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시집간 새댁이 이른 새벽 시부모님과 시누를 따라 밭에서 겨울 초를 캐었다.
땅은 살얼음이 얼어 있었고 감천 화력 발전소 옆 갯바람은 그으름을 퍼 부었다. 온 몸은 동태가 되어가고 발이 얼어 숨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장터에서 장사만 하던 새댁이 그 많은 채소와 파 밭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매일 가족끼리 작업을 하여 충무동 시장에까지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은 어머님과 내 차지였다. 몇 시간 밭에서 캔 채소를 무겁게 머리에 이고 집에 오면 힘이 넘치는 아들 넷은 모두 자고 있었다. 발이 너무 시려 방에 들어가면 그때까지 남편은 이불 밑에 자고 있었다. 시댁의 층층 시하 할머니를 비롯 열 네명의 가족들 중 시숙과 남편 시동생 둘 남자 넷 시누 셋 모두 할 일이 없어 놀고 있었지만 채소 하나 손도 까딱 하지 않았다. 끔찍히 자식을 사랑하는 시어머님은 모두 자식들을 (도도새) 게으름뱅이로 만들었다.
얼어 빠진 발을 이불 밑에 녹이며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화를 남편에게 쏟아놓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바보처럼 울기만 했다. 겨우 남편은 아내 때문에 채소를 고를 때 도와주고 그 다음 일은 남의 일이었다.
그 채소를 다듬어서 고무통에 나는 40단 어머님은 30단을 머리에 이고 버스를 타기 위해 감천 입구 계단을 올라올 때 숨이 멋어 버릴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 충무동 시장까지 머리에 이고 옮길 때도 목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이 아팠다. 가난한 친정서 밥먹기도 힘들다가 30분 선을 보고 시 고모님의 말만 듣고 부자 집 둘째 아들에다 울산 대림건설 전기 기사라는 소리에 너무도 좋아 벼락치기 결혼을 하였다.
부푼 가슴을 안고 결혼을 하고 보니 구십구프로가 거짓이었고 친정어머님은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한 달에 쌀 한 가마씩 먹는 밥을 가마솥에 불을 집혀 하면서 형님은 아이 때문에 거들어 줄 뿐 새댁은 수도도 하수구도 없는 부엌에서 숨막히는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별로 잘 못한 것도 없는데 시어머니 시누의 벼락같은 목소리에 시아버님도 말한마디 못하시고 너무 무서워 죽은 듯이 소처럼 일만 했다.
해가 중천에 떠서 땀흘려 일을 해야하는데 무능하게 놀기만 하는 남편을 닥달하여 결혼 6개월 만에 모두가 꺼린다는 하와이라는 전라도 여수 호남화력으로 직장을 갔다. 어떤 곳일까, 남편 직장을 따라 간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들뜨 있었다.
배에서 내려 택시에 이불을 싣고 고불고불 산길을 따라 첩첩 산중으로 들어갔다.
큰 기대를 걸고 어둠속에 도착한 곳은 전라남도 여천군 삼일면 상촌 마을이었다. 아무런 방도 준비해 놓지않고 어두운 골목길을 전등하나 들고 방을 얻기 위해 하촌에서 상촌까지 삿삿히 뒤져도 방이 없어다. 마지막 집에 들려 방하나 달라고 애원을 했더니 고구마를 재 놓은 창고 방을 한달에 3만원을 계약하고 부모님같은 분이 내 주셨다. 아마도 자식같이 안스러웠던 모양이었다.
하루 종일 배를 타고 시달려 임신한 몸은 눈도 뜨기 힘이 들었다. 지친 몸은 아무대나 누워버리고 싶은 차에 창고 방도 왠 떡이야,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구마를 다른곳으로 옮기고 그날 신문지를 깔고 대강 닦아 잠을 잤다. 이삿짐이라야 이불 속에 남비 두개 밥그릇 두개만이 신혼 살림 전부였다.
다음날 신문지로 벽을 바르고 못을 박아 옷을 걸고 청소를 하여 신혼 첫 살림을 차렸다.
물동이와 도마 칼을 큰 방에서 얻고 연탄 아궁이 하나 있는 방도 감사히 생각하고 살았다.
그 후 평생 먼지 한번 묻히지 않고 땀 한번 흘리지 않은 가장은 열심히 일을 다녔다. 나는 점심 밥을 하여 논둑길을 걷고 개울을 건너 약 40분 걸어서 남편과 함께 산위에 올라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매일 무슨 반찬을 해서 맛있게 먹을까 첫아이를 임신하고 입덧이 나서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힘이 없고 눕고만싶어지니
모든 매사가 힘들고 귀찮았다. 그러나 남편과 점심을 먹을때 제일 행복했다. 그러나 현장일도 호남화력 1년 다음해 포항 제철에서 1년 직장을 다니고, 친척 회사 3년을 다닌것이 남편의 마지막 직장이었다.
부잣집 둘째라고 시집을 오고 보니, 빈털터리에 병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종손 역할을 하였지만 남편은 진정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아직도 아내에게 큰 소리를 치며 미안한 생각이 별로 없다. 자신이 복이 많기 때문이란다. 아들 며느리들은 전생에 아버지는 나라를 구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 순간마다 때때로 지난 아픔이 억새풀처럼 불쑥 불쑥 올라올 때도 많다. 그 많은 세월을 감정의 노동과 육체적 시련을 무엇으로 표현 할 길이 없다.
요즘 사람들은 아이 하나 키우는 데도 힘이 든다고 아예 아이를 낳지 않는 세상에
나는 아들 넷 중 막내 (쌍둥이)를 업고 머리에 옷 봇짐을 이고 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질경이 처럼 살아왔다. 가장이라는 이름만 걸머지고 아내를 그토록 고생시켰던 철없는 가장을 어쩔 것인가, 아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용서를 해야 한다. 미워하고 분노하면 내가 병들기 때문이다.
내가 행복해 지기위해 분노와 저주 원망을 사랑으로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은 건강하게 아들 넷 아버지로 아들들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손자들의 재롱을 보며 살아가고 있다.
저물어 가는 날에 내 모든 것을 비우고 용서 할 수 없는 것도 용서를 해야 할 시간이다.
하루하루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마음을 차분히 내려놓으니 전생에 그 많은 빚을 졌던가 뇌리속에 그무엇이 쏴~아하게 스치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픔도 미움도 슬픔도 모두 씻어버리고 사랑과 감사의 기도로 두 손을 모운다.
옛날며늘들의 고생 (퍼)
그당시 며늘로 살라면 요즘은 그누가 살까?
순진하고 착한 그때 그머늘들중 이야기하나 해본다.
갓 시집간 새댁이 이른 새벽 시부모님과 시누를 따라 밭에서 겨울 초를 캐었다.
땅은 살얼음이 얼어 있었고 감천 화력 발전소 옆 갯바람은 그으름을 퍼 부었다. 온 몸은 동태가 되어가고 발이 얼어 숨이 멎어버릴 것 같았다. 장터에서 장사만 하던 새댁이 그 많은 채소와 파 밭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매일 가족끼리 작업을 하여 충무동 시장에까지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은 어머님과 내 차지였다. 몇 시간 밭에서 캔 채소를 무겁게 머리에 이고 집에 오면 힘이 넘치는 아들 넷은 모두 자고 있었다. 발이 너무 시려 방에 들어가면 그때까지 남편은 이불 밑에 자고 있었다. 시댁의 층층 시하 할머니를 비롯 열 네명의 가족들 중 시숙과 남편 시동생 둘 남자 넷 시누 셋 모두 할 일이 없어 놀고 있었지만 채소 하나 손도 까딱 하지 않았다. 끔찍히 자식을 사랑하는 시어머님은 모두 자식들을 (도도새) 게으름뱅이로 만들었다.
얼어 빠진 발을 이불 밑에 녹이며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화를 남편에게 쏟아놓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못하고 바보처럼 울기만 했다. 겨우 남편은 아내 때문에 채소를 고를 때 도와주고 그 다음 일은 남의 일이었다.
그 채소를 다듬어서 고무통에 나는 40단 어머님은 30단을 머리에 이고 버스를 타기 위해 감천 입구 계단을 올라올 때 숨이 멋어 버릴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려 충무동 시장까지 머리에 이고 옮길 때도 목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이 아팠다. 가난한 친정서 밥먹기도 힘들다가 30분 선을 보고 시 고모님의 말만 듣고 부자 집 둘째 아들에다 울산 대림건설 전기 기사라는 소리에 너무도 좋아 벼락치기 결혼을 하였다.
부푼 가슴을 안고 결혼을 하고 보니 구십구프로가 거짓이었고 친정어머님은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한 달에 쌀 한 가마씩 먹는 밥을 가마솥에 불을 집혀 하면서 형님은 아이 때문에 거들어 줄 뿐 새댁은 수도도 하수구도 없는 부엌에서 숨막히는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별로 잘 못한 것도 없는데 시어머니 시누의 벼락같은 목소리에 시아버님도 말한마디 못하시고 너무 무서워 죽은 듯이 소처럼 일만 했다.
해가 중천에 떠서 땀흘려 일을 해야하는데 무능하게 놀기만 하는 남편을 닥달하여 결혼 6개월 만에 모두가 꺼린다는 하와이라는 전라도 여수 호남화력으로 직장을 갔다. 어떤 곳일까, 남편 직장을 따라 간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들뜨 있었다.
배에서 내려 택시에 이불을 싣고 고불고불 산길을 따라 첩첩 산중으로 들어갔다.
큰 기대를 걸고 어둠속에 도착한 곳은 전라남도 여천군 삼일면 상촌 마을이었다. 아무런 방도 준비해 놓지않고 어두운 골목길을 전등하나 들고 방을 얻기 위해 하촌에서 상촌까지 삿삿히 뒤져도 방이 없어다. 마지막 집에 들려 방하나 달라고 애원을 했더니 고구마를 재 놓은 창고 방을 한달에 3만원을 계약하고 부모님같은 분이 내 주셨다. 아마도 자식같이 안스러웠던 모양이었다.
하루 종일 배를 타고 시달려 임신한 몸은 눈도 뜨기 힘이 들었다. 지친 몸은 아무대나 누워버리고 싶은 차에 창고 방도 왠 떡이야, 감사하는 마음으로 고구마를 다른곳으로 옮기고 그날 신문지를 깔고 대강 닦아 잠을 잤다. 이삿짐이라야 이불 속에 남비 두개 밥그릇 두개만이 신혼 살림 전부였다.
다음날 신문지로 벽을 바르고 못을 박아 옷을 걸고 청소를 하여 신혼 첫 살림을 차렸다.
물동이와 도마 칼을 큰 방에서 얻고 연탄 아궁이 하나 있는 방도 감사히 생각하고 살았다.
그 후 평생 먼지 한번 묻히지 않고 땀 한번 흘리지 않은 가장은 열심히 일을 다녔다. 나는 점심 밥을 하여 논둑길을 걷고 개울을 건너 약 40분 걸어서 남편과 함께 산위에 올라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매일 무슨 반찬을 해서 맛있게 먹을까 첫아이를 임신하고 입덧이 나서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힘이 없고 눕고만싶어지니
모든 매사가 힘들고 귀찮았다. 그러나 남편과 점심을 먹을때 제일 행복했다. 그러나 현장일도 호남화력 1년 다음해 포항 제철에서 1년 직장을 다니고, 친척 회사 3년을 다닌것이 남편의 마지막 직장이었다.
부잣집 둘째라고 시집을 오고 보니, 빈털터리에 병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종손 역할을 하였지만 남편은 진정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아직도 아내에게 큰 소리를 치며 미안한 생각이 별로 없다. 자신이 복이 많기 때문이란다. 아들 며느리들은 전생에 아버지는 나라를 구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 순간마다 때때로 지난 아픔이 억새풀처럼 불쑥 불쑥 올라올 때도 많다. 그 많은 세월을 감정의 노동과 육체적 시련을 무엇으로 표현 할 길이 없다.
요즘 사람들은 아이 하나 키우는 데도 힘이 든다고 아예 아이를 낳지 않는 세상에
나는 아들 넷 중 막내 (쌍둥이)를 업고 머리에 옷 봇짐을 이고 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질경이 처럼 살아왔다. 가장이라는 이름만 걸머지고 아내를 그토록 고생시켰던 철없는 가장을 어쩔 것인가, 아들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용서를 해야 한다. 미워하고 분노하면 내가 병들기 때문이다.
내가 행복해 지기위해 분노와 저주 원망을 사랑으로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오늘은 건강하게 아들 넷 아버지로 아들들의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손자들의 재롱을 보며 살아가고 있다.
저물어 가는 날에 내 모든 것을 비우고 용서 할 수 없는 것도 용서를 해야 할 시간이다.
하루하루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간다.
마음을 차분히 내려놓으니 전생에 그 많은 빚을 졌던가 뇌리속에 그무엇이 쏴~아하게 스치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아픔도 미움도 슬픔도 모두 씻어버리고 사랑과 감사의 기도로 두 손을 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