 환한 미소를 보였다.
“여름 샌달.”
“알았어.”
“나연이 것두.”
우애 좋음을 이상한 곳에서 과시하고 있었다.
“알았어. 지금 해줄 거지?”
보연이의 손목을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보연이는 진짜 피곤했던 모양인지 집중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일분 일초가 다급한 내게 그 시간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보연이의 얼굴만을 응시한 채 입을 떼기만을 기다렸다.
집중할 때의 표정만큼은 비스크 인형처럼 차갑고 무표정한 것이 조금은 무섭기까지 했다.
“이름이 키노모토 다케다.”
‘드디어 말을 하는군. 아까 키노모토 어쩌구 하더니 그게 할아버지의 성이였구나.’
“죽은 지는 한 50년쯤 됐어.”
‘어떻게 저렇게 잘 알까?’
보연이의 능력이 같은 일을 하는 나에게도 무척이나 신기하게 여겨졌다.
“음.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네. 일본사람?”
“응. 일본 할아버지야. 왜 한국에 왔대? 무슨 이유로?”
알아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면서도 자꾸 재촉을 하게 됐다.
“잠시만. 지금 물어보는 중이야.”
아까보다는 복잡한 질문이라 더욱 정신 집중이 요구되는 모양이었다.
무표정했던 보연이는 힘이 드는지 표정이 약간은 힘든 표정으로 바뀌었다.
“언니! 할아버지가 영상을 보내주려나봐. 언니도 집중해봐. 아마 보일 거야.”
나도 곧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보내주는 영상을 보연이와 함께 받았다.
크지 않지만 고급 장식품들로 가득한 방.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할아버지가 상석에 젊은 다케다씨는 그 앞에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있다.
무슨 중요한 얘기인지 목소리가 크지 않게 조곤조곤 말을 하고 있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다케다씨.
할아버지는 뭔가가 적힌 종이를 건네고 그것을 받아든 다케다씨는 여러 차례 읽은 후에 종이를 촛불에 태워버린다.
“한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대.”
“무슨 일로?”
“저 할아버지는 키노모토 가문의 종주래. 종주분에게 명령을 받았대. 한국에 가라고. 가서 민태식을 만나라고.”
‘종주라면 종갓집 큰 어른 정도 되는 건가.’
사실 나에게도 할아버지의 웅얼거림은 들리고 있었지만 해석을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일본말인 것 같은데. 아니 그럼 보연이가 일본말을 한단 말인가?’
“너 일본어도 할 줄 아는 거야?”
“응. 조금. 일본어는 나연이 전문인데. 나는 중국어를 더 잘하고.”
‘대단한 아이네. 잘난 척에도 이유가 있었구나. 나는 저 나이 때 뭐했더라? 매일 집에서 텔레비전보고 미진이랑 수다 떨고 주리랑 떡볶이 만들어 먹은 게 다구나.’
바다에 큰 배가 떠 있는 것으로 보아 항구인 듯싶다.
배에 오르는 사람들 그들을 환송하는 사람들.
항구는 매우 시끄럽고 혼잡하다.
혼잡한 인파를 헤치고 다케다씨와 다케다의 일행인 듯한 젊은 청년도 함께 배에 오른다.
“자기는 한국말을 못했대. 그래서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데리고 갔나봐. 그 사람은 통역만 할 뿐 왜 한국에 가는 지는 몰랐나봐.”
‘어째 좀 약하게 생겼더라니. 통역사일 뿐이었구나.’
배안인가보다.
배안은 몹시도 흔들리고 있다.
사람들이 빽빽이 자리를 메우고 있는 선실은 어둡고 음산하다.
아까 그 젊은 청년은 배멀미를 몹시 심하게 하는지 꽤 힘든 표정이다.
결국 토악질까지 한다.
[히무라!]
다케다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히무라라는 청년을 쳐다보았다.
코를 쥐어막는 주변의 사람들.
“이건 말로 안 해줘도 되지?”
“응.”
“너무 고생스런 여행길이었대.”
낯익은 배경, 낯익은 옷차림.
히무라와 다케다는 한국에 도착한 모양이다.
히무라의 얼굴은 마치 시체 같았다.
다케다는 히무라를 부축하며 배에서 내린다.
“한국에 막 도착했을 땐가봐?”
내가 물었다.
이제 조금씩 이해가 되고 있었다.
“응.”
보연이가 대답했다.
작은방.
다케다씨는 자고 일어나 히무라부터 살핀다.
그런데 히무라는 흔들어도 아무 반응이 없다.
부들 부들 몸을 떠는 다케다.
당황하는 기색과 분노어린 표정이 교차한다.
“그 남자가 죽어서 너무 화가 났대.”
더 이상은 없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자기 가문에서 특사로 보내진 것이었다.
그러다가 암살은 실패하고.
“언니 나 피곤해서 더 이상은 못하겠어. 오늘은 그만하자.”
“그래.”
애써준 보연이가 너무도 고마웠다.
샌달 두개가 아니라 마음 같아선 반바지 두벌 정도 더 사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민태식이라는 사람부터 누군지 알아야겠군.’
화가 나서 돌아갔던 수암이 돌아왔다.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며 하루를 더 묵고 가지고 했다.
하지만 일찍 돌아가는 것이 나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색하기만 한 하루였다.
사람들도 나처럼 수암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는지 수암의 농담에도 잘 웃지 않았다.
저녁을 먹은 후에 텔레비전을 보던 사람들은 하나둘 방으로 돌아갔고, 나도 곧 잠자리에 들었다. 옆에 있는 숙희 언니는 피곤했는지 금방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나도 어서 자야하는데.’
그러나 머리가 복잡해서일까 쉽게 잠은 와주지 않았다.
‘너무 예민해졌나봐. 우선은 건강부터 챙겨야하는데. 그래야 멀대를 도울 수 있지.’
잠을 청하기 위해 양을 세보기로 했다.
‘양 하나 나 하나. 그게 아닌가?’
양 한 마리가 울타리를 넘는다.
두 번째 비쩍 마른 양이 울타리를 넘는다.
세 번째 장이 안 좋아 변비 걸린 양이 울타리를 넘는다.
‘그러길래 양주제에 풀이나 먹지 왜 남이 먹던 숏다리는 뺏어 먹니?’
사백 예순 일곱 번째 양은 겁이 많아 울타리를 넘지 못한다.
‘자 넘어. 넌 할 수 있어.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모양이네. 유 캔 두 잇! 두 유어 베스트! 오케이 컴 온! 컴 온!’
여전히 울타리를 넘지 못하는 사백 예순 일곱 번째 양이 한마디했다.
“수미마셍1).”
‘뭐라는 거야? 아니 쟤도 일본 양? 잠이 안 오니 별 잡생각이 다 드네.’
언제 잠이 든 것일까?
눈을 뜨자 한방에 자고 있던 숙희 언니는 자신의 잠자리를 정리 하고 있었다.
“언니 몇 시야?”
“일곱시. 조금 더 자도 돼.”
다시 이불 속에 몸을 파묻었지만 할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곧 잠자리를 정리 했다.
9-4
아침 9시. 수암과 수련생들 모두 남자 숙소로 모였다.
우리는 어제 콘도를 2개 빌려 남자들과 여자들로 나누어서 따로 잠을 잤고, 방이 두개인 콘도라 나와 숙희 언니 그리고 다른 방에는 쌍둥이 둘이 잠을 잔 것이다.
여자들은 나름대로 잘 쉰 듯한 표정이었지만 영민씨와 수암은 눈 밑이 까맣고 잠을 못 잔 사람들처럼 눈도 충혈 되어 있었다.
혹시 야한 거라도 봤나?
잠시 이상한 상상을 해보았다.
수암은 근처에 인사드릴 곳이 있어 오후에나 올 수 있다며 자기가 돌아와서 출발하자고 했다.
운전을 하는 숙희 언니와 영민씨는 장을 보러 가기로 하였다.
수암이 출발하고 나서 쌍둥이들은 샌달을 사러 가야 한다며 나에게 돈을 받아 가지고는 숙희 언니를 따라 시내로 나갔다.
결국 나 혼자 있게 된 것이다.
‘심심한데 멀대한테 전화나 해봐야겠다.’
콘도앞 벤치에서 멀대를 만나기로 만나 멀대의 농담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괜히 웃으면서 멀대를 툭툭치는 오버를 보이며 친한 척도 했다.
‘나 왜 이러지? 아직 멀대에 대한 마음 정리가 안 된 건가?’
한참 웃고 떠들고 있는데 오후 5시쯤에나 온다던 수암이 예정보다 일찍 돌아왔다.
“혼자 있었어?”
“왜 혼자야. 여봉이 있잖아.”
‘내가 말 실수를 한 모양이네.’
수암의 표정이 순간 흐려졌다.
“어서 가자.”
“어딜?”
“서울 가야지.”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일단 우리부터 가자. 알아서들 오라고 하면 돼지.”
‘짜증 돌이가 따로 없군. 자기한테 안 맞으면 팩팩 토라져 버리네.’
“꼭 그래야 해? 사람들이랑 같이 가지.”
“빨리 짐 챙겨 나와.”
“서울 가는 거에요? 나도 지금 가려던 참인데 좀 태워주세요.”
멀대가 눈치도 없이 끼어들었다.
“서울 안가요. 우리 속초 갈 거에요.”
‘웬 속초?’
“서울 간다면서?”
“지금 생각이 바꿨어. 수련생들한테 미안한 것도 있고. 여기까지 온 김에 바다 구경 좀 하고 가지.”
‘짜증에 변덕까지. 곱게 자라면 다 저러는 건가?’
“그래요? 나도 바다 보고 싶었는데 잘 됐네요.”
멀대의 말은 듣지도 않고, 수암은 내 손을 잡고 끌고 가버렸다.
‘아무리 화가 나도 이건 너무하잖아.’
속초로 향하는 수암의 운전은 꽤나 거칠었다.
“걔는 왜 홍천에 온 거야? 네가 말했어?”
“아니야. 아는 형이 그 콘도에 일을 해서 놀러왔대.”
“거짓말.”
“무슨 거짓말이라고 그래.”
“형 보러 온 놈이 왜 여관에 묵냐?”
“여관?”
“내가 봤다구. 거기서 묵는 것 같던데.”
“그럴 수도 있지.”
“남자 혼자? 형 때문에 왔다면 콘도에 묵거나 형 집에 묵거나 하는 게 정상이지. 널 보러 온 거라고. 넌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
‘내가 눈치가 없다고?’
잔뜩 화가 난 수암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수암이 멀대가 싫어서 그런 것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내가 멀대와 즐겁게 떠들고 있는 모습에 질투를 느껴서 일 것이다.
좋아하니까 그런 거겠지 이해하자 마음을 먹었다.
“오해 하지마. 우린 그냥 친구야.”
멀대가 내게 주연인 친구일 뿐이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멀대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수암도 화가 많이 풀린 듯 보였다.
분위기가 완화되자 나의 머릿속은 곧 풀지 못한 여러 가지 의문들로 가득차갔다.
‘일단 숙희 언니와 관련된 일부터 물어볼까?’
“오빠, 숙희 언니있잖아. 그 민영효네 집하고는 무슨 사이야?”
“숙희씨? 민영효 외손녀야.”
다행히도 수암은 순순히 대답을 해주었다.
‘아는 척 할 순간은 놓치지 않는군. 참 단순하단 말이야.’
“그럼 숙희 언니 엄마의 아빠가 민영효?”
다시금 쉬운 말로 확인하는 혜림이.
“응.”
“그 집하고 사이좋지 않다면서? 저기 무슨 파벌 싸움 하듯이 파가 나뉜 게 아니었어? 어떻게 숙희 언니를 제자로 받아주게 된 거야?”
“숙희씨는 실은 민영효와 그다지 상관은 없어. 외손녀이다 보니 어렸을 때부터 숙희씨 능력은 탁월했는데 키워줄 생각은 안했나봐. 자기 직계 장손인 월산이 있잖아. 민영효 친손자. 그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이건 무슨 쪽수 싸움도 아니고 사람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잖아.”
‘오빠는 민태식이란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있을까?’
“그럼 오빠 혹시 민태식이란 사람은 알아? 옛날 사람이야. 나이가 많이 들어서 이미 죽은 사람인 것 같고.”
“그쪽 집안이랑 관련된 사람이야?”
“그건 몰라. 나도. 암튼 우리처럼 신을 받은 사람 같았고 산속에서 공부를 하길래. 그리고 민씨성이 흔한 것은 아니잖아.”
“어떻게 알게 된 사람인데?”
“할아버지가 과거를 보여주다가.”
할아버지가 민가네 일족에 원한이 있다는 것, 멀대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잠깐만. 민태식. 민태식. 민태식이라.”
오빠는 뭔가가 떠오르는 듯 이름을 되뇌었다.
“그 사람 옛날 사람이라면 흑술의 창시자 같은데.”
“흑술의 창시자?”
“민영효의 아버지.”
머리가 띵해지면서도 막혀있던 것이 풀리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