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그 후... <제 2 회> - 전화번호

박준욱2004.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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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

 

그와 이별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은 오늘따라 왜 이리 멀게만 느껴만 지는지 온 몸이 기진맥진이다.

드디어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고 이내 105동의 입구, 엘리베이터를 지나 현관문 앞에 도착했

다.

초인종을 힘없이 눌렀다.

금세 엄마가 날 마중... 아니, 현관문을 열어 주었다.

어김없는 잔소리와 함께...

 

"여자애가 왜 이렇게 늦게 다니니? 연애도 좋지만..."

 

난 엄마의 잔소리에 대항할 힘 따윈 없다.

그냥 내 방에 들어와 옷을 갈아입곤 욕실로 들어섰다.

샤워기를 틀었고 이내 따스한 온기가 나의 추위에 얼은 내 몸을 조심스레 녹이기 시작했다.

 

그와 헤어졌기 때문일까?

 

샤워를 해도 그리 개운하지 않을뿐더러 피곤함만이 한층 더 누적될 뿐이니 길게 늘어져 축

축하게 젖은 머리카락 말릴 힘도 없이 그대로 침대에 몸을 맡겼다.

금세 나의 무거운 눈꺼풀들은 나의 두 눈을 덮으려 한다.

그때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둔 휴대폰에서 문자가 왔다고 발신음이 짧게 울렸다.

 

그와 사랑하고부터 난 언제나 휴대폰을 아주 가까운 곳에 둔다.

내가 일찍 잠들려면 유치하게 시리 내 꿈꾸라며 그에게 문자를 보내고 그가 먼저 잠들려면

그 역시 나한테 때론 우스운... 때론... 귀여운 때론 감동적인... 때론 사랑스런 문자를 보내주

니... 그를 사랑하면서 생긴 아주 유치한 습관이다.

 

우선 문자를 확인해본다.

 

「추운 겨울에 어울리는 컬러링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연결하시려면 통화키를 누르세요.」

 

당연히 그의 문자는 아니다.

그저 단순한 광고 문자이다.

그냥 휴대폰을 닫아 버린다.

아니, 다시 열어 금방 온 광고 문자를 삭제한다.

그러자 그가 보내왔던 문자들이 내 눈에 들어온다.

한 번 다시 볼까라는 생각이 잠시나마 내 머리를 스쳐가지만, 내 이성이 내 감정을 짓누른

다.

그가 보냈던 모든 문자는 물론 이참에 그의 전화 번호까지 삭제해 버렸다.

 

하지만 이것도 그를 잊기 위한 하나의 발악일 뿐이란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여태 '0'이란 단축번호 하나로 그에게 연락을 했다지만 그의 전화번호 11자리는 쉽사리 지워

지지 않는다.

그를 사랑했던 추억이 나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듯 그의 11자리 전화번호 또한 나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

허나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내게도 새로운 사람이 생겨 그 사람과 사랑을 하게 된다면 그 사람과의 사랑으

로 인하여 그와의 추억... 그리고 전화번호 따위도 자연스레 소멸될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He...]

 

그녀와 이별했다.

 

그리고 2시간이 지났다.

2시간이면 그녀는 이미 공원을 벗어나 평소처럼 603번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했을 것이다.

여전히 하늘에선 하얀 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싸늘하게 불어대는 겨울바람은 나의 시린 마음

을 더 자극시키지만 난 아직도 이곳을 떠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떠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듯 하다.

 

미련(未練)이란 미련한 감정 때문이다.

혹시 지금이라도 그녀가 나를 잊지 못하여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어쩌면 망상(妄想)일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2시간이나 지났으니 망상임이 분명했다.

 

결국 난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그녀는 물론 자포자기(自暴自棄)한 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때 또 하나의 생각이 든다.

 

혹시 버스 정류장에서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난 혹시나 하는 생각에 어느덧 쌓인 눈 때문에 거리가 미끄러울 거라는 생각조차 못한 채

공원을 벗어났다.

그리고 이미 꽁꽁 얼어버린, 빙판 같은 아스팔트 위를 뛰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좀 전의 내 생각은 순식간에 또 망상으로 변했다.

버스 정류장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아니, 사람은커녕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자동차의 주행소리나 가끔 울려대는 경적 소리만이 전부였다.

 

숨을 차서 몰아쉬는 가운데 가슴 한곳이 욱신거린다.

너무 갑자기 뛰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벌써 이별 후의 증세가 나타나는 것일까?

허전함과 슬픔, 그리움들이 말이다.

 

그때 버스가 왔다.

난 이제 버스에 올라야 했다.

아무래도 막차인 듯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난 아무 창가자리에 앉았다.

아직도 가픈 숨은 진정되지 않은 듯 무의식으로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그때 이런 내 사정도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무정하게끔 휴대폰이 울려됐다.

휴대폰 LCD화면에 나타나는 발신자 이름을 보니 집이었다.

보나마나 어머니임이 틀림없다.

 

"여보세요?

"아직도 데이트하고 있니?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지금 들어가고 있어요."

 

짧게 대답하곤 전화를 끊었다.

더 이상 통화를 했다간 괜스레 어머니한테 심통이나 부릴 것 같다.

창 밖을 본다.

창 밖의 비쳐진 풍경들은 변함없다.

그저 내 마음만의 심정만이 끊임없이 변하고 있을 뿐이다.

 

괜스레 휴대폰에 있는 통화목록을 본다.

통화목록엔 온통 그녀의 이름으로 채워져 있었다.

물론 금방 집에서 걸려온 전화를 제외하곤 말이다.

이제 그녀는 떠났기에... 아니, 그녀와 이별했기에 이젠 아무런 의미도... 어떠한 흐뭇함도 존

재하지 않는다.

난 통화목록에 있는 그녀의 이름을 삭제했다.

그녀의 이름은 금세 11자리의 숫자로 탈바꿈했다.

이 11자리의 숫자로 된 전화번호도 이제 더 이상 내겐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이 역시 삭제

했다.

 

허나 이렇게 그녀를 정리한다는 식으로 그녀의 전화번호를 지우면 뭐 하는가?

이렇게 지우면 그녀까지 정리된다고 잠시나마 생각한 내가 어리석게 느껴진다.

이제 연락조차 해서는 안될 우리... 아니, 그녀와 나 사이에 이 따위 전화번호는 아무런 필요

가치도 느끼지 못하지만, 그것은 내 마음 깊숙이 새겨져 있다.

 

마치 아직 못 다한 그녀를 향한 내 사랑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