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들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ooooooooo2021.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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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년 9월 21일 -11월 15일.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한인들 전원 중앙아시아(6천㎞) 강제 이주당함.
우즈베키스탄 16,272가구 76,525명 이주, 카자흐스탄 20,170가구 총 95,256명 이주.(총 36,422가구. 총 171,781명 이주) 이주 전 한인 지식인 2,500명 총살형. 강제 이주는 지식인의 사전 처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소리 소문 없이 끌려간 수천 명에 달하는 한인 지도자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곧이어 진행된 강제 이주에 대한 통보 역시 출발 며칠 전에야 이루어졌다.



이주 통보 이후 여행이 중지된 상황에서 거의 맨몸으로 이들은 정든 땅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곡식의 씨앗은 잊지 않았다고 하니 한인들의 농사에 대한 집념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화물차와 가축 운반 차를 개조한 차량에 짐짝처럼 실린 이들은 매서운 시베리아의 삭풍 속을 한 달여 간 달려 중앙아시아에 도착했다. '먹을 것을 전혀 공급하지 않아' 기차가 석탄이나 물을 보충하기 위해 역에 서면 간이 상점에 뛰어가 '빵 등 사람 먹는 것은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사다 먹으면서' 여행을 했다. 열차에 화장실이 없었으며 역 구내에 열차를 세우면 모두가 내려 대소변을 본다고 '역도 아닌 허허벌판'에 차를 세웠다.



마른 음식을 계속 먹으며 고통을 겪다가 열차가 섰을 때 나뭇가지를 주워 불을 지피고 국물이라도 끓이려고 하면 열차가 떠나곤 하여 제대로 끓여 먹지도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자연히 여린 노인과 어린이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여행 중에 아이들 사이에 홍역이 발생하여 유아 사망률이 60%를 상회하였다. 여행 중에 가족이 여러 열차로 흩어져 이산 가족도 다수 발생하였고 사고도 발생하였다. 한인들이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한 후 수용 시설이라곤 전혀 없는 허허벌판에 내려 놓았다. 그 무서운 겨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다. 1938년도의 인구 표본 조사를 보면 1천 명 당 42명이 사망했으며 유아 사망률은 20%나 되었다.




특히 고통스러웠던 기간은 이주 첫해 겨울부터 이듬해 농사를 짓기까지의 기간이었는데 토굴이나 창고, 마구간 등을 개조하여 겨울을 났으며 방바닥은 맨 땅이었다고 한다.
강제 이주 이후 한인의 거주 이전은 제한되었다. 한인들은 일정한 거주 구역이 명시된 신분증을 소지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적어도 1953년까지 약 16년 간 집단적으로 수용소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민족 교육이 금지되었음은 물론 국가 기관 취업과 취학에도 제한이 있었다. 사회 정치적 진출도 사실상 봉쇄되어 있었다.



이 모든 제한은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비로소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한인은 벼농사를 시작하여 우즈베키스탄은 주요 쌀 농사 지역으로 변화하였다. 한인은 목화 등 다른 작물에서도 뛰어난 실적을 올리면서 빠르게 정착해 갔다. 전후 한인은 중앙아시아 개발에 앞장서 특유의 개척 정신과 영농법으로 수많은 모범 콜호즈를 탄생시켰다. 소연방이 자랑하던 콜호즈는 모두 한인 콜호즈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노력 영웅을 낳았음은 물론이다. 인구 대비 노력 영웅 비율은 모든 민족 가운데 최고를 자랑하였다.

강제이주에 관한 가장 정확한 증언자로 알려진 송희현씨(74)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얘기해 주었다.



“나는 1937년 10월 11일 오후에 블라디보스톡역에서 기차에 태워졌소. 사실은 그보다 앞서 태워지도록 되어 있었는데 아내가 출산하기 위해 입원하는 바람에 늦어졌소. 그래서 내 어머니와 헤어지게 되었고 그 같은 모자의 생이별은 그 후로 꼬박 5년 동안 중앙아시아 곳곳을 서로 찾아 헤매는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말았소. 강제 이주는 아주 치밀한 사전 계획과 철통 같은 감시 아래서 이뤄졌소. 국제적인 문제로 노출되지 않기 위해서였소. 이주에 주로 이용된 철도는 시베리아 철도였소.



 시베리아 철도를 핵심 노선으로 하여 사방에 흩어져 있던 고려 사람들은 며칠 앞서서 소환장을 발부했소. 간단한 살림 도구만 챙겨서 전가족이 시간엄수 집합하라는 것이었소. 정말 어느 날 갑자기 통지서가 나온 거지요. 당황해할 겨를도 주지 않았소. 어떤 지역에서는 그 때 한창 가을걷이를 할 무렵이었는데 얼마간의 곡식값을 주기도 했소. 이사 비용이라면서 일률적으로 성인 1인당 160루블을 지급했소.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끌려나갔소. 하도 어이없는 일이어서 별다른 준비도 못하고 당황해하기만 하다가 기차를 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소. 기차는 맨 처음부터 태울 사람 숫자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한 곳에서 몽땅 태운 다음 출발했소. 사람들마다 탄 곳이 다 다르지요. 한번 움직이기 시작한 기차는 좀체 쉬지 않았소. 기차를 타고 보니 그것은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 객차가 아니라 화물차였소. 벽은 두꺼운 판자를 가로질러 만들었고 바닥도 판자였소. 벽은 판자 틈서리가 제법 벌어져서 기차가 달리자 바람이 심하게 새어들었고 바닥도 그랬소. 안에는 출입문을 중앙으로 해서 좌우로 제법 선반을 질러놓았더랬소. 2층이지요. 한 층에 10명씩을 배정했소. 그러니까 한쪽에 20명이고 화물 객차 하나에 모두 40명이 타게 된 거지요. 대개 가족 단위로 태워졌소.




낮에는 그런대로 참아냈지만 저녁이 되어 기온이 뚝 떨어지자 기차 안은 얼음이 얼었소. 준비해온 이불이며 옷가지가 모두 변변찮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우리는 얼어붙기 시작했소. 나는 젖먹이가 딸린 아내 때문에 더욱 고통스러웠소.아내는 아직 몸이 덜 여문 상태였기 때문에 고통은 말할 수 없이 극심했소. 상상에 맡기겠소. 기차는 쉬지를 않았소. 대소변볼 틈도 안 주었소. 마실 물이며 끼니를 해결할 방도가 없었소. 한두 끼니는 가지고 온 음식으로 때웠는데 나는 아내에게 물이라도 마시게 해주고 싶었지만 도리가 없었소. 당신은 상상할 수 있겠소. 그런 상태로 꼬박 42일 동안을 실려갔소.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느냐고는 묻지 마시오. 우리가 살아난 것은 그냥 한(恨)때문이오.”



- 까레이스끼 또 하나의 민족사 중 223,224페이지 -



이주자들은 당시 짐을 챙기는데 24시간이 주어졌다고 한다. 일주일 전에 사실을 안 사람들도 묘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식탁, 의자 등 가구를 팔려 해도 이미 아무도 사려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