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출근도 하지 않은 채, 공원 앞 벤취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내 발끝으로 떨어지는 낙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작은 은행잎.... 이건 붉은색 단풍잎... 이건 뭐지... 플라타나스잎 인가... 곱지가 않구나... 이건 벌레 먹었 구...... 이건 다시 은행잎... 단풍잎... 눈물 한 방울... 눈물 두 방울... 주르르......
유학은 어떻게 가는 건가?
사람들이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을 때 다 버리고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어하는 것이 맞나보다.
여행이라도 갈까?...
그래 그래야 겠다...
난 그렇게 무작정 짐을 싸서는 아무도 모르게 떠났다.
막상 가려고 하니 내가 아는 곳이 없다.
그래서 그때 산행 가서 길 잃었을 때 갔었던 그 인심 좋은 아저씨, 아주머니가 있는 그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세상과는 정말 단절된 곳이라는 생각에...
일단 강원도 가는 기차에 올라 소장님 께 전화를 했다.
그냥 며칠만 쉬고 싶으니 휴가 좀 달라고 하고는 무슨 일이냐 구 묻는데 대꾸 없이 끊어버렸다.
그렇게 그 집에 도착했다.
그때는 산을 타고 올라가서 험준한 산 속에 있는 줄 알았는데... 집에 올 때 보니까 옆쪽으로 길을 닦아 놓아서 차로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난 그렇게 그 집에서의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도피가 맞나? ... 그럴 수도 있지... 그냥 다 싫어서 떠나 온 거니까 ...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 그리고 또 하루....
여기선 시간의 개념이 없다.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시계를 보고 7시 .... 출근하면서 최소한 3번은 시계를 보고 ...직장에서 일하면서 점심시간 전에 두 번 정도.... 점심 먹으면서 한 번 정도.... 오후 일하면서 두 번 정도....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한 번 ... TV프로 확인하려 구 최소한 한번이상 ...
..................시계를 본다.
여기 와서 이틀동안은 무슨 일도 없으면서 습관처럼 시계를 들여다보며 이쯤엔 이일을 했었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했는데...
오늘은 시계를 한 번 보지 않고 한 나절을 보냈다.
해가 뜨면 아침이요, 해가 중천에 떴으면 점심때고 해가 기울어 가면 저녁이지 별반 큰 시간소용이 없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해바라기를 하는 데 이 집 딸내미가 마당에 나 앉아 뜨락에 잔뜩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코스모스를 따고 있다.
언뜻 초등학교 4-5학년은 돼 보이는 데...
전에 왔을 땐 못 봤는데... 어제 아침에 밥 먹으면서 처음 눈인사를 했다.
나를 보고는 씨익 웃는 그 모습이 어딘가 약간 모자란 듯한 인상이었다.
애 앞에서 물어 볼 수도 없 구 하여 그냥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상을 물리고 나서 딸아이가 나가자 아주머니가 한마디한다.
" 저희가 느즈막히 결혼을 해서 아일 가져서 인지 애가 좀 모자라요. 그래도 시건은 멀쩡해요. 말은 다 알아듣고 하는 데..."
" 도시에서 다른 아이들과 같이 일반 학교를 보냈는데... 아이들이 따돌리고 놀리고 해서 속이 상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래 우리 부부가 이 아일 위해 해 줄게 뭐가 있겠나 생각하다가 얘 아버지 사업도 다 정리하고 그냥 여기 와서 살아요. 처음엔 큰 용기가 필요했는데 와서 보니 정말 잘했단 생각을 해요."
그렇구나... 자식하나를 위해...
그 모든 걸 다 버릴 수 있는 거구나...
그게 바로 사랑이 있기 때문이겠지...
사랑은 그렇게 아무것도 받지 못해도 그냥 해 줄 수 있는 그런 희생인가보다...
사랑은...
아이가 그렇게 코스모스를 따서는 한 웅큼을 만들어서 내게 건낸다. 수줍게 ...
" 이거 나 주는 거야? ..."
그렇다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줍어하면서 밖으로 뛰어나간다.
나도 산책이 하고 싶어져 아이를 따라 들녘을 거닐었다.
아이가 저 만치 가다가 내가 쫓아오는 걸 의식했는지 뒤돌아보고는 다시 걷기를 반복한다.
그리곤 어느새 아이와 가까워 져서 걷고 있다.
아이의 경계심이 이렇게 풀려 가는 건가? ...
아이와 나와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한 번 도 얘기를 해보지 않았지만 아이와 나사이의 마음의 거리가 좁혀져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아줌마?... 사랑이 뭐예요? "
" 글쎄 갑자기 왜... "
" 오늘 책에서 봤는 데요... "
" 무슨 책? ... "
" 있어요. 엄마가 맨날 맨날 읽는 책이요... 거기서 가인이라는 여자가 있는 데요... 그리구 남자가 있어요. 근데 사랑하니까 헤어지는 거야 그러면서 울면서 갔어요. "
"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면 사랑이 나쁜 놈인가 봐요."
" 글쎄. 사랑은 좋은건데... 너희 어머니도 널 사랑하는 거구 너 두 엄마를 사랑하잖아... "
" 난 사랑 안해요... 그냥 좋아하는 거지... "
" 그게 사랑하는 거야... "
" 그럼 좋은 건데 왜 우냐? 바보들... "
그리곤 아이가 저만치 뛰어간다.
사랑하니까 헤어지는 거야...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사랑하니까 헤어질 수도 있는 거겠지...
사랑하니까...
35. 뭔가 부족한 사랑의 느낌... 싫다...
그렇게 며칠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나는 감정이 다소 정리되면서 냉정을 되찾았다.
버스에서 내려 걸음을 옮기다가 정류장근처에 새로 생긴 꽃가게를 발견했다.
전엔 없었는데 언제 생긴 거지?
작지만 제법 깔끔하고 예쁘게 꾸며진 가게 앞에는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허브들이 심어져 있는 작은 화분들이 놓인 곳을 보다가 우연히 보랏빛 라벤더 꽃이 핀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라벤더... 정말 예쁘구나...
이상하게 이 꽃에 정이 가는 이유는 뭘까? ...
꽃색이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이라 그런가...
그러다가 문득 민혁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까페가 생각났다.
그 까페 화단에 라벤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는 데...
그러니까 문득 프로방스 지방에 가보고 싶어졌다.
민주의 엽서 속에 있었던 그 라벤더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던 그 보랏빛 초원.
그 엽서를 보고 있기만 해도 라벤더 향에 취해 정신이 몽롱해 지는 것 같았었는데...
가게로 들어서니 작은 가게문에 달린 종이 울린다.
그때 그 까페에서도 이런 종소리가 났었지...
종소리에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아가씨가 일어나 수줍은 눈웃음을 건넨다.
" 여기 가게 언제 오픈 했어요? "
" 한 달쯤 됐어요."
' 한 달 ... '
' 벌써 한달 이나 됐다 구... 난 오늘 처음 봤는데... '
쉽게 눈에 띄는 장소인데도 그 동안 지나다니면서 한 번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게 너무 신기해서 눈을 굴리며 가게 내부를 둘러보다가는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눈이 있다더니 마음으로 보지 않으니까 한 달 여를 보고도 몰랐구나 ...
나에게 이렇게 지나쳐간 것들이 많을 거란 생각에 갑자기 두려움이 일었다.
소중한 많은 것들을 마음의 눈으로 보지 못해서 그냥 그렇게 흘려 버린 건 아닌지...
" 저기.. 저 분홍장미 한 다발 만 주세요."
난 꽃잎 가장자리가 좀더 진한 분홍으로 물들어 있는 탐스럽게 핀 장미 다발을 보고 얘기했다.
" 몇 송이나 드릴까요? "
" 그냥 푸짐하게 주세요."
" 푸짐하게요? 호호 재밌게 말씀하시네요."
하면서 알아서 한 가슴에 부담 없이 안길 정도로 골라서는 포장을 한다.
" 누구에게 선물하실 거예요? "
포장을 하면서 아가씨가 묻는다.
" 네... 저 한테요..."
하면서 내가 웃어 주었다.
아가씨도 따라서 싱긋이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한 팔로 장미 다발을 안고 나오던 나는 밖에 놓인 작은 라벤더 화분에 다시금 눈이 갔다.
다시 들어가 라벤더 화분 두 개를 다시 주문했다.
" 라벤더 향은 슬픔이 많은 사람들에게 좋대요. 특히 사랑은 잃은 사람에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준대요. "
" 네... "
사랑을 잃은 사람에게...
" 저 근데 다 들고 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렇구나... 좀 벅차겠다... 그래도 꼭 가져가도 싶은 욕심이 났다.
여행갈 때 가져갔던 조금은 큰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고 장미와 라벤더 화분 두 개를 두 가슴 가득 안고 집으로 향했다.
언덕을 오르는 데 저 위쪽 가게 아주머니가 밖에 나와 있다가 내가 오는 걸 지켜보고 있다.
점점 가까워지자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 어디 다녀 오시나봐요? "
" 네. 여행 좀... "
" 여행이요? 혼자서요? "
" 네."
조금 놀라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그냥 웃고 만다.
나도 활짝 웃어드리고는 인사를 하고 올라왔다.
한참을 올라오다가 오늘 저녁에 스파게티라도 해 먹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오늘은 나를 위해 근사한 저녁을 준비해 봐야지...
하얀 접시에 스파게티를 담고 하얀 화병에 장미를 꽃아 식탁을 장식하고...
난 다시 돌아서서 가게로 향했다.
물건을 정리하던 아주머니가 다시 온 날 보더니 놀라면서 묻는다.
" 가시더니 어째 다시 내려오셨어요? "
" 스파게티 면하고 소스 좀 주세요."
" 네. 오늘 스파게티 해 드시게요? "
" 네 "
물건을 싸주면서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한마디한다.
" 저. 근데... 여행은 왜 혼자 갔다와요. 신랑은 어쩌고? "
" 그냥요... 혼자 가고 싶을 때도 있잖아요."
" 신랑하구 사이가 안 좋아요? "
" 아뇨. 왜요? 그렇게 보이세요? "
" 아니 뭐. 이런 말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
" 무슨 말씀이신대요. 그냥 편하게 말씀하세요."
" 저기.. 새댁 없는 동안 어떤 아가씨가 매일 들락거립디다. 저녁에 같이 와서는 밤 늦게야 돌아가고 하던 데... "
" 아, 네. 그냥 친굴 거예요."
" 아유, 요즘 아무리 그런 세상이라지만 남자 여자 사이에 친구가 어딨어요. 그리구 어제는 그 아가씨가 여기 와서 음료수를 사 가길래 어떻게 되는 사이냐 구 물었더니 아주 당당하게 애인이라 구 하던데... 내 참..."
그러면서 내 눈치를 살핀다.
" 저기 아주머니 얼마예요? "
" 아이구 내 정신 좀 봐. 7500원 이예요."
계산을 하고 나오는 내 뒤통수에 대고 아주머니가 한마디 당부를 잊지 않으신다.
" 초기에 꽉 잡아야 돼요. 쯧쯧... 남자들이란 족속들은... "
화분두개, 벅찬 장미 다발, 어깨에 둘러 맨 가방, 그리고 스파게티 봉다리... 점점 힘이 빠지면서 무거워 진다.
내 기분만큼이나...
그렇게 간신히 들고 집으로 온 나는 착찹한 기분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해가 질 준비를 하는 지 거실에 빛이 많이 들어오지 않아 다소 침침한 것이 내 기분을 더 우울하게 했다.
스파게티재료는 식탁에 올려놓고 나머지 짐을 들고 이층으로 올라왔다.
쇼파 밑에서 달게 자고 있던 마루가 인기척을 듣고는 내게로 달려와 반가움의 표시로 엉겨붙는다.
마루... 난 또 한 동안 마루에 대한 생각을 까맣게 잊었구나...
민혁 이가 그래도 마루 먹이 주는 건 잊지 않았나 보다.
난 화분들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는 마루를 안아 주었다.
그래도 너 밖에 없구나...
한 동안 안고 있다가 내려놓고는 짐 정리를 했다.
화분은 베란다에 내다 놓고 장미도 내가 만든 하얀 화병에 꽃아 그 옆에 나란히 놓았다.
그리곤 마루의 손길이 닿을 까봐 거실의 투명유리문을 닫아 두었다.
그리곤 한 동안 앉아 그 꽃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라벤더 향이 맡고 싶어져 화분을 들고 들어와서 코에다 대고 한껏 숨을 들이켰다.
아까 아줌마에게 들은 얘기 때문인가...
한껏 들이쉬었는데도 그 향기가 양껏 느껴지지 않는다. 몸 속에 산소가 부족한 것 같이 가슴이 답답하다.
그래서 난 창문을 열었다.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데도 가슴속은 더운 진공상태인 것 같다.
그가 날 사랑한다고 얘기하는 데도 그 사랑이 절대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느낌...
뭔가 많이 부족한 느낌... 이젠 이 느낌이 싫다.
민혁이.... 에게....수혜씨... 는... 뭘까? ... 연민의 정...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첫사랑의 정... 어쩌면 사랑...
혹시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이 연민의 정이 아닐까? ...
내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느껴지는 정 같은 것...
그가 나만 사랑하려구 했다고 했을 때...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수혜씨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웠을 수도 있다는...
근데 다시 생각해 보니 수혜씨에 대한 사랑이 나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일 수도 있겠구나...
아! 피곤하다...
갑자기 여독이 밀려왔다.
목욕이나 해야지...
화분하나를 들고는 그의 방으로 갔다.
그의 책상 위에 화분을 하나 놓아주고는 나와 욕조에 물을 받았다.
따뜻한 물이 가득 받길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욕조를 바라보다가 딸기 향이 나는 거품제를 욕조에 가득 풀었다.
그리곤 욕조에 몸을 담그고는 이런 저런 생각...
딸기 향...
정말 달콤한 것이...
사랑의 향기가 이럴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한 동안 몸을 담그고 있는 데 욕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린다.
" 누나... 언제 왔어? "
" 어, 방금."
난 몸을 좀 웅크리며 말했다.
" 미안해, 누나. 난 누나가 없는 줄 알 구"
" 괜찮아..."
그가 문을 닫아주고 가고 난 후에도 한참을 있다가 나왔다.
이층에 올라와 머리를 말리고 내려오니 그가 거실에 앉아있다.
" 누나,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핸드폰도 꺼놓고... 연락도 안되지 얼마나 걱정했는 데."
" 그랬겠구나... 미안해... "
" 민혁아, 오늘 저녁 안 먹었지? "
" 응."
" 그래 그럼 우리 스파게티 해 먹자 "
" 좋지."
" 민혁아, 개판 씨도 부르자."
" 개판이는 왜? "
그가 잔뜩 경계심을 품은 말투로 얘기한다.
" 왜는? 개판 씨도 혼자 밥 먹을 텐데... 그리구 너랑 절친한 친구잖아. 난 너랑 개판 씨가 나 때문에 껄끄런 사이가 되는 건 싫어. 그냥 편하게 밥 먹으러 오라구 해."
" 알았어."
그렇게 난 스파게티를 준비했고 개판 씨가 왔다.
" 아이구, 냄새 좋다. 역시 경자씨 음식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근데 오붓하게 두 분이 드시지... 아! 닭살 스럽게 지내는 거 자랑하려구 그러는 거 아녜요? "
그는 특유의 넉살 스런 말투로 얘기한다.
" 근데 경자씨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예요. 민혁이 이 놈이 아주 경자씨 걱정에 장난 아니였다니까요."
(코믹러브) ** 그럭저럭 살아가던 여자의 쇼킹한 결혼 ** [34][35]
34. 사랑하니까 헤어지는 거야...
오늘은 출근도 하지 않은 채, 공원 앞 벤취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내 발끝으로 떨어지는 낙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작은 은행잎.... 이건 붉은색 단풍잎... 이건 뭐지... 플라타나스잎 인가... 곱지가 않구나... 이건 벌레 먹었 구...... 이건 다시 은행잎... 단풍잎... 눈물 한 방울... 눈물 두 방울... 주르르......
유학은 어떻게 가는 건가?
사람들이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을 때 다 버리고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어하는 것이 맞나보다.
여행이라도 갈까?...
그래 그래야 겠다...
난 그렇게 무작정 짐을 싸서는 아무도 모르게 떠났다.
막상 가려고 하니 내가 아는 곳이 없다.
그래서 그때 산행 가서 길 잃었을 때 갔었던 그 인심 좋은 아저씨, 아주머니가 있는 그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세상과는 정말 단절된 곳이라는 생각에...
일단 강원도 가는 기차에 올라 소장님 께 전화를 했다.
그냥 며칠만 쉬고 싶으니 휴가 좀 달라고 하고는 무슨 일이냐 구 묻는데 대꾸 없이 끊어버렸다.
그렇게 그 집에 도착했다.
그때는 산을 타고 올라가서 험준한 산 속에 있는 줄 알았는데... 집에 올 때 보니까 옆쪽으로 길을 닦아 놓아서 차로도 충분히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난 그렇게 그 집에서의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도피가 맞나? ... 그럴 수도 있지... 그냥 다 싫어서 떠나 온 거니까 ...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 그리고 또 하루....
여기선 시간의 개념이 없다.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시계를 보고 7시 .... 출근하면서 최소한 3번은 시계를 보고 ...직장에서 일하면서 점심시간 전에 두 번 정도.... 점심 먹으면서 한 번 정도.... 오후 일하면서 두 번 정도....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한 번 ... TV프로 확인하려 구 최소한 한번이상 ...
..................시계를 본다.
여기 와서 이틀동안은 무슨 일도 없으면서 습관처럼 시계를 들여다보며 이쯤엔 이일을 했었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했는데...
오늘은 시계를 한 번 보지 않고 한 나절을 보냈다.
해가 뜨면 아침이요, 해가 중천에 떴으면 점심때고 해가 기울어 가면 저녁이지 별반 큰 시간소용이 없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해바라기를 하는 데 이 집 딸내미가 마당에 나 앉아 뜨락에 잔뜩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코스모스를 따고 있다.
언뜻 초등학교 4-5학년은 돼 보이는 데...
전에 왔을 땐 못 봤는데... 어제 아침에 밥 먹으면서 처음 눈인사를 했다.
나를 보고는 씨익 웃는 그 모습이 어딘가 약간 모자란 듯한 인상이었다.
애 앞에서 물어 볼 수도 없 구 하여 그냥 밥을 먹었다.
밥을 다 먹고 상을 물리고 나서 딸아이가 나가자 아주머니가 한마디한다.
" 저희가 느즈막히 결혼을 해서 아일 가져서 인지 애가 좀 모자라요. 그래도 시건은 멀쩡해요. 말은 다 알아듣고 하는 데..."
" 도시에서 다른 아이들과 같이 일반 학교를 보냈는데... 아이들이 따돌리고 놀리고 해서 속이 상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래 우리 부부가 이 아일 위해 해 줄게 뭐가 있겠나 생각하다가 얘 아버지 사업도 다 정리하고 그냥 여기 와서 살아요. 처음엔 큰 용기가 필요했는데 와서 보니 정말 잘했단 생각을 해요."
그렇구나... 자식하나를 위해...
그 모든 걸 다 버릴 수 있는 거구나...
그게 바로 사랑이 있기 때문이겠지...
사랑은 그렇게 아무것도 받지 못해도 그냥 해 줄 수 있는 그런 희생인가보다...
사랑은...
아이가 그렇게 코스모스를 따서는 한 웅큼을 만들어서 내게 건낸다. 수줍게 ...
" 이거 나 주는 거야? ..."
그렇다면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줍어하면서 밖으로 뛰어나간다.
나도 산책이 하고 싶어져 아이를 따라 들녘을 거닐었다.
아이가 저 만치 가다가 내가 쫓아오는 걸 의식했는지 뒤돌아보고는 다시 걷기를 반복한다.
그리곤 어느새 아이와 가까워 져서 걷고 있다.
아이의 경계심이 이렇게 풀려 가는 건가? ...
아이와 나와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한 번 도 얘기를 해보지 않았지만 아이와 나사이의 마음의 거리가 좁혀져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 아줌마?... 사랑이 뭐예요? "
" 글쎄 갑자기 왜... "
" 오늘 책에서 봤는 데요... "
" 무슨 책? ... "
" 있어요. 엄마가 맨날 맨날 읽는 책이요... 거기서 가인이라는 여자가 있는 데요... 그리구 남자가 있어요. 근데 사랑하니까 헤어지는 거야 그러면서 울면서 갔어요. "
"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면 사랑이 나쁜 놈인가 봐요."
" 글쎄. 사랑은 좋은건데... 너희 어머니도 널 사랑하는 거구 너 두 엄마를 사랑하잖아... "
" 난 사랑 안해요... 그냥 좋아하는 거지... "
" 그게 사랑하는 거야... "
" 그럼 좋은 건데 왜 우냐? 바보들... "
그리곤 아이가 저만치 뛰어간다.
사랑하니까 헤어지는 거야...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사랑하니까 헤어질 수도 있는 거겠지...
사랑하니까...
35. 뭔가 부족한 사랑의 느낌... 싫다...
그렇게 며칠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나는 감정이 다소 정리되면서 냉정을 되찾았다.
버스에서 내려 걸음을 옮기다가 정류장근처에 새로 생긴 꽃가게를 발견했다.
전엔 없었는데 언제 생긴 거지?
작지만 제법 깔끔하고 예쁘게 꾸며진 가게 앞에는 화분들이 놓여 있었다.
허브들이 심어져 있는 작은 화분들이 놓인 곳을 보다가 우연히 보랏빛 라벤더 꽃이 핀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라벤더... 정말 예쁘구나...
이상하게 이 꽃에 정이 가는 이유는 뭘까? ...
꽃색이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이라 그런가...
그러다가 문득 민혁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까페가 생각났다.
그 까페 화단에 라벤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는 데...
그러니까 문득 프로방스 지방에 가보고 싶어졌다.
민주의 엽서 속에 있었던 그 라벤더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던 그 보랏빛 초원.
그 엽서를 보고 있기만 해도 라벤더 향에 취해 정신이 몽롱해 지는 것 같았었는데...
가게로 들어서니 작은 가게문에 달린 종이 울린다.
그때 그 까페에서도 이런 종소리가 났었지...
종소리에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아가씨가 일어나 수줍은 눈웃음을 건넨다.
" 여기 가게 언제 오픈 했어요? "
" 한 달쯤 됐어요."
' 한 달 ... '
' 벌써 한달 이나 됐다 구... 난 오늘 처음 봤는데... '
쉽게 눈에 띄는 장소인데도 그 동안 지나다니면서 한 번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게 너무 신기해서 눈을 굴리며 가게 내부를 둘러보다가는 문득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마음에 눈이 있다더니 마음으로 보지 않으니까 한 달 여를 보고도 몰랐구나 ...
나에게 이렇게 지나쳐간 것들이 많을 거란 생각에 갑자기 두려움이 일었다.
소중한 많은 것들을 마음의 눈으로 보지 못해서 그냥 그렇게 흘려 버린 건 아닌지...
" 저기.. 저 분홍장미 한 다발 만 주세요."
난 꽃잎 가장자리가 좀더 진한 분홍으로 물들어 있는 탐스럽게 핀 장미 다발을 보고 얘기했다.
" 몇 송이나 드릴까요? "
" 그냥 푸짐하게 주세요."
" 푸짐하게요? 호호 재밌게 말씀하시네요."
하면서 알아서 한 가슴에 부담 없이 안길 정도로 골라서는 포장을 한다.
" 누구에게 선물하실 거예요? "
포장을 하면서 아가씨가 묻는다.
" 네... 저 한테요..."
하면서 내가 웃어 주었다.
아가씨도 따라서 싱긋이 미소를 짓는다.
그렇게 한 팔로 장미 다발을 안고 나오던 나는 밖에 놓인 작은 라벤더 화분에 다시금 눈이 갔다.
다시 들어가 라벤더 화분 두 개를 다시 주문했다.
" 라벤더 향은 슬픔이 많은 사람들에게 좋대요. 특히 사랑은 잃은 사람에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준대요. "
" 네... "
사랑을 잃은 사람에게...
" 저 근데 다 들고 가실 수 있으시겠어요.?"
그렇구나... 좀 벅차겠다... 그래도 꼭 가져가도 싶은 욕심이 났다.
여행갈 때 가져갔던 조금은 큰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고 장미와 라벤더 화분 두 개를 두 가슴 가득 안고 집으로 향했다.
언덕을 오르는 데 저 위쪽 가게 아주머니가 밖에 나와 있다가 내가 오는 걸 지켜보고 있다.
점점 가까워지자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 어디 다녀 오시나봐요? "
" 네. 여행 좀... "
" 여행이요? 혼자서요? "
" 네."
조금 놀라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그냥 웃고 만다.
나도 활짝 웃어드리고는 인사를 하고 올라왔다.
한참을 올라오다가 오늘 저녁에 스파게티라도 해 먹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오늘은 나를 위해 근사한 저녁을 준비해 봐야지...
하얀 접시에 스파게티를 담고 하얀 화병에 장미를 꽃아 식탁을 장식하고...
난 다시 돌아서서 가게로 향했다.
물건을 정리하던 아주머니가 다시 온 날 보더니 놀라면서 묻는다.
" 가시더니 어째 다시 내려오셨어요? "
" 스파게티 면하고 소스 좀 주세요."
" 네. 오늘 스파게티 해 드시게요? "
" 네 "
물건을 싸주면서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한마디한다.
" 저. 근데... 여행은 왜 혼자 갔다와요. 신랑은 어쩌고? "
" 그냥요... 혼자 가고 싶을 때도 있잖아요."
" 신랑하구 사이가 안 좋아요? "
" 아뇨. 왜요? 그렇게 보이세요? "
" 아니 뭐. 이런 말을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
" 무슨 말씀이신대요. 그냥 편하게 말씀하세요."
" 저기.. 새댁 없는 동안 어떤 아가씨가 매일 들락거립디다. 저녁에 같이 와서는 밤 늦게야 돌아가고 하던 데... "
" 아, 네. 그냥 친굴 거예요."
" 아유, 요즘 아무리 그런 세상이라지만 남자 여자 사이에 친구가 어딨어요. 그리구 어제는 그 아가씨가 여기 와서 음료수를 사 가길래 어떻게 되는 사이냐 구 물었더니 아주 당당하게 애인이라 구 하던데... 내 참..."
그러면서 내 눈치를 살핀다.
" 저기 아주머니 얼마예요? "
" 아이구 내 정신 좀 봐. 7500원 이예요."
계산을 하고 나오는 내 뒤통수에 대고 아주머니가 한마디 당부를 잊지 않으신다.
" 초기에 꽉 잡아야 돼요. 쯧쯧... 남자들이란 족속들은... "
화분두개, 벅찬 장미 다발, 어깨에 둘러 맨 가방, 그리고 스파게티 봉다리... 점점 힘이 빠지면서 무거워 진다.
내 기분만큼이나...
그렇게 간신히 들고 집으로 온 나는 착찹한 기분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해가 질 준비를 하는 지 거실에 빛이 많이 들어오지 않아 다소 침침한 것이 내 기분을 더 우울하게 했다.
스파게티재료는 식탁에 올려놓고 나머지 짐을 들고 이층으로 올라왔다.
쇼파 밑에서 달게 자고 있던 마루가 인기척을 듣고는 내게로 달려와 반가움의 표시로 엉겨붙는다.
마루... 난 또 한 동안 마루에 대한 생각을 까맣게 잊었구나...
민혁 이가 그래도 마루 먹이 주는 건 잊지 않았나 보다.
난 화분들을 아무렇게나 내려놓고는 마루를 안아 주었다.
그래도 너 밖에 없구나...
한 동안 안고 있다가 내려놓고는 짐 정리를 했다.
화분은 베란다에 내다 놓고 장미도 내가 만든 하얀 화병에 꽃아 그 옆에 나란히 놓았다.
그리곤 마루의 손길이 닿을 까봐 거실의 투명유리문을 닫아 두었다.
그리곤 한 동안 앉아 그 꽃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라벤더 향이 맡고 싶어져 화분을 들고 들어와서 코에다 대고 한껏 숨을 들이켰다.
아까 아줌마에게 들은 얘기 때문인가...
한껏 들이쉬었는데도 그 향기가 양껏 느껴지지 않는다. 몸 속에 산소가 부족한 것 같이 가슴이 답답하다.
그래서 난 창문을 열었다.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데도 가슴속은 더운 진공상태인 것 같다.
그가 날 사랑한다고 얘기하는 데도 그 사랑이 절대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느낌...
뭔가 많이 부족한 느낌... 이젠 이 느낌이 싫다.
민혁이.... 에게....수혜씨... 는... 뭘까? ... 연민의 정...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첫사랑의 정... 어쩌면 사랑...
혹시 나에 대한 그의 사랑이 연민의 정이 아닐까? ...
내가 너무 가까이 있어서 느껴지는 정 같은 것...
그가 나만 사랑하려구 했다고 했을 때...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수혜씨 때문에 많이 혼란스러웠을 수도 있다는...
근데 다시 생각해 보니 수혜씨에 대한 사랑이 나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일 수도 있겠구나...
아! 피곤하다...
갑자기 여독이 밀려왔다.
목욕이나 해야지...
화분하나를 들고는 그의 방으로 갔다.
그의 책상 위에 화분을 하나 놓아주고는 나와 욕조에 물을 받았다.
따뜻한 물이 가득 받길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욕조를 바라보다가 딸기 향이 나는 거품제를 욕조에 가득 풀었다.
그리곤 욕조에 몸을 담그고는 이런 저런 생각...
딸기 향...
정말 달콤한 것이...
사랑의 향기가 이럴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한 동안 몸을 담그고 있는 데 욕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린다.
" 누나... 언제 왔어? "
" 어, 방금."
난 몸을 좀 웅크리며 말했다.
" 미안해, 누나. 난 누나가 없는 줄 알 구"
" 괜찮아..."
그가 문을 닫아주고 가고 난 후에도 한참을 있다가 나왔다.
이층에 올라와 머리를 말리고 내려오니 그가 거실에 앉아있다.
" 누나,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핸드폰도 꺼놓고... 연락도 안되지 얼마나 걱정했는 데."
" 그랬겠구나... 미안해... "
" 민혁아, 오늘 저녁 안 먹었지? "
" 응."
" 그래 그럼 우리 스파게티 해 먹자 "
" 좋지."
" 민혁아, 개판 씨도 부르자."
" 개판이는 왜? "
그가 잔뜩 경계심을 품은 말투로 얘기한다.
" 왜는? 개판 씨도 혼자 밥 먹을 텐데... 그리구 너랑 절친한 친구잖아. 난 너랑 개판 씨가 나 때문에 껄끄런 사이가 되는 건 싫어. 그냥 편하게 밥 먹으러 오라구 해."
" 알았어."
그렇게 난 스파게티를 준비했고 개판 씨가 왔다.
" 아이구, 냄새 좋다. 역시 경자씨 음식 솜씨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근데 오붓하게 두 분이 드시지... 아! 닭살 스럽게 지내는 거 자랑하려구 그러는 거 아녜요? "
그는 특유의 넉살 스런 말투로 얘기한다.
" 근데 경자씨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예요. 민혁이 이 놈이 아주 경자씨 걱정에 장난 아니였다니까요."
" 그래요? 개판 씬 걱정 안 했어요? "
난 웃음으로 응수하며 물었다.
" 저요? 아이구 저 두 걱정 많이 했죠."
좀 당황한 듯 하더니 이내 너스레스런 웃음을 웃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농담처럼 진담처럼 웃음을 주고받으며 식사를 했다.
다 같이 약속이나 한 듯이 초기의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다들 애쓰면서...
서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던 평화로운 시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