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세와 축성 의례로 무역 허브 발돋움 한 샹파뉴
중앙일보
입력 2017.07.09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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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 경제사] 중세 유럽의 국제무역시장
그림 1 랑디 대시에서 축성하는 파리대주교, 14세기
그림 1 랑디 대시에서 축성하는 파리대주교, 14세기
<그림 1>은 중세 유럽의 장거리 무역과 관계가 깊다. 당시 유럽은 크게 세 개의 상권으로 나뉘어있었다. 무역 규모가 가장 컸던 곳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남부 상권이었다. 동양에서 향신료·직물·명반 등 값비싼 상품들을 수입해 유럽 전역에 판매하는 이탈리아 상인들이 이곳의 주인공이었다. 베네치아·제노바와 같은 무역도시들은 유럽에서 금융·회계·조선업이 가장 앞선 경제 중추였다. 둘째 상권은 독일과 네덜란드의 항구도시들이 중심이었던 북부 상권이었다. 이곳의 한자동맹 상인들은 북해와 발트 해를 통해 플랑드르의 모직물, 보르도의 포도주, 런던의 금속 제품, 스칸디나비아의 생선과 목재 등을 거래했다.
우리의 주요 관심은 세 번째 상권에 있다. 남유럽과 북유럽에서 생산된 물품들은 어딘가에서 만나 서로 거래돼야 했다. 이런 무역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대륙 중앙부에 위치한 내륙 상권이었다. 프랑스의 샹파뉴 지방과 독일의 라이프치히·프랑크푸르트가 대표적인 중심지였다. 이곳에서는 매년 일정 기간에 정기시인 대시(fair)가 열렸다. 이탈리아 상인들이 알프스 산맥의 험난한 고갯길을 넘어 북쪽으로 향하고, 독일과 플랑드르 상인들이 북유럽 상품들을 남쪽으로 운송해서 만나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여기가 유럽인들에게는 국제무역의 허브였던 것이다.
정기시장 열리며 환어음·환전 등 발달
그림 2 14세기 제노바 은행가의 작업 모습
그림 2 14세기 제노바 은행가의 작업 모습
상인들이 대시에서 무역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런데 주화나 금괴를 들고서 장거리 여행을 하자면 위험했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상인들은 신용을 기초로 거래하고 모든 거래가 끝난 후 청산하기를 원했다. 또한 대시가 파할 때까지 청산되지 않은 금액은 환어음을 발행해 차기로 결제를 이월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탈리아 금융가들이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그림 2>에 등장하는 제노바 은행가들이 대표적이었다. 이 그림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일곱 죄악 중 하나인 탐욕을 상징화한 작품이다. 사람들이 ‘탁자(banco)’에 주화를 올려놓고 계산을 하고 있다. 이 관행으로부터 은행을 뜻하는 용어 ‘방카(banca)’가 나와 영어로 ‘뱅크(bank)’가 됐다. 대시에서 금전거래를 하는 경우에는 유럽 각지에서 생산된 주화들이 서로 단위가 다르고 순도에 차이가 난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환전업이 발달했다. 결과적으로 대시는 유럽의 금융허브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는 이런 대시에 대해 어떤 입장을 보였을까? 대시를 자기 도시에 유치하려고 적극적 태도를 보인 영주들이 많았다. 국제무역의 중심지가 되면 다양한 경제적 이득이 발생하고 영향력 있는 지도자라는 정치적 위상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주들은 우선 자신의 도시가 사통팔달 연결된 도로망을 보유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교통의 편의만 가지고는 경쟁력을 내세우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일부 영주들은 무역상들에게 도로 통행세를 면제해 주었고, 점포와 창고건물을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출신지와 상관없이 모든 상인이 공평하게 처우를 받도록 보장했고, 분쟁을 공정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초보적인 상업재판소도 설립했다.
대시 유치경쟁에는 종교적 편의의 제공도 포함됐다. 성직자가 시장의 번창과 무사고를 빌며 축성 의례를 진행해주는 것이다. 대시를 방문하는 상인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으므로 성직자의 축성 의례는 이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위에서 본 <그림 1>은 파리 근교 생드니 지역의 랑디라는 도시의 모습이다. 장시가 개장하는 날 파리 대주교가 등장해 무역상들의 안전과 번영을 기원하는 기도 행사를 집전하는 광경이다.
<그림 1>은 얼핏 보면 단순한 종교 행사를 무덤덤하게 묘사한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국제 무역허브가 되기 위해 중세 도시가 펼친 치열한 경쟁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유럽 내륙 전체에서 대시가 가장 발달한 지역은 프랑스의 샹파뉴 지방이었다. 12세기부터 라그니·트루아·프로뱅·바쉬르오브 등 교통이 양호한 네 도시에서 순차적으로 6주씩 정기시가 열렸다. 보통 일 년에 여섯 차례 개장했으니 중간에 상인들이 이동하는 기간을 고려하면 거의 연중 내내 시장이 열린 셈이었다. 외떨어진 도시에서 열린 유럽의 다른 대시들과 달리 샹파뉴에서는 지리적으로 제한된 범위에서 다수의 정기시가 연이어 열렸으므로 무역상들이 선호했다.
하지만 지도자의 역할도 중요했다. 샹파뉴 백작은 경찰 조직을 구성해 무역상들에게 공공질서를 보장했다. 도량형을 속이지 못하게 했으며, 한 번 계약을 위반한 자는 대시에 다시 참여하지 못하게 금지했다. 치안과 재산권 보호는 무역상을 끌어들이는 가장 확실한 유인책이었다.
이렇게 번영했던 샹파뉴 대시가 13세기 말부터 쇠퇴기를 맞게 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기술적으로는 이탈리아에서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한 점을 들 수 있다. 지중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항해해 저지대 국가들로 직접 찾아가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신용거래 기법이 개선되고 무역회사 조직이 발달하면서 북부 상권과의 직접 거래가 쉬워졌다. 이에 따라 브뤼주·안트베르펜과 같은 도시가 새로운 무역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샹파뉴, 프랑스 왕이 중과세하며 쇠퇴
그림 3 요스트 암만, 프랑크 푸르트의 인쇄소, 16세기 판화
그림 3 요스트 암만, 프랑크 푸르트의 인쇄소, 16세기 판화
마지막으로 정치적으로는 샹파뉴 지방이 프랑스에 편입된 사실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프랑스 국왕은 샹파뉴 백작과는 달리 대시 상인들에게 안전과 계약 이행을 보장해주지 않고 오히려 세금을 징수하고 특정 상인집단에 대해서는 불이익을 주기도 했다. 무역상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샹파뉴를 찾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샹파뉴의 대시의 쇠퇴는 다른 대시들에게 기회로 작용했다. 독일은 프랑스 못지않게 일찍부터 대시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프랑크푸르트와 라이프치히가 오랜 경쟁관계를 이뤄왔다. 프랑크푸르트 대시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정기시 가운데 하나였다. 11세기에 지역 농산물을 거래하는 정기시로 시작했지만, 13세기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명시적 보호 하에 정식 대시로 지위가 격상됐다. 15세기에는 재화의 거래는 물론 은행업과 주식거래까지 이곳에서 널리 행해졌다. 라이프치히 대시는 12세기에 시작됐는데, 이곳도 통치자의 적극적 보호에 힘입어 무역과 금융 중심지로서 명성을 높여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도시는 비록 내륙 상권 전성기 때의 모습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각별한 노력을 통해 특별한 상품을 전문적으로 거래하는 정기시로서 명성을 새롭게 쌓는 데에 성공했다. 그것은 바로 책이었다. 프랑크푸르트 대시에서는 일찍부터 수도사들이 필사한 종교서적들이 거래됐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도서시장이 확대된 것은 15세기의 일이었다. 1445년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기를 개발한 이후 유럽에서 서적의 출판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그림 3>은 이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도서시장도 빠르게 확대됐다. 1500년경에 프랑크푸르트가 유럽 최대의 출판시장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시대인 17세기에 상황이 급반전했다. 30년 전쟁과 검열의 등장이 프랑크푸르트 도서 시장을 침체로 몰고 갔다. 한편 신교의 영향력이 큰 프로이센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라이프치히가 새로운 도서시장 강자로 떠올라 번영을 오래 누렸다. 그러나 라이프치히의 번영도 영원하지는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라이프치히가 동독으로 편입되면서 다시 서독에 위치한 프랑크푸르트가 부활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날 세계 최대의 도서전이 열리는 도시가 됐다. 해마다 10월이면 세계의 수많은 출판인이 방문하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1000년 전부터 무역 허브가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경주했던 유럽 도시들이 현대에 남긴 발자취다.
샹파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1740380
면세와 축성 의례로 무역 허브 발돋움 한 샹파뉴
중앙일보
입력 2017.07.09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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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 경제사] 중세 유럽의 국제무역시장
그림 1 랑디 대시에서 축성하는 파리대주교, 14세기
그림 1 랑디 대시에서 축성하는 파리대주교, 14세기
<그림 1>은 중세 유럽의 장거리 무역과 관계가 깊다. 당시 유럽은 크게 세 개의 상권으로 나뉘어있었다. 무역 규모가 가장 컸던 곳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남부 상권이었다. 동양에서 향신료·직물·명반 등 값비싼 상품들을 수입해 유럽 전역에 판매하는 이탈리아 상인들이 이곳의 주인공이었다. 베네치아·제노바와 같은 무역도시들은 유럽에서 금융·회계·조선업이 가장 앞선 경제 중추였다. 둘째 상권은 독일과 네덜란드의 항구도시들이 중심이었던 북부 상권이었다. 이곳의 한자동맹 상인들은 북해와 발트 해를 통해 플랑드르의 모직물, 보르도의 포도주, 런던의 금속 제품, 스칸디나비아의 생선과 목재 등을 거래했다.
우리의 주요 관심은 세 번째 상권에 있다. 남유럽과 북유럽에서 생산된 물품들은 어딘가에서 만나 서로 거래돼야 했다. 이런 무역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대륙 중앙부에 위치한 내륙 상권이었다. 프랑스의 샹파뉴 지방과 독일의 라이프치히·프랑크푸르트가 대표적인 중심지였다. 이곳에서는 매년 일정 기간에 정기시인 대시(fair)가 열렸다. 이탈리아 상인들이 알프스 산맥의 험난한 고갯길을 넘어 북쪽으로 향하고, 독일과 플랑드르 상인들이 북유럽 상품들을 남쪽으로 운송해서 만나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여기가 유럽인들에게는 국제무역의 허브였던 것이다.
정기시장 열리며 환어음·환전 등 발달
그림 2 14세기 제노바 은행가의 작업 모습
그림 2 14세기 제노바 은행가의 작업 모습
상인들이 대시에서 무역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그런데 주화나 금괴를 들고서 장거리 여행을 하자면 위험했고 비용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상인들은 신용을 기초로 거래하고 모든 거래가 끝난 후 청산하기를 원했다. 또한 대시가 파할 때까지 청산되지 않은 금액은 환어음을 발행해 차기로 결제를 이월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탈리아 금융가들이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그림 2>에 등장하는 제노바 은행가들이 대표적이었다. 이 그림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일곱 죄악 중 하나인 탐욕을 상징화한 작품이다. 사람들이 ‘탁자(banco)’에 주화를 올려놓고 계산을 하고 있다. 이 관행으로부터 은행을 뜻하는 용어 ‘방카(banca)’가 나와 영어로 ‘뱅크(bank)’가 됐다. 대시에서 금전거래를 하는 경우에는 유럽 각지에서 생산된 주화들이 서로 단위가 다르고 순도에 차이가 난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따라 환전업이 발달했다. 결과적으로 대시는 유럽의 금융허브 역할을 톡톡히 수행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는 이런 대시에 대해 어떤 입장을 보였을까? 대시를 자기 도시에 유치하려고 적극적 태도를 보인 영주들이 많았다. 국제무역의 중심지가 되면 다양한 경제적 이득이 발생하고 영향력 있는 지도자라는 정치적 위상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주들은 우선 자신의 도시가 사통팔달 연결된 도로망을 보유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교통의 편의만 가지고는 경쟁력을 내세우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일부 영주들은 무역상들에게 도로 통행세를 면제해 주었고, 점포와 창고건물을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출신지와 상관없이 모든 상인이 공평하게 처우를 받도록 보장했고, 분쟁을 공정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초보적인 상업재판소도 설립했다.
대시 유치경쟁에는 종교적 편의의 제공도 포함됐다. 성직자가 시장의 번창과 무사고를 빌며 축성 의례를 진행해주는 것이다. 대시를 방문하는 상인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이었으므로 성직자의 축성 의례는 이들에게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위에서 본 <그림 1>은 파리 근교 생드니 지역의 랑디라는 도시의 모습이다. 장시가 개장하는 날 파리 대주교가 등장해 무역상들의 안전과 번영을 기원하는 기도 행사를 집전하는 광경이다.
<그림 1>은 얼핏 보면 단순한 종교 행사를 무덤덤하게 묘사한 듯하다. 그러나 사실은 국제 무역허브가 되기 위해 중세 도시가 펼친 치열한 경쟁의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유럽 내륙 전체에서 대시가 가장 발달한 지역은 프랑스의 샹파뉴 지방이었다. 12세기부터 라그니·트루아·프로뱅·바쉬르오브 등 교통이 양호한 네 도시에서 순차적으로 6주씩 정기시가 열렸다. 보통 일 년에 여섯 차례 개장했으니 중간에 상인들이 이동하는 기간을 고려하면 거의 연중 내내 시장이 열린 셈이었다. 외떨어진 도시에서 열린 유럽의 다른 대시들과 달리 샹파뉴에서는 지리적으로 제한된 범위에서 다수의 정기시가 연이어 열렸으므로 무역상들이 선호했다.
하지만 지도자의 역할도 중요했다. 샹파뉴 백작은 경찰 조직을 구성해 무역상들에게 공공질서를 보장했다. 도량형을 속이지 못하게 했으며, 한 번 계약을 위반한 자는 대시에 다시 참여하지 못하게 금지했다. 치안과 재산권 보호는 무역상을 끌어들이는 가장 확실한 유인책이었다.
이렇게 번영했던 샹파뉴 대시가 13세기 말부터 쇠퇴기를 맞게 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기술적으로는 이탈리아에서 조선술과 항해술이 발달한 점을 들 수 있다. 지중해에서 지브롤터 해협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항해해 저지대 국가들로 직접 찾아가는 게 가능해진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신용거래 기법이 개선되고 무역회사 조직이 발달하면서 북부 상권과의 직접 거래가 쉬워졌다. 이에 따라 브뤼주·안트베르펜과 같은 도시가 새로운 무역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샹파뉴, 프랑스 왕이 중과세하며 쇠퇴
그림 3 요스트 암만, 프랑크 푸르트의 인쇄소, 16세기 판화
그림 3 요스트 암만, 프랑크 푸르트의 인쇄소, 16세기 판화
마지막으로 정치적으로는 샹파뉴 지방이 프랑스에 편입된 사실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프랑스 국왕은 샹파뉴 백작과는 달리 대시 상인들에게 안전과 계약 이행을 보장해주지 않고 오히려 세금을 징수하고 특정 상인집단에 대해서는 불이익을 주기도 했다. 무역상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샹파뉴를 찾을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샹파뉴의 대시의 쇠퇴는 다른 대시들에게 기회로 작용했다. 독일은 프랑스 못지않게 일찍부터 대시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프랑크푸르트와 라이프치히가 오랜 경쟁관계를 이뤄왔다. 프랑크푸르트 대시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정기시 가운데 하나였다. 11세기에 지역 농산물을 거래하는 정기시로 시작했지만, 13세기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명시적 보호 하에 정식 대시로 지위가 격상됐다. 15세기에는 재화의 거래는 물론 은행업과 주식거래까지 이곳에서 널리 행해졌다. 라이프치히 대시는 12세기에 시작됐는데, 이곳도 통치자의 적극적 보호에 힘입어 무역과 금융 중심지로서 명성을 높여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도시는 비록 내륙 상권 전성기 때의 모습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각별한 노력을 통해 특별한 상품을 전문적으로 거래하는 정기시로서 명성을 새롭게 쌓는 데에 성공했다. 그것은 바로 책이었다. 프랑크푸르트 대시에서는 일찍부터 수도사들이 필사한 종교서적들이 거래됐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도서시장이 확대된 것은 15세기의 일이었다. 1445년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기를 개발한 이후 유럽에서 서적의 출판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그림 3>은 이때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도서시장도 빠르게 확대됐다. 1500년경에 프랑크푸르트가 유럽 최대의 출판시장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의 시대인 17세기에 상황이 급반전했다. 30년 전쟁과 검열의 등장이 프랑크푸르트 도서 시장을 침체로 몰고 갔다. 한편 신교의 영향력이 큰 프로이센이 세력을 확대하면서 라이프치히가 새로운 도서시장 강자로 떠올라 번영을 오래 누렸다. 그러나 라이프치히의 번영도 영원하지는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라이프치히가 동독으로 편입되면서 다시 서독에 위치한 프랑크푸르트가 부활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날 세계 최대의 도서전이 열리는 도시가 됐다. 해마다 10월이면 세계의 수많은 출판인이 방문하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1000년 전부터 무역 허브가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경주했던 유럽 도시들이 현대에 남긴 발자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