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어버린 랭보, 그 쓸쓸한 키스

누렁이2006.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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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버린 랭보, 그 쓸쓸한 키스

김혜영


불안한 바람이 창문을 두드렸지요. 밤새도록
몸을 뒤척이다가 꿈속에서 제국주의자들에게
구원의 걸레가 되어준 식민지 소녀를 보았어
요. 거친 병사의 숨소리, 막혀버린 입, 알몸
에 새긴 검은 채찍 자국, 거미줄에 감긴 늙은
소녀를 훔쳐보는 일본 천황의 유령을 만났
어요. 햇살무늬 제복을 입고 벚꽃이 흐드러
지게 핀 사원을 산책하더군요. 바다가 보랏빛
으로 물들 때 원주민 여자의 젖꼭지에 깃발이
펄럭이더군요. 이방인처럼 세상을 마구 휘저을
반역의 깃발! 저 아득한 하늘 끝에 닻을 내린
철탑 크레인에서 뛰어내린 남자의 핏빛 작업복에
얼굴을 묻고 랭보는 미친 사자처럼 울더군요. 난
랭보의 거침없는 반항에 매료되었어요. 커다란
쇠망치로 마구 깨부수고 싶은 푸른 지옥을 죽도록
사랑하라니, 랭보의 맨발이 딱딱한 아스팔트를 걸
어가요. 가장 딱딱한 씨앗의 껍질을 벗기던 랭보의
손이 나를 껴안았지요. 고개를 푸욱 숙이고 절뚝절
뚝 걸어가던 내게 키스를 퍼붓던 랭보의 유령이 책
상 옆에 서 있었지요. 머리가 하얗게 새어버린 랭보,
갈라파고스 군도로 가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