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26은 안중근 의사님이 거사 하신달 에 생각하는 고집쟁이 김구는 무었을 했는가?

센치2021.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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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출생 1879년 9월 2일 순국 1910년 3월 26일

본관 순흥(順興,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

할아버지는 진해현감을 지낸 인수(仁壽)이며, 아버지는 진사 태훈(泰勳)이다.

태어날 때 배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이라 불렀는데,이 이름을 해외에 있을 때 많이 사용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 해주감사의 요청으로 아버지가 산포군(山砲軍)을 조직해 농민군을 진압할 때 참가하여, '박석골전투' 등에서 기습전을 감행,

진압군의 활동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多默]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7세에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다.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와 한일신협약의 체결, 군대해산에 따라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자 독립전쟁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에서 함께 의병활동을 하던

김기룡·황병길·강기순·유치현·박봉석·백낙규·강두찬·김백춘·김춘화·정원식 등 12명이모여 단지회(斷指會: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가 코코프체프와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환영군중 쪽으로 가는 순간 권총을 쏘아,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켰사살했다.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만철 이사 다나카 등에게

중경상을 입힌 뒤 '대한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김구

출생 1876. 8. 29, 황해도 해주 사망 1949. 6. 26, 서울

천민 집안에 테어난 그는 어린시절에 아버지서당에서 공부을하여 과거시험을

보러가나 아사리판인 현장을보고 회의을 느껴 과거을 보지않고 낙향한다

부친께서 관상학을 공부하라하여 동학을 만나는데 동학은 양반상놈을 차별을

주지않는 사상에 반하여 동학인이된다(갓쓴선비가 김구에게 맞절을 하여

크게감명받았다고함)

민비가 암살당하자 격분하여 일본순사놈을때려죽인죄로 최포당하여 사형언도을 받으나 고종의 특사로 풀려나서 명성을 얻게되고 독립운동에 매진하개되어 왜놈을의 간담을 떨게하는 사람이되고 이나라의 독립의 초석을 만들었다.


동시대에 두영웅은 서로 교감이 있었는가?

김구는 안중근의 아버지로부터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일부기록도 있으나

구채적인 내용은없습니다

단 안중근의 아버지가 김구는 앞으로 크게 될사람이니사귈것을 권유하자

안중근은 그릇이 큰사람이 못된다고 거절했다는 밀도 있습니다.

(아주현명한 판단)

하늘은 동시대에 두명의 영웅은 탄생시키지 않는다는 말이 맞는것 같습니다

뜻은 같으나 두사람이 협력한 기록은 없고

안의사가 이토을 저격할때 김구도 체포되나협의없이 풀려납니다.


후일

안의사가 거사을 할때 2남1녀을 두었는데 그가족들은 정착해서

살수가없었습니다

부인 김아려여사는 성당에 딸은 맞겨두고 두아들만 데리고 떠돌이생활을 합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 2자 안준생은 2살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첫째 아들 안분도는 길림성에서 어린 나이로 죽었는데 일본 밀정에 의한 독살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안준생 자신의 큰형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자신 역시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하루하루를 일제의 핍박을 피해가면서, 중국 상하이 식당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면서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자의또는 타의로 안준생과 누이는 일본인의 꼭두각시가 되어 김구로부터

심한 질책을받습니다.

아버지 얼굴에 거름칠하는 못난놈이라하여 교수형을 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후 그후손들은 이나라에서는 살수없는 철저한 토착왜구가 되고 말앗습니다.

김구 주석의 말대로 아편 장사를 한다는 말도 있었죠.=먹고살려고


왜김구는 안중근의 가족을 돌보지못하고 맹비난만 하였나요?

김구는 고집쟁이고 자가밖에모르는 철저한 이기주의자며 남을 배려하는

덕이모자란다고합니다.

1947년 안의사의 부인은 해방된 고국으로 오지도 못하고 상해에서

생을마감합니다.

그후 안중근의사 후손들은 지금도 토착왜구란 오명(?)속에 미국에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효창공원에 안의사님의가묘와 김구묘가 함께있는걸로 아는데 어찌면 둘사이에는 풀수없는 원한이 있을수도 있고요 김구을 사살한 안두희는 안의사의 혼의

명이 아닐런지요?

안의사님의 육신이 이땅으로 돌아오는날은 다시한번 생각을 해보아야

할사안이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