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때 성폭행 당할때 내가 보낸 SOS 방관한 엄마 용서하게 된 이야기 (스압 주의 패스)
3912022.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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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을 올리는 이유는 최근에 과거의 나처럼 부모가 밉고 용서 안되는 동생과 이야기를 하게 된거다. 본가는 지방인데 서울서 자취하며 직장생활하는 후배한테 '요샌 부모님이랑 전화 드리니?' 했더니 "엄마가 싫어요 너무 나약해.." 라고 했다. 뭔지 알것 같았다. 부모가 싫다는 감정. 그냥 너무 너무 싫은거... 그 친구처럼 내 부모가 너무 싫고 용서가 안되는 많은 사람이 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도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올린다.
그리고 나중에 애기 낳고 엄마들끼리 모이고 애들끼리 놀릴때 이런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꼭 명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라도 여기 올린다.
사실 우리 엄마가 이 사건을 빼고는 굉장히 열심히 키운 편이다. 학원도 델고 다녔고, 중고등학교때 차로 실어 나르고 데려오고 등등 여러가지 많이 잘했다. 대학교 괜찮은 서울서 지하철 타고 갈 수 있는데로 갔고 엄친딸 소리도 듣고 컸었다.
우선 그 전에 말하고 싶은것은... 이 글을 쓰고 묘사하는 중에 알게 된 건데 그 사건이 하루 중 한 순가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나에겐 그게 너무 큰 사건이고 한달을 뛰어넘는 존재감이었는데 이렇게 글로 쓰니 일어난지 하루에 한 순간이라는것을 알게 되었다. 그 날 이후, 나에게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도 잊고 살아왔다. 25살때 즈음 내가 그날 기억이 났고 그날 겪은 일이 성폭행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잊고 살다가 가끔씩만 기억이 나곤 했다.
내가 6살때 엄마랑 (가명)철수 집으로 놀러갔다. 철수와 우리집은 주택에서 서로 옆집에 살던 사이였는데 비슷한 시기에 철수네도 아파트로 우리집도 아파트로 이사가게 되었다. 철수네 집에 도착해보니 내 엄마, 철수엄마 말고도 엄마 두명이 더 있었다. 엄마들은 부엌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나는 철수랑 안방에 애들끼리 노는 무리에 꼈다.
그 방에는 어린이들이 있었다. 나랑 철수 각각 6살, 그리고 더 어린 동생 5살 한명과 7살 형이 있었다. 내 빼고는 모두다 남자였다. 애들끼리 이것 저것 하고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을 닫고 딸깍 소리게 나게 문을 잠그었다. 돌아보니 7살 형이 잠근 것이었다. 그 형은 나랑 철수에게 와서 이상한 걸 시키기 시작했다. 내 원피스 팬티 속으로 철수에게 시켜서 손가락을 넣어 보라고 했다. 무섭고 당황스럽고 창피하고 황당해서 꼼짝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빨리 상황이 지나가기만을 바랬고,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서 머리가 하야졌다. 5살 동생은 재미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다른 거 하면서 놀고 있었다. 철수도 많이 당황 했던 것 같다. 표정이 막 신나하고 즐겁고 라기 보다는 나처럼 빨리 이상황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일진에게 당하는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손가락 하나를 넣어보고 나니 손가락 어디까지 들어갔는지 물어봤다. 그 다음에는 손가락 두개를 넣어보라고 시켰다. 손가락 어느 마디 까지 들어갔는지 자기들끼리 말하고 재밌어했다. 막 재밌어하니 주변에서 놀던 5살이 뭐야 뭐야 하면서 왔다가 무슨 상황인지 이해 못하고 다시 혼자 놀다가 심심해서 문열고 나가버렸다. 그때 잠시 멈추었고 나는 문 밖으로 나갔다.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엄마는 아줌마들끼리 이야기 하고 있었다. 하하 호호 커피와 다과상 차려놓고 조카 떠들고 있었다. 엄마한테 '엄마 이제 집에 가자'라고 했다. 그랬는데 엄마는 눈은 아줌마들에게 둔 채로 '가서 놀아'라고 짧게 이야기 했다. 집에 가자고 찡찡 거리면서 계속 이야기 했는데 엄마란 사람은 날 한번도 쳐다보지 않고 눈은 계속 아줌마들에게 둔 채로 '얼른가' '가서 놀아' '이따가 갈꺼야' 이런 말로 내 말에 대응흘 하지 않았다. 그렇게 엄마란 사람이 나보고 다시 그 지옥굴로 들어가라고 몇번이고 반복해서 얘기했다.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진땀 나는 그 상황을 또 맞이했다. 그리고 끝나고 집에 왔다. 그리고 나선, 그 기억은 없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즈음 구성애 성교육 강연이 인기였다. 그 때서야 엄마는 세상 착한 사촌오빠와 내가 차에서 단둘이서 이야기하는 것도 불안해서 와서 오도방정을 떨고 갔다. ㅈㄹ 이었다. 진짜. 더 필요한 때는 방치하더니 이제 와서 난리치는게 너무 꼴보기 싫었다. 대학생 때는 내 치마가 짧다고 이마트에서 내 치마를 손으로 내려버리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불같이 화냈다. 엄마는 영문도 모르고 애가 성격이 이상해서 그런줄 알면서 나한테 너무한다 이야기했다.
나중에 29살 즈음 우울증이 왔었다. 그때 엄마에게 전화로 처음으로 이야기 했고, 따졌다. 왜 그때 6살 때 내가 집에 가자고 했는데 왜 안갔냐고 엄마 맞냐고.. 엄마도 나도 가슴 찢어지게 울었다. 그 때 즈음부턴 엄마에게 잘 못했다. 잘 안했다. 그리고 잔소리하고 안 좋은 점만 보였다. 엄마가 싫었다. 엄마의 이중성이 싫었고 토나왔다. 자기는 정리 안해놓고 설거지 안하고 살아놓고 나보고 더럽다고 비난한거 이것 저것 다 싫었다. 바라는 것만 많았고, 정말 다 미웠다.
나중에 시간이 한참 지나서 결혼도 하고 애기도 낳았다. 애기를 키우면서 엄마도 나를 이렇게 키웠으려나 생각이 들었다. 애기를 키우면서는 나는 지나치게 허용적인 부모가 됬다. 우리 엄마가 내가 한 이야기를 흘려 들어서 사고가 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아기가 하는 모든 말들에 다 과하게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 반응해주려 했다. 다른 글들 보면 알겠지만, 육아는 정말 장난아니게 힘들다. 그런데 나는 아기에게 지나치게 허용적이고 다 따라다녔다보니 더 힘들었다. 집안일 요리 안하고 아이 말만 들어주려 따라 다녔다. 남편은 갈수록 엉망인 집안 꼴에 화를 냈고, 내가 너무 애만 따라다니고 아무것도 안한다고 화를 냈다. 난 아기가 눈을 뜨면 핸드폰 한번 안보고 아기만 봤다. 그러다 번아웃이 왔다.
다시 우울증이 왔다. 엄마에게 화가 났다. 내가 지저분한것은 엄마 때문이라 생각했다. 초1학년때, 이를 안 닦고 다녀서 내 짝이 나를 더럽다고 싫어했다. 심지어 때리고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그때 내가 받은 모욕은 모두 엄마 책임이었다. 엄마 머릿속엔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다. 너무 짜증났다. 우울증에 살이 쪘고 화가 많이 났고, 엄마에게 전화해서 화를 냈다. 다시 따졌다. 6살때 왜 그때 나 다시 그 방에 들어가라고 했냐고 전하로 고래 고래 울부짖었다.
엄마가 '너가 그렇게 자꾸 따지면 난 얼마나 힘든줄 아냐. 난 이게 몸으로 아픔으로 온다. 힘들다. 내가 어디까지 사과해야 하는거냐.. 아빠를 만난거.. 내가 너를 낳은것 까지 사과해야 하냐...' 이렇게 엄마 울면서 이야기 하다가 "그러게 너는 왜 그때 내 말을 들었어! 그때 내 말을 듣고 버티지 그랬어! 말 좀 하지 그랬어!!" 라고 했다.
그러게 왜 난 그때 소리지르고 못하게 하고 왜 못그랬을까... 내 머리가 잠깐 멈췄다.. 나도 모르겠다..... 그냥 너무 어려서 그랬나? 왜 그랬지? 하다... 이렇게 다른 성인 성폭행 피해자가 경찰조사를 받다가 2차 피해를 받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엄마도 이런 말을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애를 키우면서 4년 반이 지났다. 어린이 집? 당연 못 보냈다. 내가 그런일을 당했는데 애들끼리 어떻게 둘 수 있을까... 더군다나 청와대 청원에 어린이집에 나와 비슷한 케이스로 애들끼리 놀다가 성폭행 당한 사연을 보게 되었기에 보낼 수 없었다. 아이 끼고 있으니 너무 힘들어서 번아웃은 왔는데, 아기는 끝없이 집안일 생성기였다. 그러나 어느날은 딸에게 못참고 소리를 지르고 알게되었다.
그렇게 잘해주기만 하려했는데... 내가 아무리 잘하고 싶어도, 내가 가진 경제력 능력 안에서 잘해 줄 수 있는 거였다. 내가 번아웃이 와있고, 친정 찬스도 없이 혼자서 다 하는데 할수 있는 일의 한계가 있었다. 만약 내가 재벌처럼 집안일 하는 사람 따로 있었다면, 소리 10번 지를거 1번으로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엄마란 존재도 인간인지라 인내심의 그릇이 다 차면 끝인 거였다. 경제력이 없더라도 만약 내가 살림을 할 줄 아는게 많았더라면, 요령이 좋았더라면... 하고 생각하다 문득 깨달았다.
모든 엄마에게 내 아기는 세상에 둘도 없이 소중하다. 그러나 내가 가진 능력 만큼 잘해줄 수 있다. 아기에게. 그게 성격이든, 능력이든, 노하우든, 인맥이든... 하지만 엄마 자체에 가진게 없는데에서 비극이 시작되는 것 같다.
내 엄마는 정말 너무 불쌍하게 컸다. 가난한 집의 7 남매가 막내딸이었는데 할머니가 아들만 예뻐하느라고 모든 자원을 아들에게만 몰았다. 솔직히 상상이 안된다. 내 엄마가 내 편이 아닌기분.. 난 한번 겪고도.. 물론 운이 굉장히 안좋아서 그 경우가 성폭행이었지만, 엄마는 매 순간 자신의 울타리가 없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어디선가 본 글에서 어렸을때 부모가 아들만 예뻐하고 그렇게 차별당하고 살면서 큰 딸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짧은 머리를 유지 한다고 한다. 우리 엄마 20대부터 짧은 쇼커트였다. 결혼전부터 긴머리 사진이 없고, 이모들 모두다 숏컷이었다. 이른바 아줌마 파마
거기에 나처럼 차별당하고 가끔 잔소리 당해서 억울한 수준이 아니라, 엄마는 학교를 못갔다. 거기에 덧붙여서 요리하고 설거지하면서 밥을 해내야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모두 일나가고 없었고, 먹고 싶은건 감기 걸렸을때만 아플때만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돈 없으니 대학을 못갔지만, 아들들은 모두 대학을 보냈다. 부모란 사람이 나의 생계와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엄마가 어렸을때 당했던 상처를 가지고 어른이 되어서 그 상처를 나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서 키웠다. 그 말인 즉슨 내 엄마는 항상 할머니가 보호막이 되어서 이것 저것 다 알려주고 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1958년 생인 내 엄마, 625 지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그때 무슨 먹을게 있을 턱이 없다. 엄마도 케어, 보호 없이 커서 아이 낳고 그렇게 멍하고 맹했나 보다.
우리 엄마는 보호 하지 못했던 그 한순간 빼고 나머지 모든 시간에 내 지지막이 되어주었고, 딸이라서 차별 받는거 없이 내가 원하는 모든거 다 해주려 노력했다. 내 엄마는 가진 조건에선 최고로 키우려고 노력했다. 그게 내 기준에 미흡했을 지언정.. 엄마가 내 마음에 안 드는건 엄마를 뛰어넘는 존재가 되도록 열심히 키운게 성공했다는 거다. 내가 더 나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니.
세계는 점점 좋아지고 있을까? 안 좋아지고 있을까? 좋아지고 있다. 전쟁 빈도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고,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정말 ㅠㅜ) 기계의 발달로 건조기, 식세기, 무선 청소기, 로봇 청소기 덕에 살림도 많이 편해졌다. 내가 더 나은 존재가 되어서 엄마에게 잘해주는 것 밖에 안 남았다. 엄마 아빠는 자기가 가진 정보 안에서 최고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자기의 아기 내 아기 좋은 것만 줘야지 하면서 키운 결과가 나 이기 때문이다.
엄마 미운거 많다. 그러나 나또한 내 아이에게 완벽하게 해주고팠지만, 결국 소리 지르고 말았다. 가진게 많음 편하게 키울수 있다. 하지만 없이 컸다고 사랑도 없는것은 아니다. 그래서 결국엔본인이 더 힘들다. 본인도 자신이 완벽하지 않은 부모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도 딸 엄마이니 알겠다. 그리고 모두 용서했다. 엄마는 엄마의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나니 용서가 된다. 엄마는 내가 바꿔야 할 사람이 아니고, 내가 더 빨리 크게 발전해서 엄마에게 그 혜택을 누리게 하면 되는거였다.
엄마가 미운 사람에게 내 글이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길 글 썼는데 이 긴 글 같이 읽어줘서 고맙고 당신 모두에게 행운이 가득하길.
6살때 성폭행 당할때 내가 보낸 SOS 방관한 엄마 용서하게 된 이야기 (스압 주의 패스)
그리고 나중에 애기 낳고 엄마들끼리 모이고 애들끼리 놀릴때 이런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꼭 명심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라도 여기 올린다.
사실 우리 엄마가 이 사건을 빼고는 굉장히 열심히 키운 편이다. 학원도 델고 다녔고, 중고등학교때 차로 실어 나르고 데려오고 등등 여러가지 많이 잘했다. 대학교 괜찮은 서울서 지하철 타고 갈 수 있는데로 갔고 엄친딸 소리도 듣고 컸었다.
우선 그 전에 말하고 싶은것은... 이 글을 쓰고 묘사하는 중에 알게 된 건데 그 사건이 하루 중 한 순가에 일어났다는 것이다. 나에겐 그게 너무 큰 사건이고 한달을 뛰어넘는 존재감이었는데 이렇게 글로 쓰니 일어난지 하루에 한 순간이라는것을 알게 되었다. 그 날 이후, 나에게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도 잊고 살아왔다. 25살때 즈음 내가 그날 기억이 났고 그날 겪은 일이 성폭행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잊고 살다가 가끔씩만 기억이 나곤 했다.
내가 6살때 엄마랑 (가명)철수 집으로 놀러갔다. 철수와 우리집은 주택에서 서로 옆집에 살던 사이였는데 비슷한 시기에 철수네도 아파트로 우리집도 아파트로 이사가게 되었다. 철수네 집에 도착해보니 내 엄마, 철수엄마 말고도 엄마 두명이 더 있었다. 엄마들은 부엌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나는 철수랑 안방에 애들끼리 노는 무리에 꼈다.
그 방에는 어린이들이 있었다. 나랑 철수 각각 6살, 그리고 더 어린 동생 5살 한명과 7살 형이 있었다. 내 빼고는 모두다 남자였다. 애들끼리 이것 저것 하고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문을 닫고 딸깍 소리게 나게 문을 잠그었다. 돌아보니 7살 형이 잠근 것이었다. 그 형은 나랑 철수에게 와서 이상한 걸 시키기 시작했다. 내 원피스 팬티 속으로 철수에게 시켜서 손가락을 넣어 보라고 했다. 무섭고 당황스럽고 창피하고 황당해서 꼼짝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빨리 상황이 지나가기만을 바랬고,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서 머리가 하야졌다. 5살 동생은 재미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다른 거 하면서 놀고 있었다. 철수도 많이 당황 했던 것 같다. 표정이 막 신나하고 즐겁고 라기 보다는 나처럼 빨리 이상황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일진에게 당하는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손가락 하나를 넣어보고 나니 손가락 어디까지 들어갔는지 물어봤다. 그 다음에는 손가락 두개를 넣어보라고 시켰다. 손가락 어느 마디 까지 들어갔는지 자기들끼리 말하고 재밌어했다. 막 재밌어하니 주변에서 놀던 5살이 뭐야 뭐야 하면서 왔다가 무슨 상황인지 이해 못하고 다시 혼자 놀다가 심심해서 문열고 나가버렸다. 그때 잠시 멈추었고 나는 문 밖으로 나갔다.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엄마는 아줌마들끼리 이야기 하고 있었다. 하하 호호 커피와 다과상 차려놓고 조카 떠들고 있었다. 엄마한테 '엄마 이제 집에 가자'라고 했다. 그랬는데 엄마는 눈은 아줌마들에게 둔 채로 '가서 놀아'라고 짧게 이야기 했다. 집에 가자고 찡찡 거리면서 계속 이야기 했는데 엄마란 사람은 날 한번도 쳐다보지 않고 눈은 계속 아줌마들에게 둔 채로 '얼른가' '가서 놀아' '이따가 갈꺼야' 이런 말로 내 말에 대응흘 하지 않았다. 그렇게 엄마란 사람이 나보고 다시 그 지옥굴로 들어가라고 몇번이고 반복해서 얘기했다.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진땀 나는 그 상황을 또 맞이했다. 그리고 끝나고 집에 왔다. 그리고 나선, 그 기억은 없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즈음 구성애 성교육 강연이 인기였다. 그 때서야 엄마는 세상 착한 사촌오빠와 내가 차에서 단둘이서 이야기하는 것도 불안해서 와서 오도방정을 떨고 갔다. ㅈㄹ 이었다. 진짜. 더 필요한 때는 방치하더니 이제 와서 난리치는게 너무 꼴보기 싫었다. 대학생 때는 내 치마가 짧다고 이마트에서 내 치마를 손으로 내려버리기도 했다. 그럴때마다 불같이 화냈다. 엄마는 영문도 모르고 애가 성격이 이상해서 그런줄 알면서 나한테 너무한다 이야기했다.
나중에 29살 즈음 우울증이 왔었다. 그때 엄마에게 전화로 처음으로 이야기 했고, 따졌다. 왜 그때 6살 때 내가 집에 가자고 했는데 왜 안갔냐고 엄마 맞냐고.. 엄마도 나도 가슴 찢어지게 울었다. 그 때 즈음부턴 엄마에게 잘 못했다. 잘 안했다. 그리고 잔소리하고 안 좋은 점만 보였다. 엄마가 싫었다. 엄마의 이중성이 싫었고 토나왔다. 자기는 정리 안해놓고 설거지 안하고 살아놓고 나보고 더럽다고 비난한거 이것 저것 다 싫었다. 바라는 것만 많았고, 정말 다 미웠다.
나중에 시간이 한참 지나서 결혼도 하고 애기도 낳았다.
애기를 키우면서 엄마도 나를 이렇게 키웠으려나 생각이 들었다.
애기를 키우면서는 나는 지나치게 허용적인 부모가 됬다. 우리 엄마가 내가 한 이야기를 흘려 들어서 사고가 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아기가 하는 모든 말들에 다 과하게 진지하게 최선을 다해 반응해주려 했다.
다른 글들 보면 알겠지만, 육아는 정말 장난아니게 힘들다. 그런데 나는 아기에게 지나치게 허용적이고 다 따라다녔다보니 더 힘들었다. 집안일 요리 안하고 아이 말만 들어주려 따라 다녔다. 남편은 갈수록 엉망인 집안 꼴에 화를 냈고, 내가 너무 애만 따라다니고 아무것도 안한다고 화를 냈다. 난 아기가 눈을 뜨면 핸드폰 한번 안보고 아기만 봤다. 그러다 번아웃이 왔다.
다시 우울증이 왔다. 엄마에게 화가 났다. 내가 지저분한것은 엄마 때문이라 생각했다. 초1학년때, 이를 안 닦고 다녀서 내 짝이 나를 더럽다고 싫어했다. 심지어 때리고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그때 내가 받은 모욕은 모두 엄마 책임이었다. 엄마 머릿속엔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다. 너무 짜증났다. 우울증에 살이 쪘고 화가 많이 났고, 엄마에게 전화해서 화를 냈다. 다시 따졌다. 6살때 왜 그때 나 다시 그 방에 들어가라고 했냐고 전하로 고래 고래 울부짖었다.
엄마가 '너가 그렇게 자꾸 따지면 난 얼마나 힘든줄 아냐. 난 이게 몸으로 아픔으로 온다. 힘들다. 내가 어디까지 사과해야 하는거냐.. 아빠를 만난거.. 내가 너를 낳은것 까지 사과해야 하냐...' 이렇게 엄마 울면서 이야기 하다가 "그러게 너는 왜 그때 내 말을 들었어! 그때 내 말을 듣고 버티지 그랬어! 말 좀 하지 그랬어!!" 라고 했다.
그러게 왜 난 그때 소리지르고 못하게 하고 왜 못그랬을까... 내 머리가 잠깐 멈췄다.. 나도 모르겠다..... 그냥 너무 어려서 그랬나? 왜 그랬지? 하다... 이렇게 다른 성인 성폭행 피해자가 경찰조사를 받다가 2차 피해를 받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엄마도 이런 말을 하는데 말이다...
그렇게 애를 키우면서 4년 반이 지났다. 어린이 집? 당연 못 보냈다. 내가 그런일을 당했는데 애들끼리 어떻게 둘 수 있을까... 더군다나 청와대 청원에 어린이집에 나와 비슷한 케이스로 애들끼리 놀다가 성폭행 당한 사연을 보게 되었기에 보낼 수 없었다. 아이 끼고 있으니 너무 힘들어서 번아웃은 왔는데, 아기는 끝없이 집안일 생성기였다. 그러나 어느날은 딸에게 못참고 소리를 지르고 알게되었다.
그렇게 잘해주기만 하려했는데...
내가 아무리 잘하고 싶어도, 내가 가진 경제력 능력 안에서 잘해 줄 수 있는 거였다. 내가 번아웃이 와있고, 친정 찬스도 없이 혼자서 다 하는데 할수 있는 일의 한계가 있었다. 만약 내가 재벌처럼 집안일 하는 사람 따로 있었다면, 소리 10번 지를거 1번으로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엄마란 존재도 인간인지라 인내심의 그릇이 다 차면 끝인 거였다. 경제력이 없더라도 만약 내가 살림을 할 줄 아는게 많았더라면, 요령이 좋았더라면... 하고 생각하다 문득 깨달았다.
모든 엄마에게 내 아기는 세상에 둘도 없이 소중하다.
그러나 내가 가진 능력 만큼 잘해줄 수 있다. 아기에게.
그게 성격이든, 능력이든, 노하우든, 인맥이든...
하지만 엄마 자체에 가진게 없는데에서 비극이 시작되는 것 같다.
내 엄마는 정말 너무 불쌍하게 컸다. 가난한 집의 7 남매가 막내딸이었는데 할머니가 아들만 예뻐하느라고 모든 자원을 아들에게만 몰았다. 솔직히 상상이 안된다. 내 엄마가 내 편이 아닌기분.. 난 한번 겪고도.. 물론 운이 굉장히 안좋아서 그 경우가 성폭행이었지만, 엄마는 매 순간 자신의 울타리가 없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어디선가 본 글에서 어렸을때 부모가 아들만 예뻐하고 그렇게 차별당하고 살면서 큰 딸은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짧은 머리를 유지 한다고 한다. 우리 엄마 20대부터 짧은 쇼커트였다. 결혼전부터 긴머리 사진이 없고, 이모들 모두다 숏컷이었다. 이른바 아줌마 파마
거기에 나처럼 차별당하고 가끔 잔소리 당해서 억울한 수준이 아니라, 엄마는 학교를 못갔다. 거기에 덧붙여서 요리하고 설거지하면서 밥을 해내야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모두 일나가고 없었고, 먹고 싶은건 감기 걸렸을때만 아플때만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돈 없으니 대학을 못갔지만, 아들들은 모두 대학을 보냈다. 부모란 사람이 나의 생계와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엄마가 어렸을때 당했던 상처를 가지고 어른이 되어서 그 상처를 나에게 물려주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서 키웠다. 그 말인 즉슨 내 엄마는 항상 할머니가 보호막이 되어서 이것 저것 다 알려주고 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1958년 생인 내 엄마, 625 지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그때 무슨 먹을게 있을 턱이 없다. 엄마도 케어, 보호 없이 커서 아이 낳고 그렇게 멍하고 맹했나 보다.
우리 엄마는 보호 하지 못했던 그 한순간 빼고 나머지 모든 시간에 내 지지막이 되어주었고, 딸이라서 차별 받는거 없이 내가 원하는 모든거 다 해주려 노력했다. 내 엄마는 가진 조건에선 최고로 키우려고 노력했다. 그게 내 기준에 미흡했을 지언정.. 엄마가 내 마음에 안 드는건 엄마를 뛰어넘는 존재가 되도록 열심히 키운게 성공했다는 거다. 내가 더 나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니.
세계는 점점 좋아지고 있을까? 안 좋아지고 있을까? 좋아지고 있다.
전쟁 빈도수도 점점 줄어들고 있고,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정말 ㅠㅜ)
기계의 발달로 건조기, 식세기, 무선 청소기, 로봇 청소기 덕에 살림도 많이 편해졌다.
내가 더 나은 존재가 되어서 엄마에게 잘해주는 것 밖에 안 남았다.
엄마 아빠는 자기가 가진 정보 안에서 최고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자기의 아기 내 아기 좋은 것만 줘야지 하면서 키운 결과가 나 이기 때문이다.
엄마 미운거 많다. 그러나 나또한 내 아이에게 완벽하게 해주고팠지만, 결국 소리 지르고 말았다.
가진게 많음 편하게 키울수 있다. 하지만 없이 컸다고 사랑도 없는것은 아니다.
그래서 결국엔본인이 더 힘들다. 본인도 자신이 완벽하지 않은 부모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도 딸 엄마이니 알겠다. 그리고 모두 용서했다. 엄마는 엄마의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나니 용서가 된다. 엄마는 내가 바꿔야 할 사람이 아니고, 내가 더 빨리 크게 발전해서 엄마에게 그 혜택을 누리게 하면 되는거였다.
엄마가 미운 사람에게 내 글이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길 글 썼는데 이 긴 글 같이 읽어줘서 고맙고 당신 모두에게 행운이 가득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