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약속은 지켜야겠지만 멀대와 단둘이 만난다는 것은 조금 꺼려졌다. ‘어쩌지? 주리에게 말해 봐야겠다.’ 다행히도 얘기를 들은 주리가 흔쾌히 나와주겠다고 했다. 정우를 데리고 나 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러면 쌍쌍 파티 분위기 되는 거잖아.” - 그렇지. 난 네 짝이구, 정우는 여봉이 짝. “너 그 말 진짜지?” - 주리는 영원히 혜림이 짝할꼬야. 주리의 혀꼬기가 왠지 미덥지 않았지만 정우를 데리고 나오지 말라고 끝까지 우기기는 힘들 것 같았다. 영화 보고 술이나 먹는 평범한 스케줄을 짜고는 전화를 끊었다. ‘약속은 정했고. 내일 뭐 입고 나간담. 최대한 이쁘지 않게, 귀엽지 않게 보여야지.’ 멀대를 보내야 한다고 마음을 정리한 것이다. ‘내 귀여움에 매료된 멀대에게 나도 가끔은 귀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 장롱이며 옷걸이에 걸린 옷가지들을 전부 거실에 꺼내놓았다. 꺼내놓고 보니 문제가 있었다. 옷들이 하나같이 전부 예쁜 것 아닌가? ‘참, 난 왜 센스까지 있어서는. 그나저나 곤란하네.’ 한참을 뒤적거린 끝에 찾은 것은 이모의 디스코 풍 청바지와 중학교 때 사서 촌스러워 한번도 입지 못한 빨간 체크 남방이었다. 남방은 그럭저럭 촌스러웠지만 청바지는 도통 소화가 불가능했다. ‘이걸 입고 가면 대번에 작전이 드러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이 바지는 무난한 면바지로 입기로 했고, 머리는 하나로 촌스럽게 묶기로 했다. ‘어디 이모 머리끈 중에 왕 분홍 꽃 달린 것이 있었는데. 여기 있군. 중간 고무줄이 끊어졌네. 하하하. 이걸 이렇게 묶으면 더 열악해졌군.’ 흰 면티에 빨간 체크 남방, 남색 면바지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보색 대비가 키가 더 작아보이게는 했지만 별로 촌스럽지 않았다. ‘그냥 수수한 정도인데. 뭘 입어도 예쁘니 곤란한걸. 주리 기집애는 또 짧은 치마에 야시한 옷을 입고 나오겠지. 거기에 비하면 확 쳐지기는 하겠지만 아직 뭔가 부족해.’ 그 때 이모가 방에서 나왔다. “이모 뭔가 허전하지 않아?” “스카프가 빠졌잖아. 이모 분홍색 스카프 빌려줄까?” 이모가 건네준 진분홍 스카프를 두르자 이젠 완성되었다하는 느낌이 들었다. “고마워, 이모! 땡큐.” 여러 가지 이유로 시집을 못가고 있는 이모였다. 징...징... 누가 징징대는 거야? 머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베게 밑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는 모양이었다. “여보세요?” -아직도 자? 니네 집 다 왔는데. 시계를 보니 10시였다. “약속 2시 아니야?” - 우리 강촌 갈거거든. 지금 정우 차 타고 여봉이랑 같이 가고 있어. 10분 후면 도착할거야. “갑자기 웬 강촌?” -정우가 얼마 전에 엠티 갔다왔는데 너무 좋더래. 그래서 가기로 했지. 어때 좋지? “영화 본다고 했잖아.” -나 아직 강촌 안 가봤단 말이야. 가자. 혜림아. 갈꼬지? ‘저 혀꼬기는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인데.’ “알았어. 나갈게.” -금방 나와야돼. 이따 봐. ‘이럴 줄 알았다면 야시한 정장풍을 준비했어야 하는 건데. 마치 미리 야외로 놀러갈 줄 아는 것이 되어 버렸잖아. 으흐흐흐. 하지만 내게는 어제 준비한 비장의 무기가 있지롱.’ 그것은 바로 아이라이너 과다 사용. ‘이걸 좋아하는 남자는 없겠지.’ 혜림이 망가지기를 모두 끝내고 밖으로 나갔다. “어머, 혜림이 너무 귀여워. 너 중학생같애. 하하하.” 주리는 나를 보고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흡족한 반응에 나도 즐거웠다. 멀대는 차에서 내려 차문을 열어 주었다. “화장했네.” 멀대도 웃고 있었다. ‘작전이 성공한 걸까?’ 성공 여부를 가늠하기 힘든 모호한 웃음이었다. “나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거야? 에구 귀여워.” 그리고는 날 덥석 안아버렸다. “머리를 쪼맸네. 안 그래도 머리 묶은 거 보고 싶어서 머리끈도 사왔는데. 이걸로 바꿔서 해봐.” 내가 보기에도 예쁜 빨간 머리끈이었다. 작전은 실패였다. 정우와 주리가 앞에 나와 멀대는 뒷자석에 앉았다. “너 야외로 놀러갈 줄 알았던 거야? 꼭 옷을 미리 준비한 것 같아.” “미리 준비하기는.” “그 스카프 말이야...” “왜?” ‘촌스럽다고 말하려는 거지? 얼른 말하렴.’ “나 줘라. 색깔이 너무 이뻐.” 주리는 정말 갖고 싶은지 몸까지 틀어 내 얼굴 가까이로 왔다. “혜림아 나 줄꼬지?” ‘또 혀꼬기. 혀꼬기에 내가 두 번 당할 것 같으냐. 이건 오늘 작전의 핵심이라고.’ “안돼. 혜림이한테 더 잘 어울려. 혜림아, 주지마!” 멀대가 단호하게 말했다. 잘 어울려, 어울려 그 말이 귀에서 맴 돌았다. 작전은 완전히 실패였다. 우리집에 몰래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분명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동안 강촌에 도착을 했다. 내 짝을 하겠다던 주리는 정우의 팔에 매달려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내 눈에는 그 모습이 멀대랑 친한 척 해야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라고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행동으로 보였다. ‘웃겨. 그 정도에 넘어가지 않는다구.’ 강촌이라는 곳은 정말 유원지답게 산, 물, 간단한 유락 시설까지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분위기를 더했다. “우리도 자전거 타자.” 한껏 신이 난 주리가 말했다. “싫어.” 망가지기에 실패한 나는 모든 것에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짜증을 유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럼 밥부터 먹을까?” 멀대가 물었다. “싫어.” “그래. 난 운전하느라 피곤하니까 차안에서 조금만 쉬자.” 정우가 피곤해서 쉬겠다는데 싫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곧 나도 배가 고파지기 시작해서 밥을 먹으러 갔고,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보니 타고 싶어지는 바람에 비협조 작전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이것 저것 하자 거의 서울로 출발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늦었다. 가자.” 멀대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하기 전에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간신히 단 둘이 있을만한 틈을 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가긴 어딜 가? 우리 1박 하기로 했는데. 주리야, 아까 얘기 안했어?” ‘뭐야, 이건. 1박?’ “어머, 말 안했던가? 정신이 없었나봐.” ‘그래. 너 정신 나갔구나.’ “안돼. 나 집에 가야 돼.” “그러지 말고. 하루 있다가 가자. 이모한테는 내가 전화할게.” “이모 문제가 아니잖아. 어떻게 하루 자고 간다는 얘기를 지금 할 수가 있니?” “미안해. 깜박했어. 방도 예약했는데 자고 가자.” “방은 예약할 정신이 있으면서 친구한테는 말할 정신이 없든?” 내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멀대를 정리해야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강촌으로 놀러 온 것 하며 거기다가 여행일정을 1박으로 잡은 것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너 집에 가고 싶으면 가면 되지. 왜 소리를 질러?” 아마도 정우 앞에서 소리를 지른 것이 화가 난 모양인지 주리도 핏대를 올렸다. “나 혼자 가란 말이지. 알았어. 갈께.” “가고 싶으면 가. 누가 너 못 가게 잡았니?”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주리는 잡을 생각도 없는 모양인지 아예 다른 곳을 쳐다 보았다. ‘나쁜 기집애.’ 11-4 “같이 가. 니들은 놀고 내일 와. 나는 혜림이랑 서울 갈께.” 멀대도 가방을 집어 들고는 일어났다. 혹시 가지 말라고 잡으면서 주리를 편들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었는데 같이 일어나준 멀대에게 고마웠다. 빠른 걸음으로 기차역 쪽으로 걸어갔다. 멀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따라왔다. “너도 놀고 싶으면 애들이랑 놀다가. 나 혼자 올라갈 수 있어.” 괜히 멀대에게 심술을 부렸다. 멀대는 대답 대신 매표소쪽으로 갔다. “서울 두장이요.” 그리고는 사온 표를 내게 건네주었다. “10분후 출발이래.” “나도 알아.” 표를 받고는 혼자 먼저 플랫홈으로 들어가 버렸다. 플랫홈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모두들 스트레스를 풀고 간 모양인지 피곤해 보이지도 했지만 얼굴이 다 밝아 보였다. ‘이대로 서울을 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좀 무거운데. 멀대랑 놀아주기로 약속하고 나온 건데. 주리랑 같이 만나자고 하는 게 아니었어.’ “여봉아, 미안해.” “뭐라고?” 사람들 소리에 묻혀 못들은 모양이었다. “미안하다고.” “괜찮아.” ‘괜찮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미안한 걸.’ 멀리서부터 기차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가게 되는구나.’ “저기, 혜림아! 내일 가면 안 되는 거니?” 멀대의 말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사이 기차가 플랫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멀대에게 고개를 돌리지 못한 채 굉음을 울리면서 거대한 몸체를 서서히 드러내는 물체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멀대는 아마도 웃음이 약간 깃 듯 장난 어린 표정이겠지. 그 얼굴을 본다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나만 우스워 질거야.’ 말을 못들은 척 기차가 빨리 멈추기를 기다렸다. ‘여기서 흔들리면 안돼. 나 때문에 멀대를 더욱 힘들게 하는 꼴이 된다구.’ 표를 다시 꺼내 자리를 확인했다. 그동안 다행히 멀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드디어 완전히 멈춘 기차. 출입구까지는 조금은 걸어야했다. 한걸음 한걸음. 미안한 마음은 커져갔지만 뒤는 돌아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계단에 발을 올리는 순간 멀대가 나의 팔을 잡았다. ‘자식. 그럴 줄 알았다구. 미안하지만 바쁜 몸이라서.’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 그대로 몸을 옮기는데 팔을 놓아줄 것이라 생각했던 멀대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강혜림! 내일 가라.” 갑자기 지른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멀대의 표정이... 눈물을 그렁 그렁 달고서는 너무나 진지한 표정이었다. 혜림이를 너무나 원하는 듯한. 표정이 가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생각지 못한 애절한 눈빛에 순간 주춤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 계단에서 내려오지는 않은 상태였다. 멀대는 곧 힘으로 팔을 잡아 당겼고, 나는 기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너 왜 그러는 거야? 내가 간다고 했잖아.” 내가 소리를 지른 것 열차가 떠난 후였다. 혜림이 속 보이네. 그렇다고 그래 안갈께 바로 그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갈 거면 가던가.” 멀대는 그제서야 웃고 있었다. 웃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편해지면서도 약이 올랐다. “나는 애들이랑 있다 갈게.” 멀대는 성큼 성큼 기차역으로 걸어갔다. 어쩔 수 없이 멀대를 뒤를 따랐다. “너도 나랑 같이 가게? 서울 안가고?” “널 따라가다니? 표는 바꿔야 할 것 아니야.” “그러지 말고 다시 돌아가자. 지금 쯤 주리도 후회하고 있을 거야.” 멀대는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렇게 기차역을 빠져 나왔다.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주리였다. -기차 탔니? “몰라.” - 안 탔구나. 다행이다. 아까는 미안해. “야! 니가 친구야? 어떻게 간다고 하는데 잡지도 않아. 정우랑 단둘이 있으니 좋든?” -응. 좋아. 너 오는 거야? 에이 단둘이 오붓한 밤 좀 보내보려구 했는데. “그래. 단둘이 있는 꼴 보기 싫어서 내가 간다. - 밥 많이 해놨으니까 빨리 와. “반찬이 뭔데?” 통화하는 동안 멀대는 내내 실실 웃었다. 일취월장한 주리의 요리 솜씨에 감탄하며 밥을 맛있게 먹었다. “주리 대단한대. 음식이 전부 맛있다.” 멀대도 감탄을 하고. 정우도 역시 맛있게 먹었다. “주리 음식 잘하지?” ‘그간 주리가 정우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했네. 그냥 음식에 단련된 거라 생각했는데. 잘됐어. 두사람.’ “나중에 우리집 요리사로 취직시키려구.” “뭐야?” 눈 흘기는 주리. ‘가지가지 하네. 꼴에 커플이라고 사랑싸움을 한다. 에잇! 눈꼴시어.’ “혜림아! 밥 맛 없지? 그만 먹을래?” 멀대도 같은 생각이었나보다. “우리 술 사가지고 올께.” 술을 사러 나간다던 주리와 정우는 한참 동안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방에 우리 둘을 남은 우리는 어색함 그 자체였다. ‘뻣뻣이 굳은 내몸. 마치 북어 같구나. 아버지 이야기나 물어봐야겠다. 기회도 없었는데.’ “으흠. 저기 여봉아!” “응?” “저기 말이야. 네 아버님 애기 물어봐도 되니?” ‘그렇게 눈을 동그랗게 뜰 것까지야. 나도 미안하다구.’ “뭐가 궁금한 건데?” “아무래도 이번 일 너랑도 관련 있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그래. 물어봐.” “언제 돌아가신 거야?” “나 유치원 다녔을 때라고 했으니까 5살쯤이었을 거야. 실은 엄마가 그 얘기 꺼내는 것 별루 안 좋아하셔서 아빠에 대해서는 아는 것 별루 없는데.” “뭐 하시던 분인지는 모르고?” “몰라. 회사 다니셨다는 것 같던데.” ‘회사? 그냥 평범하신 분이셨나보네.’ “어떻게 돌아 가셨는지는 알아?” 물어는 보고 있지만 못할 노릇이었다. “흔한 교통 사고였나봐. 근데 이상한 건 갑작스런 사고였는데 마치 죽을 때를 아신 것처럼 통장이랑 주변 정리를 다 해놓으셨다나봐. 보험도 많이 들어있었고. 덕분에 아버지 돌아가셔도 생활이 어렵지는 않았어.” ‘것 참 이상하군. 마치 죽을 때를 아는 사람이라. 민가네 집이라 멀대 아버지도 어떤 능력이 있어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걸까?’ “실은 아빠도 너 같은 능력이 있는 분이셨나봐. 자세히는 모르지만. 사실 그래서 너도 처음 봤을 때 무섭지 않았어.” ‘역시 그랬군.’ “하지만 그걸 사람들이 아는 것은 싫어 하셨다고 하시더라.” “그래, 사람들이 알면 좋을 게 없으니까. 이해가 가.” “너도 그것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그렇지. 좋게 봐주는 사람들은 없으니까.” ‘멀대가 그래서 날 무서워하지 않았던 거구나. 왠지 멀대에게 더욱 내 맘을 열 수 있을 것 같아.’ “네 할아버지나 친가에 관해서는 아는 것 없어?” “할아버지는 모르겠구 큰 아버지는 계셔. 지금도 가끔 뵈는 걸.” 껄그러운 질문에도 대답을 잘 해주는 멀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큰아버지?” “응.” “그분은 뭐하시는데?” “그냥 회사 다니지.” 큰 아버지가 실마리를 푸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뵐 수 있을까?” “인사드리려구? 인사는 울 마미에게 먼저 해야지.” ‘하하하. 어색할 땐 웃는 게 최고지. 하하하.’ “애들이 많이 늦는다.” “그러게. 우리도 나가 볼까?” “아니. 전화 해봐. 근데 나 너무 피곤하다. 올 때까지 눈 좀 붙일께.” “이쪽으로 누워.” “아니. 저쪽 방에서 30분만 잘께. 애들 오면 깨워줘.” 닫힌 공간에 둘이 있을 자신이 없었다.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것을 멀대도 알겠지. 이불을 펴고 자리에 누웠다. 이불과 베개는 생각보다 깔끔했다. 이제 막 세탁을 한 듯 엷은 세재 냄새도 풍겼다. 그렇게 곧 잠이 든 모양이다. 누군가의 신음 소리에 잠이 깨었다. ‘내 옆에 사람이?’ 방에 불이 꺼진 상태라 잘 보이지는 않았다. ‘누구야? 혹시 멀대?’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꽤 기다란 게 멀대인 듯 싶었다. ‘이것들이 같이 자려고 우리를 한방에 넣어?’ “야, 여봉아! 일어나.” 멀대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저쪽 가서 자!” ‘눈을 뜰 생각을 안하네. 일부러 자는 척을 하나?’ “으으.” 멀대는 일어나는 대신 이상한 신음 소리를 냈다. ‘어디가 아픈가?’ 불을 켰다. 그런데 멀대 위에 할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멀대 위에 앉아 나를 보고는 씨익 웃음을 보였다. 11-5 “할아버지...” 싸늘한 웃음에 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뭘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가부좌를 튼 채로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얼굴엔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쿵. 천장까지 떠올랐던 할아버지는 멀대의 가슴으로 떨어져 내렸다. “우욱.” 가슴에 상당한 충격이 있었는지 멀대의 몸은 들썩거리더니 신음을 토해냈다. “하지마요.” 나의 말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느릿했다. 그 말을 하기에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할아버지에게 가까이 가자 또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있는 힘껏 손을 뻗어보았지만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쿵. 이번 충격은 더욱 심했는지 멀대의 입에선 신음소리대신 피가 조금 흐르고 있었다. ‘죽이려는 거야. 겁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야. 진짜 이번엔 멀대를 죽일거야.’ 다시 멀대를 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보같은 웃음도, 널따란 가슴도, 닭살 멘트도 이제는 없다. 생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멀대를 보낼 준비를 하고 왔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보내려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이렇게 보낼 수가 없다구.’ 순간 내가 멀대를 보낼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안돼요. 안된다구요.” 또 허공에 떠 버린 할아버지를 잡으려 손을 뻗고 뛰어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상실감에 눈물이 흘렸다. 가슴이 너무나 답답했다. 할아버지가 세 번째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멀대의 가슴팍으로 몸을 날렸다. 쿵. 어깨와 등이 부서진 듯한 느낌이었고, 속이 울컥거리면서 메슥거렸다. 소량의 피가 났는지 입에선 철 맛이 났다. 몸으로 막아도 멀대에게도 충격이 미쳤는지 아까보다도 더 붉은 피가 흘려 나왔다. ‘여봉아, 막아주고 싶었지만 막을 수가 없나봐. 미안해. 나 때문에. 다 나 때문이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멀대의 얼굴을 보았다. 정신은 없는 채인데도 고통이 상당한 듯 너무나 괴로워 보였다. 할아버지는 또 공중으로 오르는 모양이었다. 뒤를 돌아볼 기력도 없었다. 왠지 이번이 마지막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멀대의 얼굴을 보는 것도 마지막. 멀대의 고통도 마지막. 나의 고통도 마지막. 순간 바라는 것은 멀대보다 내가 먼저 죽지 않는 것뿐이었다. 이 순간에 살기를 바란다는 것은 헛된 희망 같았다. ‘우리 죽나봐. 그래도 너랑 같이 있어서 다행이야.’ “으흐흐흐.” 할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방안 가득 퍼졌다. 쿵. “아악!” 꿈이었다. 방안은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내 옆에 멀대가 누워있고 불을 켜는 순간 아까의 일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겠지?’ 손을 더듬어 보았지만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불을 컸다. 다행히 아무 것도 없었다. 온 몸이 땀에 쩔은 모양인지 바람이 몸에 스치자 서늘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채였고, 너무나 무서웠다. ‘멀대는?’ 서둘러 다른 방으로 가보았다. “일어났어? 한시만 있다가 깨우려고 했는데. 이리로 앉아.” 멀대였다. 언제나 보여주던 바보 같은 웃음을 보이며 천천히 내가 앉을 자리를 자기 자리 옆에 만들고 있었다. 셋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혜림아! 우리끼리 마셔서 삐진 거야? 우리도 술 마신지 10분도 안됐어.” 현실의 주리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제서야 현실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자 나는 자리에 주저 앉아 목놓아 울고 말았다. 멀대가 울고 있는 나를 데리고 방안으로 데리고 왔다. 마음은 많이 진정된 후였다. 우리 둘은 벽에 기대어 앉았고 멀대는 떨고 있는 나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슬며시 멀대에게 머리를 기댔다. ‘이러면 안되는데. 멀대는 자기 좋아한다고 오해할 놈인데. 이따 사람들한테 말하지 말라고 부탁해야겠군. 입은 무거운 놈이니 약속은 지키겠지.’ “무서운 꿈 꾼 거야?” “응. 많이 무서웠어. 정말 많이.”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네가 무서워하는 것도 있냐?” 하하하. 멀대에게 내가 그렇게 비쳤다니. “널 잃게 될까 무서웠어.” ‘말을 뱉고 나니 이상한 걸. 그 뜻이 아닌데.’ “나도 요즘 그런 생각 많이 하는데. 널 잃게 될까 무서워.” 분위기를 잡는 꼴이 되어버렸네. 머리를 빼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는 중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수암 오빠네. 받아야하나?’ “민국이형 전화지? 받아.” “이따 전화하지 뭐.” “기다리는 사람은 정말 피 마른다. 전화 받아.” ‘네가 받으라고 하니까 받는 거다. 나중에 딴소리마라.’ “오빠야?” - 너 어디야? “강촌.” - 강촌? 오늘 간 거야? “응.” 멀대의 눈치가 보였다. - 근데 왜 아직 강촌이야? 서울로 오는 길도 아니구. “여기서 하루 자기로 했어.” - 너 장난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 야, 강촌 가서 전화할 테니까. 기다려. 어이가 없었다. 가라고 할 때는 언제고 데리러 오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오지 마.” - 뭐? “오지 말라고.” - 너 제정신이야? 여봉이랑 강촌가서 하루 자고 온다는데 내가 참아야 하는 거니? “오빠가 걱정하는 게 뭔데? 주리랑 같이 왔어. 오빠가 생각하는 일 없다구.” - 그래도 자고 오는 건 안돼. 2시간이면 도착할거야. 가서 전화할게. “오지 말라고 말했잖아.” - 혜림아! 여자친구가 외박한다는데 난 화 낼 자격도 없는 거니? “그런 건 아니구.” 오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멀대를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까의 일로 분명해진 것이다. - 너 흔들리는 거니? “오빠. 미안해. 나에게 시간을 좀 줘.” - 알았다. 서울 와서 연락해라. 수암은 먼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생각보다 마음이 아프지 않은걸. 난 정말 나쁜 아이인가봐.’ “가봐야 하는 것 아니야?” 멀대는 걱정스러운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니야. 괜찮아. 우리 이러고 조금만 더 있자.” 나는 다시 멀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51. 꿀꿀이 바구미 11장 (03-05)
11-3
약속은 지켜야겠지만 멀대와 단둘이 만난다는 것은 조금 꺼려졌다.
‘어쩌지? 주리에게 말해 봐야겠다.’
다행히도 얘기를 들은 주리가 흔쾌히 나와주겠다고 했다.
정우를 데리고 나 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러면 쌍쌍 파티 분위기 되는 거잖아.”
- 그렇지. 난 네 짝이구, 정우는 여봉이 짝.
“너 그 말 진짜지?”
- 주리는 영원히 혜림이 짝할꼬야.
주리의 혀꼬기가 왠지 미덥지 않았지만 정우를 데리고 나오지 말라고 끝까지 우기기는 힘들 것 같았다.
영화 보고 술이나 먹는 평범한 스케줄을 짜고는 전화를 끊었다.
‘약속은 정했고. 내일 뭐 입고 나간담. 최대한 이쁘지 않게, 귀엽지 않게 보여야지.’
멀대를 보내야 한다고 마음을 정리한 것이다.
‘내 귀여움에 매료된 멀대에게 나도 가끔은 귀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
장롱이며 옷걸이에 걸린 옷가지들을 전부 거실에 꺼내놓았다.
꺼내놓고 보니 문제가 있었다. 옷들이 하나같이 전부 예쁜 것 아닌가?
‘참, 난 왜 센스까지 있어서는. 그나저나 곤란하네.’
한참을 뒤적거린 끝에 찾은 것은 이모의 디스코 풍 청바지와 중학교 때 사서 촌스러워 한번도 입지 못한 빨간 체크 남방이었다.
남방은 그럭저럭 촌스러웠지만 청바지는 도통 소화가 불가능했다.
‘이걸 입고 가면 대번에 작전이 드러날 것 같은데.’
어쩔 수 없이 바지는 무난한 면바지로 입기로 했고, 머리는 하나로 촌스럽게 묶기로 했다.
‘어디 이모 머리끈 중에 왕 분홍 꽃 달린 것이 있었는데. 여기 있군. 중간 고무줄이 끊어졌네. 하하하. 이걸 이렇게 묶으면 더 열악해졌군.’
흰 면티에 빨간 체크 남방, 남색 면바지를 입고 거울 앞에 섰다.
보색 대비가 키가 더 작아보이게는 했지만 별로 촌스럽지 않았다.
‘그냥 수수한 정도인데. 뭘 입어도 예쁘니 곤란한걸. 주리 기집애는 또 짧은 치마에 야시한 옷을 입고 나오겠지. 거기에 비하면 확 쳐지기는 하겠지만 아직 뭔가 부족해.’
그 때 이모가 방에서 나왔다.
“이모 뭔가 허전하지 않아?”
“스카프가 빠졌잖아. 이모 분홍색 스카프 빌려줄까?”
이모가 건네준 진분홍 스카프를 두르자 이젠 완성되었다하는 느낌이 들었다.
“고마워, 이모! 땡큐.”
여러 가지 이유로 시집을 못가고 있는 이모였다.
징...징... 누가 징징대는 거야?
머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베게 밑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는 모양이었다.
“여보세요?”
-아직도 자? 니네 집 다 왔는데.
시계를 보니 10시였다.
“약속 2시 아니야?”
- 우리 강촌 갈거거든. 지금 정우 차 타고 여봉이랑 같이 가고 있어. 10분 후면 도착할거야.
“갑자기 웬 강촌?”
-정우가 얼마 전에 엠티 갔다왔는데 너무 좋더래. 그래서 가기로 했지. 어때 좋지?
“영화 본다고 했잖아.”
-나 아직 강촌 안 가봤단 말이야. 가자. 혜림아. 갈꼬지?
‘저 혀꼬기는 절대 물러나지 않겠다는 뜻인데.’
“알았어. 나갈게.”
-금방 나와야돼. 이따 봐.
‘이럴 줄 알았다면 야시한 정장풍을 준비했어야 하는 건데. 마치 미리 야외로 놀러갈 줄 아는 것이 되어 버렸잖아. 으흐흐흐. 하지만 내게는 어제 준비한 비장의 무기가 있지롱.’
그것은 바로 아이라이너 과다 사용.
‘이걸 좋아하는 남자는 없겠지.’
혜림이 망가지기를 모두 끝내고 밖으로 나갔다.
“어머, 혜림이 너무 귀여워. 너 중학생같애. 하하하.”
주리는 나를 보고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흡족한 반응에 나도 즐거웠다.
멀대는 차에서 내려 차문을 열어 주었다.
“화장했네.”
멀대도 웃고 있었다.
‘작전이 성공한 걸까?’
성공 여부를 가늠하기 힘든 모호한 웃음이었다.
“나한테 잘 보이려고 그런 거야? 에구 귀여워.”
그리고는 날 덥석 안아버렸다.
“머리를 쪼맸네. 안 그래도 머리 묶은 거 보고 싶어서 머리끈도 사왔는데. 이걸로 바꿔서 해봐.”
내가 보기에도 예쁜 빨간 머리끈이었다.
작전은 실패였다.
정우와 주리가 앞에 나와 멀대는 뒷자석에 앉았다.
“너 야외로 놀러갈 줄 알았던 거야? 꼭 옷을 미리 준비한 것 같아.”
“미리 준비하기는.”
“그 스카프 말이야...”
“왜?”
‘촌스럽다고 말하려는 거지? 얼른 말하렴.’
“나 줘라. 색깔이 너무 이뻐.”
주리는 정말 갖고 싶은지 몸까지 틀어 내 얼굴 가까이로 왔다.
“혜림아 나 줄꼬지?”
‘또 혀꼬기. 혀꼬기에 내가 두 번 당할 것 같으냐. 이건 오늘 작전의 핵심이라고.’
“안돼. 혜림이한테 더 잘 어울려. 혜림아, 주지마!”
멀대가 단호하게 말했다.
잘 어울려, 어울려 그 말이 귀에서 맴 돌았다. 작전은 완전히 실패였다.
우리집에 몰래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 것이 분명해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는 동안 강촌에 도착을 했다.
내 짝을 하겠다던 주리는 정우의 팔에 매달려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내 눈에는 그 모습이 멀대랑 친한 척 해야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라고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행동으로 보였다.
‘웃겨. 그 정도에 넘어가지 않는다구.’
강촌이라는 곳은 정말 유원지답게 산, 물, 간단한 유락 시설까지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분위기를 더했다.
“우리도 자전거 타자.”
한껏 신이 난 주리가 말했다.
“싫어.”
망가지기에 실패한 나는 모든 것에 비협조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짜증을 유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럼 밥부터 먹을까?”
멀대가 물었다.
“싫어.”
“그래. 난 운전하느라 피곤하니까 차안에서 조금만 쉬자.”
정우가 피곤해서 쉬겠다는데 싫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곧 나도 배가 고파지기 시작해서 밥을 먹으러 갔고,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보니 타고 싶어지는 바람에 비협조 작전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이것 저것 하자 거의 서울로 출발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늦었다. 가자.”
멀대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하기 전에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간신히 단 둘이 있을만한 틈을 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가긴 어딜 가? 우리 1박 하기로 했는데. 주리야, 아까 얘기 안했어?”
‘뭐야, 이건. 1박?’
“어머, 말 안했던가? 정신이 없었나봐.”
‘그래. 너 정신 나갔구나.’
“안돼. 나 집에 가야 돼.”
“그러지 말고. 하루 있다가 가자. 이모한테는 내가 전화할게.”
“이모 문제가 아니잖아. 어떻게 하루 자고 간다는 얘기를 지금 할 수가 있니?”
“미안해. 깜박했어. 방도 예약했는데 자고 가자.”
“방은 예약할 정신이 있으면서 친구한테는 말할 정신이 없든?”
내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멀대를 정리해야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강촌으로 놀러 온 것 하며 거기다가 여행일정을 1박으로 잡은 것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너 집에 가고 싶으면 가면 되지. 왜 소리를 질러?”
아마도 정우 앞에서 소리를 지른 것이 화가 난 모양인지 주리도 핏대를 올렸다.
“나 혼자 가란 말이지. 알았어. 갈께.”
“가고 싶으면 가. 누가 너 못 가게 잡았니?”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주리는 잡을 생각도 없는 모양인지 아예 다른 곳을 쳐다 보았다.
‘나쁜 기집애.’
11-4
“같이 가. 니들은 놀고 내일 와. 나는 혜림이랑 서울 갈께.”
멀대도 가방을 집어 들고는 일어났다.
혹시 가지 말라고 잡으면서 주리를 편들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었는데 같이 일어나준 멀대에게 고마웠다.
빠른 걸음으로 기차역 쪽으로 걸어갔다.
멀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따라왔다.
“너도 놀고 싶으면 애들이랑 놀다가. 나 혼자 올라갈 수 있어.”
괜히 멀대에게 심술을 부렸다.
멀대는 대답 대신 매표소쪽으로 갔다.
“서울 두장이요.”
그리고는 사온 표를 내게 건네주었다.
“10분후 출발이래.”
“나도 알아.”
표를 받고는 혼자 먼저 플랫홈으로 들어가 버렸다.
플랫홈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모두들 스트레스를 풀고 간 모양인지 피곤해 보이지도 했지만 얼굴이 다 밝아 보였다.
‘이대로 서울을 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좀 무거운데. 멀대랑 놀아주기로 약속하고 나온 건데. 주리랑 같이 만나자고 하는 게 아니었어.’
“여봉아, 미안해.”
“뭐라고?”
사람들 소리에 묻혀 못들은 모양이었다.
“미안하다고.”
“괜찮아.”
‘괜찮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미안한 걸.’
멀리서부터 기차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가게 되는구나.’
“저기, 혜림아! 내일 가면 안 되는 거니?”
멀대의 말에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사이 기차가 플랫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멀대에게 고개를 돌리지 못한 채 굉음을 울리면서 거대한 몸체를 서서히 드러내는 물체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멀대는 아마도 웃음이 약간 깃 듯 장난 어린 표정이겠지. 그 얼굴을 본다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나만 우스워 질거야.’
말을 못들은 척 기차가 빨리 멈추기를 기다렸다.
‘여기서 흔들리면 안돼. 나 때문에 멀대를 더욱 힘들게 하는 꼴이 된다구.’
표를 다시 꺼내 자리를 확인했다.
그동안 다행히 멀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드디어 완전히 멈춘 기차.
출입구까지는 조금은 걸어야했다.
한걸음 한걸음.
미안한 마음은 커져갔지만 뒤는 돌아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계단에 발을 올리는 순간 멀대가 나의 팔을 잡았다.
‘자식. 그럴 줄 알았다구. 미안하지만 바쁜 몸이라서.’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라 그대로 몸을 옮기는데 팔을 놓아줄 것이라 생각했던 멀대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강혜림! 내일 가라.”
갑자기 지른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멀대의 표정이... 눈물을 그렁 그렁 달고서는 너무나 진지한 표정이었다.
혜림이를 너무나 원하는 듯한.
표정이 가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생각지 못한 애절한 눈빛에 순간 주춤하고 말았다.
하지만 아직 계단에서 내려오지는 않은 상태였다.
멀대는 곧 힘으로 팔을 잡아 당겼고, 나는 기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너 왜 그러는 거야? 내가 간다고 했잖아.”
내가 소리를 지른 것 열차가 떠난 후였다.
혜림이 속 보이네.
그렇다고 그래 안갈께 바로 그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갈 거면 가던가.”
멀대는 그제서야 웃고 있었다.
웃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편해지면서도 약이 올랐다.
“나는 애들이랑 있다 갈게.”
멀대는 성큼 성큼 기차역으로 걸어갔다.
어쩔 수 없이 멀대를 뒤를 따랐다.
“너도 나랑 같이 가게? 서울 안가고?”
“널 따라가다니? 표는 바꿔야 할 것 아니야.”
“그러지 말고 다시 돌아가자. 지금 쯤 주리도 후회하고 있을 거야.”
멀대는 나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렇게 기차역을 빠져 나왔다.
때마침 전화가 울렸다.
주리였다.
-기차 탔니?
“몰라.”
- 안 탔구나. 다행이다. 아까는 미안해.
“야! 니가 친구야? 어떻게 간다고 하는데 잡지도 않아. 정우랑 단둘이 있으니 좋든?”
-응. 좋아. 너 오는 거야? 에이 단둘이 오붓한 밤 좀 보내보려구 했는데.
“그래. 단둘이 있는 꼴 보기 싫어서 내가 간다.
- 밥 많이 해놨으니까 빨리 와.
“반찬이 뭔데?”
통화하는 동안 멀대는 내내 실실 웃었다.
일취월장한 주리의 요리 솜씨에 감탄하며 밥을 맛있게 먹었다.
“주리 대단한대. 음식이 전부 맛있다.”
멀대도 감탄을 하고. 정우도 역시 맛있게 먹었다.
“주리 음식 잘하지?”
‘그간 주리가 정우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했네. 그냥 음식에 단련된 거라 생각했는데. 잘됐어. 두사람.’
“나중에 우리집 요리사로 취직시키려구.”
“뭐야?”
눈 흘기는 주리.
‘가지가지 하네. 꼴에 커플이라고 사랑싸움을 한다. 에잇! 눈꼴시어.’
“혜림아! 밥 맛 없지? 그만 먹을래?”
멀대도 같은 생각이었나보다.
“우리 술 사가지고 올께.”
술을 사러 나간다던 주리와 정우는 한참 동안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방에 우리 둘을 남은 우리는 어색함 그 자체였다.
‘뻣뻣이 굳은 내몸. 마치 북어 같구나. 아버지 이야기나 물어봐야겠다. 기회도 없었는데.’
“으흠. 저기 여봉아!”
“응?”
“저기 말이야. 네 아버님 애기 물어봐도 되니?”
‘그렇게 눈을 동그랗게 뜰 것까지야. 나도 미안하다구.’
“뭐가 궁금한 건데?”
“아무래도 이번 일 너랑도 관련 있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그래. 물어봐.”
“언제 돌아가신 거야?”
“나 유치원 다녔을 때라고 했으니까 5살쯤이었을 거야. 실은 엄마가 그 얘기 꺼내는 것 별루 안 좋아하셔서 아빠에 대해서는 아는 것 별루 없는데.”
“뭐 하시던 분인지는 모르고?”
“몰라. 회사 다니셨다는 것 같던데.”
‘회사? 그냥 평범하신 분이셨나보네.’
“어떻게 돌아 가셨는지는 알아?”
물어는 보고 있지만 못할 노릇이었다.
“흔한 교통 사고였나봐. 근데 이상한 건 갑작스런 사고였는데 마치 죽을 때를 아신 것처럼 통장이랑 주변 정리를 다 해놓으셨다나봐. 보험도 많이 들어있었고. 덕분에 아버지 돌아가셔도 생활이 어렵지는 않았어.”
‘것 참 이상하군. 마치 죽을 때를 아는 사람이라. 민가네 집이라 멀대 아버지도 어떤 능력이 있어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걸까?’
“실은 아빠도 너 같은 능력이 있는 분이셨나봐. 자세히는 모르지만. 사실 그래서 너도 처음 봤을 때 무섭지 않았어.”
‘역시 그랬군.’
“하지만 그걸 사람들이 아는 것은 싫어 하셨다고 하시더라.”
“그래, 사람들이 알면 좋을 게 없으니까. 이해가 가.”
“너도 그것 때문에 많이 힘들었지?”
“그렇지. 좋게 봐주는 사람들은 없으니까.”
‘멀대가 그래서 날 무서워하지 않았던 거구나. 왠지 멀대에게 더욱 내 맘을 열 수 있을 것 같아.’
“네 할아버지나 친가에 관해서는 아는 것 없어?”
“할아버지는 모르겠구 큰 아버지는 계셔. 지금도 가끔 뵈는 걸.”
껄그러운 질문에도 대답을 잘 해주는 멀대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큰아버지?”
“응.”
“그분은 뭐하시는데?”
“그냥 회사 다니지.”
큰 아버지가 실마리를 푸는데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뵐 수 있을까?”
“인사드리려구? 인사는 울 마미에게 먼저 해야지.”
‘하하하. 어색할 땐 웃는 게 최고지. 하하하.’
“애들이 많이 늦는다.”
“그러게. 우리도 나가 볼까?”
“아니. 전화 해봐. 근데 나 너무 피곤하다. 올 때까지 눈 좀 붙일께.”
“이쪽으로 누워.”
“아니. 저쪽 방에서 30분만 잘께. 애들 오면 깨워줘.”
닫힌 공간에 둘이 있을 자신이 없었다.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것을 멀대도 알겠지.
이불을 펴고 자리에 누웠다.
이불과 베개는 생각보다 깔끔했다.
이제 막 세탁을 한 듯 엷은 세재 냄새도 풍겼다. 그렇게 곧 잠이 든 모양이다.
누군가의 신음 소리에 잠이 깨었다.
‘내 옆에 사람이?’
방에 불이 꺼진 상태라 잘 보이지는 않았다.
‘누구야? 혹시 멀대?’
머리부터 발끝까지가 꽤 기다란 게 멀대인 듯 싶었다.
‘이것들이 같이 자려고 우리를 한방에 넣어?’
“야, 여봉아! 일어나.”
멀대를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 저쪽 가서 자!”
‘눈을 뜰 생각을 안하네. 일부러 자는 척을 하나?’
“으으.”
멀대는 일어나는 대신 이상한 신음 소리를 냈다.
‘어디가 아픈가?’
불을 켰다.
그런데 멀대 위에 할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멀대 위에 앉아 나를 보고는 씨익 웃음을 보였다.
11-5
“할아버지...”
싸늘한 웃음에 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다.
뭘 해야 할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가부좌를 튼 채로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얼굴엔 웃음을 머금은 채였다. 쿵.
천장까지 떠올랐던 할아버지는 멀대의 가슴으로 떨어져 내렸다.
“우욱.”
가슴에 상당한 충격이 있었는지 멀대의 몸은 들썩거리더니 신음을 토해냈다.
“하지마요.”
나의 말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느릿했다.
그 말을 하기에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할아버지에게 가까이 가자 또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있는 힘껏 손을 뻗어보았지만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쿵.
이번 충격은 더욱 심했는지 멀대의 입에선 신음소리대신 피가 조금 흐르고 있었다.
‘죽이려는 거야. 겁을 주려고 온 것이 아니야. 진짜 이번엔 멀대를 죽일거야.’
다시 멀대를 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보같은 웃음도, 널따란 가슴도, 닭살 멘트도 이제는 없다.
생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멀대를 보낼 준비를 하고 왔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보내려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은 이렇게 보낼 수가 없다구.’
순간 내가 멀대를 보낼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안돼요. 안된다구요.”
또 허공에 떠 버린 할아버지를 잡으려 손을 뻗고 뛰어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상실감에 눈물이 흘렸다.
가슴이 너무나 답답했다.
할아버지가 세 번째 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멀대의 가슴팍으로 몸을 날렸다.
쿵.
어깨와 등이 부서진 듯한 느낌이었고, 속이 울컥거리면서 메슥거렸다.
소량의 피가 났는지 입에선 철 맛이 났다.
몸으로 막아도 멀대에게도 충격이 미쳤는지 아까보다도 더 붉은 피가 흘려 나왔다.
‘여봉아, 막아주고 싶었지만 막을 수가 없나봐. 미안해. 나 때문에. 다 나 때문이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멀대의 얼굴을 보았다.
정신은 없는 채인데도 고통이 상당한 듯 너무나 괴로워 보였다.
할아버지는 또 공중으로 오르는 모양이었다.
뒤를 돌아볼 기력도 없었다.
왠지 이번이 마지막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멀대의 얼굴을 보는 것도 마지막.
멀대의 고통도 마지막.
나의 고통도 마지막.
순간 바라는 것은 멀대보다 내가 먼저 죽지 않는 것뿐이었다.
이 순간에 살기를 바란다는 것은 헛된 희망 같았다.
‘우리 죽나봐. 그래도 너랑 같이 있어서 다행이야.’
“으흐흐흐.”
할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방안 가득 퍼졌다.
쿵.
“아악!”
꿈이었다.
방안은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내 옆에 멀대가 누워있고 불을 켜는 순간 아까의 일이 반복되는 것은 아니겠지?’
손을 더듬어 보았지만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불을 컸다.
다행히 아무 것도 없었다.
온 몸이 땀에 쩔은 모양인지 바람이 몸에 스치자 서늘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채였고, 너무나 무서웠다.
‘멀대는?’
서둘러 다른 방으로 가보았다.
“일어났어? 한시만 있다가 깨우려고 했는데. 이리로 앉아.”
멀대였다.
언제나 보여주던 바보 같은 웃음을 보이며 천천히 내가 앉을 자리를 자기 자리 옆에 만들고 있었다.
셋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혜림아! 우리끼리 마셔서 삐진 거야? 우리도 술 마신지 10분도 안됐어.”
현실의 주리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제서야 현실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자 나는 자리에 주저 앉아 목놓아 울고 말았다.
멀대가 울고 있는 나를 데리고 방안으로 데리고 왔다.
마음은 많이 진정된 후였다.
우리 둘은 벽에 기대어 앉았고 멀대는 떨고 있는 나의 어깨를 감싸주었다.
슬며시 멀대에게 머리를 기댔다.
‘이러면 안되는데. 멀대는 자기 좋아한다고 오해할 놈인데. 이따 사람들한테 말하지 말라고 부탁해야겠군. 입은 무거운 놈이니 약속은 지키겠지.’
“무서운 꿈 꾼 거야?”
“응. 많이 무서웠어. 정말 많이.”
응석을 부리고 싶었다.
“네가 무서워하는 것도 있냐?”
하하하.
멀대에게 내가 그렇게 비쳤다니.
“널 잃게 될까 무서웠어.”
‘말을 뱉고 나니 이상한 걸. 그 뜻이 아닌데.’
“나도 요즘 그런 생각 많이 하는데. 널 잃게 될까 무서워.”
분위기를 잡는 꼴이 되어버렸네.
머리를 빼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는 중이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수암 오빠네. 받아야하나?’
“민국이형 전화지? 받아.”
“이따 전화하지 뭐.”
“기다리는 사람은 정말 피 마른다. 전화 받아.”
‘네가 받으라고 하니까 받는 거다. 나중에 딴소리마라.’
“오빠야?”
- 너 어디야?
“강촌.”
- 강촌? 오늘 간 거야?
“응.”
멀대의 눈치가 보였다.
- 근데 왜 아직 강촌이야? 서울로 오는 길도 아니구.
“여기서 하루 자기로 했어.”
- 너 장난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 야, 강촌 가서 전화할 테니까. 기다려.
어이가 없었다.
가라고 할 때는 언제고 데리러 오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인가?
“오지 마.”
- 뭐?
“오지 말라고.”
- 너 제정신이야? 여봉이랑 강촌가서 하루 자고 온다는데 내가 참아야 하는 거니?
“오빠가 걱정하는 게 뭔데? 주리랑 같이 왔어. 오빠가 생각하는 일 없다구.”
- 그래도 자고 오는 건 안돼. 2시간이면 도착할거야. 가서 전화할게.
“오지 말라고 말했잖아.”
- 혜림아! 여자친구가 외박한다는데 난 화 낼 자격도 없는 거니?
“그런 건 아니구.”
오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멀대를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까의 일로 분명해진 것이다.
- 너 흔들리는 거니?
“오빠. 미안해. 나에게 시간을 좀 줘.”
- 알았다. 서울 와서 연락해라.
수암은 먼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생각보다 마음이 아프지 않은걸. 난 정말 나쁜 아이인가봐.’
“가봐야 하는 것 아니야?”
멀대는 걱정스러운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니야. 괜찮아. 우리 이러고 조금만 더 있자.”
나는 다시 멀대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