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왜 사형제도를 막고 있는가. 그렇게 사형집행을 막으면서 범죄자의 인권만 챙겨주는 나라가 되다보니 '이것도 나라냐'라는 한탄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 그러나 산 사람은 살아야한다'는 궤변(詭辯)만 지껄여대고 범죄자들의 인권만 강조하면서 승자독식(勝者獨食)을 당연시하는 그런 나라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최대우 2021. 07. 01)
입증(立證)은 조작(造作)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방증(傍證)은 조작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방증은 입증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전에 의심받을 행동을 하게된다면 그것은 방증(傍證)으로 나타날 수 있으니 조심(操心)해야 합니다. (최대우 2021. 04. 16)
법률적(法律的) 판단(判斷)이 요구(要求)될 때, 입증(立證)보다는 방증(傍證)이 더 중요하게 취급된다는 점을 모르는 법조인((法曹人)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입증자료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자백(自白)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拷問)이라는 악행(惡行)을 저지르기도 했지요. 그렇게 방증은 입증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방증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입증자료는 신뢰할 수 없다는 초심으로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결과, 방증(傍證)을 외면하고 입증(立證)에만 연연(戀戀)한다면 그런 행위(行爲)가 바로 사법농단(司法壟斷)입니다.(최대우 2019. 03. 07)
가정집에서는 현관문(대문)을 단단히 걸어 잠가야지만 도둑 과 강도의 출몰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습니다. 국가안보는 가정집의 현관문(대문)처럼 그렇게 매우 중요합니다. (최대우 2018. 05. 11)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있는 대한민국은 국토방위에 매우 취약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안방어 임무에 최적화된 6개해병사단 창설은 불가피합니다. 그 중에 2개해병사단은 강원도 동해안지역을 방어하고 있는 육군 8군단을 대신하여 교체 투입하고, 3개해병사단은 경기도/인천 서해안지역을 방어하고 있는 육군 수도군단을 대신하여 교체 투입한 후 물샐틈없이 방어해야 합니다. 그리고 육군 53보병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부산/울산지역은 해병대가 방어하기에 적합한 해안방어지역이므로 나머지 1개해병사단은 부산/울산지역에 교체 투입한 후 효율적으로 방어해야 합니다.(최대우 2016. 06. 29 원본 / 2017. 09. 05 수정본)
// ( KaKaoStory ID : vvcdw1962 ) // // ( v v c d w 1 9 6 2 )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일본의 싸움 중 가장 처절했던 이오지마 전투 참전용사 데이비드 세브란스 예비역 미 해병대 대령이 10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당시 부하 해병대원들한테 이오지마에서 가장 높은 곳에 대형 성조기를 세우게 한 그의 일화는 할리우드 영화 ‘아버지의 깃발’(2006)에 잘 그려져 있다. 고인은 2차대전 종전 후에도 군대에 남았고 6·25전쟁은 물론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다.
미 해병대는 7일 공식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2차대전과 6·25전쟁,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인 세브란스 대령이 지난 2일 102세로 타계했다”고 전했다. 이어 “오늘 우리는 잠시 발길을 멈추고 이오지마에 성조기를 게양한 해병대원들의 지휘관이자 은성무공훈장(Silver Star) 수훈자인 고인을 기린다”고 덧붙였다.
고인은 1919년 2월 위스콘신주(州)에서 태어나 콜로라도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학을 다니다가 순전히 돈을 벌 목적으로 1941년 해병대에 입대했다. 그해 12월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2차대전에 뛰어들면서 고인은 대학 재학 경력을 인정받아 사관교육대(OCS·Officer Candidates School)에 보내졌고 소정의 훈련을 마친 뒤 소위로 임관했다.
1943년 일본과의 전투가 격렬하던 태평양 전선에 배치된 고인은 제5해병사단 소속으로 부건빌 전투 등에 참여했다. 대위 진급 후 하와이에서 짧은 휴식을 취한 뒤 1945년 2월 이번에는 태평양의 작은 섬 이오지마 점령 작전에 투입됐다.
미군 입장에선 이오지마를 차지하면 그곳에 비행장을 세워 일본 본토를 공습할 수 있었다. 이를 잘 아는 일본군도 이오지마 수비 병력을 2만1000여명으로 증원하고, 섬 남동쪽 수리바치산을 중심으로 섬 전체를 요새로 만들었다. 1945년 2월19일 미군은 무사히 섬에 상륙했고 전투는 금방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내륙으로 진입하는 미군은 동굴 진지에 매복해 있던 일본군의 기습에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이오지마의 토양은 화산재라 참호를 파기 어려웠고 엄폐할 곳이 없는 미군 병사들은 일본군의 사격에 그대로 노출됐다.
미군은 동굴 진지마다 일일이 화염방사기 공격을 가하는 악전고투 끝에 가까스로 섬에서 가장 높은 수리바치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1945년 2월23일의 일이었다. 당시 대위로서 중대장을 맡고 있던 고인은 상부로부터 “수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고인의 중대원들이 성조기를 들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처음에는 급한 대로 가로 54인치(137㎝), 세로 28인치(71㎝)의 성조기를 세웠다. 하지만 너무 작다는 지적에 섬 근처의 해군 군함에서 가로 96인치(243㎝), 세로 56인치(142㎝)의 대형 성조기를 급히 구해와 다시 게양했다.
고인이 이끌던 중대에 속한 5명의 해병대원이 대형 성조기가 매달린 깃대를 수직으로 세우는 모습을 담은 역사적 사진이 이때 촬영됐다. 우여곡절 끝에 성조기를 두 번 게양한 이 과정은 할리우드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아버지의 깃발’에 잘 그려져 있다. 할리우드 배우 닐 맥도프가 작품 속에서 당시 중대장이던 고인의 배역을 맡아 연기했다.
성조기 게양 후에도 이오지마 전투는 계속 이어졌다. 일본군의 전멸로 상황이 종료한 것은 미군의 상륙 후 1개월도 더 지난 1945년 3월26일의 일이었다. 미군 사상자는 2만6000명이 넘었는데 이는 태평양전쟁을 통틀어 미군 사상자가 일본군 사상자보다 더 많은 유일한 전투였다. 고인이 이끌던 중대도 부대원의 무려 84%가 사상자로 기록됐다. 끝까지 생존해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로로 고인에겐 은성무공훈장이 수여됐다.
일본 패망 후 잠시 일본 점령 임무에 관여했던 고인은 1945년 말 미국으로 돌아가 조종사 교육을 받고 해병대 파일럿이 되었다. 1950년 한국에서 6·25전쟁이 터지자 다시 전투 현장에 뛰어든 고인은 총 69회 출격해 임무를 수행했고 비행십자가 훈장을 받았다. 그는 계속 해병대에 남아 있으면서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하고 1968년에야 대령 계급을 끝으로 퇴역했다.
은퇴 후에는 날씨가 좋은 캘리포니아주에 정착해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2019년 100세가 된 것을 기념해 지역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고인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면서 “그냥 30년 동안 해병대원이었고 평생 감옥에 간 적이 없다는 점 정도”라고 답해 좌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사진 설명) 1945년 2월 이오지마 전투 당시 섬에서 가장 높은 수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미국 해병대원들을 촬영한 사진. 미 해병대 SNS 캡처
이오지마에 성조기 꽂은 세브란스 美 해병 대령 별세
입증(立證)은 조작(造作)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방증(傍證)은 조작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방증은 입증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전에 의심받을 행동을 하게된다면 그것은 방증(傍證)으로 나타날 수 있으니 조심(操心)해야 합니다. (최대우 2021. 04. 16)
법률적(法律的) 판단(判斷)이 요구(要求)될 때, 입증(立證)보다는 방증(傍證)이 더 중요하게 취급된다는 점을 모르는 법조인((法曹人)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입증자료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자백(自白)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拷問)이라는 악행(惡行)을 저지르기도 했지요. 그렇게 방증은 입증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방증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입증자료는 신뢰할 수 없다는 초심으로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결과, 방증(傍證)을 외면하고 입증(立證)에만 연연(戀戀)한다면 그런 행위(行爲)가 바로 사법농단(司法壟斷)입니다.(최대우 2019. 03. 07)
가정집에서는 현관문(대문)을 단단히 걸어 잠가야지만 도둑 과 강도의 출몰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습니다. 국가안보는 가정집의 현관문(대문)처럼 그렇게 매우 중요합니다. (최대우 2018. 05. 11)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있는 대한민국은 국토방위에 매우 취약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안방어 임무에 최적화된 6개해병사단 창설은 불가피합니다. 그 중에 2개해병사단은 강원도 동해안지역을 방어하고 있는 육군 8군단을 대신하여 교체 투입하고, 3개해병사단은 경기도/인천 서해안지역을 방어하고 있는 육군 수도군단을 대신하여 교체 투입한 후 물샐틈없이 방어해야 합니다. 그리고 육군 53보병사단이 방어하고 있는 부산/울산지역은 해병대가 방어하기에 적합한 해안방어지역이므로 나머지 1개해병사단은 부산/울산지역에 교체 투입한 후 효율적으로 방어해야 합니다.(최대우 2016. 06. 29 원본 / 2017. 09. 05 수정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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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글] 이오지마에 성조기 꽂은 세브란스 美 해병 대령 별세 - 세계일보 김태훈 기자 (2021. 08. 08)
{역사적 사진… 美 해병대 ‘상징’으로 남아}
{할리우드 영화 ‘아버지의 깃발’로 재조명}
{6·25전쟁에도 참전… 조종사로 69회 출격}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과 일본의 싸움 중 가장 처절했던 이오지마 전투 참전용사 데이비드 세브란스 예비역 미 해병대 대령이 10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당시 부하 해병대원들한테 이오지마에서 가장 높은 곳에 대형 성조기를 세우게 한 그의 일화는 할리우드 영화 ‘아버지의 깃발’(2006)에 잘 그려져 있다. 고인은 2차대전 종전 후에도 군대에 남았고 6·25전쟁은 물론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했다.
미 해병대는 7일 공식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2차대전과 6·25전쟁, 베트남 전쟁 참전용사인 세브란스 대령이 지난 2일 102세로 타계했다”고 전했다. 이어 “오늘 우리는 잠시 발길을 멈추고 이오지마에 성조기를 게양한 해병대원들의 지휘관이자 은성무공훈장(Silver Star) 수훈자인 고인을 기린다”고 덧붙였다.
고인은 1919년 2월 위스콘신주(州)에서 태어나 콜로라도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학을 다니다가 순전히 돈을 벌 목적으로 1941년 해병대에 입대했다. 그해 12월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2차대전에 뛰어들면서 고인은 대학 재학 경력을 인정받아 사관교육대(OCS·Officer Candidates School)에 보내졌고 소정의 훈련을 마친 뒤 소위로 임관했다.
1943년 일본과의 전투가 격렬하던 태평양 전선에 배치된 고인은 제5해병사단 소속으로 부건빌 전투 등에 참여했다. 대위 진급 후 하와이에서 짧은 휴식을 취한 뒤 1945년 2월 이번에는 태평양의 작은 섬 이오지마 점령 작전에 투입됐다.
미군 입장에선 이오지마를 차지하면 그곳에 비행장을 세워 일본 본토를 공습할 수 있었다. 이를 잘 아는 일본군도 이오지마 수비 병력을 2만1000여명으로 증원하고, 섬 남동쪽 수리바치산을 중심으로 섬 전체를 요새로 만들었다. 1945년 2월19일 미군은 무사히 섬에 상륙했고 전투는 금방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내륙으로 진입하는 미군은 동굴 진지에 매복해 있던 일본군의 기습에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이오지마의 토양은 화산재라 참호를 파기 어려웠고 엄폐할 곳이 없는 미군 병사들은 일본군의 사격에 그대로 노출됐다.
미군은 동굴 진지마다 일일이 화염방사기 공격을 가하는 악전고투 끝에 가까스로 섬에서 가장 높은 수리바치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1945년 2월23일의 일이었다. 당시 대위로서 중대장을 맡고 있던 고인은 상부로부터 “수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고인의 중대원들이 성조기를 들고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처음에는 급한 대로 가로 54인치(137㎝), 세로 28인치(71㎝)의 성조기를 세웠다. 하지만 너무 작다는 지적에 섬 근처의 해군 군함에서 가로 96인치(243㎝), 세로 56인치(142㎝)의 대형 성조기를 급히 구해와 다시 게양했다.
고인이 이끌던 중대에 속한 5명의 해병대원이 대형 성조기가 매달린 깃대를 수직으로 세우는 모습을 담은 역사적 사진이 이때 촬영됐다. 우여곡절 끝에 성조기를 두 번 게양한 이 과정은 할리우드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아버지의 깃발’에 잘 그려져 있다. 할리우드 배우 닐 맥도프가 작품 속에서 당시 중대장이던 고인의 배역을 맡아 연기했다.
성조기 게양 후에도 이오지마 전투는 계속 이어졌다. 일본군의 전멸로 상황이 종료한 것은 미군의 상륙 후 1개월도 더 지난 1945년 3월26일의 일이었다. 미군 사상자는 2만6000명이 넘었는데 이는 태평양전쟁을 통틀어 미군 사상자가 일본군 사상자보다 더 많은 유일한 전투였다. 고인이 이끌던 중대도 부대원의 무려 84%가 사상자로 기록됐다. 끝까지 생존해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로로 고인에겐 은성무공훈장이 수여됐다.
일본 패망 후 잠시 일본 점령 임무에 관여했던 고인은 1945년 말 미국으로 돌아가 조종사 교육을 받고 해병대 파일럿이 되었다. 1950년 한국에서 6·25전쟁이 터지자 다시 전투 현장에 뛰어든 고인은 총 69회 출격해 임무를 수행했고 비행십자가 훈장을 받았다. 그는 계속 해병대에 남아 있으면서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도 참전하고 1968년에야 대령 계급을 끝으로 퇴역했다.
은퇴 후에는 날씨가 좋은 캘리포니아주에 정착해 조용히 여생을 보냈다. 2019년 100세가 된 것을 기념해 지역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고인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면서 “그냥 30년 동안 해병대원이었고 평생 감옥에 간 적이 없다는 점 정도”라고 답해 좌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
(사진 설명) 1945년 2월 이오지마 전투 당시 섬에서 가장 높은 수리바치산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하는 미국 해병대원들을 촬영한 사진. 미 해병대 SNS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