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1살인 나는 빅뱅과 시대를 함께 했다. 고등학교 시절 '거짓말'부터 오늘의 '봄여름가을겨울'까지 그들의 탄생과 저묾을 함께 했다. 나에게 있어 평생토록 그리고 앞으로도 가장 오래 가슴에 남아있을 보이밴드일 것이다.
빅뱅이 데뷔하던 2007년도 까지만 해도 엔터사라는 표현은 생소했고 대신 '기획사'라는 말이 통용되었다. 실제로 SM과 JYP의 이수만, 박진영은 프로듀싱 전반의 과정에 개입하며 아이돌들을 '기획'해냈다. 이수만, 박진영은 각 서울대, 연세대 출신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 둘의 성향은 기본적으로 학구적이며 탐구적이며 시스템을 사업의 작동 원리로 삼았다. 이수만은 가수 보아를 일본에 진출시키기 위해 NHN 아나운서의 집에서 홈스테이 시키며 언어를 습득시켰고, 보아 주변의 스텝들을 전부 일본인으로 섭외했다. 모든 일은 이수만 전 대표가 기획하고 설계한 일이었다. 얼마 뒤 보아의 노래가 CF송에 삽입된 것을 계기로 SM은 일본 시장을 최초로 개척해냈다. JYP의 구 사옥 사훈에는 '모든 일은 시스템 속에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박진영은 시스테믹한 성향을 보인다. 그에게 있어 춤 또한 엔지니어링 가능한 대상이며 최적의 퍼포먼스를 어떻게 낼 수 있을까에 대해 인체학 서적까지 공부할 정도로 탐구한다. 방시혁 또한 JYP의 수석프로듀서 출신으로 박진영과 남들이 들으면 무슨 의미가 싶은 연역적, 개념적, 철학적 대화를 6시간씩 할 정도로 너드 기질을 보인다. 방시혁이 서울대 미학과 출신인 것은 더 이상 놀랍지 않다. 학벌이 성공에 있어 중요하진 않지만, 그들이 공부하던 습관은 사고의 관성이 되어 모든 일을 프로세스화 하여 대하는 습관을 만들어줬다. 꼭 이것이 성공의 방정식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현재 세계인들이 인지하는 케이팝이라는 장르 특유의 정제된 색채들은 디자인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들 세 대표의 핵심역량은 바로 '패키징' 역량이다. 아티스트들을 하나의 프로덕트 관점에서 어떻게 해야 최적의 시장성을 갖출 지 '연출'하는 전문가들인 것이다.
그러나 양현석은 달랐다. 그는 무식했고, 무식했지만 감이 좋았다. 홍대 NB의 사장 출신으로 자신과 가까이 지내던 동료들을 모아 회사를 차렸다.그의 동물적인 감이 기업화된 것이 바로 YG라는 브랜드이다. 양현석은 처음부터 YG의 아티스트들을 프로덕트가 아닌 패밀리로 불렀고, 그렇게 크루의 형태로 사업을 영위했다. 구 세대의 AOMG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YG는 시스템이 아닌 보스 리더십에 의해 운영되었다. 추후 양현석의 동생 양민석이 경영에 투입되면서 현재의 형태를 갖추었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상당부분 양현석의 감에 의존했다. 박진영은 아이돌을 기획할 때 자신이 설정한 이상향에 맞게 그들을 수없이 제련시키는 방식을 택했고, 양현석은 테디, 용감한 형제, 쿠시 등 작곡가 '크루'의 조력 아래 니들끼리 멋있는 거 한 번 해봐라. 다만 나한테 '감'이 올 때까지의 방식을 택했다. 즉 마이크로 매니징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던 양현석이 갑자기 아이돌을 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네 명과 한 명이 모였다. 양현석은 빅뱅의 초기 결성 당시 그 한 명과 옛 비스트 멤버 장현승을 탈락시키겠다고 마음 먹다가 그 한 명이 노래 한 번 해보겠다는 말에 끌려 수 분 만에 자신의 결정을 뒤집었다. 그렇게 빅뱅은 탄생되었다. 그리고 최초의 '힙합' 아이돌이라는 식으로 프레이즈를 만들었다. 그 넷의 외모는 너무도 수수했고, 수수해서 눈이 갔다. 당시 YG 프로듀서였던 용감한 형제는 둔탁한 힙합을 신디사이저 선율로 가볍게 풀어내 '거짓말'이라는 명곡을 만들었다. 수수한 외모, 전례없던 아이돌의 힙합 의상, 용감한 형제의 후킹 능력이 만나 '거짓말'은 한국을 흔들었다.
빅뱅이 지난 10년간 한국 음악사에 기여한 공로는 다음과 같다.
1. 아이돌의 아티스트화
2. 아이돌의 패션 아이콘화
빅뱅의 전까지만 해도 아이돌이 직접적으로 곡을 만들고 이를 타이틀 곡으로 삼던 전례가 없었다. YG의 작곡가 크루들은 소속 아티스트와 형동생으로 지냈고 그들에게 작곡 노하우를 공유했다. JYP는 곡을 박진영이 직접 만들었고, SM은 유영진 프로듀서가 대부분을 제작했고 아티스트들은 그를 더러 '선생님'이라 칭했다. 곡 제작을 하는 사람과 형동생으로 지내는 크루 문화가 없던 시점이었다. 그들은 친구처럼 자유롭게 소통하며 특유의 실험적인 시도를 이어갔고, 나중에는 아이돌을 아티스트라 칭해도 이질감이 없을 정도로 곡의 퀄리티가 올라갔다. GD의 'ONE OF A KIND'가 그 시초이다. 당시 인디랩퍼들 사이에서 아이돌 힙합을 가짜라고 칭하는 비난 문화가 유행처럼 번질 때였는데 당시 인디계의 최정상에 있던 도끼마저 샤라웃을 할 정도로 하나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두 번째로 이전까지 패션계는 음악 시장이 아닌 배우들로 대변되는 영화와 드라마 등 스크린계와 의류업계 마케팅 부서가 이끌어갔다. 그리고 빅뱅은 아이돌 사상 처음으로 옷만으로도 그들인지 연상되는 시그니쳐를 형성하여 아이돌을 최초로 패션 아이콘이 되었다. 그 당시까지 JYP와 SM은 패션 트렌드를 분석하여 그들의 아이돌에 잘 맞는 컨셉을 발굴하여 착장시키는 형태였다면, YG는 일본 출신의 히피 스타일리스트가 여러가지 실험적 옷들을 입혀가며 그들의 스타일을 '창작'했다. 그 이질감은 신선함으로 다가왔고 그들은 하이탑 슈즈를 시작으로 한국 패션계를 장악했다. 지금은 흔해진 명품 의류사의 엠베세더로 처음으로 초청받은 아이돌 또한 빅뱅이다.
이 두 가지 시도가 나온 배경에는 YG 특유의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자유는 방종을 낳았다. 그저 힙함을 인재요건으로 내세워 들여온 많은 스타일리스트와 스탭진들은 각종 마약 문제로 적발되기 시작했고, 그들과 형동생으로 지냈던 아티스트 또한 그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자유라는 무게에 맞게 아티스트 스스로 자정능력이 있어야 했는데, 심적으로 불안했던 그들은 빠져들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불안과 공황 속에서도 여러 곡들을 꽃처럼 피워냈다.
그러던 YG도 양현석이라는 크레이티브 디렉터가 빠지고, SM과 JYP와 같이 감이 아닌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변해갔다. 빅뱅의 후발주자 '위너'는 패션돌이라는 컨셉으로 초기 결성 단계부터 상당부분 기획되어 나왔다. 현재 '트레저'의 무대를 보면 이들이 YG 소속인지 좀처럼 연상되지 않을 것이다. 빅뱅은 크루 문화 속 자유와 방종에서 탄생된 최초이자 마지막의 아이돌인 것이다. 빅뱅에는 GD라는 리더가 있던 것처럼 '아이콘' 또한 김한빈(B.I)이라는 자작곡에 능하고 알파기질이 다분한 리더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실의에 빠졌다. 당시 회사에서 비아이를 차세대 GD라며 추켜세웠으나 바비와 같이 나간 쇼미더머니에서 가사를 절며 국민적 조롱거리가 된 것이다. 당시를 자세히 아는 사람은 비아이가 YG 자체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쇼미더머니를 나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같은 기간 내에 두 개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것으로 당시 아티스트 보호라는 개념없이 양현석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대했는 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양현석은 그저 1등하고 오라는 말만을 했을 뿐이다. 당시 쇼미더머니에 우승한 바비의 경우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사 루틴들을 재조합하여 그나마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 속 그의 랩과 쇼미더머니의 랩 가사속 교집합을 찾아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조롱거리가 된 비아이는 특유의 '알파성'을 잃고 나약해져갔다. 선장없는 함대처럼 아이콘은 순한 맛이 되어갔다.
크루 문화에 뿌리를 둔 아이돌은 더 이상 한국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엔터사들이 모두 상장사가 되었고 거대기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BTS의 하이브는 저스틴 비버가 속한 이타카 홀딩스를 1조원이 넘는 금액에 인수했다. 빅뱅이 나오기 전까지 YG는 비상장사이자 홍대에 있는 조그마한 독립 법인이었다. 그들이 목표로 한 것은 오로지 '멋'이었다. 엔터사들이 상장사가 되고 거대기업이 된다함은 그만큼 이해관계자가 많아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안정적 영업익을 담보하기 위해 아티스트 라인을 다변화하고, 어느정도 상품성이 입증된 특이하지 않는 아이들을 보여야 할 사회적 압박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빅뱅의 계보를 이을 아이돌은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빅뱅으로 우주가 시작했지만 한 번의 빅뱅은 영원히 반복되지 않는다. 최초이자 동시에 마지막인 셈이다. 부정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현재 유닛 형식의 아이돌, 리더들의 자작곡 제작 역량 대두, 명품사와의 협업 모두는 빅뱅으로 말미암은 것들이다. 앞으로 이어질 엔터사업의 역사에도 빅뱅이라는 그룹의 존재와 영향은 작은 점의 형태든 거대한 그늘의 형태든 끊이지 않고 남아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이돌의 지위를 아티스트로 격상시킨 혁명가였다.
30대 초반에 접어든 사람들에게 빅뱅이라는 그룹이 갖는 의미
올해 31살인 나는 빅뱅과 시대를 함께 했다. 고등학교 시절 '거짓말'부터 오늘의 '봄여름가을겨울'까지 그들의 탄생과 저묾을 함께 했다. 나에게 있어 평생토록 그리고 앞으로도 가장 오래 가슴에 남아있을 보이밴드일 것이다.
빅뱅이 데뷔하던 2007년도 까지만 해도 엔터사라는 표현은 생소했고 대신 '기획사'라는 말이 통용되었다. 실제로 SM과 JYP의 이수만, 박진영은 프로듀싱 전반의 과정에 개입하며 아이돌들을 '기획'해냈다. 이수만, 박진영은 각 서울대, 연세대 출신으로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 둘의 성향은 기본적으로 학구적이며 탐구적이며 시스템을 사업의 작동 원리로 삼았다. 이수만은 가수 보아를 일본에 진출시키기 위해 NHN 아나운서의 집에서 홈스테이 시키며 언어를 습득시켰고, 보아 주변의 스텝들을 전부 일본인으로 섭외했다. 모든 일은 이수만 전 대표가 기획하고 설계한 일이었다. 얼마 뒤 보아의 노래가 CF송에 삽입된 것을 계기로 SM은 일본 시장을 최초로 개척해냈다. JYP의 구 사옥 사훈에는 '모든 일은 시스템 속에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박진영은 시스테믹한 성향을 보인다. 그에게 있어 춤 또한 엔지니어링 가능한 대상이며 최적의 퍼포먼스를 어떻게 낼 수 있을까에 대해 인체학 서적까지 공부할 정도로 탐구한다. 방시혁 또한 JYP의 수석프로듀서 출신으로 박진영과 남들이 들으면 무슨 의미가 싶은 연역적, 개념적, 철학적 대화를 6시간씩 할 정도로 너드 기질을 보인다. 방시혁이 서울대 미학과 출신인 것은 더 이상 놀랍지 않다. 학벌이 성공에 있어 중요하진 않지만, 그들이 공부하던 습관은 사고의 관성이 되어 모든 일을 프로세스화 하여 대하는 습관을 만들어줬다. 꼭 이것이 성공의 방정식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현재 세계인들이 인지하는 케이팝이라는 장르 특유의 정제된 색채들은 디자인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들 세 대표의 핵심역량은 바로 '패키징' 역량이다. 아티스트들을 하나의 프로덕트 관점에서 어떻게 해야 최적의 시장성을 갖출 지 '연출'하는 전문가들인 것이다.
그러나 양현석은 달랐다. 그는 무식했고, 무식했지만 감이 좋았다. 홍대 NB의 사장 출신으로 자신과 가까이 지내던 동료들을 모아 회사를 차렸다.그의 동물적인 감이 기업화된 것이 바로 YG라는 브랜드이다. 양현석은 처음부터 YG의 아티스트들을 프로덕트가 아닌 패밀리로 불렀고, 그렇게 크루의 형태로 사업을 영위했다. 구 세대의 AOMG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YG는 시스템이 아닌 보스 리더십에 의해 운영되었다. 추후 양현석의 동생 양민석이 경영에 투입되면서 현재의 형태를 갖추었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상당부분 양현석의 감에 의존했다. 박진영은 아이돌을 기획할 때 자신이 설정한 이상향에 맞게 그들을 수없이 제련시키는 방식을 택했고, 양현석은 테디, 용감한 형제, 쿠시 등 작곡가 '크루'의 조력 아래 니들끼리 멋있는 거 한 번 해봐라. 다만 나한테 '감'이 올 때까지의 방식을 택했다. 즉 마이크로 매니징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던 양현석이 갑자기 아이돌을 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네 명과 한 명이 모였다. 양현석은 빅뱅의 초기 결성 당시 그 한 명과 옛 비스트 멤버 장현승을 탈락시키겠다고 마음 먹다가 그 한 명이 노래 한 번 해보겠다는 말에 끌려 수 분 만에 자신의 결정을 뒤집었다. 그렇게 빅뱅은 탄생되었다. 그리고 최초의 '힙합' 아이돌이라는 식으로 프레이즈를 만들었다. 그 넷의 외모는 너무도 수수했고, 수수해서 눈이 갔다. 당시 YG 프로듀서였던 용감한 형제는 둔탁한 힙합을 신디사이저 선율로 가볍게 풀어내 '거짓말'이라는 명곡을 만들었다. 수수한 외모, 전례없던 아이돌의 힙합 의상, 용감한 형제의 후킹 능력이 만나 '거짓말'은 한국을 흔들었다.
빅뱅이 지난 10년간 한국 음악사에 기여한 공로는 다음과 같다.
1. 아이돌의 아티스트화
2. 아이돌의 패션 아이콘화
빅뱅의 전까지만 해도 아이돌이 직접적으로 곡을 만들고 이를 타이틀 곡으로 삼던 전례가 없었다. YG의 작곡가 크루들은 소속 아티스트와 형동생으로 지냈고 그들에게 작곡 노하우를 공유했다. JYP는 곡을 박진영이 직접 만들었고, SM은 유영진 프로듀서가 대부분을 제작했고 아티스트들은 그를 더러 '선생님'이라 칭했다. 곡 제작을 하는 사람과 형동생으로 지내는 크루 문화가 없던 시점이었다. 그들은 친구처럼 자유롭게 소통하며 특유의 실험적인 시도를 이어갔고, 나중에는 아이돌을 아티스트라 칭해도 이질감이 없을 정도로 곡의 퀄리티가 올라갔다. GD의 'ONE OF A KIND'가 그 시초이다. 당시 인디랩퍼들 사이에서 아이돌 힙합을 가짜라고 칭하는 비난 문화가 유행처럼 번질 때였는데 당시 인디계의 최정상에 있던 도끼마저 샤라웃을 할 정도로 하나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두 번째로 이전까지 패션계는 음악 시장이 아닌 배우들로 대변되는 영화와 드라마 등 스크린계와 의류업계 마케팅 부서가 이끌어갔다. 그리고 빅뱅은 아이돌 사상 처음으로 옷만으로도 그들인지 연상되는 시그니쳐를 형성하여 아이돌을 최초로 패션 아이콘이 되었다. 그 당시까지 JYP와 SM은 패션 트렌드를 분석하여 그들의 아이돌에 잘 맞는 컨셉을 발굴하여 착장시키는 형태였다면, YG는 일본 출신의 히피 스타일리스트가 여러가지 실험적 옷들을 입혀가며 그들의 스타일을 '창작'했다. 그 이질감은 신선함으로 다가왔고 그들은 하이탑 슈즈를 시작으로 한국 패션계를 장악했다. 지금은 흔해진 명품 의류사의 엠베세더로 처음으로 초청받은 아이돌 또한 빅뱅이다.
이 두 가지 시도가 나온 배경에는 YG 특유의 '자유'가 있었다. 그러나 자유는 방종을 낳았다. 그저 힙함을 인재요건으로 내세워 들여온 많은 스타일리스트와 스탭진들은 각종 마약 문제로 적발되기 시작했고, 그들과 형동생으로 지냈던 아티스트 또한 그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자유라는 무게에 맞게 아티스트 스스로 자정능력이 있어야 했는데, 심적으로 불안했던 그들은 빠져들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불안과 공황 속에서도 여러 곡들을 꽃처럼 피워냈다.
그러던 YG도 양현석이라는 크레이티브 디렉터가 빠지고, SM과 JYP와 같이 감이 아닌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변해갔다. 빅뱅의 후발주자 '위너'는 패션돌이라는 컨셉으로 초기 결성 단계부터 상당부분 기획되어 나왔다. 현재 '트레저'의 무대를 보면 이들이 YG 소속인지 좀처럼 연상되지 않을 것이다. 빅뱅은 크루 문화 속 자유와 방종에서 탄생된 최초이자 마지막의 아이돌인 것이다. 빅뱅에는 GD라는 리더가 있던 것처럼 '아이콘' 또한 김한빈(B.I)이라는 자작곡에 능하고 알파기질이 다분한 리더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실의에 빠졌다. 당시 회사에서 비아이를 차세대 GD라며 추켜세웠으나 바비와 같이 나간 쇼미더머니에서 가사를 절며 국민적 조롱거리가 된 것이다. 당시를 자세히 아는 사람은 비아이가 YG 자체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쇼미더머니를 나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같은 기간 내에 두 개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것으로 당시 아티스트 보호라는 개념없이 양현석이 얼마나 주먹구구식으로 대했는 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양현석은 그저 1등하고 오라는 말만을 했을 뿐이다. 당시 쇼미더머니에 우승한 바비의 경우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사 루틴들을 재조합하여 그나마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 속 그의 랩과 쇼미더머니의 랩 가사속 교집합을 찾아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조롱거리가 된 비아이는 특유의 '알파성'을 잃고 나약해져갔다. 선장없는 함대처럼 아이콘은 순한 맛이 되어갔다.
크루 문화에 뿌리를 둔 아이돌은 더 이상 한국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엔터사들이 모두 상장사가 되었고 거대기업이 되었기 때문이다. BTS의 하이브는 저스틴 비버가 속한 이타카 홀딩스를 1조원이 넘는 금액에 인수했다. 빅뱅이 나오기 전까지 YG는 비상장사이자 홍대에 있는 조그마한 독립 법인이었다. 그들이 목표로 한 것은 오로지 '멋'이었다. 엔터사들이 상장사가 되고 거대기업이 된다함은 그만큼 이해관계자가 많아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안정적 영업익을 담보하기 위해 아티스트 라인을 다변화하고, 어느정도 상품성이 입증된 특이하지 않는 아이들을 보여야 할 사회적 압박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빅뱅의 계보를 이을 아이돌은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빅뱅으로 우주가 시작했지만 한 번의 빅뱅은 영원히 반복되지 않는다. 최초이자 동시에 마지막인 셈이다. 부정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현재 유닛 형식의 아이돌, 리더들의 자작곡 제작 역량 대두, 명품사와의 협업 모두는 빅뱅으로 말미암은 것들이다. 앞으로 이어질 엔터사업의 역사에도 빅뱅이라는 그룹의 존재와 영향은 작은 점의 형태든 거대한 그늘의 형태든 끊이지 않고 남아있을 것이다. 그들은 아이돌의 지위를 아티스트로 격상시킨 혁명가였다.
https://blog.naver.com/dannyreleased/222692502759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