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정장, 금관조복

완소혜교2006.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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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대표적인 관복으로는 公服과 朝服이 있었다.

공복은 복두라는 관모와 셋트를 이루어 복두공복이라 불렸고,

조복은 금관과 셋트가 되어 금관조복이라 불렸다.


우선 공복에 대해 알아보자.

공복은 가벼운 의례에 입는 옷이었다.

매일 아침 조례할 때, 지방관으로 부임 시 임금님을 뵈올 때, 공무에 참여할 때...


복두공복은 고려시대에도 입었던 관복이다.

지금 방영 중인 "신돈"에서 신하들이 입고 나오는 이상한 모자와 도포가 바로 이 옷이다.


고려시대에는 임금님까지도 이 옷을 입고 있었다.

"신돈"의 정보석이 색깔만 다를 뿐 같은 형태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국왕 이하 모든 신하들이 착용하였던 복두공복은 조선시대에는 그 효용성이 줄어들어 결국에 임진왜란 이후에 소멸된다.


이는 세종 8년 관복 제정 시, 常服(평상시 입는 관복)이라는 관복을 만든 것과 관련이 깊다. 공교롭게도 이 옷의 모양은 공복과 흡사했다. 공복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재질이 면이라는 것(공복은 비단이었음)과 흉배가 달려있다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상복을 입고 다니다 보니 상대적으로 공복은 덜 입게 되었고, 결국에 상복에게 자리를 내주고만 것이다.


소례복에 복두공복이 있었다면 대례복에는 금관조복이 있다.

금관조복은 큰 예절에 입는 관복이다.

나라의 제사, 새해, 동지, 조칙을 반포할 때, 임금님을 뵈올 때(대조례), 새해에 중전에게 하례할 때 등...


금관조복은 주자성리학을 기본이념으로 출발한 조선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예복이었다. 금관조복이 얼마나 귀중하게 여겨졌나는 다음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세종 15년의 실록에,

 “조복을 만드는 데는 工費가 매우 많이 드는데, 각사의 관리들이 마음을 써서 간수하지 아니하여, 혹 더럽히고 파손하거나 유실하는 자가 있사오니, 이 뒤로는 매년 점검하여 유실하는 자는 징계하고, 더럽히고 파손하는 자는 죄주옵소서.”


또 성종 13년엔

 “요즘에 朝官들이 입는 조복이 찢어지고 또 더럽습니다. 조복은 반드시 정결하게 해야 하며 常服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런데 요새 조복은 도리어 상복만도 못하여 너무나 조정의 광채가 없습니다. 그러니 더럽거나 찢어진 옷을 입은 자는 규찰하여 죄를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정조 13년 정월에도 사직에 大祭를 지낼 때 신하 중 조복에 백초중단(白綃中單, 겉옷 바로 밑에 입는 옷)을 착용하지 않은 자가 있어 파직을 시킨 후 죄를 주었다는 기사도 있다.


한마디로 조복을 더럽히거나 제대로 갖추어 입지 않으면 목이 달아났던 것이다. 그만큼 조복은 중요한 옷이었다.

 

조복은 원래 궁궐 안에서 제작했다. 비단이 귀하던 시절이었으므로, 궁중의 상의원에서 일괄로 제작하여 대례 시 사용하고, 일을 마치면 다시 반납하여 보관했던 것이다.


귀중한 조복은 그러나 처음부터 "금관"과 짝이 아니었다.

금관의 본래 이름은 양관(梁冠)이다(금관은 양관의 별칭이다. 금색으로 빛나므로 금관이라 불리게 되었다).

양관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타원형 모자에 금속으로 테를 두른 형태인데(백과사전 그림 참조), 검은 비단위에 그은 줄을 양(梁)이라 했으므로 양관이라 불렸다.

 

양은 계급을 나타내는 것이다. 중국에 비해 우리의 품계는 2등급 낮았으므로 중국의 1품관이 7줄의 양관을 착용하였다면 우리는 5줄의 양관을 착용하였다.

 

조선의 양관은 현존하는 금관과 모양이 같다.

다만 색에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

금관이 도금을 해 번쩍인다면 우리의 양관은 금속을 그대로 사용하여 원래 광채가 없었다.


양관이 도금을 한  금관으로 바뀐 것은 중종 때의 일이다. 중종 당시 명 문물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 때 명의 금관과 조복이 함께 들어 왔던 것이다. 이 중국에서 들어온 양관은 우리와 달리 번쩍이는 황금관이었다.

 

중종은 이 금관을 좋아하지 않았다. 중종이 보기에 이는 하극상이었다. 임금도 쓰지 않는 금관을 감히 신하들이 쓰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중종은 금관을 본래의 색이 없는 양관으로 돌릴려고 무던히도 종용하였다.

그러나 대세는 이미 금관으로 기울어져있었다. 불행히도 중종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효종 대에는 이미 금관이 상용화 되어 있었다. 전란 이후 금관의 마련이 어렵자 종이에 금물을 발라 “금관”으로 만들 것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금관은 더 이상 색이 없는 양관이 아니었다. 더불어 후대에는 용어 자체도 아예 금관으로 바뀌어, 영조, 정조의 실록에는 금관으로만 표현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금관조복은 이렇게 정착되었다.

금관조복은 고종의 갑신의제개혁에도 살아남아 지금까지 그 모양을 보존하고 있다.


금관조복은 조선 제1의 정장이다.

서양으로 치면 연미복이요, 요새로 치면 조끼까지 받쳐 입은 아래, 위 셋트의 검은 양복이다.


누가 한국의 색을 흰색이라고 했는가.

서양의 남자들이 검은 색 일색의 무미건조한 풍경을 만들고 있을 동안,

조선의 점잖은 선비들은 금색과 강렬한 빨강으로 빛나는 자리를 더욱 빛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오픈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