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갈대 울타리 너머로 간신히 보이는 갈색 초가가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가자 안에는 풀이 나 있지 않고 깨끗이 치워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부엌에서 쌀을 씻던 주씨 부인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나와서 나를 맞아들였다.
“안녕하세요? 부인과 아이들은요?” 부인이 물었다.
“우리는 잘 지냅니다. 부인과 주씨는 안녕하신지요?” 내가 답했다.
주씨는 내 목소리를 듣더니 몇 자 되는 담뱃대를 들고 사랑방에서 나왔다. 나는 즉시 안으로 안내되어 상석의 방석 위에 양반다리로 앉았다. 주씨는 맞은편에 앉고, 주씨 부인은 안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둔 채 부엌에 일하러 돌아갔다. 그는 한국에 대해, 한국의 미래에 대해, 지역의 일들에 대해 얘기해주었고, 나는 동양인에 대해 누구나 느끼게 되는 관심을 억누르지 않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검은 눈은 친절하고도 자신감 있게 나를 향해 있었다. 너무 검어서 동공과 홍채를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피부는 올리브빛이었고, 머리는 흑청색의 직모였으며, 치아는 강건하고 상아처럼 하얬다. 코는 예쁘다고 하기에는 다소 납작했지만 곧았다. 그의 얼굴은 다소 가늘고 나약해 보였지만, 늘 뛰는 심장처럼 편안하게 자리 잡은 안정감, 그리고 순수하고 남을 위하는 의지를 가진 그는 다른 모든 서양 기독교인들보다도 하얘 보였다. 동양인들은 자유롭게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주씨가 특별히 사상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기억력을 가졌기 때문에 지식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황색 피부와 튀어나온 눈 뒤로부터 조상들의 전통들이 끊임없이 실려 나왔다.
내가 말했다. “주씨, 오래 전 우리나라 남부 지역에는 톱시(Topsy)라고 불리는 흑인 소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교회에서 돌아온 그녀에게 주인이 말했죠. ‘톱시야, 목사님이 오늘 뭐라고 설교하셨니?’ 톱시가 답했죠. ‘하느님이요, 피비 주인님. 그는 하느님에 대해 설교했어요.’ 주씨, 이제 내게 하느님에 대해 설교해 주십시오. 기독교 시절 이전에 한국인들이 그분에 대해 알았던 모든 것에 대해 말해주세요.”
주씨가 말했다. “우리의 하느님은 큰 한 분(the Great One)이고, 하나를 뜻하는 말 ‘하나’와 군주, 주인, 왕을 뜻하는 말 ‘님’으로부터 나온 말 ‘하나님’(Hananim)이라고 불립니다. 우리는 그분을 우주[천지]의 건설과 연결시키며 그래서 그분을 고대의 창조주[조화옹]이라고도 부릅니다.”
나는 주씨의 이 말이 만물이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진화했다는 순수한 유학자들의 생각과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만물은 스스로 생겨난 것이다”라고 말한다. 만물이 부모 혈통이나 기원의 종이 아니라 혼돈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이것은 서양이나 현대 진화론의 분파보다도 더 일관된 진화론 견해인 것 같다. 집비둘기가 가만히 있는 푸른 바위에서 발달해 펑하고 나올 수 있다면, 무한한 무(無)에서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는가? 그들의 말에 따르면 “사람은 정점에 이르기까지 발달하며, 그 후에는 늙어 퇴화하게 된다.” 발달과 함께 퇴화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잘난 체하는 지식인들의 견해이지 주씨와 같은 소박한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다. 그는 만물이 위의 하늘에 계시면서 하시는 바에 따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거나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분은 삶의 중요한 운행에만 관여하신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평범한 사건들에 대해서는 제2의 정령들에게 직접 빌고 기도하고 제사를 올리지만, 모든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는 하나님을 부른다. 나는 이와 관련해서 내가 원산의 한 거리를 지나갈 때 하나님을 부르며 아들을 살려달라고 하는 한 할머니를 본 이야기를 주씨에게 해주었다.
주씨는 말했다. “그것이 그 노인의 마지막 호소인 거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적 존재의 극한이고 그분을 넘어 이야기할 곳은 없으니까요. 비바람에 영혼이 양지를 떠나는 폭풍우의 고통 아래서만 그분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극히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으시고[하나님 지공무사(至公無私)하다], 거룩하시다[거룩하시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들이 호소할 수 있는 마지막 관청이지만, 그분께 다가가는 길은 무섭고 천둥 번개가 놓인 곳이다.”
나는 천둥이 칠 때 한국인들이 항상 갖고 다니던 담뱃대도 치워두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래서 주씨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우리는 관리 앞에서도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어떻게 감히 담배를 피우겠습니까? 하지만 무섭긴 해도 그분은 인자하시고 비를 내려주십니다.[고마우신 하나님 비 주신다] 그리고 매일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장터에서 옛부터 전해지는 노래가 있죠. [밥 잘 먹기는 하나님 덕 / 옷 잘 입기는 처권의 덕 / 재주 잘 나긴 조상의 덕 / 신수 잘 나긴 부모의 덕 / …… ]”
이 일반적인 장터 노래에서 한국인들은 하느님을 사람을 먹이는 존재로 묘사하였다. 옷은 여성에 의해 준비되고, 지위는 조상에게서 오고, 아름다움은 유전되고, 부모님에 대한 사랑은 자식과 함께 가고, 친구들 간의 우의도 볼 수 있지만, 이 상황의 기반이 되는 것은 대지의 선물이고 하느님[하나님]이 이들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배은망덕하여 죄를 짓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다려 주시고 시간을 두고 벌을 내립니다. 예부터 전해져서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아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 하느님은 지상의 일에 대해 끈기 있게 기다렸지만 그의 기다림은 수포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점점 하느님의 존재로부터 멀어지고 세대가 지날수록 더 사악해졌기 때문이다. 마침내 화가 난 하느님은 천둥 천사(Thunder Angel)를 불러 사악한 자들을 멸망시키라는 명령을 주어 무장해서 내려 보냈다. 처음 왔을 때 천사가 보기에 모든 사람들이 사악했고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은 지구를 깨끗이 하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여러 나라를 둘러보고 모든 곳을 다녔다. 마침내 여행 막바지에 그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 중에 죄를 짓지 않은 의로운 사람 단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천둥 천사는 수만 명중 한 사람으로서 전적으로 사랑스러운 그를 보고 사랑했다. 천사가 하게 된 일은 무엇이었을까? 남들을 모두 멸망시키고 이 사람 하나만 살리는 것이었을까? 오래 생각한 후 천사가 말했다. ‘무엇을 할지 정했다. 나는 한 명 의로운 사람을 죽여 모든 악한 이들을 대신할 것이다.’ 그리하여 천둥번개가 천사가 사랑한 이에게 내리쳐서, 그는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죽었다. 그것은 천사를 보낸 하나님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당신은 우리의 하느님이 위대하고 거룩하고 정의롭고 전지하고 전능하며 편재해 있고 경이롭고 두려우며 불가해한 분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 교사들이 와서 하나님이라는 이름과 우리가 밤에 전해 듣는 이 작은 이야기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에는 알지 못했던 의미,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죠.”
주씨는 세월의 부침을 겪었고, 그의 검은 눈으로 슬픈 일들을 힘없이 지켜봐왔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의 내부를 충만케 했으며, 그의 마음속에서 예수는 그와 다른 많은 이들을 대신해 돌아가신 한 분 의로운 분으로 존재했다.]
신문기사 올립니다.
[기독교의 한국 전래와 수용 과정에서 대두된 큰 문제는 '여호와(YHWH)' 라는 기독교의 최고 신 명칭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가장 중요한 용어였기에 이를 둘러싸고 선교사들 사이에서 이견이 많았고 논란도 오랫동안 극심했다. 성경 번역과 찬송가 편찬, 전도문서 간행 사역에서는 물론이고 전도와 예배 현장에서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속히 결정해야 할 급선무였다.
중국의 한문 성경에서는 '상제(上帝)'로 번역되어 있었다. 중국에서도 이런 번역 문제로 많은 논란이 빚어졌다. 중국인들은 많은 신을 섬겨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천주교인들이 '천주'라고 호칭하고 있었고, 만주에서 로스 목사가 주도해 간행한 한국어 성경에서는 '하느님'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전지전능한 최고의 신을 '하늘님' '하느님'으로 불러오고 있었다.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에서는 일본의 호칭에 따라 '신(神)'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모든 신보다 뛰어나고 유일신관을 내포하는 개념
언더우드는 마가복음을 새로 번역하면서 ‘샹뎨’로 표기했다. 일본인이 부르는 ‘신’은 일반적으로 귀신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한국인들이 부르는 ‘하늘님’에서 파생된 ‘하나님’도 사용하지 않고, ‘샹뎨’나 ‘상주’ ‘참신’이라고 부르기를 주장하였다.
1893년에 자신이 간행한 ‘찬양가’에서 그는 ‘아버지’ ‘참신’ ‘여호와’를 사용하였다.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하나님’과 ‘신’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논쟁은 불이 붙었다. 당시에 마펫이나 스크랜턴은 ‘하나님’과 ‘텬쥬’를 선호해 번갈아 사용했다. 아펜젤러와 베어드는 ‘하나님’을 사용하였다.
기독교의 신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언더우드가 찾았던 것은 모든 신들보다 뛰어나고 온갖 잡신을 포괄할 수 있고 유일신관을 내포할 수 있는 개념이었다. 그는 이를 뒷받침하는 성경적 근거로 이사야와 시편 구절을 들었다.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나이다”(사 37:16) “만국의 모든 신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시 96:5). 두 성구가 적용되는 용어여야 했다.
언더우드는 처음에는 ‘여호와’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과 ‘참신’이란 용어를 선호하였다. 귀신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상쥬’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천주와 같은 뜻을 가졌으면서도 천주교를 따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용어에 대해서는 성공회에서도 같은 견해를 지녔다.
언더우드는 얼마 후 중국과 한국의 전통종교에 대해 연구를 한 후에 한국인을 위한 하나님 개념을 다시 정립하고 자기의 주장을 바꾸었다. 그는 한국인들이 고구려시대 ‘하나님’이라 불리는 ‘위대하고 유일한’ 신만을 섬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하나님’은 하늘님에서 파생하였지만 당시에 사용되었던 의미와는 다르다고 파악하였다.
마침내 크고 ‘고귀한 하나님(The Honorable Heavens)’이란 본래의 의미대로 사용되기를 바라면서 종래의 태도를 바꾸었다. 이때가 1903년이었다. 그는 자신이 강력하게 주장해 오던 명칭들을 버리고 상대방의 요구를 기꺼이 수용했다.
그리하여 신약전서 공인본을 1906년 간행하면서 신의 명칭으로 인한 논란이 일단락됐다. 언더우드는 후에 프린스턴신학교와 뉴욕대학교에서 동아시아의 고대종교에 대해 강연하고 이 강연 내용을 ‘동아시아의 종교(The Religion of Eastern Asia)’란 책으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하나님으로 번역한 것은 완벽하게 의미 살린 것
‘하나님’을 ‘하늘의 주’에서 ‘유일하신 큰분’으로 바뀌어 이해하게 된 것은 주시경의 영향을 받은 게일 선교사의 공이 컸다. 주시경은 “하나님의 ‘하나님’는 ‘일(一)’을 뜻하고 ‘님’은 ‘주’ ‘주인’ ‘임금’을 뜻한다. 즉 한 크신 창조주가 하나님이다”라고 알려주었다. ‘하나님’은 후에 맞춤법 통일안에 따라 ‘하나님’으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현배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많은 반대를 받았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하나란 숫자에 님을 붙인 것은 유일신의 의미만 나타낼 뿐 전통적인 한국인의 하느님 개념이 없고 문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개신교에서는 ‘하나님’, 일부 개신교인들과 공동번역 성경, 천주교 측에서는 ‘하느님’을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인이 히브리어의 신 명칭인 ‘YHWH’를 ‘하나님’으로 번역한 것은 단순한 수사에 ‘님’자가 붙은 것만이 아닌 거의 완벽한 것으로 인정받아 사용되고 있다. 외래 종교가 들여온 신 개념이라기보다 한민족이 대대로 심중에 믿어온 하나님을 새로 찾은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말이란 지속적으로 사용하면 의미가 붙여져서 그대로 통용되게 되는 것 같다.
정확한 내용과 사실
“안녕하세요? 부인과 아이들은요?” 부인이 물었다.
“우리는 잘 지냅니다. 부인과 주씨는 안녕하신지요?” 내가 답했다.
주씨는 내 목소리를 듣더니 몇 자 되는 담뱃대를 들고 사랑방에서 나왔다. 나는 즉시 안으로 안내되어 상석의 방석 위에 양반다리로 앉았다. 주씨는 맞은편에 앉고, 주씨 부인은 안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둔 채 부엌에 일하러 돌아갔다. 그는 한국에 대해, 한국의 미래에 대해, 지역의 일들에 대해 얘기해주었고, 나는 동양인에 대해 누구나 느끼게 되는 관심을 억누르지 않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검은 눈은 친절하고도 자신감 있게 나를 향해 있었다. 너무 검어서 동공과 홍채를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피부는 올리브빛이었고, 머리는 흑청색의 직모였으며, 치아는 강건하고 상아처럼 하얬다. 코는 예쁘다고 하기에는 다소 납작했지만 곧았다. 그의 얼굴은 다소 가늘고 나약해 보였지만, 늘 뛰는 심장처럼 편안하게 자리 잡은 안정감, 그리고 순수하고 남을 위하는 의지를 가진 그는 다른 모든 서양 기독교인들보다도 하얘 보였다. 동양인들은 자유롭게 사유하지 않기 때문에, 주씨가 특별히 사상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기억력을 가졌기 때문에 지식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황색 피부와 튀어나온 눈 뒤로부터 조상들의 전통들이 끊임없이 실려 나왔다.
내가 말했다. “주씨, 오래 전 우리나라 남부 지역에는 톱시(Topsy)라고 불리는 흑인 소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교회에서 돌아온 그녀에게 주인이 말했죠. ‘톱시야, 목사님이 오늘 뭐라고 설교하셨니?’ 톱시가 답했죠. ‘하느님이요, 피비 주인님. 그는 하느님에 대해 설교했어요.’ 주씨, 이제 내게 하느님에 대해 설교해 주십시오. 기독교 시절 이전에 한국인들이 그분에 대해 알았던 모든 것에 대해 말해주세요.”
주씨가 말했다. “우리의 하느님은 큰 한 분(the Great One)이고, 하나를 뜻하는 말 ‘하나’와 군주, 주인, 왕을 뜻하는 말 ‘님’으로부터 나온 말 ‘하나님’(Hananim)이라고 불립니다. 우리는 그분을 우주[천지]의 건설과 연결시키며 그래서 그분을 고대의 창조주[조화옹]이라고도 부릅니다.”
나는 주씨의 이 말이 만물이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진화했다는 순수한 유학자들의 생각과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만물은 스스로 생겨난 것이다”라고 말한다. 만물이 부모 혈통이나 기원의 종이 아니라 혼돈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이것은 서양이나 현대 진화론의 분파보다도 더 일관된 진화론 견해인 것 같다. 집비둘기가 가만히 있는 푸른 바위에서 발달해 펑하고 나올 수 있다면, 무한한 무(無)에서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는가? 그들의 말에 따르면 “사람은 정점에 이르기까지 발달하며, 그 후에는 늙어 퇴화하게 된다.” 발달과 함께 퇴화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잘난 체하는 지식인들의 견해이지 주씨와 같은 소박한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다. 그는 만물이 위의 하늘에 계시면서 하시는 바에 따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거나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분은 삶의 중요한 운행에만 관여하신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평범한 사건들에 대해서는 제2의 정령들에게 직접 빌고 기도하고 제사를 올리지만, 모든 희망이 좌절되었을 때는 하나님을 부른다. 나는 이와 관련해서 내가 원산의 한 거리를 지나갈 때 하나님을 부르며 아들을 살려달라고 하는 한 할머니를 본 이야기를 주씨에게 해주었다.
주씨는 말했다. “그것이 그 노인의 마지막 호소인 거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적 존재의 극한이고 그분을 넘어 이야기할 곳은 없으니까요. 비바람에 영혼이 양지를 떠나는 폭풍우의 고통 아래서만 그분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극히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으시고[하나님 지공무사(至公無私)하다], 거룩하시다[거룩하시다]고 말합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들이 호소할 수 있는 마지막 관청이지만, 그분께 다가가는 길은 무섭고 천둥 번개가 놓인 곳이다.”
나는 천둥이 칠 때 한국인들이 항상 갖고 다니던 담뱃대도 치워두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래서 주씨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우리는 관리 앞에서도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어떻게 감히 담배를 피우겠습니까? 하지만 무섭긴 해도 그분은 인자하시고 비를 내려주십니다.[고마우신 하나님 비 주신다] 그리고 매일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십니다. 장터에서 옛부터 전해지는 노래가 있죠. [밥 잘 먹기는 하나님 덕 / 옷 잘 입기는 처권의 덕 / 재주 잘 나긴 조상의 덕 / 신수 잘 나긴 부모의 덕 / …… ]”
이 일반적인 장터 노래에서 한국인들은 하느님을 사람을 먹이는 존재로 묘사하였다. 옷은 여성에 의해 준비되고, 지위는 조상에게서 오고, 아름다움은 유전되고, 부모님에 대한 사랑은 자식과 함께 가고, 친구들 간의 우의도 볼 수 있지만, 이 상황의 기반이 되는 것은 대지의 선물이고 하느님[하나님]이 이들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배은망덕하여 죄를 짓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다려 주시고 시간을 두고 벌을 내립니다. 예부터 전해져서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아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 하느님은 지상의 일에 대해 끈기 있게 기다렸지만 그의 기다림은 수포로 돌아갔다. 사람들은 점점 하느님의 존재로부터 멀어지고 세대가 지날수록 더 사악해졌기 때문이다. 마침내 화가 난 하느님은 천둥 천사(Thunder Angel)를 불러 사악한 자들을 멸망시키라는 명령을 주어 무장해서 내려 보냈다. 처음 왔을 때 천사가 보기에 모든 사람들이 사악했고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은 지구를 깨끗이 하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여러 나라를 둘러보고 모든 곳을 다녔다. 마침내 여행 막바지에 그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 중에 죄를 짓지 않은 의로운 사람 단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천둥 천사는 수만 명중 한 사람으로서 전적으로 사랑스러운 그를 보고 사랑했다. 천사가 하게 된 일은 무엇이었을까? 남들을 모두 멸망시키고 이 사람 하나만 살리는 것이었을까? 오래 생각한 후 천사가 말했다. ‘무엇을 할지 정했다. 나는 한 명 의로운 사람을 죽여 모든 악한 이들을 대신할 것이다.’ 그리하여 천둥번개가 천사가 사랑한 이에게 내리쳐서, 그는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죽었다. 그것은 천사를 보낸 하나님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당신은 우리의 하느님이 위대하고 거룩하고 정의롭고 전지하고 전능하며 편재해 있고 경이롭고 두려우며 불가해한 분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 교사들이 와서 하나님이라는 이름과 우리가 밤에 전해 듣는 이 작은 이야기에 새로운 의미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에는 알지 못했던 의미,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죠.”
주씨는 세월의 부침을 겪었고, 그의 검은 눈으로 슬픈 일들을 힘없이 지켜봐왔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의 내부를 충만케 했으며, 그의 마음속에서 예수는 그와 다른 많은 이들을 대신해 돌아가신 한 분 의로운 분으로 존재했다.]
신문기사 올립니다.
[기독교의 한국 전래와 수용 과정에서 대두된 큰 문제는 '여호와(YHWH)' 라는 기독교의 최고 신 명칭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가장 중요한 용어였기에 이를 둘러싸고 선교사들 사이에서 이견이 많았고 논란도 오랫동안 극심했다. 성경 번역과 찬송가 편찬, 전도문서 간행 사역에서는 물론이고 전도와 예배 현장에서 사용하기 위해서라도 속히 결정해야 할 급선무였다.
중국의 한문 성경에서는 '상제(上帝)'로 번역되어 있었다. 중국에서도 이런 번역 문제로 많은 논란이 빚어졌다. 중국인들은 많은 신을 섬겨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천주교인들이 '천주'라고 호칭하고 있었고, 만주에서 로스 목사가 주도해 간행한 한국어 성경에서는 '하느님'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전지전능한 최고의 신을 '하늘님' '하느님'으로 불러오고 있었다.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에서는 일본의 호칭에 따라 '신(神)'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모든 신보다 뛰어나고 유일신관을 내포하는 개념
언더우드는 마가복음을 새로 번역하면서 ‘샹뎨’로 표기했다. 일본인이 부르는 ‘신’은 일반적으로 귀신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한국인들이 부르는 ‘하늘님’에서 파생된 ‘하나님’도 사용하지 않고, ‘샹뎨’나 ‘상주’ ‘참신’이라고 부르기를 주장하였다.
1893년에 자신이 간행한 ‘찬양가’에서 그는 ‘아버지’ ‘참신’ ‘여호와’를 사용하였다.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하나님’과 ‘신’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을 계기로 논쟁은 불이 붙었다. 당시에 마펫이나 스크랜턴은 ‘하나님’과 ‘텬쥬’를 선호해 번갈아 사용했다. 아펜젤러와 베어드는 ‘하나님’을 사용하였다.
기독교의 신을 한국어로 번역하면서 언더우드가 찾았던 것은 모든 신들보다 뛰어나고 온갖 잡신을 포괄할 수 있고 유일신관을 내포할 수 있는 개념이었다. 그는 이를 뒷받침하는 성경적 근거로 이사야와 시편 구절을 들었다.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나이다”(사 37:16) “만국의 모든 신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시 96:5). 두 성구가 적용되는 용어여야 했다.
언더우드는 처음에는 ‘여호와’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과 ‘참신’이란 용어를 선호하였다. 귀신을 극복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상쥬’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천주와 같은 뜻을 가졌으면서도 천주교를 따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용어에 대해서는 성공회에서도 같은 견해를 지녔다.
언더우드는 얼마 후 중국과 한국의 전통종교에 대해 연구를 한 후에 한국인을 위한 하나님 개념을 다시 정립하고 자기의 주장을 바꾸었다. 그는 한국인들이 고구려시대 ‘하나님’이라 불리는 ‘위대하고 유일한’ 신만을 섬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인들이 사용하는 ‘하나님’은 하늘님에서 파생하였지만 당시에 사용되었던 의미와는 다르다고 파악하였다.
마침내 크고 ‘고귀한 하나님(The Honorable Heavens)’이란 본래의 의미대로 사용되기를 바라면서 종래의 태도를 바꾸었다. 이때가 1903년이었다. 그는 자신이 강력하게 주장해 오던 명칭들을 버리고 상대방의 요구를 기꺼이 수용했다.
그리하여 신약전서 공인본을 1906년 간행하면서 신의 명칭으로 인한 논란이 일단락됐다. 언더우드는 후에 프린스턴신학교와 뉴욕대학교에서 동아시아의 고대종교에 대해 강연하고 이 강연 내용을 ‘동아시아의 종교(The Religion of Eastern Asia)’란 책으로 간행하기도 하였다.
하나님으로 번역한 것은 완벽하게 의미 살린 것
‘하나님’을 ‘하늘의 주’에서 ‘유일하신 큰분’으로 바뀌어 이해하게 된 것은 주시경의 영향을 받은 게일 선교사의 공이 컸다. 주시경은 “하나님의 ‘하나님’는 ‘일(一)’을 뜻하고 ‘님’은 ‘주’ ‘주인’ ‘임금’을 뜻한다. 즉 한 크신 창조주가 하나님이다”라고 알려주었다. ‘하나님’은 후에 맞춤법 통일안에 따라 ‘하나님’으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현배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많은 반대를 받았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하나란 숫자에 님을 붙인 것은 유일신의 의미만 나타낼 뿐 전통적인 한국인의 하느님 개념이 없고 문법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재 개신교에서는 ‘하나님’, 일부 개신교인들과 공동번역 성경, 천주교 측에서는 ‘하느님’을 사용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인이 히브리어의 신 명칭인 ‘YHWH’를 ‘하나님’으로 번역한 것은 단순한 수사에 ‘님’자가 붙은 것만이 아닌 거의 완벽한 것으로 인정받아 사용되고 있다. 외래 종교가 들여온 신 개념이라기보다 한민족이 대대로 심중에 믿어온 하나님을 새로 찾은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말이란 지속적으로 사용하면 의미가 붙여져서 그대로 통용되게 되는 것 같다.
최재건 연세대 신과대 연구교수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2792395&code=23111117&cp=n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