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은은 참지 못하고 그 다음날로 병준을 만났다. 차가운 냉커피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좀 살 것 같았다.
"야, 도대체 그 계획이 뭔데?"
"그를 더 자극해보는 거야. 분명 그 사람은 질투를 했어. 그게 어느 정도 의 감정이건 간에....분명히 반응을 보였다구.....그걸 더 자극하는 거 야...."
"어떻게?"
"넌 그의 일정을 알아봐. 특히 호텔이나 아님 그런 특별한 장소에서의 약 속같은 거....."
"그런 건 왜?"
"그곳에서 그와 마주치는 거야."
"야! 너 미쳤어? 그럼 단박에 우릴 의심할 거야......"
"바로 그걸 노리자는 거야....."
"야, 그러다 완전히 끝나면?"
"그 정도는 감수를 해야지.....안 그러면 그 사람은 다른 여자 품으로 날아 가버릴텐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하는 거 아니야?"
"날 경멸하면 어떡해?"
"난 너보다 내가 더 걱정이 돼. 아무래도 내 턱이 염려가 되거든......그 사람은 이성으로 넌 동생일뿐이다라고 억누르고 있는 거야.....그런 사람은 자기가 정해놓은 선 이상은 여간해선 넘지 않거든......"
"너 심리학 공부도 했냐?"
"우리 과하고 얼마나 연관이 많은데......연기는 그냥 하는 게 아니야. 다 사람들 심리하고 연관된 거라구....."
"정말 잘 될까?"
서은은 조금은 의심스런 마음으로 하지만 조금은 기대하는 표정으로 병준을 쳐다봤다.
하지만 병준 말대로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그거라도 기대를 해보는수밖에.......하지만 서은은 역시 불안한 마음만은 어쩔 수 없었다. 서은은 그의 스케줄을 알아내기 위해 무진장 고생을 했다. 우선 그녀는 석훈을 한 번 더 만나야 했다. 그는 PDA로 자신의 스케줄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를 만나서 몰래 그 정보를 빼내는수밖에 없었다. 서은의 전화에 그는 다시 쉽게 응했다. 그는 요즘 조금은 변한듯했다. 여전히 그녀를 여동생 취급할 뿐이었지만 그녀와의 만남에 순순히 응하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들은 가볍게 맥주를 마셨다. 그를 보니 다시 가슴이 뛰었다. 이렇게 같이 있는 것이 좋을 수가 없다. 이런 걸 갖고 사랑에 빠졌다고 하는 것인가 보다.....
"공부는 잘돼?"
"그럭저럭이요."
"데이트도 잘하고 있고......?"
"네....."
석훈이 씁쓸한듯 웃었다.
"오빠도 애인이랑 잘되고 있는 거죠?"
"그렇지, 뭐....."
서은은 그의 PDA를 노리고 있었다. 그의 가방에 들어있을 것이다. 그는 그녀와 만날 때도 가끔은 그것을 꺼내 확인하곤 했던 것이다. 그가 화장실을 갈 때만을 노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오늘 따라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결혼은 언제쯤 하실 거에요?"
"좀 서두르려고.....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갑자기 가슴에서 뭔가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다행인지 그때 석훈이 일어났다.
서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서은은 재빨리 움직였다. 그의 이번달 스케줄 표를 보니 다행히도 호텔에서 바이어 약속이 몇개인가 잡혀있었다. 서은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재빨리 PDA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다행히 이 모든 일이 끝났을 때 그가 돌아왔다. 서은이 갑자기 기침을 해대자 석훈이 걱정스럽게 물어봤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요. 사리들렸나봐요.."
"조심해야지....."
석훈이 부드럽게 서은을 쳐다봤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를 동반한 걱정스런 표정을 보자 서은은 이 남자만은 정말 놓치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다소의 찔림은 극복할 수밖에 없다. 그는 서은을 집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그는 잠시 서은에게 뭔가 할말이 있는 것처럼 망설였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은듯 무표정이 되었다. 그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은은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놓칠수는 없었다. 병준과 서은은 서로 디데이를 잡았다. 그의 약속일 중에 병준과 서은은 둘의 시간이 일치하는 날을 선택했다. 하루하루의 시간이 서은이에게 마치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처럼 무섭게 느껴졌다. 정말 잘될까하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취소할까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드이어 디데이.
병준과 호텔입구에 서있으니 서은의 가슴은 억누르지 못할 만큼 콩닥 뛰었다. 죄를 짓는 듯해 서은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켜야했다.
"우리 정말 잘하는 걸까?"
"이 겁장이....사랑을 얻는 건 쉬은 게 아니야. 잃고 나서 후회할래? 이 렇게 된 이상 무라도 잘라야지....."
"알았어......"
서은은 쉼호흡을 했다. 그리고 로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물론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곳에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약속 시간 전에 석훈이 역시 젊어보이는 남자와 나타났다. 그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서은과 병준은 그가 커피숍을 나올 때 자연스럽게 그와 마주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마치 룸이 있는 곳에서 나온듯이 말이다. 서은의 가슴은 계속 콩닥거리고 있었다. 1시간이 거의 됐을 무렵 일본인으로 보이는 남자 둘과 석훈과 그 젊은 남자가 같이 커피숍에서 나왔다. 병준은 떨고 있는 서은을 데리고 자연스럽게 호텔을 나가는듯이 움직였다. 그때였다. 석훈이 병준과 서은을 발견한 것이다. 발견하지 않을래야 발견하지 않을 수없게 병준은 기가 막히는 타이밍으로 그 앞을 지나갔던 것이다. 석훈은 잠시 긴장한듯 보였다. 잠깐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으로 봐서 당황한 것만은 분명했다. 석훈은 일행에게 뭐라고 말을 했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일본말이 오갔기 때문에 서은은 대충 느낌과 익숙한 단어로 미루어 판단할 뿐이었다. 병준이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다. 석훈과 함께 한 일행들이 먼저 사라졌다. 석훈이 잠시 후에 그들 앞으로 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나갈까? 아니 그럴 것 없이 바이어들이 왔을 때마다 주로 묵는 객 실이 있어. 그리로 가지. 지금은 비어있을 테니까....."
그의 목소리는 엄청 가라 앉아있었다. 서은은 자신이 정말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르고 취조당하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석훈이 프론트로 가서 키를 들고 왔다. 병준과 서은은 석훈을 따라 호텔방으로 들어갔다. 호텔방에 들어가서도 그들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우린 서로 좋아하는 사이예요. 무슨 짓을 하든 형님이 상관하실 건 아니 죠."
병준은 의예로 당당하게 대답했다. 석훈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석훈은 병준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는 한대 갈기려는 것 같았지만 이내 참는듯 했다.
"너랑은 나중에 따로 얘기하겠다. 지금은 돌아가라.....지금은 서은 이와 할 얘기가 있어."
병준은 뭐라고 한마디하려는듯 보였지만 이내 문쪽으로 갔다. 그리고는 석훈이 보지 않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는 서은에게 윙크를 하고 사라졌다. 석훈과 서은 사이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물론 이건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난 지금 너한테 정말 실망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얼마나 자유스럽게 연애를 하고 있는가 는 나도 알고 있지만 너한테 정말 실망했다."
"난 어린애가 아니에요."
"그렇다고 넌 아직 어른도 아니야.....더욱이 넌 지금 재수하는 중이라 구....요즘 연애에 빠져서 그것까지 잊어버린 것 아니야?"
"오빠한테 그런 말 들을 입장 아니예요......병준인 내 애인이라구요. 우 린 성인이에요. "
"성적으로 자유로운게 성인이라는 거야?"
갑자기 석훈이 서은에게 다가왔다.
"난 내 행동에 책임을 진다구요."
"어떤 식으로? 서로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너희는 아직 어린애들이 야. 넌 앞으로 대학에 들어가야하고 그 녀석도 이제 겨우 대학 초년생이 라구.....그런 너희들이 뭘 어쩌겠다는 거야?"
"좋아하면 같이 잘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뭐야? 그럼 네가 원한 건 그거였니? 같이 자는 거.....내가 좋다고 했 을 때도 그랬던 거야? 그럼 그렇게 빙둘러 말하지 말고 확실히 말하지 그 랬어. 나랑 자고 싶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이젠 오빠한테 그러고 싶은 맘 사라졌다 구요......"
"그래?....정말로? ...."
그가 갑자기 다가왔다. 그의 손이 서은의 얼굴을 잡았다.
"그 자식을 죽여버리겠어......너를 만진 걸 생각하면 그것도 모자 라....."
그가 무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석훈이 냉정을 잃고 이렇게 화가 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자식이 널 만졌다는 것 생각만 해도 미치겠어......."
그러면서 갑자기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서은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서은은 아주 거칠게 침대에 내동댕이쳐졌다. 서은의 가슴은 엄청나게 방망이질을 쳤다. 석훈이 이렇게 냉정을 잃은 것을 본 적이 없다. 겁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그에게 사실을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와 이런 식으로 맺어지고 싶진 않다. 이렇게 화난 상태에서......하지만 서은의 예상과 달리 석훈은 서은을 내버려두고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그가 방을 나가자 서은은 다리의 힘이 쭉 빠져 일어날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다. 그가 그렇게 괴로워할 줄 알았다면 이런 일은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든 일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서은은 그가 자신에 대한 믿음마저도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서은은 이 일로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이다. 서은은 침대에 누운 채로 울고 있었다. 석훈에겐 그 후로 연락이 없었다. 그렇게 지나간 시간이 벌써 한달이 다 되간다. 서은은 그 일로 병이 나서 몇일은 누워 있어야했다. 병준은 자신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다는 것에 상당히 미안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은은 그의 탓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은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도 점점 더 우울해져갔다. 병준은 그런 서은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미안하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아니야. 괜찮아.......어차피 그 사람과는 인연이 아니었나봐."
"얼굴이 아주 수척해졌어.....그 남잘 정말 좋아하는구나?"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될 거야......"
하지만 말과는 달리 눈이 뜨거워진다.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뜻밖에도 그건 미진의 전화였다. 그녀는 서은에게 만나자고 했다. 서은은 혹시나 자신이 저지른 실수 때문인가 해서 불안해졌다. 그녀와의 약속을 정하고 나자 서은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 여자가 왠일이지?"
"모르겠어.....그 일 때문은 아니겠지?"
"그런 걸 그 여자한테 말했다면 정말 남자도 아니야.......하지만 정말 왜 전화 했을까? 그렇게 유치한 남자는 아닌 것 같던데......"
병준은 이해가 안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약속장소에 나가니 이미 미진이 나와 있었다. 차가운 아름다움이 미진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은은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끼면서 자리에 앉았다.
"내가 왜 전화했는지 알아?"
그녀는 다짜고짜 반말이다.
"아니요....."
"정말 몰라?"
"모르겠어요."
서은도 지지 않고 말했다.
"너 석훈씨한테 어떻게 꼬리친 거야?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봤어. 그 이한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거......"
"당신과 그런 얘기 할 이윤 없다고 생각히요. 저 일어나겠어요. 오빠하고 는 연락도 안하고 깨끗하게 끝났어요....."
"끝났다고?"
"네...."
"너 때문에 그 사람이 변했어.....도대체 그 사람을 어떻게 휘저은 거 야? 물론 어린 너한테 잠시 흥미를 느껴 빠질 수도 있어.....하지만 무 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그 사람 같지가 않아. 말도 안하고 아주 우울해졌 어.....그 사람 예전엔 전혀 그런 사람 아니었어....."
"아무일도 없었어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당신에게 말할 의무 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니 상관있어.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우린 당연히 결혼할 거 라고 생각해왔어. 나나 그 사람이나..... 그런데 그 사람이 나에게 서로 좀더 생각을 해보자고 하더군......그리고 얼마전엔 나에게 <<미안하다> > 고 했어.....물론 난 그 말을 못들은 척 했어.....난 절대로 인정할 수 가 없었거든. 더욱이 너같은 애송이 계집애한텐 절대로 그이를 뺏길 수 없어......."
서은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이 귀에서 윙윙거린다.
"그에게 확실히 네 감정을 말해......그 사람과 넌 아니라고 말이 야......"
"자신이 채이고서 왜 나한테 이러는지 모르겠군요......."
"뭐야? 이 못된 계집애....난 그 사람 이외는 다른 사람은 생각도 안해봤 어.....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
그러면서 미진이 서은의 뺨을 갈겼다.
서은은 놀랐다.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이번 건 참겠어요......당신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기 때문이예요. 하지 만 그 사람과 난 서로 연락도 안해요.....한 번만 더 그러면 저도 당신 을 용서 못해요......."
"용서못하면 네까짓게 어쩔 건데......"
미진이 다시 서은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이번엔 서은도 지지않고 매섭게 미진의 뺨을 때렸다. 미진이 어이가 없다는듯 서은의 뺨을 다시 때리려했다. 그때였다. 미진의 행동이 저지 당했다. 석훈이었다. 이곳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석훈이 미진의 팔을 잡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나한테 이럴 권리는 충분히 있어......바로 이 계집애 때문에 이런 일 이 일어난 거잖아......."
"어리석은 짓 하지마......난 지금까지 너한테 정말 미안했어...그래서 마음이 정말 편치 않았다. 가능하면 어떻게 너한테 상처를 주지 않을까하 고 최대한 생각했어.....하지만 이것으로 깨끗해졌다고 생각하지...너도 지금 너보다 어린애한테 상처를 주고 있는 거야.....난 서은이하고 도 깨끗하게 끝낼 생각이었어.....그게 가능하다면......."
"당신은 지금 나한테 핑계를 대고 있는 거야......"
"그래.....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변명할 생각은 없어.....하지만 이것으 로 너한테 분명히 내 생각을 밝힐 수는 있겠어......너하고의 인연은 이 것으로 끝났어......."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절대로"
미진은 분노로 떨고 있었다. 그리고는 카페를 나갔다. 서은은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질 것 같았다. 그것을 알았는지 석훈이 서은의 팔을 잡고 카페를 나갔다. 그리고는 석훈은 서은을 차에 태웠다. 석훈이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한강고수부지였다.
"나한테 책임감이나 부담감 느낄 필요 없어요......오빠가 그럴만한 일 을 한 적은 전혀 없잖아요......."
"왜 나한테 전화 안했어? 미진이한테 전화왔다고......병준이 전화안해줬 다면 몰랐을 거야......"
"오빠가 나타날 필욘 없었어요......"
"수척해졌군......."
"오빠완 상관없어요......."
"그래? 그럼 집에 가자....데려다줄게......"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서은은 자신이 너무나 비참해지는 것 같았다. 서은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차가 도착하자 서은이 내렸고 석훈은 차를 돌려 그대로 사라졌다. 서은은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부터 서은은 죽기살기로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녀의 변화에 가장 놀라는 건 어머니였다. 어머닌 서은이 맘을 잡았다고 좋아하고 계셨다. 그렇게 시간만 지나가고 있었다. 석훈에겐 다시 연락이 없었다. 병준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 한 두달쯤 지난 후였다. 학원이 끝나고 병준이 서은일 데려다주었다. 병준이 먼저 가고 나서 서은이 벨을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서은을 잡아 세웠다. 서은은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너무 놀라선지 비명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곧 그녀는 더 놀라고 말았다. 그는 다름아닌 석훈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서은을 놀라게 한 건 석훈에게서 술냄새가 강하게 났다는 것이다. 석훈이 이렇게 술에 취한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서은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석훈을 보고 잠시 어떻게 해야할까 망설였다.
병준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병준은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서은은 망설이다가 그를 데리고 모텔로 갔다. 그를 데려다주고 자신은 나올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하고 가슴을 졸였지만 석훈이란 존재가 서은에겐 더 컸다. 서은은 억지로 석훈을 끌고 모텔방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석훈을 침대에 눕혔다. 그와 단둘이 이렇게 방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인사불성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서은은 그와 같이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서은은 망설이다 그의 겉옷을 벗기고 수건에 물을 묻혀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갑자기 그가 눈을 떴다. 서은은 가슴이 뛰었다. 물론 그는 취한 상태이긴 하지만 서은의 눈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그가 손을 내밀었다. 서은은 거절해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거부하지 못했다. 그의 힘에 서은은 그의 위로 쓰러졌다. 그는 서은을 침대에 눕히고는 가만히 서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서은에게 입술을 가져갔다. 서은은 눈을 감았다. 서은은 그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가 되어갔다. 아침이 되었을 때 서은은 부끄러움으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가 옆에서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서은은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얼굴에 저절로 홍조가 생겼다. 그리고 그가 일어나서 침대에 걸터앉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 서은은 듣지 말아야할 말을 듣고 말았다.
"아,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서은은 그의 괴로운듯한 목소리를 듣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비참한 일은 없을 것이다. 어젯밤 그는 몇번인가 그녀를 요구했었다. 그런데 제정신을 차린 그는 그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서은은 그때 모든 희망은 끝이 났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그렇게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들은 악몽과도 같았다. 그는 서은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이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막중한 책임감을 준 것 같았다. 그는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서은은 거절했지만 일사천리로 일은 진행되었다. 어른들은 서은의 의견같은 건 진지하게 들으려고조차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누구나 흡족해할 정도로 조건이 좋았다. 그는 화장품회사를 경영하게 될 후계자였다. 어른들은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완벽한 허락도 아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그 결혼을 반대한 것이다. 하지만 석훈은 그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서은의 부모들은 그의 혼인신고를 허락한 것이다. 그는 그녀와 혼인신청을 하고 바로 외국으로 나갔다. 해외지사 근무를 신청한 것이다. 당장 일이 급하다고 그는 급히 떠났다. 그동안 서은은 학교를 다니고 그는 일에 매진하겠다고 했다.결혼식은 돌아와서 하겠다고 말했다. 서은은 부모님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고 허락했다. 하지만 서은은 그가 자신에게서 도망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남은 것은 이제 이혼뿐이라고 모든 마음을 정리한 지금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2년이란 시간이 흐른뒤에 말이다. 서은은 더욱이 소문으로 그에게 여자들이 있다는 얘길 듣고 있었다. 또한 그는 갑자기 달라진 건지 아니면 서은이 원래 그를 잘못 판단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훨씬 뻔뻔해져서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더욱 여유롭고 어른스워졌고 더욱 냉정졌다. 어쩜 그도 좀더 어른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서은에게 시간이 흐른 것처럼 그에게도 시간이 흐른 것이다. 예전에 없던 그녀의 속을 박박 긁는 그 뻔뻔함만은 이상하게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속이 부글부글 끓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에게 여자가 있다는 소문은 사실일까?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을 제쳐두고라도 가장 서은이 참을 수 없는 건 그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왜 여전히 그에게 이렇게 온통 지배당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또한 서은은 자신에게 정말 그와 헤어질 생각이 있는지 궁금했다. 왜 서은은 이를 악물고 그와 같은 과를 결국은 들어갔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했었다. 스스로 믿고 싶지 않았지만 서은은 그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자신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서은은 그와 떨어져있던 그 2년이란 시간동안조차도 그에게 영향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물이 식었나 보다. 서은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벌써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는 1년만 기다려보고 이혼하자고 한 것이다. 원래 그게 그의 속셈이었을 것이다. 남들에게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이혼할 수 있는 시간을 벌고 싶었던 것이다. 서은은 식은 욕조의 물에 얼굴마저 묻어버렸다. 그녀는 자신에게조차도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야들야들 결혼서약 (8)-호텔에서 일어난 질투유발 대작전-회상완결판
#8. 그와 그녀 사이에 일어난 회상완결판
서은은 참지 못하고 그 다음날로 병준을 만났다.
차가운 냉커피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좀 살 것 같았다.
"야, 도대체 그 계획이 뭔데?"
"그를 더 자극해보는 거야. 분명 그 사람은 질투를 했어. 그게 어느 정도
의 감정이건 간에....분명히 반응을 보였다구.....그걸 더 자극하는 거
야...."
"어떻게?"
"넌 그의 일정을 알아봐. 특히 호텔이나 아님 그런 특별한 장소에서의 약
속같은 거....."
"그런 건 왜?"
"그곳에서 그와 마주치는 거야."
"야! 너 미쳤어? 그럼 단박에 우릴 의심할 거야......"
"바로 그걸 노리자는 거야....."
"야, 그러다 완전히 끝나면?"
"그 정도는 감수를 해야지.....안 그러면 그 사람은 다른 여자 품으로 날아
가버릴텐데 그 정도는 감수해야하는 거 아니야?"
"날 경멸하면 어떡해?"
"난 너보다 내가 더 걱정이 돼. 아무래도 내 턱이 염려가 되거든......그 사람은 이성으로 넌 동생일뿐이다라고 억누르고 있는 거야.....그런 사람은 자기가 정해놓은 선 이상은
여간해선 넘지 않거든......"
"너 심리학 공부도 했냐?"
"우리 과하고 얼마나 연관이 많은데......연기는 그냥 하는 게 아니야.
다 사람들 심리하고 연관된 거라구....."
"정말 잘 될까?"
서은은 조금은 의심스런 마음으로 하지만 조금은 기대하는 표정으로 병준을 쳐다봤다.
하지만 병준 말대로 뾰족한 수가 없지 않은가...그거라도 기대를 해보는수밖에.......하지만 서은은 역시 불안한 마음만은 어쩔 수 없었다.
서은은 그의 스케줄을 알아내기 위해 무진장 고생을 했다.
우선 그녀는 석훈을 한 번 더 만나야 했다.
그는 PDA로 자신의 스케줄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를 만나서 몰래 그 정보를 빼내는수밖에 없었다.
서은의 전화에 그는 다시 쉽게 응했다.
그는 요즘 조금은 변한듯했다.
여전히 그녀를 여동생 취급할 뿐이었지만 그녀와의 만남에 순순히 응하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들은 가볍게 맥주를 마셨다.
그를 보니 다시 가슴이 뛰었다.
이렇게 같이 있는 것이 좋을 수가 없다.
이런 걸 갖고 사랑에 빠졌다고 하는 것인가 보다.....
"공부는 잘돼?"
"그럭저럭이요."
"데이트도 잘하고 있고......?"
"네....."
석훈이 씁쓸한듯 웃었다.
"오빠도 애인이랑 잘되고 있는 거죠?"
"그렇지, 뭐....."
서은은 그의 PDA를 노리고 있었다. 그의 가방에 들어있을 것이다.
그는 그녀와 만날 때도 가끔은 그것을 꺼내 확인하곤 했던 것이다.
그가 화장실을 갈 때만을 노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오늘 따라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
"결혼은 언제쯤 하실 거에요?"
"좀 서두르려고.....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갑자기 가슴에서 뭔가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다행인지 그때 석훈이 일어났다.
서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서은은 재빨리 움직였다.
그의 이번달 스케줄 표를 보니 다행히도 호텔에서 바이어 약속이 몇개인가 잡혀있었다.
서은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재빨리 PDA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다행히 이 모든 일이 끝났을 때 그가 돌아왔다.
서은이 갑자기 기침을 해대자 석훈이 걱정스럽게 물어봤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아니요. 사리들렸나봐요.."
"조심해야지....."
석훈이 부드럽게 서은을 쳐다봤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를 동반한 걱정스런 표정을 보자 서은은 이 남자만은 정말 놓치고 싶지 않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다소의 찔림은 극복할 수밖에 없다.
그는 서은을 집앞까지 데려다주고 돌아갔다.
그는 잠시 서은에게 뭔가 할말이 있는 것처럼 망설였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은듯 무표정이 되었다.
그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은은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놓칠수는 없었다.
병준과 서은은 서로 디데이를 잡았다.
그의 약속일 중에 병준과 서은은 둘의 시간이 일치하는 날을 선택했다.
하루하루의 시간이 서은이에게 마치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처럼 무섭게 느껴졌다.
정말 잘될까하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취소할까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드이어 디데이.
병준과 호텔입구에 서있으니 서은의 가슴은 억누르지 못할 만큼 콩닥 뛰었다.
죄를 짓는 듯해 서은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켜야했다.
"우리 정말 잘하는 걸까?"
"이 겁장이....사랑을 얻는 건 쉬은 게 아니야. 잃고 나서 후회할래? 이
렇게 된 이상 무라도 잘라야지....."
"알았어......"
서은은 쉼호흡을 했다.
그리고 로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물론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곳에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약속 시간 전에 석훈이 역시 젊어보이는 남자와 나타났다.
그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서은과 병준은 그가 커피숍을 나올 때 자연스럽게 그와 마주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마치 룸이 있는 곳에서 나온듯이 말이다.
서은의 가슴은 계속 콩닥거리고 있었다.
1시간이 거의 됐을 무렵 일본인으로 보이는 남자 둘과 석훈과 그 젊은 남자가 같이 커피숍에서 나왔다.
병준은 떨고 있는 서은을 데리고 자연스럽게 호텔을 나가는듯이 움직였다.
그때였다. 석훈이 병준과 서은을 발견한 것이다.
발견하지 않을래야 발견하지 않을 수없게 병준은 기가 막히는 타이밍으로 그 앞을 지나갔던 것이다.
석훈은 잠시 긴장한듯 보였다.
잠깐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으로 봐서 당황한 것만은 분명했다.
석훈은 일행에게 뭐라고 말을 했고 그들은 그 자리에서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일본말이 오갔기 때문에 서은은 대충 느낌과 익숙한 단어로 미루어 판단할 뿐이었다.
병준이 자신의 턱을 어루만졌다.
석훈과 함께 한 일행들이 먼저 사라졌다.
석훈이 잠시 후에 그들 앞으로 왔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나갈까? 아니 그럴 것 없이 바이어들이 왔을 때마다 주로 묵는 객
실이 있어. 그리로 가지. 지금은 비어있을 테니까....."
그의 목소리는 엄청 가라 앉아있었다.
서은은 자신이 정말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르고 취조당하는듯한 기분을 느꼈다.
석훈이 프론트로 가서 키를 들고 왔다.
병준과 서은은 석훈을 따라 호텔방으로 들어갔다.
호텔방에 들어가서도 그들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석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우린 서로 좋아하는 사이예요. 무슨 짓을 하든 형님이 상관하실 건 아니
죠."
병준은 의예로 당당하게 대답했다.
석훈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석훈은 병준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는 한대 갈기려는 것 같았지만 이내 참는듯 했다.
"너랑은 나중에 따로 얘기하겠다. 지금은 돌아가라.....지금은 서은
이와 할 얘기가 있어."
병준은 뭐라고 한마디하려는듯 보였지만 이내 문쪽으로 갔다.
그리고는 석훈이 보지 않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는 서은에게 윙크를 하고 사라졌다.
석훈과 서은 사이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물론 이건 내가 참견할 일이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난 지금 너한테
정말 실망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얼마나 자유스럽게 연애를 하고 있는가
는 나도 알고 있지만 너한테 정말 실망했다."
"난 어린애가 아니에요."
"그렇다고 넌 아직 어른도 아니야.....더욱이 넌 지금 재수하는 중이라
구....요즘 연애에 빠져서 그것까지 잊어버린 것 아니야?"
"오빠한테 그런 말 들을 입장 아니예요......병준인 내 애인이라구요. 우
린 성인이에요. "
"성적으로 자유로운게 성인이라는 거야?"
갑자기 석훈이 서은에게 다가왔다.
"난 내 행동에 책임을 진다구요."
"어떤 식으로? 서로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너희는 아직 어린애들이
야. 넌 앞으로 대학에 들어가야하고 그 녀석도 이제 겨우 대학 초년생이
라구.....그런 너희들이 뭘 어쩌겠다는 거야?"
"좋아하면 같이 잘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뭐야? 그럼 네가 원한 건 그거였니? 같이 자는 거.....내가 좋다고 했
을 때도 그랬던 거야? 그럼 그렇게 빙둘러 말하지 말고 확실히 말하지 그
랬어. 나랑 자고 싶다고......"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이젠 오빠한테 그러고 싶은 맘 사라졌다
구요......"
"그래?....정말로? ...."
그가 갑자기 다가왔다. 그의 손이 서은의 얼굴을 잡았다.
"그 자식을 죽여버리겠어......너를 만진 걸 생각하면 그것도 모자
라....."
그가 무서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석훈이 냉정을 잃고 이렇게 화가 난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 자식이 널 만졌다는 것 생각만 해도 미치겠어......."
그러면서 갑자기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서은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서은은 아주 거칠게 침대에 내동댕이쳐졌다.
서은의 가슴은 엄청나게 방망이질을 쳤다.
석훈이 이렇게 냉정을 잃은 것을 본 적이 없다.
겁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그에게 사실을 말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그와 이런 식으로 맺어지고 싶진 않다.
이렇게 화난 상태에서......하지만 서은의 예상과 달리 석훈은 서은을 내버려두고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그가 방을 나가자 서은은 다리의 힘이 쭉 빠져 일어날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다.
그가 그렇게 괴로워할 줄 알았다면 이런 일은 저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든 일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서은은 그가 자신에 대한 믿음마저도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서은은 이 일로 모든 것을 다 잃은 것이다.
서은은 침대에 누운 채로 울고 있었다.
석훈에겐 그 후로 연락이 없었다.
그렇게 지나간 시간이 벌써 한달이 다 되간다.
서은은 그 일로 병이 나서 몇일은 누워 있어야했다.
병준은 자신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다는 것에 상당히 미안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서은은 그의 탓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은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도 점점 더 우울해져갔다.
병준은 그런 서은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미안하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아니야. 괜찮아.......어차피 그 사람과는 인연이 아니었나봐."
"얼굴이 아주 수척해졌어.....그 남잘 정말 좋아하는구나?"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될 거야......"
하지만 말과는 달리 눈이 뜨거워진다.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뜻밖에도 그건 미진의 전화였다.
그녀는 서은에게 만나자고 했다.
서은은 혹시나 자신이 저지른 실수 때문인가 해서 불안해졌다.
그녀와의 약속을 정하고 나자 서은은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 여자가 왠일이지?"
"모르겠어.....그 일 때문은 아니겠지?"
"그런 걸 그 여자한테 말했다면 정말 남자도 아니야.......하지만 정말
왜 전화 했을까? 그렇게 유치한 남자는 아닌 것 같던데......"
병준은 이해가 안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약속장소에 나가니 이미 미진이 나와 있었다.
차가운 아름다움이 미진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은은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끼면서 자리에 앉았다.
"내가 왜 전화했는지 알아?"
그녀는 다짜고짜 반말이다.
"아니요....."
"정말 몰라?"
"모르겠어요."
서은도 지지 않고 말했다.
"너 석훈씨한테 어떻게 꼬리친 거야?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아봤어. 그
이한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거......"
"당신과 그런 얘기 할 이윤 없다고 생각히요. 저 일어나겠어요. 오빠하고
는 연락도 안하고 깨끗하게 끝났어요....."
"끝났다고?"
"네...."
"너 때문에 그 사람이 변했어.....도대체 그 사람을 어떻게 휘저은 거
야? 물론 어린 너한테 잠시 흥미를 느껴 빠질 수도 있어.....하지만 무
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그 사람 같지가 않아. 말도 안하고 아주 우울해졌
어.....그 사람 예전엔 전혀 그런 사람 아니었어....."
"아무일도 없었어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당신에게 말할 의무
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니 상관있어.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알아? 우린 당연히 결혼할 거
라고 생각해왔어. 나나 그 사람이나..... 그런데 그 사람이 나에게 서로
좀더 생각을 해보자고 하더군......그리고 얼마전엔 나에게 <<미안하다> >
고 했어.....물론 난 그 말을 못들은 척 했어.....난 절대로 인정할 수
가 없었거든. 더욱이 너같은 애송이 계집애한텐 절대로 그이를 뺏길 수
없어......."
서은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말이 귀에서 윙윙거린다.
"그에게 확실히 네 감정을 말해......그 사람과 넌 아니라고 말이
야......"
"자신이 채이고서 왜 나한테 이러는지 모르겠군요......."
"뭐야? 이 못된 계집애....난 그 사람 이외는 다른 사람은 생각도 안해봤
어.....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
그러면서 미진이 서은의 뺨을 갈겼다.
서은은 놀랐다.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이번 건 참겠어요......당신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기 때문이예요. 하지
만 그 사람과 난 서로 연락도 안해요.....한 번만 더 그러면 저도 당신
을 용서 못해요......."
"용서못하면 네까짓게 어쩔 건데......"
미진이 다시 서은의 뺨을 때렸다.
하지만 이번엔 서은도 지지않고 매섭게 미진의 뺨을 때렸다.
미진이 어이가 없다는듯 서은의 뺨을 다시 때리려했다.
그때였다. 미진의 행동이 저지 당했다.
석훈이었다.
이곳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석훈이 미진의 팔을 잡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나한테 이럴 권리는 충분히 있어......바로 이 계집애 때문에 이런 일
이 일어난 거잖아......."
"어리석은 짓 하지마......난 지금까지 너한테 정말 미안했어...그래서
마음이 정말 편치 않았다. 가능하면 어떻게 너한테 상처를 주지 않을까하
고 최대한 생각했어.....하지만 이것으로 깨끗해졌다고 생각하지...너도
지금 너보다 어린애한테 상처를 주고 있는 거야.....난 서은이하고
도 깨끗하게 끝낼 생각이었어.....그게 가능하다면......."
"당신은 지금 나한테 핑계를 대고 있는 거야......"
"그래.....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변명할 생각은 없어.....하지만 이것으
로 너한테 분명히 내 생각을 밝힐 수는 있겠어......너하고의 인연은 이
것으로 끝났어......."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절대로"
미진은 분노로 떨고 있었다.
그리고는 카페를 나갔다.
서은은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질 것 같았다.
그것을 알았는지 석훈이 서은의 팔을 잡고 카페를 나갔다.
그리고는 석훈은 서은을 차에 태웠다.
석훈이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한강고수부지였다.
"나한테 책임감이나 부담감 느낄 필요 없어요......오빠가 그럴만한 일
을 한 적은 전혀 없잖아요......."
"왜 나한테 전화 안했어? 미진이한테 전화왔다고......병준이 전화안해줬
다면 몰랐을 거야......"
"오빠가 나타날 필욘 없었어요......"
"수척해졌군......."
"오빠완 상관없어요......."
"그래? 그럼 집에 가자....데려다줄게......"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서은은 자신이 너무나 비참해지는 것 같았다.
서은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차가 도착하자 서은이 내렸고 석훈은 차를 돌려 그대로 사라졌다.
서은은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때부터 서은은 죽기살기로 공부에만 매달렸다.
그녀의 변화에 가장 놀라는 건 어머니였다.
어머닌 서은이 맘을 잡았다고 좋아하고 계셨다.
그렇게 시간만 지나가고 있었다.
석훈에겐 다시 연락이 없었다.
병준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 한 두달쯤 지난 후였다.
학원이 끝나고 병준이 서은일 데려다주었다.
병준이 먼저 가고 나서 서은이 벨을 누르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누군가 서은을 잡아 세웠다.
서은은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는 것 같았다.
너무 놀라선지 비명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곧 그녀는 더 놀라고 말았다.
그는 다름아닌 석훈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서은을 놀라게 한 건 석훈에게서 술냄새가 강하게 났다는 것이다.
석훈이 이렇게 술에 취한 것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서은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석훈을 보고 잠시 어떻게 해야할까 망설였다.
병준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병준은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서은은 망설이다가 그를 데리고 모텔로 갔다.
그를 데려다주고 자신은 나올 생각이었다.
혹시라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하고 가슴을 졸였지만 석훈이란 존재가 서은에겐 더 컸다.
서은은 억지로 석훈을 끌고 모텔방까지 들어갔다.
그리고 석훈을 침대에 눕혔다. 그와 단둘이 이렇게 방에 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인사불성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서은은 그와 같이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뛰었다.
서은은 망설이다 그의 겉옷을 벗기고 수건에 물을 묻혀 그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갑자기 그가 눈을 떴다.
서은은 가슴이 뛰었다.
물론 그는 취한 상태이긴 하지만 서은의 눈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그가 손을 내밀었다.
서은은 거절해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거부하지 못했다.
그의 힘에 서은은 그의 위로 쓰러졌다.
그는 서은을 침대에 눕히고는 가만히 서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서은에게 입술을 가져갔다.
서은은 눈을 감았다. 서은은 그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하나가 되어갔다.
아침이 되었을 때 서은은 부끄러움으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가 옆에서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서은은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얼굴에 저절로 홍조가 생겼다.
그리고 그가 일어나서 침대에 걸터앉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때 서은은 듣지 말아야할 말을 듣고 말았다.
"아,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서은은 그의 괴로운듯한 목소리를 듣고 모든 것이 끝났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비참한 일은 없을 것이다.
어젯밤 그는 몇번인가 그녀를 요구했었다.
그런데 제정신을 차린 그는 그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서은은 그때 모든 희망은 끝이 났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그렇게 일어나서 방을 나갔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들은 악몽과도 같았다.
그는 서은에게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이었다는 사실은 그에게 막중한 책임감을 준 것 같았다.
그는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서은은 거절했지만 일사천리로 일은 진행되었다.
어른들은 서은의 의견같은 건 진지하게 들으려고조차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누구나 흡족해할 정도로 조건이 좋았다.
그는 화장품회사를 경영하게 될 후계자였다.
어른들은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 완벽한 허락도 아니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그 결혼을 반대한 것이다.
하지만 석훈은 그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서은의 부모들은 그의 혼인신고를 허락한 것이다.
그는 그녀와 혼인신청을 하고 바로 외국으로 나갔다.
해외지사 근무를 신청한 것이다.
당장 일이 급하다고 그는 급히 떠났다. 그동안 서은은 학교를 다니고 그는 일에 매진하겠다고 했다.결혼식은 돌아와서 하겠다고 말했다.
서은은 부모님도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고 허락했다.
하지만 서은은 그가 자신에게서 도망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남은 것은 이제 이혼뿐이라고 모든 마음을 정리한 지금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2년이란 시간이 흐른뒤에 말이다.
서은은 더욱이 소문으로 그에게 여자들이 있다는 얘길 듣고 있었다.
또한 그는 갑자기 달라진 건지 아니면 서은이 원래 그를 잘못 판단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훨씬 뻔뻔해져서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더욱 여유롭고 어른스워졌고 더욱 냉정졌다.
어쩜 그도 좀더 어른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서은에게 시간이 흐른 것처럼 그에게도 시간이 흐른 것이다.
예전에 없던 그녀의 속을 박박 긁는 그 뻔뻔함만은 이상하게 참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속이 부글부글 끓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에게 여자가 있다는 소문은 사실일까?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을 제쳐두고라도 가장 서은이 참을 수 없는 건 그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왜 여전히 그에게 이렇게 온통 지배당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또한 서은은 자신에게 정말 그와 헤어질 생각이 있는지 궁금했다.
왜 서은은 이를 악물고 그와 같은 과를 결국은 들어갔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했었다.
스스로 믿고 싶지 않았지만 서은은 그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자신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서은은 그와 떨어져있던 그 2년이란 시간동안조차도 그에게 영향받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새 물이 식었나 보다.
서은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벌써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그는 1년만 기다려보고 이혼하자고 한 것이다.
원래 그게 그의 속셈이었을 것이다. 남들에게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이혼할 수 있는 시간을 벌고 싶었던 것이다.
서은은 식은 욕조의 물에 얼굴마저 묻어버렸다. 그녀는 자신에게조차도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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