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정부 수립

0002021.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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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거부 건으로 투옥되었다가 해방 직후 출옥하게 된 이른바 '출옥 성도' 계열 인물들이 교계 정화를 부르짖으며 기성 교단에 회개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로 인해 그 동안 은폐되어 왔던 트라우마가 해방과 거의 동시에 터질 위기가 도래하게 되었다. 특히 고신 교단이라는 이름 아래 모인 신사참배 반대 순수신앙파 장로교 교인과 목사들이 대표적이었는데, 신사참배 문제에 자유롭지 못한 교단들은 잘못을 인정하기 전까지 적극적으로 이들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신학교 교육 과정에서도 조직적으로 은폐 및 왜곡[14]하면서 스스로의 치부를 덮는 데 급급했다. 이 때문에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스스로 평가하는 것조차 '해방과 동시에 본격적인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논한다. 

해방 이후에 전래, 설립되었기에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서 자유로워서 신사참배에 대해서 가르치는 교단들의 신학대학을 제외한다면, 고신대학교를 제외한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서 관련된 모든 교단의 신학교의 교회역사학에서 고신 교단에 대한 교육을 전혀 하지 않으며, 일선 교회에서도 고신 교단이 아닐 경우 관련 정보를 신도들에게 전혀 가르쳐 주지 않는 것으로 악명높다. 이러한 정보 은폐가 어찌나 심각한지 아예 자체적으로 자료를 정리하고 홍보하는 역사편찬위원회를 고신 쪽에서 따로 꾸려야 했을 정도다. 다만, 고신 교단이 비 고신 교단에게 신사참배에 대한 문제를 너무 걸고 넘어져서 역풍을 맞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해방 이후에 설립된 교단들은 신사참배 관련 자료가 없어 연구가 미미한 편인데, 이들에게도 책임을 무리하게 적용시켜서 반발을 산다던가(...)

그러나 신사참배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하고 유야무야 된 것은 북한의 김일성 정권을 위시한 공산주의 세력의 횡포 때문에 관심이 그 쪽으로 쏠려셔였다. 해방이 되고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기독교를 포함한 종교가 탄압을 받자, 믿음의 자유를 찾아서 평양에서 활동하였던 종교 관련 인사들이 대거 월남한 역사가 있다. 원래 개신교의 지역적 기반은 38선 이북 지역이었는데[15], 소련군 주둔과 공산정권 수립으로 오히려 일제보다 핍박이 훨씬 심해지자 참다못한 개신교인들이 대거 월남했다. 개신교의 최대 신학교인 총신대학교와 장신대학교는 각각 전신이 평양장로회신학교, 평양신학교였다. 숭실대학교의 전신인 숭실학교도 원래 평양에 있었다.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정도로 개신교가 크게 부흥했던 지역들 중 하나였지만 북한의 우익 대학살을 거치면서 지금은 주체사상의 성지로 전락해 버렸다.

6.25 전쟁을 거치면서 북한 정부가 개신교도들을 비롯한 모든 기독교도들에게 큰 핍박을 가했다. 당시에는 북한에서의 우익과 개신교도들의 교집합이 많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북한이 6.25전쟁을 거치면서 개신교도들에게 크게 대학살을 진행하였다. 현재도 개신교도들을 적대계층으로 분류하고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무조건 정치범수용소로 끌고 가는 등 개신교에 대한 매우 강도 높은 핍박을 진행하며, 이 때문에 외국의 개신교인들이 이를 문제 삼아서 진상조사에 나설 정도이다. 그렇기에 한국 개신교들의 북한에 대한 적대감은 유대인들이 나치에 대해 적대감을 보이는 정도와 비슷하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에게 이 시기의 일을 물어보면 정치성향과 관계없이 크게 치를 떨 정도로 6.25 전란기는 한국 개신교의 암흑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기독교인들은 북한 정부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다. 북한의 핍박이 신사참배를 요구한 일제의 핍박보다 더 지독했다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 물론 저 말 그대로 신사참배를 완강하게 거부한 성직자들만 끌고 갔던 일제와 달리 북한은 예배를 하는 모습만 보여도 도륙을 내다시피 했으니 증오심이 그만큼 클 만도 하다. 한국 기독교인들 각자의 정치성향의 차이 때문에 판문점 선언에 대한 견해차가 있지만 그래도 북한의 핍박에 대한 증오심과 남북 통일 이후 북한 수뇌부 처벌에 대한 소망은 공통적이다. 차후 북한 정부 수뇌부가 이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하지 않는 이상 이러한 적대감은 유지될 확률이 압도적이다.


그렇기에 전쟁 직후의 개신교인들의 북한에 대한 분노는 엄청났다. 전쟁 직후의 한국의 보수 정치인들은 개신교인들에게 반공을 내세워서 자신의 지지를 호소할 정도였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당시 이승만 장로와 이기붕 권사를 지지해 달라고 호소하는 포스터[16]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도 한국 보수정치에서 기독교의 지분이 클 정도로 개신교인들이 북한에게 입은 상처는 매우 컸다. 국내 보수 진영이 북한 개신교인을 비롯한 북한 인권 문제에 꽤나 적극적인 것은 개신교인들이 보수 정치에 주는 영향이 꽤나 크기 때문이다.

이승만김구김규식과 같은 대한민국의 건국 지도자들은 개신교 정신을 기반으로 개신교 건국론을 주장했고, 이들은 상해임시정부, YMCA, 흥사단에 참여했던 신실한 개신교인들이었다.
반만년 길고 유구한 역사에 처음으로 민주주의 시대를 개막하고 국회를 열게 된 것은 사람의 힘과 사람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고 우리 민족을 사랑하사 대한민국을 탄생케 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대한민국 국회 속기록 제 1권 1쪽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가 열리던 날, 초대 국회의장 이승만은 위와 같이 연설함으로서 대한민국이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진 민주주의공화국이라 연설하였다. 그렇게 한국에는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민주주의, 국민주권주의, 삼균주의를 포함하여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보수적 가치를 내걸고 북한 김일성을 겨냥한 반공과 내셔널리즘[17]을 외치기 시작했다.[18]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은근히 불교를 탄압하였는데, 개신교 교회에서는 세금을 받지 않았던 것과 달리 사찰에는 세금을 따로 받고 승려들의 환속을 권장했다. 재미있는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승려들이 당시 이승만에게 아첨하며 "또 다른 부처님"이라는 망언을 해댔다.[19][20] 지금도 보수적 성향이 강한 한기총에선 이승만 대통령을 국가의 아버지라 추앙하며 조선일보나 뉴라이트와 같이 동상을 만들자고 하는 이들도 꽤 적지 않다.

1970년대 근대화와 새마을 운동을 계기로 해서 개신교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교회들이 굉장히 근대적인 이미지를 내세워서 개신교 믿으면 서양식으로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인식이 자리잡기 시작하고[21][22] 이러한 이미지는 역설적으로 기복신앙적인 면과도 결합하게 되었다. 지금도 도시와 마을 곳곳에 빨간 십자가 교회 철탑이 많이 보이는 이유 중 하나다. 또한 전통 문화들 가운데 개신교 입장에서 부정적으로 보이는 부분들을 없애는데 개신교 영향이 컸다.

과거 전두환 정권 시절에만 하도 도시산업 선교회 등 친노동운동적인 개신교 단체가 존재했으나 정부의 탄압으로 소멸당하거나 규모가 축소되었다. 다소 예외일 수 있겠으나, 70-80년대 빈민선교활동과 두레 공동체 운동으로 대중에게 알려졌고 10월 유신 반대로 옥고를 치렀다가 뉴라이트 연합 상임 이사가 된 김진홍 목사 같은 경우도 있다.

민주화 운동에 관한 것으로는, 한국의 개신교인들은 학문적으로 민중신학, 해방신학처럼 기독교 신학을 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진보적인 신학들을 한국 상황에 맞게 해석하여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을 실천한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종교 간의 대화, 곧 다른 종교를 적대시할 대상이 아닌 같이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대화하려는 노력을 했으며, 기독교 교파에 따른 전통들의 다양성을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기독교의 공동 신조에 근거하여 존중하고 일치하려는 교회 일치 운동으로 교회 분열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였다. 또한 이 시기는 산업화가 진행된터라 노동운동 탄압 곧 노동자들의 권리가 자본가에 의해 짓밞혀지는 경우 고통받는 노동자들의 편에 서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려는 산업선교가 실천되기도 하였다. (천주교 인천교구가 노동사목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 저명한 개신교 신학자 장공 김재준 목사가 개신교와 가톨릭에서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스스로 분신한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는 예배/미사를 집전하자, "이 자리는 전태일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가 아닌, 기독교인들의 나태를 추모하는 자리다."라고 설교한 일, "도시산업선교회가 들어오면 도산한다"는 자본가들의 비방과 형사를 보내 감시하는 경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개신교인들에 의해 도시산업선교회를 결성하여 활동한 일이 그 흔적이다. 그러나 이런 진보적 개신교인 역시 내부적으로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며, 그 예로 도시산업선교회는 오늘날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직 예장통합 교단 산하에 남아있는 영등포산업선교회가 그 명맥을 미약하게나마 이어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