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의 꿈 <5>

ㅇㄹㅂㄹ도리200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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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욕심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휴가를 이용하여 LA, 산타애나,

또는 하버 법정에 가서 법정 통역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별로 벌이가

되지 않았다. 그럭저럭 미국에 온지 약 2년만에 5만 달러 이상의 돈이

모였다. 그 때 내가 장사를 시작 했거나 부동산 사업을 시작 했으면

지금쯤 부자가 됐을 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1960년대 올림픽과 버몬트,

또는 웨스턴 길에 있는 작은 상가 건물이 2만불 내지는 3만불 정도 였다. 

                                                         

 그러나 나는 이 저축된 돈으로 미국에서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대학에 가기 위하여 나의 상사이고 연구 소장인 프레드 하니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그는 사장과 상의한 결과를 나에게 전해 주었다. 즉

플린코트는 나를 놓치기 싫다는 것 이다. 제의인 즉 회사에서 등록금

100%와 책 값을 지불 할테니 아무 때나 시간이 있을 때 회사에 와서

내가 해야 할 일만 하라는 것이었다. 또 하는 말이 대학은 일학년부터

다녀야 진짜 미국 대학의 맛을 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회사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대학교 일학년 수학과에 입학했다.

주립 대학인지라 기초과목인 영어, 철학, 음악, 미술, 체육, 연설법 등부터

해야 했다. 미국 대학의 수학의 수준이란 그리 어렵지가 않아 3년만에

대학을 졸업 할 수 있었다. 졸업장에는 주지사 였던 로널들 레이건의

사인이 들어 있었다. 얼마 후 그 당시 미국에서는 월남전쟁이 막 끝나고

방위산업들은 거의 문을 닫게 되었고 고급 실업자가 속출 할 때 였다.

 

 정부에서는 실업자가 된 고급 두뇌들을 구제하게 위하여 연방 정부내에

환경청를 새로 신설했고 주정부에서는 수질 보전 통제국이 신설되었으며

공업 폐수 처리국 등이 새로 생겼다. 그러나 방위산업체의 두뇌들이란

대부분이 전기공학, 기계공학, 화학공학, 등을 공부한 엔지니어들이고

환경공학을 공부한 사람은 전혀 없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제일 먼저 환경공학을 시작한 대학은 USC 대학과

스탠포드 대학 뿐이었다. 나는 이것을 전공하면 미국에서 장래가 좋을

것 같았다. 대학원에 들어 가려면 GRE 시험을 치뤄야 하는 데 겨우

합격선에 들어 갈 정도 였다. 대학원에 들어 가니 같은 과 안에 정부

돈으로 공부 하는 현직 엔지니어 공무원들이 몇 명 있었다. 함께 공부

하다보니 자연히 숙제를 그들 집에서 같이하는 경우가 많았다. 엔지니어

공무원이 되기는 어렵지만 되기만 하면 정부에서 100%의 등록금과

책값까지 지급 한다는 것 이었다. 친해지고 나니 그들은 시험 예상 문제

까지 가르쳐 주었다. 그러던 중 환경 공학의 석사 학위를 받았고 같은

과 친구들 소개로 공무원 시험을 치르고 공무원으로서 문명 공학 엔지니어

(Civil Engineer)가 되었다.

 

  그러나 나 에게는 큰 고민 거리가 생겼다. 고민거리란 내가 다니던

연구소에 아무 얘기도 안 하고 모든 것을 진행했기 때문에 나를 여지껏

도와 준 플린코트 회사에 무엇이라 말을 할 것 인가?  단돈 몇 푼을 들고

미국에 와 나의 거지 생활을 면하게 해 주었고 여지껏 많은 호의를

베풀어 준 그 회사를 떠난다는 것이 꼭 큰 죄를 진 죄인의 심정이었다.

정부에는 1973년5월10일 부터 나가야 하는데 약 3주 정도가 남았는데도

상사에게 그만 두겠다는 말이 입에서 나오지가 않았다.

 

그러나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프레드 하니

사무실에 들어가 저녁 식사 후 집을 방문 하고 싶다고 하니, 다우니에 있는

자신의 집을 알려 주었다. 빈 손으로 갈 수 없어 잘 생긴 화분을 하나

사들고 갔다. 그의 부인은 칼스테이트 대학 교수였다. 나는 그와 그의

부인에게 모든 사정을 숨김없이 털어 놓았다. 내 얘기를 다 들은 그는

내일 사장과 함께 상의 하자고 했다. 다음날 평소처럼 연구소에 출근했다.

점심 시간 직전 그는 사장과의 회담 결과를 말해 주었다. 얘기인 즉

월급을 그대로 줄 테니 시간에 구애 받지 말고 공업폐수의 연구 문제와

정부와의 기술 협조만 맡아 달라는 것 이었다. 그의 제의를 그대로

 받아 주었다.

 

 1973년5월10일이 되었다.

 

아침에 출근 하자마자 과장인 제이 크리머에게 전 직장을 공무원 근무

시간 외에 그대로 계속 하겠다고 말 했다. 그는 첫 마디에 거절하는

것이었다. 즉 자기 직책과 같은 일이나 비슷한 일도 외부에서 못 한다는

것 이었다. 단 대학 강의 만은 허용한다며 지금 이 자리에서 이중 택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용서를 빈다는 편지를 써서 플린코트에

보내고 끝을 맺었다. 그러나 그 후 은혜를 갚기 위하여 나의 직분으로

할 수 있는 많은 것을 도와주며 보답을 했다.

 

 

미주중앙신인문학상 당선작 <거지의 꿈 - 이중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