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연 프로그램을 경멸한다. 한국 사회의 질병들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흥행하기 때문이다. 경연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권위’를 좋아하는지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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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들이 오만한 태도로 평가한다. 이건 좋다, 저건 별로다, 너 정말 잘한다, 쟤는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냐. 방송의 재미를 위해 과장된 호불호의 반응은 시청자들에게 정답이 된다. 그렇다, 경연 프로그램의 세계에는 명백한 ‘정답’이라는 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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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보는 내가 듣기 좋고 듣기 싫은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심사위원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노래를 들려주다가도 TV는 중간중간 심사위원이 눈물을 글썽이며 감동을 받는 장면을 보여주며 힌트를 준다. 아 이 노래는 좋은 노래구나, 그래 정말 잘 부른다. 심사위원이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모습을 내보내면, 그래 어쩐지 별로더라. 경연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사람들의 반응들을 보면 심사위원들의 권위에 완벽히 순응하며 그들이 이야기하는 정답을 따라가고자 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들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는 것만으로 거대한 기쁨을 누리는 이도 봤다. ‘맞췄다’고. 정답을 맞췄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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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권위’라고 얼버무려 표현한 그것. 비단 예능 프로그램 심사위원의 어깨에 들어간 힘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유독 잦은 ‘유행’이라는 것도 결국 ‘집단성의 권위’로부터 출발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여러 명이 하면 그게 정답이다. 그 정답은 일종의 사회적 기준이요, 계급을 나누는 룰이며, 잘 사는 사람의 진입장벽이다. “SNS에서 난리난”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붙은 “맛집”에는 몇시간씩 줄을 서서라도 가야하고, 소셜미디어에 너도나도 올리는 명품 핫 아이템은 소위 인싸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잘 나가는 유명인이 집안일 하는 TV 프로나 소셜미디어에서 쓴 물건은 다음날 꼭 품절이 된다.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가 이런 현상을 더욱 부추긴다는 문제의식은 일단 차치해두자. 독일보다 더 많이들 굴리는 독일 차부터, 무려 ‘계급’이 존재한다는 겨울철 패딩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집단성의 권위로 정답과 오답이 나뉘고, 좋은 것 나쁜 것이 갈리고, 계급이 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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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생활 같은 작은 것부터, 삶의 가치관 같은 거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집단주의 아래 휘둘리고 있다. 그 원인? 결국 정신적 궁핍에 기인하는 ‘몰취향’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 자신의 기준이 없다. 자기 취향이 없다는 말은 곧 가난하다는 뜻이다. 여유가 없는데 어떻게 깊이가 생길 것이며, 깊이가 없는데 어떻게 자기 기준, 주관, 철학이 생겨나고,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데 어떻게 취향이 생기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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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다른 사람들 눈치 좇아 가는 것만해도 너무 힘이 든다. 나날이 새로운 기준, 유행, 정답들이 따라가야 할 숙제가 되어 등장한다. 문제는 그 속에서도 돋보이고 싶은 심리가 있기에 희소가치가 계속 새롭게 등장한다는 거다. 독일 3사 차가 길거리에 넘치니, 이제는 포르쉐 벤틀리쯤 타야 한다는 식이다. 모두가 쳇바퀴 속에서 뛰는 햄스터들과 같다. 빠르게 뛰면 뛸수록 쳇바퀴는 더욱 빠르게 돌아간다. 죽을 힘을 다해 쫓아거나, 여기서 이탈하는 수 밖에 없다. 이탈된 사람들은 박탈감을 느낀다.
한국이 부유한 나라인데도 한국인들의 행복도가 바닥을 기어다니는 이유
경연 프로그램을 경멸한다. 한국 사회의 질병들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흥행하기 때문이다. 경연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권위’를 좋아하는지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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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들이 오만한 태도로 평가한다. 이건 좋다, 저건 별로다, 너 정말 잘한다, 쟤는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냐. 방송의 재미를 위해 과장된 호불호의 반응은 시청자들에게 정답이 된다. 그렇다, 경연 프로그램의 세계에는 명백한 ‘정답’이라는 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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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보는 내가 듣기 좋고 듣기 싫은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심사위원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노래를 들려주다가도 TV는 중간중간 심사위원이 눈물을 글썽이며 감동을 받는 장면을 보여주며 힌트를 준다. 아 이 노래는 좋은 노래구나, 그래 정말 잘 부른다. 심사위원이 짜증을 내거나 화를 내는 모습을 내보내면, 그래 어쩐지 별로더라. 경연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사람들의 반응들을 보면 심사위원들의 권위에 완벽히 순응하며 그들이 이야기하는 정답을 따라가고자 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들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는 것만으로 거대한 기쁨을 누리는 이도 봤다. ‘맞췄다’고. 정답을 맞췄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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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권위’라고 얼버무려 표현한 그것. 비단 예능 프로그램 심사위원의 어깨에 들어간 힘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유독 잦은 ‘유행’이라는 것도 결국 ‘집단성의 권위’로부터 출발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여러 명이 하면 그게 정답이다. 그 정답은 일종의 사회적 기준이요, 계급을 나누는 룰이며, 잘 사는 사람의 진입장벽이다. “SNS에서 난리난”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붙은 “맛집”에는 몇시간씩 줄을 서서라도 가야하고, 소셜미디어에 너도나도 올리는 명품 핫 아이템은 소위 인싸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잘 나가는 유명인이 집안일 하는 TV 프로나 소셜미디어에서 쓴 물건은 다음날 꼭 품절이 된다.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가 이런 현상을 더욱 부추긴다는 문제의식은 일단 차치해두자. 독일보다 더 많이들 굴리는 독일 차부터, 무려 ‘계급’이 존재한다는 겨울철 패딩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집단성의 권위로 정답과 오답이 나뉘고, 좋은 것 나쁜 것이 갈리고, 계급이 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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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 생활 같은 작은 것부터, 삶의 가치관 같은 거대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람들은 이렇게 집단주의 아래 휘둘리고 있다. 그 원인? 결국 정신적 궁핍에 기인하는 ‘몰취향’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 자신의 기준이 없다. 자기 취향이 없다는 말은 곧 가난하다는 뜻이다. 여유가 없는데 어떻게 깊이가 생길 것이며, 깊이가 없는데 어떻게 자기 기준, 주관, 철학이 생겨나고, 그렇게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데 어떻게 취향이 생기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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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다른 사람들 눈치 좇아 가는 것만해도 너무 힘이 든다. 나날이 새로운 기준, 유행, 정답들이 따라가야 할 숙제가 되어 등장한다. 문제는 그 속에서도 돋보이고 싶은 심리가 있기에 희소가치가 계속 새롭게 등장한다는 거다. 독일 3사 차가 길거리에 넘치니, 이제는 포르쉐 벤틀리쯤 타야 한다는 식이다. 모두가 쳇바퀴 속에서 뛰는 햄스터들과 같다. 빠르게 뛰면 뛸수록 쳇바퀴는 더욱 빠르게 돌아간다. 죽을 힘을 다해 쫓아거나, 여기서 이탈하는 수 밖에 없다. 이탈된 사람들은 박탈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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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취향 없는 가난한 사회. 집단의 기준이 모든 걸 지배하는 나라. 숨막히고 피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