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회와 도산 안창호

0002022.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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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한 이후 일본은 한국교회에 대한 적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제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자신들의 통치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자들이며, “십자가 보호 밑에 그 세력을 크게 양성하여 장차 십자군을 일으켜 일본 세력을 한국에서 축출”하려는 자들로 보았다. 이에 일제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기독교에 압제를 가하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기독교인들에 대한 살육도 망설이지 않고 감행했다. 한 예로 강화도 남문에 살던 김동수씨 3형제는 일본 순사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여학교로 사용되던 보창학교 교장이동휘의 집도 불태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위기에 처한 민족을 구해보겠다는 일념에서 구국기도회나 저항시위와 같은 대중적 집회, 망국의 원흉들에 대한 암살, 조세저항운동이나 국채보상운동과 같은 경제적 저항, 신민회나 서북학회와 같은 정치적 저항 등을 통한 항일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한 예로 함경북도 경성군 서면의 기독교인들은 당시 통감부가 조선정부의 이름으로 재정 발표한 가옥세, 주세, 연초세 등을 망국적인 세금이라 보고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으며, 평안도 등지에서 기독교인들의 주도로 시장세 반대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조세반대운동을 통한 항일투쟁과 함께 신민회 또한 우리의 주목을 끈다. 신민회는 1907년 도산 안창호(1878-1938)를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단체로 그 구성원 대부분이 개신교 신자였다. 발기인이었던 양기탁, 이갑, 유동열, 이동휘, 이동녕, 전덕기 등은 구한말 기독교 민족운동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상동청년학원과 직간접으로 관계있는 인사들이었다.

105인 사건의 공판기록에 따르면 기소자 123명 가운데 장로교도 96명, 감리교도 6명, 동학교도 2명, 천주교도 2명이었다(이승만, [한국교회 핍박], 99). 신민회는 이처럼 민족적인 성향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 형성한 단체였다.

신민회의 창립 목적은 “부패한 사상과 습관을 혁신하야 국민을 유신케 하고, 쇠퇴한 발육과 산업을 개량하여 사업을 유신케 하며, 유신한 국민이 통일 연합하여 유신한 자유문명국을 설립함”에 있었다. 즉 안으로는 봉건왕조를 청산하여 근대적인 공화정을 설립하고, 밖으로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친 뒤 명실상부한 자주독립 국가를 수립함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신민회의 이런 성격은 도산의 실력양성론으로 집약된다. 민족이 예속화된 상태에서 독립하려면 무력투쟁으로는 안되고, 교육과 산업 진흥을 통해 배양된 실력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산은 “참배나무에 참배가 열리고 돌배나무에 돌배가 열리듯이, 독립할 만한 자격이 있을 때 독립할 수 있고 남의 노예가 될 만한 자격밖에 없을 때는 망국인이 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힘 있는 민족이 되기 위해서는 경제적 자본(금전), 정신적 자본(지식), 도덕적 자본(신용) 세 가지를 동맹하여 저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실력양성론은 이후 민족개조론으로 연결되었다. 여기서 ‘개조’는 기독교 용어로 회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919년 ‘개조’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도산은 “예수보다 좀 먼저 온 요한이 맨 처음으로 백성에게 부르짖은 말씀이 무엇이오? ‘회개하라’였오. 그후 예수가 맨 처음 크게 외친 말씀이 무엇이오? 또 ‘회개하라’라 였오, 나는 이 ‘회개’라는 것이 곧 ‘개조’임을 말하려오”라고 하였다.

도산은 사람의 생각과 태도의 전면적 변화를 의미하는 ‘회개’라는 기독교 용어를 수용하여 민족 각 개인의 변화를 주장하는 개조의 한 방식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도산이 회개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민족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변화의 가능성이 없이 회개는 요구되지 않는다. 회개는 가능성을 보고 요구하며 기대하는 열려있는 용어인 것이다. 따라서 도산의 민족개조론은 민족적 열등감을 전제로 했던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도산의 민족개조론은 우리 민족의 저력에 대한 철저한 신뢰와 이해의 바탕에서 나온 자기비판이었다. 그는 우리 민족성을 결코 고착화된 불가능태가 아니라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가능태로 보았던 것이다.

도산의 이런 실력양성론과 민족개조론의 사상적 바탕은 기독교였다. 기독교는 그에게 목전에 있는 민족의 참담한 실상만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민족의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을 열러주었다. 그리고 기독교신앙과 겨레의 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사상적 발판을 제공했다.

평안남도 강서 태생이었던 도산이 기독교를 접하게 된 것은. 17세 되던 해(1894) 서울에서였다. 공부하기 위해 상경했지만 돈이 없던 그는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설립한 구세학당 앞을 거의 매일처럼 배회하고 있었다. 그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이들이 ‘선교사의 허락만 받으면 공부할 수 있다’라고 귀띔을 해주어 선교사를 찾아갔다. 선교사가 그를 보고 "어디서 왔느냐?"하고 물었다. 평양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선교사는 "평양에서 여기까지가 몇 리가 되는가?"라고 물었다. “8백 리요”라고 그는 대답했다. 그러자 선교사가 "거기서 공부하지 않고 뭐하려고 이 먼 곳까지 왔느냐?"하고 재차 물었다. 이에 그는 한 가지만 묻겠다고 양해를 구한 후 “미국이 여기서 몇 리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러자 선교사는 "8만 리"라고 했다. 이에 그는 "8만 리 밖에서도 가르쳐 주러 오는데 8백 리 밖에서 배우러 못 올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했다.

이를 계기로 안창호는 구세학당에 입학하게 되었으며, 이후 기독교는 그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 이때 받아들인 기독교사상은 도산이 평생을 일관했던 민주적 민족사상의 바탕이 되었으며,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도 끝까지 "민족은 참 좋은 민족인데"라며 기독교적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크리스천투데이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