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노동자

쓰니2021.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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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마트 계산원이었어요. 어느 날 계산대 앞으로 온 고객의 유모차에 먹다 남은 과자와 생수병이 보였어요. 저는 혹시나 싶어 고객에게 마트에 진열되었던 과자와 생수병이냐고 물어봤어요. 그러자 고객은 기분이 나쁘다며 소리를 질렀고, 저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죄송하다고만 했어요.
그래도 고객의 화가 풀리지 않자 관리자가 와서 고객을 데리고 갔고, 저는 직원 라커룸으로 갔지요. 정신이 혼미해져서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거든요. 그때였어요. 고객이 제가 있는 라커룸까지 쫓아와 자신을 도둑 취급하냐며 화를 내는 거예요. 고객이 라커룸까지 쫒아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저는 공포에 떨었어요.
저는 고객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그날 이후부터 저는 출근을 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정신과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 진단을 받았지요.”
마트 계산원으로 일하던 이 여성은 일을 하다 병을 앓게 되었어요. 이런 경우 이 여성을 고용한 사업주가 고용노동부에 산업재해를 신청해야 해요. 산업재해란 노동자가 노동을 하다가 신체적·정신적 질병을 얻는 것을 말하는데요. 노동자가 걸린 병이 산업재해라는 사실이 객관적으로 인정되면 고용노동부에서 노동자에게 치료비와 임금의 70%를 주게 되어 있어요.
정신적인 질병의 경우 지금까지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만 산업재해로 인정받아 왔고, 감정노동자에게 빈번히 생기는 우울증은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했어요. 다행히도 곧 법이 개정되어 머지않아 ‘우울병’과 ‘적응장애’도 산업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고 해요. 그렇게 되면 11만 명의 노동자가 혜택을 누릴 수 있대요. 늦게나마 다행이지요?

왜 날이 갈수록 이처럼 감정노동자에게 신체적·정신적 폭력을 가하는 고객들이 늘고 있을까요? 전문가들은 두 가지 이유를 꼽아요. 우선 사람들이 고객으로서의 권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거예요.
다시 말해 제품을 구매하거나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으로서 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건데요. 녹색소비자 연합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사람들이 제품·서비스에 대해 불만을 느끼는 이유로 ‘필요한 정보를 제대로 주지 않는다’ 26.7%, ‘필요로 하는 서비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20.6%로 절반가량 차지하고 있어요.

고객으로서 정확한 상품 정보를 제공받고, 기업이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원하는 거지요. 질 좋은 제품만 있으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러나 산업이 계속 발달하고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서 더 이상 질 좋은 제품만으로는 경쟁력을 갖기 어려워졌지요.
기업은 서비스 제공으로 경쟁력을 확보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기업은 ‘고객이 왕이다’라는 구호 아래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들에게 고객을 왕으로 대우할 것을 강요해 왔어요.

이것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와 서비스를 누리는 고객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지요. 그래서 고객이 합리적인 이유 없이 소리를 지르더라도 노동자는 고객의 행동에 대해 당당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노동자가 고객에게 종속되어 버리는 상태가 되고 말았어요.
이러한 현실은 감정노동자를 폭력적인 상황으로 내몰고 있어요. 많은 감정노동자들이 곧 산업재해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그러나 노동자가 이미 병들어 버린 뒤에 치료비를 제공하는 것보다는 노동자가 병들지 않도록 사전에 폭력적인 상황을 예방하는 일이 더 낫지 않을까요? 사실 고객이 원하는 것은 과도한 친절이 아니거든요. ‘신속한 처리’, ‘정확한 상품 정보’, ‘원스톱 서비스’와 같은 것들이 고객이 진정 원하는 것이지요.
고객을 위해서라도 기업이 먼저 감정노동자들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챙기고, 고객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필요해요. 부디 이번 산업재해 법 개정이 감정노동자들의 보다 나은 노동환경을 위한 첫걸음이 되었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