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혼자가 되었다. 아내는 직장에 사직서를 내고, 아들이 다닐만한 학교를 알아봤고, 비자수속을 시작했다. 떨어져 살기로 결정한 후 4개월 후 아내와 아들은 캐나다로 떠났다.
공항 출국장에서 아내와 아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모자의 뒷모습이 눈에 보였다. 아내와 7살 된 아들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나라는 남편과 아빠가 없다라는게 보였고, 두 모자의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예전 아들이 너무 이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웠을 때 그리고 내 목숨과도 바꿀수 있다라고 느꼈을 때, 어머니는 “나도 너 그렇게 키웠어” 라는 말씀하신적이 있었다. 나도 저 나이때 엄마와 손을 잡고 동네를 걸어서 갔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많아졌다.
휴가다 결혼으로부터 휴가 였고 치유에서 휴가 였다. 복잡하게 생각하기도 싫었고, 일단 아내가 떠난후 심적인 불편함이 없어졌다. 문제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사라졌다고 인간은 착각한다. 그래도 편했다. 나는 억압해온 자물쇠를 봉인해제 하고 싶었다. 살고 있는 집을 전세 주고 오피스텔로 이사했다. 처음에는 아내와 아들에게 매일 전화를 했으나 나중에는 생사확인 정도였다. 아이폰에 생활비나 학비 붙여주는 일정 알람을 해놓고 알람이 울릴 때 마다 내가 결혼을 해서 아내와 아들이 있지라는 확인작업을 한달 혹운 분기마다 했다.
약 복용도 중단했다. 상담도 부담되었고 약을 먹었을 때 오는 부작용도 싫었다. 그리고 일단
기러기 아빠로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리고 내 삶의 계획표를 수정했다. 나이 사십대면, 그리고 직장인이라면 임원의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이 된다. 그리고 임원이 되봐야 월급쟁이로써의 수명이 얼마나 갈지 그리고 그 이후에는 어떻게 살지 쉽게 판단된다. 바람의 치유는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었고. 별거라는 주거형태의 변화도 비용이 많이 들었다. 난 퇴사를 하고 내 일을 해보기로 결심했고, 3년후 창업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캐나다의 아들을 자주 보러 가기에는 월급쟁의 삶이 쉽지 않았고, 현재 보다 자유롭게 움직일수 있는 내 일을 하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질펀하게 놀아보고 싶었다. 아내에게 복수가 아니라 아내가 아닌 여자들에게서 내가 숫컷으로 어떻게 보이는지 평가 받고 싶었다. 솔직히 그 때는” 이왕이렇게 된거 나도 놀아봐 “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극적인 유혹에도 빠져보고 싶었다. 아내가 떠나기전 아내에게 나도 외로움이 있었고 누군가 내 외로움이 채워줄 사람이 나타난다면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당신에게 새사람과 심각하게 발전하기 전에 말하겠다고 했다. 아내는 그때 나를 빤하게 쳐다볼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었다.
티나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 보려 틴더도 핸드폰에 깔아보고 심장도 졸깃졸깃 헤지려 심쿵도 깔아봤다. 매칭되기는 정말 어려웠다. 암컷을 쫏는 불나방 같은 숫컷의 심리를 잘 이용한 앱이였다. 희망고문으로 시작된 앱의 여성사진들은 아프라키 티비에 별풍선 처럼 하나 하나 앱내 구매를 유도 했고, 그러다 보니 데이팅앱에 현질이 시작되었다. 생에 처음으로 인터넷 사기극을 맞아본 느낌이었다. 그리고 혼자 이야기 했다 이게 뭐지 누군가를 새로 만드는것도 쉽지 않군.
그렇게 다음달 핸드폰 요금이 생애 최초로 숫자 일곱자리가 청구 되었고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런 일련의 뻘짖들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모던바에서 낯선 여성과 이야기도 해봤다.
젠장 내 말을 듣고 위로 받는게 아니라 우리 부부사이에 발생한 문제로 느낀 교훈으로 내가 어가씨들 연애 상담을 해주고 있었다. 부부상담을 받다 보니 그리고 부부관계에 대한 글들을 자주 읽다 보니.
나의 언변은 작두를 타고 방언을 업소 아가씨들에게 하고 있었고 내 문제도 해결 못하는 내가 남의 연애 문제를 상담하고 있었다.
난 그렇게 질펀하게 노는 사람이 아니였다. 맞지도 않은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기분이였다.. 접대로 간 룸살롱이나 업소에서 업무만 말하고 옆에 파트너에 신경을 잘 안쓰는 편이다. 접대 때문에 간 단골업체에서도 속칭 묵는 고정 아가씨도 없었다.
(12) 아내와나 그리고 그놈
오랜만에 혼자가 되었다. 아내는 직장에 사직서를 내고, 아들이 다닐만한 학교를 알아봤고, 비자수속을 시작했다. 떨어져 살기로 결정한 후 4개월 후 아내와 아들은 캐나다로 떠났다.
공항 출국장에서 아내와 아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모자의 뒷모습이 눈에 보였다. 아내와 7살 된 아들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뒷모습에서 나라는 남편과 아빠가 없다라는게 보였고, 두 모자의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예전 아들이 너무 이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웠을 때 그리고 내 목숨과도 바꿀수 있다라고 느꼈을 때, 어머니는 “나도 너 그렇게 키웠어” 라는 말씀하신적이 있었다. 나도 저 나이때 엄마와 손을 잡고 동네를 걸어서 갔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많아졌다.
휴가다 결혼으로부터 휴가 였고 치유에서 휴가 였다. 복잡하게 생각하기도 싫었고, 일단 아내가 떠난후 심적인 불편함이 없어졌다. 문제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사라졌다고 인간은 착각한다. 그래도 편했다. 나는 억압해온 자물쇠를 봉인해제 하고 싶었다. 살고 있는 집을 전세 주고 오피스텔로 이사했다. 처음에는 아내와 아들에게 매일 전화를 했으나 나중에는 생사확인 정도였다. 아이폰에 생활비나 학비 붙여주는 일정 알람을 해놓고 알람이 울릴 때 마다 내가 결혼을 해서 아내와 아들이 있지라는 확인작업을 한달 혹운 분기마다 했다.
약 복용도 중단했다. 상담도 부담되었고 약을 먹었을 때 오는 부작용도 싫었다. 그리고 일단
기러기 아빠로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리고 내 삶의 계획표를 수정했다. 나이 사십대면, 그리고 직장인이라면 임원의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이 된다. 그리고 임원이 되봐야 월급쟁이로써의 수명이 얼마나 갈지 그리고 그 이후에는 어떻게 살지 쉽게 판단된다. 바람의 치유는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들었고. 별거라는 주거형태의 변화도 비용이 많이 들었다. 난 퇴사를 하고 내 일을 해보기로 결심했고, 3년후 창업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캐나다의 아들을 자주 보러 가기에는 월급쟁의 삶이 쉽지 않았고, 현재 보다 자유롭게 움직일수 있는 내 일을 하는게 맞다고 생각했다.
질펀하게 놀아보고 싶었다. 아내에게 복수가 아니라 아내가 아닌 여자들에게서 내가 숫컷으로 어떻게 보이는지 평가 받고 싶었다. 솔직히 그 때는” 이왕이렇게 된거 나도 놀아봐 “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극적인 유혹에도 빠져보고 싶었다. 아내가 떠나기전 아내에게 나도 외로움이 있었고 누군가 내 외로움이 채워줄 사람이 나타난다면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당신에게 새사람과 심각하게 발전하기 전에 말하겠다고 했다. 아내는 그때 나를 빤하게 쳐다볼 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었다.
티나게 새로운 사람을 만나 보려 틴더도 핸드폰에 깔아보고 심장도 졸깃졸깃 헤지려 심쿵도 깔아봤다. 매칭되기는 정말 어려웠다. 암컷을 쫏는 불나방 같은 숫컷의 심리를 잘 이용한 앱이였다. 희망고문으로 시작된 앱의 여성사진들은 아프라키 티비에 별풍선 처럼 하나 하나 앱내 구매를 유도 했고, 그러다 보니 데이팅앱에 현질이 시작되었다. 생에 처음으로 인터넷 사기극을 맞아본 느낌이었다. 그리고 혼자 이야기 했다 이게 뭐지 누군가를 새로 만드는것도 쉽지 않군.
그렇게 다음달 핸드폰 요금이 생애 최초로 숫자 일곱자리가 청구 되었고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런 일련의 뻘짖들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모던바에서 낯선 여성과 이야기도 해봤다.
젠장 내 말을 듣고 위로 받는게 아니라 우리 부부사이에 발생한 문제로 느낀 교훈으로 내가 어가씨들 연애 상담을 해주고 있었다. 부부상담을 받다 보니 그리고 부부관계에 대한 글들을 자주 읽다 보니.
나의 언변은 작두를 타고 방언을 업소 아가씨들에게 하고 있었고 내 문제도 해결 못하는 내가 남의 연애 문제를 상담하고 있었다.
난 그렇게 질펀하게 노는 사람이 아니였다. 맞지도 않은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기분이였다.. 접대로 간 룸살롱이나 업소에서 업무만 말하고 옆에 파트너에 신경을 잘 안쓰는 편이다. 접대 때문에 간 단골업체에서도 속칭 묵는 고정 아가씨도 없었다.
그렇게 말도 안되는 나만의 정신적 방황 후 의미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