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의 꿈 <3>

ㅇㄹㅂㄹ 도리200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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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세를 생각하면 어느 때는 길을 걸으며 마구 울었다. 실컷 울고

나면 좀 시원한 것 같았으나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의 잘못도

있겠지만 한국 조폐공사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 같기도 하여 더 없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직업소개소에 또 찾아 갔다. 노동 일을 찾기는 쉬웠다. 다음에 걸린

직장은 선반(Lathe)으로 나사를 깎는 공장이었다. 사장이 선반을 운전할 줄

아느냐고 물었다. 선반을 운전할 리가 없었지만 돈이 필요한 나는 우선

“예스”라고 대답했다. 어느 회사에서 선반을 운전 했느냐고 묻는 말에 또

거짓말을 했다. 한번 거짓말을 하고 나니 그 거짓말을 감추기 위하여 또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사장은 나를 작업실로 데리고 가 작업 반장인 프랭크란 사람에게

인계하고는 사무실로 들어 갔다. 프랭크는 기름 투성이의 선반 앞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선반 위에는 직경이 새끼 손가락 정도의 철봉이

수십개 쌓여 있었다. 프랭크는 이 나사가 비행기 부품으로 들어 갈 것이니

정확히 깎으라면서 나사의 규격명세서를 주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은 내가 진짜 선반공인 줄 알았나보다. 선반을 만져 본 일이 없는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기계가 돌아 가고 어디다 철봉을 끼워야 하는

것인지 전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 작업실에는 같은 선반이 수십 대

있었으며 모두 다 크기만 다르지 같은 나사를 깎는 일을 하고 있었다.

옆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그 가는 철봉을 겨우 선반에 끼웠다. 작업

반장이 주고 간 규격명세서를 어떻게 맞추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쫓겨나기 밖에 더 하겠느냐’ 하는 마음으로 제일 오른쪽의

버튼을 눌렀다. 누르는 순간 그 선반의 손잡이 레일을 따라 왼쪽으로

움직이는데 그 옆의 버튼을 눌러도 서질 않고 가더니 ‘딱’ 소리를 내며

선반에 끼웠던 그 가는 철봉이 부러졌다. 옆에서 일하던 사람이 작업반장인

프랭크에게 달려 가더니 나를 가리키며 무엇인가 얘기 하는 듯 했다.

 

 프랭크는 즉시 사무실로 들어 갔다. 곧 사장이 나와 당장 그만 두라는

것이었다. 즉 거짓말을 하고 선반공으로 들어 갔다 한 시간도 채 못 되어서

쫓겨났다. 그러니까 못 하는 것을 한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나의 큰 잘못

이었다. 이것 이외에도 몇 군데 간 곳이 있었으나 창피한 일 뿐이라 생략 한다.

 

다시 거지 들이 사는 숙소로 돌아 오며 많은 반성을 했다. 나의 실력으로는

남이 먹다 남은 것을 주워 먹는 거지 신세 밖에는 살 길이 없구나 하고 느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곰곰히 생각해 봐도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닐 때 화학 실험실에서 얻은 얕은 경험이 생각났다.

실험실 일이라면 할 구 있을 것 같았다.

 

거지 숙소로 돌아 온 나는 즉시 전화 번호책을 빌려 석유회사, 화학회사,

그리고 제지회사의 이름과 주소를 적었다. 그리고는 실험실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는 편지를 써서 우편으로 보냈다. 책상도 타자기도 없는 나는

그 거지 숙소의 더러운 공동 변소로 가서 변기의 뚜껑을 닫고 그 위에서

30통의 내용은 같고 주소가 다른 편지를 그 더러운 바닥에 엎드려 쓰고

나니 새벽이 되었다. 몹시 피로했다.

 

  30통의 편지 중 단 두 군데서 면접을 하러오라는 답장이 왔다. 만일

나에게 전화가 있었더라면 더 많은 곳에서 면접을 하러 오라는 전화가

왔을지도 모른다. 만일 잘 풀려 나가기만 하면 먼저 갔었던 문방구

도매상이나 구슬 꿰는 공장이나 선반공 같은 공장 보다 좋겠다고

생각하니 신바람이 나기도 했다.

 

우선 9번 버스를 타고 버논시에 있는 플린코트 주식회사(Flintkote Corp)

라고 하는 제지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갔다. 플린코트 회사는 알라메다

선상에서 52가부터 57가까지 다섯 블럭이나 차지하고 있는 큰 회사였다.

 

  기술담당이사 라는 할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화학실험실에 갔다.

화학에 관하여 이것 저것 묻더니 몇개의 실험기구와 많은 약품병

중에서 몇 개를 골라 약품의 이름을 부르며 화학 분자식을 써 보라고

했다. 화학을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쉽게 대답할 수가 있었다.

그 이사는 오토 세스 (Otto Sass)라는 사람인데 나에게 자기가

패서디나에 있는 공대(칼텍)를 나온 화공학 엔지니어라고 했다.

 

 운이 좋았던지 혹은 그 회사가 강한 노동조합이 있어서인지 그 당시

최하 임금이 시간당 1달러25센트 할 때 였는데 나에게 시간당 7달러

50센트에 시작 하라는 것 이었다. 귀가 번쩍 띄는 것 같았고 온 세상이

내 것이 된 것 같이 기뻤다. 회사의 간부들이 배운 사람들 이라 무척

너그럽고 좋은 사람들 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하는 일이란 어려운 일이 아니고 약 40분에 한번씩 생산된 종이의

견본을 가져오면 약 열 다섯 가지 종류의 실험치의 결과를 기준치와

비교하여 ‘합격(Pass)’ 또는 ‘불합격(No pass)’ 을 판정하여 생산과에

전화로 연락하면 합격된 제품은 창고로 실려 가고 불합격된 제품은

다시 원료가 되는 것 이다. 하루에 이런 쉬운 일을 하고 60불이라니

금방 부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먼저 다니던 공장과는 전혀 딴

세상 사람들 이었다. 게다가 초과 근무시간(Overtime)이 어찌나  많은지

초과근무만 하면 시간당 11달러25센트를 주니 여덟 시간을 한 후

교대자가 아프다고 안 나오면 하루에 1백50달러를 버는 날도 많았다.

초과근무가 일요일인 경우에는 16시간을 일하면 하루에 2백10달러를

벌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초과근무를 하면 식권(Meal Ticket)이라 하여

현금, 그것도 1달러짜리 실버달러 (Silver Dollar)로 10달러씩을 주는 것

이었다.

 

이리하여 1960년대에 한 달에 3천달러씩 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국의 어머니께 돈을 조금씩 부쳐 드렸다. 가난 하게만 살았던 나는

“돈을 모아야지! 그리고 공부도 하고 미국에서 성공 해야지!” 하고

결심 했다. 자동차가 없는 나는 아침 일곱 시까지 출근을 하려면 새벽

다섯시 전에 집을 나와 버스를 타고 포시픽 길과 슬로슨 길 까지

오는데 약 한 시간 십오분이 소요되었고 그 곳에서 회사까지 걸어서

또 30분이 걸렸다. 그래도 회사에 가면 내가 일등 이었다. 나는 남들이

오기 전에 자진 해서 걸레를 빨아 실험실의 벤치와 모든 기계들을

깨끗이 닦고 커피도 끓여 놓고 하니 몇 개월 후에는 약 8백명이나

되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 했다.

 

 전부가 백인이고 필리핀 사람이 하나 있었고 동양사람은 나 뿐이었는데

나의 감독자인 오토 세스 박사는 나를 가르켜 ‘좋은 사람(Hey, nice guy)’

라고 불렀다. 이 회사에서 어느 정도 신임을 얻고 기반을 닦은 후 일본

아줌마가 경영하는 하숙집으로 숙소를 옮겼다. 거기에는 대부분이

USC 대학과 UCLA대학에 다니는 일본 학생들이 었고 독방에는 침대도

있었다.

 

 그 하숙집 에서도 식사 후에 설거지를 도와 주고 앞마당과 뒷마당의

풀도 깎아주고 쓰레기차가 오기 전 날이면 쓰레기통을 길에다 갖다 놓고

하여 아줌마를 도왔다. 그 때 하숙비가 아침과 저녁 두 끼를 먹고 한 달에

40불이었는데 내가 이것 저것 도와 준다며 나에게는 30불만 받겠다는 것을

정중히 거절하고 40불을 그냥 냈다. 나와 나이가 같은 보스톤 대학 출신

이며 어바인에 있는 플로러 다니엘 주식회사(Flour Daniel Corp)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로날드 스미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자기 어머니를

도와 준다고 나를 무척이나 좋아해서 가끔 일본 영화관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그는 37년 이상이 지난 지금도 나의 좋은 친구이다.

 

 그 회사에서 일년간 착실히 일을 하고 나니 2만달러 이상의 거금이

저축되었다. 지금 생각 하면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 때 까지 자동차

없이 살았다. 그 때 USC에서 대학을 끝내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학생의

중고차를50불에 하나 샀다. 그 차는 바닥이 높아서 차에 앉으면 길의

아스팔트가 보였고 위를 쳐다 보면 하늘이 보이는 차 였다. 그 당시

새차가 2천5백달러 정도 였고 휘발유 값이 갤런당 18센트에서 23센트였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그 당시 학생 비자를 일 년에 한번씩 연장 해야

했는데 나는 학교에 안 갔기 때문에 비자 연장을 포기 하고 직접

제 3순위 영주권을 신청했다. 얼마 후 이민국에서 부결 통지와 언제까지

출국 하라는 날짜까지 적힌 통지서가 왔다. 이민국의 결정이 그러한데

변호사에게 상의해 봤자 뾰족한 방법이 있을 것 같지 않아 혼자

이민국에 가서 부결의 이유를 물었다. 같은 연방 정부 건물 안에 있는

노동부의 직원들을 찾아가 부결의 이유를 물으니 나의 직종은 미국에서

필요하지 않다는 것 이다.

 

 이민국에서 출국 하라는 날짜까지는 많이 남지 않았기에 노동부의

담당자인 론 홀랜드에게 가서 나를 인정해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대답은 같았다. 자주 만나고 보니 어느 때는 화장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나를 보는 순간 “하이(Hi)!” 하며 “또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한국에 가고 싶지 않다” 며 서울 종로학원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고 얘기를 했더니 “수학?” 하고 물으며 미국에 수학선생이

대폭 부족 하다며 그 경력 증명서를 갖고 오라는 것 이었다. 부랴부랴

서울에 편지를 보내 그 경력증명서를 론 홀랜드에게 갖다 주었다.

그는 웃으면서 “됐다” 고 했다. 약 3개월 후 영주권이 나왔다.

 

 그 날 밤 어찌나 신기 한지 자다가도 몇 번 깨어나 영주권 카드를

보고 또 다시 보며 기뻐 했다. 그 다음 날 홀랜드를 찾아가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는 나같은 사람은 처음이라며 자기 집에 놀러 오라고

알함브라의 자기 집을 가르쳐 주었다. 지금은 타계한 사람이 됐지만

인간적으로 참 좋은 사람이었다. 그 당시 영주권 받기란 하늘의 별따기

였다. 왜냐하면 쿼터제였으며 한국에서 일 년에 1백명, 일본에서

1백50명 뿐만이 가능 했었는데 그 1백명중 80%는 미군과 결혼해서

오는 여자들 이었기 때문이다.

 

 

미주중앙신인문학상 당선작 <거지의 꿈 - 이중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