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가 거지라서 많이 미안해

거지2021.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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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때 그림 그리는게 좋다고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디자인 고등학교로 진학했었지

나름 영수 과외도 받으면서
내신으로 중앙대 가자는 과외쌤 따르면서 공부 하고
나름 지딴에는 열심히 하긴 했다고 내신 1~2등급 유지하니까
담임선생이 "결국 취업할거면 지금 하는게 낫다"라고 꼬드겼었고
3학년 2학기동안 건강보험공단에 인턴으로 들어갔었어

학교에서는 인턴 몇 개월 하면 정직원이 될것처럼 얘기했지만
입사해보니 내 경쟁 상대는 전국에 있는 19~32살의 사람들이었고
많은 사람들 중 10명도 안되게 뽑는 경쟁에서 탈락하고 말았지
그 와중에 난 병신마냥 취업했답시고 수능도 보지를 않았고
탈락한 이후에 대학을 확인해보니까 들어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 취업 잘 된다는 폴리텍 대학교 산업디자인과로 입학을 했지

비록 똥통학교 소리는 들을 수 있으나
열심히 디자인 공부 해서 빨리 취업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대학에서 다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을 했지만
교수들이 취업처에 관련해서 가진 정보는 거의 전무했고
죽어라 여기저기 물어보고 찔러보고 디자인 과외까지 받고 나서야
겨우 디자인 에이전시 취업할 수 있었지

26살, 세전 200에 이제 겨우 일한지 6개월차
집에서 편도 1시간 반정도 거리
디자인 회사가 다 그렇듯 야근은 많지만 수당도 없고
프로젝트 인센티브도 사실상 없는 회사
그럼에도 나한테는 너무나 과분한 회사

몇 명 없는 회사 직원들 무리에는 못 끼어서 겉돌고
잘 하고 싶어서 잡일도 눈에 보이거나 할 수 있는건 다 하려고 하고
성격도 재능도 능력치도 병신이라서
할 줄 아는건 주어진 상황 안에서 지 나름 열심히 노력하는것 뿐이지만
디자인 실력이나 일머리는 좀처럼 안늘고
열심히 주어지는 일 하다보면 실력이 늘고 에이전시를 탈출할거라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네





그래도 너랑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좋고 행복해서
그렇게 5년이 넘는 시간동안 너와의 결혼을 꿈꾸며 살아왔는데
오늘 네가 친한 언니들을 오랜만에 만나고 와서
기가 죽은 것처럼 보이는게 어째선지 너무 내 마음을 후벼파더라

내가 끈질기게 계속 캐묻고난 이후에야 겨우
"아닌 사람도 분명 많을텐데.. 내 주변 사람들은 다들 남자친구가
왜 그렇게 잘 나가는걸까?"라면서
혹여나 내가 상처 받을까 조심스레 말하는 네 모습을 보니까
내가 너무 한심스럽게 느껴지더라

전에도 친한 언니들을 가끔 만나고 오면
언니들이랑 어떤 얘기 했는지 하나하나 꼭 보고해야 직성이 풀리는 네가
가끔씩 언니들의 남자친구 얘기를 하던거는 별로 와닿지 않았었는데
오늘은 왜 자꾸 그 언니들의 남자친구 얘기가 내 머릿속에서 멤도는건지
누구네 남자친구는 삼성이나 엘지같은 대기업에 다니고
누구네 남자친구는 부모님 가업 물려받고
누구네 남자친구는 사업 하고





너랑 결혼하고 싶어서 빨리 취업하려고 했던게 너무 급했던걸까
아니면 내가 인생을 열심히 안살아서 그런걸까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배워서 돈 많이 벌어다줄게"
"내가 너보다 돈 더 많이 벌고 모아서 최대한 빨리 결혼할거야"
"결혼하고 나면 내가 돈 벌테니까 넌 그냥 하고싶은거 하면서 살아"
맨날 쉽게 하던 이 말들을
오늘은 정말 절대 못하겠더라

정말 난 일 열심히 오래 할 수 있는데
너 힘들지 않게 해주고 싶은데
오늘 처음으로 이런 내 고집이 너라는 여자를 나한테 묶어둔건 아닌지
내가 잘못하는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덜컥 겁이 나더라

그런데도 난 너무 욕심많은 한심한 남자친구라서
너랑 여전히 함께 하고 결혼하고 싶어
나한테 오늘도 사랑해라고 말해주고 자러간 네가
나한테는 너무나도 과분하고 이쁜 네가
너무 욕심이 나서
세상 잘난 남자들이 너를 선택하지 않고
못난 내가 널 먼저 발견했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생겨 한심하게도

나를 너무 사랑해줘서 고마워 지혜야
남자친구가 한심한 거지라서 많이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