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내가 이런 글을 접했다면 조금은 달랐을 수 있을까, 혹시 내가 누군가의 현실을 조금은 바꿀 수 있지는 않을까 라는 바람으로 적습니다. 짧게 쓰는 점은 양해 바랍니다.
나는 아직 20대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음.
유산은커녕 유품도 다 정리되지 않았고 아버지가 지내던 집은 그대로 비어 있음.
장례식도 여차저차 끝내고 회사에 복귀 했는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음.
아무렇지 않다가도 아무 이유 없이 아빠 생각이 남.
당연한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적어도 나한테는 당연한 일이 아니었음.
나는 엄마가 없음. 있긴 한데 엄마는 아님.
어릴 때 우리를 버렸고 아빠 혼자 젖먹이였던 누나와 나를 키우셨음.
어린 시절 나는 평범한 애가 아니라 애새끼였음.
지랄견마냥 사고뭉치였고 아버지도 매일같이 때리고(훈육) 가르치느라 애를 먹었지만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기억은 이 때가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우리 가족은 행복했음.
그 시절 나는 혼자 우리를 버리지 않고 키워주는 불쌍한 아버지를 존경하고, 동정했음.
엄마 없는 새끼라는 말이 참 싫었는데 나보다도 아빠가 나의 그 호칭을 듣게 될까 무서워서 조심하다보니 지금도 예의에 아주 민감한 사람이 됐음.
아빠의 술 담배가 심해지고 술주정의 강도가 더해지기 시작한 무렵에 내가 중학생이 됨.
이 때부터 아버지는 꼭 짐승처럼 거칠고 예민해졌음.
폭행시비는 다반사였고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사건 사고는 다 있었음.
술에 덜 깨서 아침 일찍 밀린 월세 받으러 온 집주인한테 쌍욕을 시전할 정도로 충동적이고 화에 지배당해 살았는데 이 때 빡친 집주인이 반환소송 민사를 걸기도 했음.
중1때 나는 작고 왜소했음.
금방 클 거라며 엄청나게 큰 교복을 입었는데, 키 140에 동복 마이가 100짜리였을 거임.
이발비가 없어서 머리가 지저분하고 옷도 크게 입는 찐따 그 자체였음.
초딩 때 워낙 많이 싸우고 깝치고 다녀서 일진들이 소문 듣고 찾아오고 그랬는데, 성장기에 접어든 애들에 비해 여전히 초딩 그대로였던 나는 결국 밥이 됨.
차라리 꼬리라도 내리면 괜찮았는데 깝치다가 반 년정도 왕따도 당해보면서 인생의 암흑기를 맞음.
암흑기는 점점 심해지다가 고등학교때 절정을 찍음.
그 때의 나는 아버지를 기어코 자식을 등지고 부모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증오했음.
이 시절부턴 키가 점점 커져서 아버지한테 종종 대들기도 했지만 우리 아버지는 183에 조폭 못지 않은 피지컬 소유자임.
나는 맘이 여려서 차마 아버지를 때리지 못하고 말로만 개겼는데 아버지는 아니었음.
어릴 때는 회초리 외에도 급 빡칠땐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찍는다거나 뺨을 후리거나 말 그대로 줘패곤 했는데 그래도 이 때는 손찌검을 하진 않고 나를 들어서 집어 던지는 정도로 봐주셨음. 그래서인지 어릴 때와 다르게 공포보단 증오가 더 커서 더 이상 굴복당하진 않았음.
누난 졸업 하자마자 돈 벌러 나갔는데, 아버지가 누나에게 자주 손을 벌렸음.
일이 안돼서 생계가 어려웠으니 당연히 그럴 수 있겠지만, 어느샌가 나한테는 아빠가 술 먹고 오는 날은 누나가 입금한 날이라는 공식이 세워졌음.
누나가 얼마나 힘들게 돈 버는지 알았기 때문에 그 돈에 손 벌려서 술 먹는 아버지가 한심했고, 그 술주정에 피해자는 내가 되니까 분노가 더 커져 갔음.
집에 먹을 게 너무 없어서 소금에 밥을 비벼 먹다가 새삼 서러워져서 울던 날과 누나가 과로로 쓰러져서 병원에 있다는 날, 그렇게 건강하시던 할머니가 아파서 입원했다는 날도 어김없이 아빠는 손 벌린 돈으로 술과 안주를 사 먹고 들어와서 술주정을 했음.
특히 할머니가 입원한 날은 누나한테 전화로 푸념하다가 안에 있는 것들 다 쏟아내면서 목놓아서 울어봤는데, 이번에 아버지 장례를 포함하면 내 인생 통틀어 딱 두 번 울어본 게 됨.
절대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나는 나중에 저런 부모는 되지 말아야지 했는데 지금은 아버지에게 본받을 것이 많았음
지금까지 단점만 열거했을 뿐 우리 아버지는 술만 없으면 굉장히 다정하고 포근했음.
특히 술주정 다음날에 더 다정하고 포근했는데, 민망해하고 미안해 하시는 걸 알아서 더더욱 미워하기만 할 수가 없었음.
평상시에도 우리한테 못해주는 게 많다는 걸 너무 잘 아시고 미안해 하셨는데,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만은 한 하나의 의심의 여지도 없었음.
다만 주체하지 못하고 술을 드셨을 뿐.
다정하실땐 아버지를 사랑하자고 다짐하는 데 밤에는 술에 취해서 내 멘탈을 가루로 만듦.
이를 갈다 다음 날이 되면 특유의 말투와 다정함으로 "아가 밥 먹자" 하시면서 일어난 나를 다시 무너뜨렸음.
그 괴리감 사이에서 난 계속해서 괴로워 했음.
술주정도, 가난도 시간이 갈수록 악화 됐음.
졸업은 다가왔는데 공부가 뒷전이었던 나는 당연히 좋은 직장을 들어갈 수 없었음.
잘사는거? 웃기지도 않는다는 거 진즉 알고 있었음. 내 꿈은 어릴때부터 평범하게만 사는거였고 그래서 주제파악이 잘 되어 있었음.
그냥 성실하게만 살면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를 통해 배움.
그 마인드로 다행히 고3때 회사에 입사에 성공했고, 첫 월급으로 210만원을 받았는데 당시 내 한달 생활비가 2만원도 안되던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거액이었음.
그런 와중에 여느 때와 같은 술주정이 있었는데 게라웃 마이홈을 시전하심.
매번 듣던 말인데 집에서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생기니까 너무나 다르게 느껴짐.
다음 날 곧장 짐을 싸서 집을 나왔음.
이 때 집 나오는 길에 술 깬 아버지를 마주쳤음.
세상 당당하게 “저 집 나가요” 한마디 던지고 나왔음.
친구 자취방에 월세를 보태며 같이 지내면서 돈 쓰는 맛에 취해 살았음.
그 동안 못해본 것, 못먹은 것, 못사본 모든 것들을 충족하기 시작했음.
그리고 그 돈에서 아버지에게 가는 돈은 명절 용돈 외에는 단 한푼도 없었음.
홀로의 삶이 너무나 자유로웠고 행복했음.
연애라는 것도 하고, 일 하는 것조차 즐거웠을 정도였음.
일하다가 22살에 입대했는데 그 동안 아버지와 연락한 것은 채 20번이 안되는 것 같음.
어쩌다 한 번 연락하는 것 마저도 철저하게 어색한 경어체를 사용해서 대화했음.
당시에는 나 이렇게 혼자 잘 자랐다, 나 이렇게 당당한 어른이 됐다면서 어깨가 으쓱했는데
여전히 가슴에 못이나 쳐박는 꼬맹이가 세상에서 제일 어른스러운 흉내를 냈을 뿐이라는 걸 이제서야 깨닫고 후회하고 있음.
군대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많이 꺾임.
그 집단이 워낙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세뇌시키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보고 듣는 게 그런 것들이니 아무래도 영향이 컸음.
게다가 친구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슬슬 귀찮게 한다는 눈치를 받을 때쯤, 유일하게 내 연락을 반겨주는 사람은 가족 뿐이었음.
마침 아버지가 술을 줄이고 제대로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 집도 드디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큰 기대와 희망을 품게 됨.
어릴 때를 제외하면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사랑한다는 말도 편지로 써봤는데 이건 돌아가신 지금에서는 나에게 제일 큰 위로가 되는 일 중 하나임. 그래도 나 사랑한다는 말을 하긴 했구나, 진짜 다행히 한번은 해봤구나 하면서 위로를 많이 받음.
그 때 아버지는 글씨 학원 다니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셨고 나는 잔뜩 삐져서 편지를 끊었는데, 나중에야 아버지가 그 편지들 거듭 읽으면서 울었다는 말 듣고 마음이 정말 많이 아팠음. 물론 돌아가신 지금은 찢어발겨지는 중이고.
기대와는 달리 전역하고 다시 들어간 우리 집은 처참할 정도로 그대로였음.
아버지의 업종이 잘 안풀렸고 아버지는 다시 술에 빠졌음.
가족이 함께 살 새 집을 마련해서 단란하게 살자는 내 기대와 희망이 모조리 박살 남.
그 당시의 술주정 내용은 기초생활수급자였는데, 이것만 되면 혼자 알아서 먹고 사는데 자식새끼들이 방해가 된다는 거였음.
늬들만 없어도 나 혼자 잘 먹고 산다는 말에 엄청난 배신감과 충격에 빠짐.
2번째 출가로 집을 뛰쳐나와 주소지를 옮겼고 기초생활수급자는 잘 처리됐지만 나와 아버지 사이에는 더 두껍고 커다란 벽이 생겨서 이젠 아예 1년에 1번도 안보는 사이가 되어 버렸음.
최초 몇 년은 연락조차 1~2번 할까 말까 했던 것 같음.
이 때 아버지 나이가 50 초반이었는데 볼 때마다 늙어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가끔 봤음.
늙으면 마음이 여려진다는 말이 맞는지 점점 누나를 통해 나를 찾는 일이 많아졌는데 원망이 녹는 속도는 어색함 때문에 많이 더뎠음.
때론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시릴 때도 있었지만 완전히 녹이기엔 내 마음이 너무 얼어 있었음.
그렇게 관심이 있을 땐 없는 척, 관심이 없을 땐 있는 척 하는 천하의 몹쓸 짓을 매년 반복함.
그리고 어느 날, 아빠가 쓰러져서 수술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음.
아차 싶었음. 설마 아니겠지 싶다가도 진짜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가 무한 루프로 반복됨.
인생에 파도가 많긴 했지만 이렇게 커다란 쓰나미는 아직까지 맞아본 적이 없었음.
그런 쓰나미는 그저 남한테만 듣던 얘기, 뉴스에서만 보던 얘기일 뿐이었음.
게다가 나한테 아버지는 이미 숱한 엄살들과 거짓말, 가감 화법으로 신뢰를 잃은 사람이라서 어디까지가 믿을 만한 내용인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음.
이 때 아버지의 병명을 진단 받았는데 죽네 사네 오도방정을 떨었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간단한 시술로 끝이 남.
비록 허무하고 또 속았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죽음"에 대한 경각심은 생기게 되는 계기는 되었음.
빌어먹게도 그 대상이 아버지가 아닌 할머니였지만.
그 당시에는 불효도 익숙해지는 건지, 어느샌가 할머니에게도 소홀해져 있었음.
아직 큰 병치레 한번 없이 건강하시지만 연세 때문에 사실상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듦.
우리 때문에 평생 고생만 하신 할머니 이렇게 가시면 후회가 많겠다 싶어 전화라도 더 자주 드리게 됨.
한번씩 찾아 뵈면 몰래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으면서 나 혼자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
예전에 찍은 것들과 비교해보니 할머니가 언제 이렇게 늙었나 싶어 반성도 깊고 마음도 조급해짐.
그 사이 아버지한테 전화 와서 숨이 안쉬어진다, 라는 말을 끝으로 연락이 끊긴 적이 있는데
119를 부르고 난리 법석을 떨었지만 결국 술에 취해 잠든 채 발견 돼 구급대원에게 혼이 난 일이 있었음.
이 날이 아마도 가장 원망스러운 날인 것 같음.
아무리 곱씹어봐도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역시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은연 중에 확신해 버린 것임.
그래도 한번씩 문자라도 해보게 됐음.
그 동안은 명절에도 쌩 까는 날이 부지기수였는데, 그래도 이제 명절에는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자리잡았음.
올 해 설에는 용돈도 주고 김치도 받아왔는데, 이게 뭐라고 그 김치를 꺼내 먹을 때마다 기분이 엄청 좋은거임.
아, 이렇게 용서하고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는 구나 하면서 혼자 또 드라마 1편 찍었음.
그리고 올 해 추석 전 날 저녁, 나는 신출귀몰한 아버지의 행적을 파악하기 위해 전화를 드렸음.
안받으심. 그러나 흔한 일이었음. 술에 취하면 만사를 제쳐버리는 분이니까. 술 먹는 데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분이니까.
그래도 술에 깨면 아들 전화했었어? 하면서 전화 오고 그랬는데, 어쩐지 이 날은 명절 당일이 돼도 연락이 없는 것임.
아버지는 종종 명절에 친척들의 연락을 피해 잠수를 타버리곤 했는데, 이 때는 또 돈이 없으니 몹쓸 병이 도졌다고 생각했음.
혹시 라는 생각은 정말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그런건 어차피 뉴스에나 나오는 일이니까 신경을 꺼버림.
추석 당일 아침, 일찍 할머니 뵈러 가는 길에 다시 한번 아버지께 전화를 했음.
여전히 안받으심. 또 잠시 물음표가 떴지만,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음. 아직 못 일어날 시간이긴 하니까.
할머니를 뵙고 생각보다 일찍 할머니 댁을 나섰음.
아버지한테 갈까, 일찍 일어나서 피곤한데 집에 가서 잠이나 한 숨 잘까 고민했는데 이 어이없는 고민은 의외로 쉽게 결정됨.
또 술먹고 뻗어 있을 텐데 뭔 좋은 꼴 본다고, 그냥 다음에 오자 싶었음.
그리고 그 날 아버지는 돌아가셨음.
아버지 전화를 웬 남자가 받음.
자신은 형사이고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함.
의외로 침착했던 나는 왜 소식을 바로 알 수 없었는지 물었고, 형사님은 시신의 신분도 알고 휴대폰도 있지만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가족 연락처에 경찰조차도 접근할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함. 대한민국의 "그" 국민성이 만든 대단한 업적인거임.
이미 시체검안서까지 나와 있었고, 시신도 이미 장례식장에 안치되어 있어서 장례부터 치루면 되는 상황이었음.
이걸 이 단계에서야 알았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는데, 나 스스로에게 화가 난건지 개인정보 보호를 하게 만든 그 사람들에게 화가 난건지는 잘 모르겠음.
하나 확실한건 이 때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에 현실감이 없어서 하나도 안슬펐다는 것임.
이후 장례식장에 와보니 자꾸 고인이라면서 아버지를 극존칭으로 높여 부름.
아버지 친구분들이 하나씩 와서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내기 시작하니까 슬슬 실감이 나는 것임.
연락을 안하던 날은 그렇게 많았어도 연락이 안된 것을 무시한 것은 딱 한번인데, 그게 어느샌가 "내가 살릴 수 있었는데"로 변해서 머릿속에 한번 박히니까 꼭 고장난 것처럼 눈물이 흘렀음.
언젠가 우리 집 속사정을 아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음. 난 아빠가 죽어도 눈물조차 안 흘릴 것 같다고.
실제로 난 내 기준을 벗어난 사람에게는 굉장히 잔인해 질 수 있는 사람이고, 부자 간에도 그렇다는게 스스로 무서웠음.
처음 울 땐 그래도 눈물은 나네, 이런 헛생각이 들 만큼 우는 와중에도 자꾸만 아버지가 죽어 세상에서 없어졌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했음.
체감이 되면 눈물이 났다가 망각이 되면서 그쳤다가를 반복하는 단계였음.
친인척들이 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마치 아버지 생각을 못하게 만드려는 것처럼 엄청나게 복잡해졌기 때문임.
도와준다고 이거는 했냐 저거는 했냐 물어보는 것에 다 대답해주기도 벅찰 만큼 정신이 없었고, 조문객이 끊긴 새벽이 되어서야 정신이 들었고, 온전히 아버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었던 것 같음.
그렇게 불 꺼진 장례식장에서 혼자 영정사진을 보다보니, 그제서야 모든 것을 실감되는 느낌이었음.
나는 최근 마음 먹은 것이 하나 있었음.
할머니를 보내 드리면 나라도 아버지를 용서하자. 아버지가 참 많이 후회하고 아플 텐데 그때부터는 나도 아버지를 용서하고 챙겨야겠다.
우리 할머니한테 잘하고 잘 보내 드리자.
물론 이 모든건 아무짝에도 쓸 모 없는 다짐이었음. 아버지가 이렇게 먼저 돌아가실 수 있다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 영정사진을 보다보니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음.
혼자 그렇게 가실 때 얼마나 쓸쓸했을까. 가시면서 나를 얼마나 원망하셨을까. 그런데 혹시 이런 후레자식도 자식이라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가신 건 아닐까. 우리 아버지는 정말 그러셨을 것도 같아서, 그렇게 항상 아무 이유도 필요 없이 오롯한 나의 편이셨을 것만 같아서, 그런 유일한 사람을 그렇게 고독하게 보낸 것이 미칠듯이 후회돼서 오열이 터져 나왔음.
철 없이 어른인 척 콧대 세웠던 지난 날이 아버지를 얼마나 초라하게 만들었을까. 프로필에 올라오는 내 일상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죄책감과 후회가 짙어질수록 한이 되고, 나름 필사적으로 소리 죽여서 울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친척들도 다 깨서 말없이 듣고 계셨었다는 걸 알게됨.
밤을 꼴딱 샌 둘째 날은 아버지 시신을 입관함.
이 때 참관을 할 수 있는데 이건 사람마다 다르게 결정하는 게 좋음.
나는 아버지 시신을 보고 싶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죄책감을 더 깊게 할 것 같은 겁 때문이었음.
단지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다면서 포장했지만 사실은 나 때문에 죽은 아버지의 마지막 처참한 모습을 받아들이기 겁나고 무서웠음.
가는 모습 못 본 후회는 돌이킬 수 없다는 말에 결국 참관했는데 역시 난 안보는 게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듦.
내 가족의 시신을 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훨씬 훨씬 가슴이 찢어짐.
내 경우는 그 처참한 모습을 쳐다보기 힘든 것보다도, 내 아버지의 시신을 두고 징그럽다는 추악한 생각을 하게 되는 내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특히 강했음.
언젠가 입관할 일이 생긴다면, 고인의 마지막을 꼭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거나 정말 큰 용기와 멘탈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참관하길 추천함.
혹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정도에 따라 정말 트라우마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함.
나는 시간이 꽤 지났는데 파랗게 질린 아버지의 모습이 여전히 몸서리쳐지고 있음.
저토록 처참한 모습으로 가셨다는 사실에 죄책감은 가중되고, 이 때부터는 영정 사진을 볼 때는 물론이고 듣고 보는 모든 것들에 아버지가 연상되면서 하루 종일 울기만 하게 됐음.
이제는 아버지의 시점에서 아버지 인생을 다시 바라보게 됨.
그제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정말 너무너무나 많았음.
사랑 노래는 아버지에게도 대입할 수 있었구나를 알았고, 간간히 의미 없이 하시던 문자에 담겨 있는 진짜 의미를 알았고, 집을 뛰쳐 나오던 날 아버지의 눈빛이 뭐라고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됐고, 자식에게 센 척 강한 척 했어야만 했던 이유를 알았고, 아버지의 투박한 사랑 방식과 서툰 표현 방식을 알았고, 술은 아버지에게 막막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버텨내는 약이었구나, 아버지가 술에 절어가며 이 세상을 악으로 버텼던 이유가 그저 자식이었구나, 강해보였지만 누구보다 사랑과 관심과 위로가 필요했던 사람이었구나를 알았음.
내게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해서 아버지는 고통과 고독 속에 돌아가셨고, 등을 지고 자식의 도리를 다 하지 않아서 죽어 스러진 육신에다 생전 해주지도 않던 음식 갖다 바치고 있고, 간단한 안부 문자 한 통을 귀찮아 하고 외면해서 이 따위 글이나 몇 시간 째 쓰고 지우며 울고 있는, 이런 모습을 다신 그 누구도 안했으면 해서 적어 봅니다.
부디 부모님에게 함부로 하지 마세요.
부모님의 인생도 행복하실 수 있게 해주세요.
지금 말하기 어려운 그 한 마디는
당장 언제라도 말할 수 없는 수백만 마디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꼭 알아주세요.
저보다 관계가 더 열악하신 분도 많겠죠
코웃음치고 비난하실 분도 많이 계실 것 같아요
그래도 손해보는 것 없으니까,
지금 미친척 하고 부모님한테 아프지는 않은지 물어봐 주세요.
혹시 평소에 하신다면 식사는 하셨냐고 하시고
이것도 평소에 하신다면 사랑한다고 하시고
이 마저도 하신다면 그냥 지금 너무 보고싶다고 해주세요.
어색함도 습관이 되더라구요.
부모를 잃으면 느끼는 것들
나는 아직 20대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음.
유산은커녕 유품도 다 정리되지 않았고 아버지가 지내던 집은 그대로 비어 있음.
장례식도 여차저차 끝내고 회사에 복귀 했는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음.
아무렇지 않다가도 아무 이유 없이 아빠 생각이 남.
당연한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적어도 나한테는 당연한 일이 아니었음.
나는 엄마가 없음. 있긴 한데 엄마는 아님.
어릴 때 우리를 버렸고 아빠 혼자 젖먹이였던 누나와 나를 키우셨음.
어린 시절 나는 평범한 애가 아니라 애새끼였음.
지랄견마냥 사고뭉치였고 아버지도 매일같이 때리고(훈육) 가르치느라 애를 먹었지만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기억은 이 때가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우리 가족은 행복했음.
그 시절 나는 혼자 우리를 버리지 않고 키워주는 불쌍한 아버지를 존경하고, 동정했음.
엄마 없는 새끼라는 말이 참 싫었는데 나보다도 아빠가 나의 그 호칭을 듣게 될까 무서워서 조심하다보니 지금도 예의에 아주 민감한 사람이 됐음.
아빠의 술 담배가 심해지고 술주정의 강도가 더해지기 시작한 무렵에 내가 중학생이 됨.
이 때부터 아버지는 꼭 짐승처럼 거칠고 예민해졌음.
폭행시비는 다반사였고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사건 사고는 다 있었음.
술에 덜 깨서 아침 일찍 밀린 월세 받으러 온 집주인한테 쌍욕을 시전할 정도로 충동적이고 화에 지배당해 살았는데 이 때 빡친 집주인이 반환소송 민사를 걸기도 했음.
중1때 나는 작고 왜소했음.
금방 클 거라며 엄청나게 큰 교복을 입었는데, 키 140에 동복 마이가 100짜리였을 거임.
이발비가 없어서 머리가 지저분하고 옷도 크게 입는 찐따 그 자체였음.
초딩 때 워낙 많이 싸우고 깝치고 다녀서 일진들이 소문 듣고 찾아오고 그랬는데, 성장기에 접어든 애들에 비해 여전히 초딩 그대로였던 나는 결국 밥이 됨.
차라리 꼬리라도 내리면 괜찮았는데 깝치다가 반 년정도 왕따도 당해보면서 인생의 암흑기를 맞음.
암흑기는 점점 심해지다가 고등학교때 절정을 찍음.
그 때의 나는 아버지를 기어코 자식을 등지고 부모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증오했음.
이 시절부턴 키가 점점 커져서 아버지한테 종종 대들기도 했지만 우리 아버지는 183에 조폭 못지 않은 피지컬 소유자임.
나는 맘이 여려서 차마 아버지를 때리지 못하고 말로만 개겼는데 아버지는 아니었음.
어릴 때는 회초리 외에도 급 빡칠땐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찍는다거나 뺨을 후리거나 말 그대로 줘패곤 했는데 그래도 이 때는 손찌검을 하진 않고 나를 들어서 집어 던지는 정도로 봐주셨음. 그래서인지 어릴 때와 다르게 공포보단 증오가 더 커서 더 이상 굴복당하진 않았음.
누난 졸업 하자마자 돈 벌러 나갔는데, 아버지가 누나에게 자주 손을 벌렸음.
일이 안돼서 생계가 어려웠으니 당연히 그럴 수 있겠지만, 어느샌가 나한테는 아빠가 술 먹고 오는 날은 누나가 입금한 날이라는 공식이 세워졌음.
누나가 얼마나 힘들게 돈 버는지 알았기 때문에 그 돈에 손 벌려서 술 먹는 아버지가 한심했고, 그 술주정에 피해자는 내가 되니까 분노가 더 커져 갔음.
집에 먹을 게 너무 없어서 소금에 밥을 비벼 먹다가 새삼 서러워져서 울던 날과 누나가 과로로 쓰러져서 병원에 있다는 날, 그렇게 건강하시던 할머니가 아파서 입원했다는 날도 어김없이 아빠는 손 벌린 돈으로 술과 안주를 사 먹고 들어와서 술주정을 했음.
특히 할머니가 입원한 날은 누나한테 전화로 푸념하다가 안에 있는 것들 다 쏟아내면서 목놓아서 울어봤는데, 이번에 아버지 장례를 포함하면 내 인생 통틀어 딱 두 번 울어본 게 됨.
절대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나는 나중에 저런 부모는 되지 말아야지 했는데 지금은 아버지에게 본받을 것이 많았음
지금까지 단점만 열거했을 뿐 우리 아버지는 술만 없으면 굉장히 다정하고 포근했음.
특히 술주정 다음날에 더 다정하고 포근했는데, 민망해하고 미안해 하시는 걸 알아서 더더욱 미워하기만 할 수가 없었음.
평상시에도 우리한테 못해주는 게 많다는 걸 너무 잘 아시고 미안해 하셨는데,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만은 한 하나의 의심의 여지도 없었음.
다만 주체하지 못하고 술을 드셨을 뿐.
다정하실땐 아버지를 사랑하자고 다짐하는 데 밤에는 술에 취해서 내 멘탈을 가루로 만듦.
이를 갈다 다음 날이 되면 특유의 말투와 다정함으로 "아가 밥 먹자" 하시면서 일어난 나를 다시 무너뜨렸음.
그 괴리감 사이에서 난 계속해서 괴로워 했음.
술주정도, 가난도 시간이 갈수록 악화 됐음.
졸업은 다가왔는데 공부가 뒷전이었던 나는 당연히 좋은 직장을 들어갈 수 없었음.
잘사는거? 웃기지도 않는다는 거 진즉 알고 있었음. 내 꿈은 어릴때부터 평범하게만 사는거였고 그래서 주제파악이 잘 되어 있었음.
그냥 성실하게만 살면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를 통해 배움.
그 마인드로 다행히 고3때 회사에 입사에 성공했고, 첫 월급으로 210만원을 받았는데 당시 내 한달 생활비가 2만원도 안되던 것을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거액이었음.
그런 와중에 여느 때와 같은 술주정이 있었는데 게라웃 마이홈을 시전하심.
매번 듣던 말인데 집에서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생기니까 너무나 다르게 느껴짐.
다음 날 곧장 짐을 싸서 집을 나왔음.
이 때 집 나오는 길에 술 깬 아버지를 마주쳤음.
세상 당당하게 “저 집 나가요” 한마디 던지고 나왔음.
친구 자취방에 월세를 보태며 같이 지내면서 돈 쓰는 맛에 취해 살았음.
그 동안 못해본 것, 못먹은 것, 못사본 모든 것들을 충족하기 시작했음.
그리고 그 돈에서 아버지에게 가는 돈은 명절 용돈 외에는 단 한푼도 없었음.
홀로의 삶이 너무나 자유로웠고 행복했음.
연애라는 것도 하고, 일 하는 것조차 즐거웠을 정도였음.
일하다가 22살에 입대했는데 그 동안 아버지와 연락한 것은 채 20번이 안되는 것 같음.
어쩌다 한 번 연락하는 것 마저도 철저하게 어색한 경어체를 사용해서 대화했음.
당시에는 나 이렇게 혼자 잘 자랐다, 나 이렇게 당당한 어른이 됐다면서 어깨가 으쓱했는데
여전히 가슴에 못이나 쳐박는 꼬맹이가 세상에서 제일 어른스러운 흉내를 냈을 뿐이라는 걸 이제서야 깨닫고 후회하고 있음.
군대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많이 꺾임.
그 집단이 워낙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세뇌시키기도 하고, 멀리 떨어져 보고 듣는 게 그런 것들이니 아무래도 영향이 컸음.
게다가 친구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슬슬 귀찮게 한다는 눈치를 받을 때쯤, 유일하게 내 연락을 반겨주는 사람은 가족 뿐이었음.
마침 아버지가 술을 줄이고 제대로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 집도 드디어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수 있다는 큰 기대와 희망을 품게 됨.
어릴 때를 제외하면 처음으로 아버지한테 사랑한다는 말도 편지로 써봤는데 이건 돌아가신 지금에서는 나에게 제일 큰 위로가 되는 일 중 하나임. 그래도 나 사랑한다는 말을 하긴 했구나, 진짜 다행히 한번은 해봤구나 하면서 위로를 많이 받음.
그 때 아버지는 글씨 학원 다니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셨고 나는 잔뜩 삐져서 편지를 끊었는데, 나중에야 아버지가 그 편지들 거듭 읽으면서 울었다는 말 듣고 마음이 정말 많이 아팠음. 물론 돌아가신 지금은 찢어발겨지는 중이고.
기대와는 달리 전역하고 다시 들어간 우리 집은 처참할 정도로 그대로였음.
아버지의 업종이 잘 안풀렸고 아버지는 다시 술에 빠졌음.
가족이 함께 살 새 집을 마련해서 단란하게 살자는 내 기대와 희망이 모조리 박살 남.
그 당시의 술주정 내용은 기초생활수급자였는데, 이것만 되면 혼자 알아서 먹고 사는데 자식새끼들이 방해가 된다는 거였음.
늬들만 없어도 나 혼자 잘 먹고 산다는 말에 엄청난 배신감과 충격에 빠짐.
2번째 출가로 집을 뛰쳐나와 주소지를 옮겼고 기초생활수급자는 잘 처리됐지만 나와 아버지 사이에는 더 두껍고 커다란 벽이 생겨서 이젠 아예 1년에 1번도 안보는 사이가 되어 버렸음.
최초 몇 년은 연락조차 1~2번 할까 말까 했던 것 같음.
이 때 아버지 나이가 50 초반이었는데 볼 때마다 늙어가는 게 눈에 보일 정도로 가끔 봤음.
늙으면 마음이 여려진다는 말이 맞는지 점점 누나를 통해 나를 찾는 일이 많아졌는데 원망이 녹는 속도는 어색함 때문에 많이 더뎠음.
때론 아버지 생각에 가슴이 시릴 때도 있었지만 완전히 녹이기엔 내 마음이 너무 얼어 있었음.
그렇게 관심이 있을 땐 없는 척, 관심이 없을 땐 있는 척 하는 천하의 몹쓸 짓을 매년 반복함.
그리고 어느 날, 아빠가 쓰러져서 수술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음.
아차 싶었음. 설마 아니겠지 싶다가도 진짜 그렇게 되면 어떡하지가 무한 루프로 반복됨.
인생에 파도가 많긴 했지만 이렇게 커다란 쓰나미는 아직까지 맞아본 적이 없었음.
그런 쓰나미는 그저 남한테만 듣던 얘기, 뉴스에서만 보던 얘기일 뿐이었음.
게다가 나한테 아버지는 이미 숱한 엄살들과 거짓말, 가감 화법으로 신뢰를 잃은 사람이라서 어디까지가 믿을 만한 내용인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음.
이 때 아버지의 병명을 진단 받았는데 죽네 사네 오도방정을 떨었던 것에 비하면 너무나 간단한 시술로 끝이 남.
비록 허무하고 또 속았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죽음"에 대한 경각심은 생기게 되는 계기는 되었음.
빌어먹게도 그 대상이 아버지가 아닌 할머니였지만.
그 당시에는 불효도 익숙해지는 건지, 어느샌가 할머니에게도 소홀해져 있었음.
아직 큰 병치레 한번 없이 건강하시지만 연세 때문에 사실상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듦.
우리 때문에 평생 고생만 하신 할머니 이렇게 가시면 후회가 많겠다 싶어 전화라도 더 자주 드리게 됨.
한번씩 찾아 뵈면 몰래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으면서 나 혼자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
예전에 찍은 것들과 비교해보니 할머니가 언제 이렇게 늙었나 싶어 반성도 깊고 마음도 조급해짐.
그 사이 아버지한테 전화 와서 숨이 안쉬어진다, 라는 말을 끝으로 연락이 끊긴 적이 있는데
119를 부르고 난리 법석을 떨었지만 결국 술에 취해 잠든 채 발견 돼 구급대원에게 혼이 난 일이 있었음.
이 날이 아마도 가장 원망스러운 날인 것 같음.
아무리 곱씹어봐도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역시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은연 중에 확신해 버린 것임.
그래도 한번씩 문자라도 해보게 됐음.
그 동안은 명절에도 쌩 까는 날이 부지기수였는데, 그래도 이제 명절에는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자리잡았음.
올 해 설에는 용돈도 주고 김치도 받아왔는데, 이게 뭐라고 그 김치를 꺼내 먹을 때마다 기분이 엄청 좋은거임.
아, 이렇게 용서하고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는 구나 하면서 혼자 또 드라마 1편 찍었음.
그리고 올 해 추석 전 날 저녁, 나는 신출귀몰한 아버지의 행적을 파악하기 위해 전화를 드렸음.
안받으심. 그러나 흔한 일이었음. 술에 취하면 만사를 제쳐버리는 분이니까. 술 먹는 데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 분이니까.
그래도 술에 깨면 아들 전화했었어? 하면서 전화 오고 그랬는데, 어쩐지 이 날은 명절 당일이 돼도 연락이 없는 것임.
아버지는 종종 명절에 친척들의 연락을 피해 잠수를 타버리곤 했는데, 이 때는 또 돈이 없으니 몹쓸 병이 도졌다고 생각했음.
혹시 라는 생각은 정말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그런건 어차피 뉴스에나 나오는 일이니까 신경을 꺼버림.
추석 당일 아침, 일찍 할머니 뵈러 가는 길에 다시 한번 아버지께 전화를 했음.
여전히 안받으심. 또 잠시 물음표가 떴지만, 이번에도 그러려니 했음. 아직 못 일어날 시간이긴 하니까.
할머니를 뵙고 생각보다 일찍 할머니 댁을 나섰음.
아버지한테 갈까, 일찍 일어나서 피곤한데 집에 가서 잠이나 한 숨 잘까 고민했는데 이 어이없는 고민은 의외로 쉽게 결정됨.
또 술먹고 뻗어 있을 텐데 뭔 좋은 꼴 본다고, 그냥 다음에 오자 싶었음.
그리고 그 날 아버지는 돌아가셨음.
아버지 전화를 웬 남자가 받음.
자신은 형사이고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함.
의외로 침착했던 나는 왜 소식을 바로 알 수 없었는지 물었고, 형사님은 시신의 신분도 알고 휴대폰도 있지만 개인정보 보호 때문에 가족 연락처에 경찰조차도 접근할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함. 대한민국의 "그" 국민성이 만든 대단한 업적인거임.
이미 시체검안서까지 나와 있었고, 시신도 이미 장례식장에 안치되어 있어서 장례부터 치루면 되는 상황이었음.
이걸 이 단계에서야 알았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는데, 나 스스로에게 화가 난건지 개인정보 보호를 하게 만든 그 사람들에게 화가 난건지는 잘 모르겠음.
하나 확실한건 이 때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에 현실감이 없어서 하나도 안슬펐다는 것임.
이후 장례식장에 와보니 자꾸 고인이라면서 아버지를 극존칭으로 높여 부름.
아버지 친구분들이 하나씩 와서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내기 시작하니까 슬슬 실감이 나는 것임.
연락을 안하던 날은 그렇게 많았어도 연락이 안된 것을 무시한 것은 딱 한번인데, 그게 어느샌가 "내가 살릴 수 있었는데"로 변해서 머릿속에 한번 박히니까 꼭 고장난 것처럼 눈물이 흘렀음.
언젠가 우리 집 속사정을 아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음. 난 아빠가 죽어도 눈물조차 안 흘릴 것 같다고.
실제로 난 내 기준을 벗어난 사람에게는 굉장히 잔인해 질 수 있는 사람이고, 부자 간에도 그렇다는게 스스로 무서웠음.
처음 울 땐 그래도 눈물은 나네, 이런 헛생각이 들 만큼 우는 와중에도 자꾸만 아버지가 죽어 세상에서 없어졌다는 사실을 망각하곤 했음.
체감이 되면 눈물이 났다가 망각이 되면서 그쳤다가를 반복하는 단계였음.
친인척들이 오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마치 아버지 생각을 못하게 만드려는 것처럼 엄청나게 복잡해졌기 때문임.
도와준다고 이거는 했냐 저거는 했냐 물어보는 것에 다 대답해주기도 벅찰 만큼 정신이 없었고, 조문객이 끊긴 새벽이 되어서야 정신이 들었고, 온전히 아버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었던 것 같음.
그렇게 불 꺼진 장례식장에서 혼자 영정사진을 보다보니, 그제서야 모든 것을 실감되는 느낌이었음.
나는 최근 마음 먹은 것이 하나 있었음.
할머니를 보내 드리면 나라도 아버지를 용서하자. 아버지가 참 많이 후회하고 아플 텐데 그때부터는 나도 아버지를 용서하고 챙겨야겠다.
우리 할머니한테 잘하고 잘 보내 드리자.
물론 이 모든건 아무짝에도 쓸 모 없는 다짐이었음. 아버지가 이렇게 먼저 돌아가실 수 있다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자 영정사진을 보다보니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음.
혼자 그렇게 가실 때 얼마나 쓸쓸했을까. 가시면서 나를 얼마나 원망하셨을까. 그런데 혹시 이런 후레자식도 자식이라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가신 건 아닐까. 우리 아버지는 정말 그러셨을 것도 같아서, 그렇게 항상 아무 이유도 필요 없이 오롯한 나의 편이셨을 것만 같아서, 그런 유일한 사람을 그렇게 고독하게 보낸 것이 미칠듯이 후회돼서 오열이 터져 나왔음.
철 없이 어른인 척 콧대 세웠던 지난 날이 아버지를 얼마나 초라하게 만들었을까. 프로필에 올라오는 내 일상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죄책감과 후회가 짙어질수록 한이 되고, 나름 필사적으로 소리 죽여서 울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친척들도 다 깨서 말없이 듣고 계셨었다는 걸 알게됨.
밤을 꼴딱 샌 둘째 날은 아버지 시신을 입관함.
이 때 참관을 할 수 있는데 이건 사람마다 다르게 결정하는 게 좋음.
나는 아버지 시신을 보고 싶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죄책감을 더 깊게 할 것 같은 겁 때문이었음.
단지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다면서 포장했지만 사실은 나 때문에 죽은 아버지의 마지막 처참한 모습을 받아들이기 겁나고 무서웠음.
가는 모습 못 본 후회는 돌이킬 수 없다는 말에 결국 참관했는데 역시 난 안보는 게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듦.
내 가족의 시신을 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훨씬 훨씬 가슴이 찢어짐.
내 경우는 그 처참한 모습을 쳐다보기 힘든 것보다도, 내 아버지의 시신을 두고 징그럽다는 추악한 생각을 하게 되는 내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특히 강했음.
언젠가 입관할 일이 생긴다면, 고인의 마지막을 꼭 기억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거나 정말 큰 용기와 멘탈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참관하길 추천함.
혹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정도에 따라 정말 트라우마가 될 수 있으니 조심해야함.
나는 시간이 꽤 지났는데 파랗게 질린 아버지의 모습이 여전히 몸서리쳐지고 있음.
저토록 처참한 모습으로 가셨다는 사실에 죄책감은 가중되고, 이 때부터는 영정 사진을 볼 때는 물론이고 듣고 보는 모든 것들에 아버지가 연상되면서 하루 종일 울기만 하게 됐음.
이제는 아버지의 시점에서 아버지 인생을 다시 바라보게 됨.
그제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정말 너무너무나 많았음.
사랑 노래는 아버지에게도 대입할 수 있었구나를 알았고, 간간히 의미 없이 하시던 문자에 담겨 있는 진짜 의미를 알았고, 집을 뛰쳐 나오던 날 아버지의 눈빛이 뭐라고 하고 있었는지 알게 됐고, 자식에게 센 척 강한 척 했어야만 했던 이유를 알았고, 아버지의 투박한 사랑 방식과 서툰 표현 방식을 알았고, 술은 아버지에게 막막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버텨내는 약이었구나, 아버지가 술에 절어가며 이 세상을 악으로 버텼던 이유가 그저 자식이었구나, 강해보였지만 누구보다 사랑과 관심과 위로가 필요했던 사람이었구나를 알았음.
내게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해서 아버지는 고통과 고독 속에 돌아가셨고, 등을 지고 자식의 도리를 다 하지 않아서 죽어 스러진 육신에다 생전 해주지도 않던 음식 갖다 바치고 있고, 간단한 안부 문자 한 통을 귀찮아 하고 외면해서 이 따위 글이나 몇 시간 째 쓰고 지우며 울고 있는, 이런 모습을 다신 그 누구도 안했으면 해서 적어 봅니다.
부디 부모님에게 함부로 하지 마세요.
부모님의 인생도 행복하실 수 있게 해주세요.
지금 말하기 어려운 그 한 마디는
당장 언제라도 말할 수 없는 수백만 마디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꼭 알아주세요.
저보다 관계가 더 열악하신 분도 많겠죠
코웃음치고 비난하실 분도 많이 계실 것 같아요
그래도 손해보는 것 없으니까,
지금 미친척 하고 부모님한테 아프지는 않은지 물어봐 주세요.
혹시 평소에 하신다면 식사는 하셨냐고 하시고
이것도 평소에 하신다면 사랑한다고 하시고
이 마저도 하신다면 그냥 지금 너무 보고싶다고 해주세요.
어색함도 습관이 되더라구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